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의 비극
기억과 추억 사이/옛날 고향 이야기
2006-02-03 22:15:04
노근리에 세상 사람들의 눈길이 쏠린 것은 노근리 사건 때문이었다. 융단폭격을 퍼붓듯 매일 언론과 방송에 그 사건의 내막이 발표되는 것을 봐도 그 사건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영원히 벗겨지지 않을 것 같은 노근리 사건이 수면위로 떠오른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그 참혹성을 바로 알아 속이 시원했고 후손들이 한을 풀어 더없이 반가웠지만 노근리가 그 사건의 희생양이 되어 전 세계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것은 씻을 수 없는 큰 비극이었다.
사건의 한 가운데에 미국이 있었다. 전혀 남을 해칠 것 같지 않았던 영원한 우방, 우리나라가 강펀치를 휘둘러도 마냥 귀엽게만 봐주고 등이라도 톡톡 두드려 줄 것 같았던 미국이 귀신도 소리 높여 울만큼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차츰 철이 들고 국제정세에 눈이 뜨일 때 쯤, 어렴풋이 미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미국은 영원한 우방도 아니고, 약소국을 포용력 있게 감싸주는 다정다감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기회 있으면 사사건건 트집 잡고, 흠집 내고, 고통을 주어 끝내는 한 나라를 요절내고 마는 무섭고 치가 떨리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미국의 정체를 알게 된 건 아프카니스탄이 미국의 폭격을 받아 완전 폐허가 된 후였고 이라크에 미사일을 소나기처럼 퍼부어 결국 후세인이 쫓겨나고 민중들이 공항상태에 빠진 날이었다. 아, 나는 왜 이토록 미국에 둔감했을까. 미국이 음흉하게 흘리는 미소가 뭔지 왜 진작 몰랐던가. 그건 내가 철이 없어서도 아니고, 어리석어서도 아니다. 몇 해의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에도 햇살처럼 쏟아지던 미군들의 웃음과 따스한 손길을 잊지 못해서였다.
고개만 들려도 보일 것 같은 아련한 시절, 콧물로 얼룩진 옷소매가 반질반질 하던 그 때, 죽과 보리밥과 헤진 옷으로 세월을 보내던 그 시절을 생각하며 노근리 터널 앞을 지나치다보면 터널 벽에 붙은 플랭카드 한 장이 차고 매몰차게 내 가슴을 때린다.
“여기는 노근리 사건 현장입니다”
그 플랭카드 한 장을 걸기 위해 도대체 몇 해의 세월이 흘렀던가. 한 줄의 글귀를 쓰기 위해 유족들은 얼마나 애간장을 태우며 살았던가.
6, 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노근리 터널 속에 피신하고 있던 인근 마을 주민 300여명을 미군이 기관단총으로 사살한 사건, 주민들 속에 혹시 있을 지도 모를 북한군을 죽이기 위해 죄 없는 주민까지 몰살했던 사건, 그래서 300여명의 주민들이 피와 살을 흩뿌려 한 송이 꽃으로 지고 만 사건치고는 저 한 줄의 플랑카드 글귀로 영혼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도대체 왜 미군이 저런 못된 짓을 했을까. 왜 역사에 얼룩이 남을 과오를 저질렀을까. 터널 너머 산자락의 진달래와 철쭉이 왜 저리 붉고 선명하게 타올랐는지, 뻐꾸기들이 왜 숨넘어갈 듯 자지러지게 울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가 이 실상을 알기 전까지 미군은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초등학생 시절에 나는 심심하면 친구들과 신작로로 나갔다. 제기차기가 지치면, 활 놀이가 싫증나면 신작로로 나가 미군들에게 달려갔다. 우리 동네 입구 앞으로 휘돌아가는 비포장도로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늘 미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몇 발짝 더 올라가면 장구매기에 국방색 천으로 둘러씌운 미군들의 막사가 밀집돼 있었고 도로변에는 군용트럭을 세워놓고 망중한에 빠져 있는 미군들이 많았다. 트럭 안에서 조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권총을 꼬나 쥐고 장난을 치는 놈들도 있었고 음탕한 미소를 흘리는 놈들도 있었다. 