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공[空] 딱 한자만 사용하는데,
티벳불교에서는 공성[空性]이라고 많이 표현합니다.
공[空] 딱 한 글자보다는
공성[空性]이라는 두 글자가 空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수월합니다.
왜냐면 공[空]이 곧 공한 성품, 즉 공성[空性]이기 때문입니다.
<공한 성품이다>라고 이해하는게 훨씬 명확하고, 정확합니다.
대지도론을 통해 공/공성이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위 내용은 반야바라밀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입니다.
위의 내용은 또한,
반야심경의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반야바라밀의 모습은 공[空]한 모습이다......라는 말씀은
모습없는 모습이란 의미입니다.
공[空]한데 뭔 모습/형상이 있겠습니까?
만약 어떤 모습이나 형상이 있다면, 그것은 유[有]이지, 결코 공[空]이 되지 못하지요.
근데 왜 공[空]은 그 무엇도 없어서 모습이 없는데, 왜왜왜 모습이란 용어를 썼을까요?
이것은 이것 외에 그 어떤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습이 없는 모습임을 알리기 위한 방편이지요.
모습이 없더라도, 모습이라는 용어를 쓰는 수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중생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리고 그 공[空]의 모습이란, 반야심경에서는 세가지를 말씀하셨지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공 그 자체에는 텅 비어 있어서,
본래 생겨난게 없으므로 또 소멸 될 것도 없기에 불생불멸이고,
또 당연히 더러움이나 깨끗함을 따져볼만한 것도 없어서 불구부정이고,
뭔가 있어야 늘어나고 줄어들텐데, 그런게 아예 없으니 부증불감입니다.
“공(空)이 곧 모습이니, 모습도 없고 지음도 없는 모습,
생멸이 없는 모습, 지어감이 없는[無行] 모습,
항상 나지 않아 성품과 같은 모습, 적멸의 모습이니라.”
위에서는 공의 모습을 이와 같이 말씀하셨는데, 반야심경과 매우 유사합니다.
정리해보면, 공의 모습이란 아래와 같습니다.
1. 모습이 없는 모습
2. 뭔가를 형성됨/지어져 있음도 없는 모습
3. 생멸이 없는 모습
4. 뭔가를 만들고 생성해내는 것이 없는 모습
5. 본래부터 뭔가가 생겨나지 않는 모습
6. 적멸의 모습
공의 모습이 이러하므로,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설명할 때 많은 사람들이 잘못설명하는 부분이,
<공즉시색을 "공에서 색이 나왔다"로 풀이하는 것> 입니다.
공에서 색이 나올 수 없습니다.
위의 설명처럼 공은 결코 뭘 만들어내는 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공 그 자체가 뭔가의 작용을 일으킨다면, 그건 공이 아닙니다.
공은 무위이지, 유위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뭔가의 작용을 하는 것은 모두 다 유위법입니다.
그래서 공즉시색을 단순하게 공에서 색이 나왔다라고 설명하면 큰 오류입니다.
티벳불교에도 반야심경이 있는데, 산스크리트어를 티벳어로 그대로 번역했다고 합니다.
티벳불교의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대한 해석은 아래와 같습니다.
색즉시공 : 물질과 별도로 비어 있음 그 자체가 다르게 있지 않다.
공즉시색 : 비어 있음 그 자체와 별도로 물질도 다르게 있지 않다.
티벳불교에서도 역시 공즉시색을 공에서 색이 나왔다.....라고 풀이하지는 않습니다.
공 그 자체에서 색이 나올 수 없습니다.
공은 그 어떤 변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어 공하므로, 변화/생성이 일어날 수 있다..라고 표현하면
이 표현은 맞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기법입니다.
하지만, 공 그 자체만을 가지고 따질 때는 상황이 다릅니다.
공 그 자체는 결코 뭘 생성해내거나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지요.
변화/생성을 이어가는 것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것들 입니다.
세속의 것들이 변화와 생성일 이어가는 것이지,
진제의 공 그 자체는 그 어떤 변화가 없는 적멸입니다.
공이 만약 작용한다면, 그건 결코 공이 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이 인연화합에 의해 생겨났으므로 그 본성이 공하다.....라는 것과
공 그 자체만 가지고 따지는 이 두가지를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공 그 자체만 가지고 따질 때는,
공 그 자체엔 그 무엇도........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며,
니까야에서는 부처님께서 "아무것도 없음에 의지해서 열반으로 나아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무엇도, 단 하나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집착할 것도, 죽을 것도, 잃을 것도.....
그래서 공이 곧 적멸이며, 열반[열반적정]입니다.
이런 것이 오로지 불교만의 특징입니다.
이 공성의 진리는 그 어디에도 없는 오로지 부처님 가르침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힌두교/부라만교, 또는 기독교, 이슬람교 등등 온갖 종교들의 가르침과는
그야말로 근본적으로 꺼꾸로이자 정반대의 가르침이지요.
불교는 그 모든 것에 실체가 없다고 가르치지만,
불교 이외의 종교들은 그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는 기반위에 세워진 종교들입니다.
온갖 철학이나 사상들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이런 이유로 불교에서는 결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실제 본질적으로 창조되어진 존재나 물건이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지요. 다 허깨비입니다.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인데,
중생은 그 허깨비를 진짜라고 여겨서 거기에 집착해서 업을 짓고 괴로움을 겪습니다.
이런 이유로 외도들의 수행과 불교 수행은 그야말로 정반대입니다.
같을래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진공묘유........
이 단어 역시 단순하게 해석한다면, 역시나 오류에 빠질 수 있는 용어입니다.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반야부 경전을 모두 다 공부해야만 합니다.
반야심경은 아주 짧게 압축된 경전이라,
반야바라밀다, 즉 공을 어떻게 닦아야 하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야부 경전에는 그 설명이 매우 상세하고 자세히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