호거산 운문사의 겨울 2000년
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 608년 (진평왕 30)에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835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였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운문사의봄 2000년
일주문이 따로없는 운문사는 범종각이있는 낮은돌담길로 드나들게된다.
해방이후 제1세 김상명 스님에서 제4세 박상웅스님까지 잠시 대처승이 거주하였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
(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어 1998년부터 제13대 주지로 송혜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선원을 신축하여 교와 선을 아울러
익힐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었다.2002년부터 제14대 주지로 고흥륜 강사스님이 부임하여 오늘에
이른다.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략 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운문사의 가람배치는 크게둘로나뉘어 있는데 불이문不二門으로 들어서는
수행공간과 그밖의 예불공간이 그것이다.큰법당이 생김에따라 비로자나부처님이
마침내비로전편액을 달게 되었는데 그모습이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외경의
엄숙함으로 보인다. 그리고 18세기의 장엄한 후불탱後佛幀이 눈길을 끌며.
뜨락의 사믕석탑(보물 제678호)이 천년역사로 살아있고 옥개석에 피어난
보랏빛 제비꽃이 생명을 발한다. 오백전의 오백나한은 피부빛깔과모습,
표정과옷모양이 모두달라 참으로 해학적이다.
호거산 운문사의 봄 2000년
운문사의 월송月松 (천연기념물 제180호)2000년
작압전鵲鴨殿과 대추나무 2000년
대추나무앞 작압전鵲鴨殿은 운문사에서 가장작은.그러나 가장의미깊은 공간이다.
예전당우가 전돌로 지어졌음을 알게하는사진이 종무소에 걸려있으며사천왕석주와
희불상이 이채롭다. 그옆에 관음전엔 항마촉지인 여래좌상으로 보관을쓴 관음보살이자
수염이난 부처의 모습을 함께보여주는 특이한 불상이 있다.
신록(운문사 은행나무)2000년
구름문과 송림에 싸인 수행의 향기
운문사 비로전과 삼층석탑,오백나한전도 보인다.
암자에 독성각에 나반존자那畔尊者를 모셨다 운문사의 오백나한중 한분인나반존자를 이곳에 모셨는데많은신도들이 영험을본다고 사철기도가 끊이지않는다고한다. 툭트인시야로 수려한송림과 활엽수사이로 여러새소리가 들려오는데 잠시후 참으로 신기한일이 벌어졌다. 스님이 손바닥에 모이를 올려놓자 작은새가 이내날아와 모이를 쪼는게 아닌가.한번.두번.스님이 새를부를때마다 어김없이 날아와 스님손을향해 날아든다. 아. 진정 이것이 불이不二의 법문이요.상생相生의 노래가 아닌가.자연과 인간이 하나요,만물이 생명의 존엄으로 되살아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단아하고 경쾌한미감을 보여주는 신라때의 석등(보물제193호)
일찍이화랑5계의도량이요
일연선사께서 5년간 운문사머물며
겨래의 위대한유산인 삼국유사를 집필한 기운으로 느껴진다.
6.25이후 1958년 운문사에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었는데
1977년 제10대주지로 취임한 명성스님은 현제 260여명 의
비구니스님들이거처하는 대도량을 일구신분이다
신라 진흥왕때 오갑사를지었는데 그중가슬갑사가 오늘의 운문사다
제1중창의 원광국사,
2중창 보양국사,
제3중창 원응국사들의 줄기찬 발원으로
운문사는 오늘날대가람의 숨결이 이어졌음을 실감케한다.
비로소 나는 왜스님들이 새벽예불때 차사창건차寺創建삼대법사三大法師세분을
매일부르는지를 알게되었다. 호거산운문사.호쾌한도량은 즐비한이곳
거송巨松의 기운으로 느겨지고,오늘날 한국최대 비구니승가대학의 면모로 구름문(雲門)속에 꽃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