노랗고 꼬들꼬들한 머리, 흰털이 송송한 피부, 얼굴에 까만 구두약을 바른 듯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검둥이들, 꼬부라진 혀로 무슨 말인지 정신없이 지껄이는 놈들을 보고 있으면 꼭 외계인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무섭다기보다는 형제 같은 다정다감한 존재로 다가왔다. 그것은 그들이 먹을 것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으로 한 끼를 때우고 보리밥으로 연명하던 시절에는 미군들이 던져주는 음식들이 달고 기름진 것들이 많았다. 초콜렛, 건빵, 깐수메, 껌 등이었다. 반질반질 기름칠한 종이를 벗겨내면 달콤한 초콜렛이 나오고 까칠한 봉지를 뜯어내면 버석버석한 건빵이 나왔다. 그리고 둥근 깡통 마개를 따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쫄깃한 육질이 가득 들어있는 깐수메도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여분으로 심심할 때 씹는 것이 껌이었다. 단물이 다 빠져 나갈 때까지 씹고 씹으면 이빨이 아프고 턱이 딱딱 거렸지만 버리기가 아까워 방안의 벽에 찰싹 붙여놓고 생각나면 또 씹었다. 껌을 씹으며 도로에 나가면 미군들도 껌을 씹었다. 서로 껌을 씹으며 얼굴을 쳐다보면 미군의 갈색 눈동자와 나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쳐 교감이 통하는 듯 빛이 났다.
나는 미군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월적인 존재로 보았고 미군은 나를 가진 것 없는 불쌍한 존재로 보는 것 같았다. 그런 감정 때문에 미군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많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두 다 맘 좋고 기분 좋은 존재들이 아니었다. 어떤 놈들은 깍쟁이들도 있었다. 군용트럭이 터질 정도로 불룩하게 물품을 싣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이 손을 내밀면 “노까 땜”을 연발했다. “노까 땜”이 무엇인지 몰랐다, 혹시 싫다는 말 아닐까 하고 그 정도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그러는가 싶어 배운 것이 우리나라 말과 영어를 뒤섞어 잡탕을 만든 콩글리쉬였다. “쩝쩝 기부미” 미군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그 뒤로 무수히 “쩝쩝 기부미”를 외치고 다녔다. 미군이 보이면 어김없이 이 말이 튀어 나왔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를 달려가는 군용트럭 뒤에 대고 “쩝쩝 기부미”라고 외치는가 하면 플라타너스 그늘에 차를 세우고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미군에게도 “쩝쩝 기부 미” 하고 손을 내밀었다. 가는 곳마다 이 말을 외치면서도 창피한 줄 몰랐다. 달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다는 기쁨으로 창피한 건 뒷전이었다. “창피”라는 말은 타고날 때부터 아예 마음 한 구석 어디에도 없는 말처럼 창피하다는 것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 만큼 비참했던 시절이었다. 옥양목을 덧대 갈기갈기 꿰맨 옷이나 사이즈에도 맞지 않는 국방색옷들, 흰 고무신만 신고 다녀도 부자라고 부러워하던 것만 봐도 그 때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친하던 미군들도 싫증이 날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은 인근 냇가로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주로 노근리 터널이 바라보이는 냇가였다. 그 곳에는 물고기가 엄청 많았다. 송사리, 뿌구리, 치리, 메기 등 이름도 알 수 없는 물고기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전혀 오염되지 않는 맑은 물, 바닥이 훤히 보이는 수정 같은 물속에는 물고기들이 신명나게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큰 돌이나 모래 속에 꼬리지느러미를 감추거나 아니면 갈대숲에 숨어 요리저리 잘도 피해 다녔다. 무거운 햄머로 큰 돌을 치면 배를 까집고 물위로 떠오르는 물고기들도 있었지만 갈대숲에 숨은 물고기는 요절낼 수 없었다. 그래서 들고 간 것이 족대였다. 족대는 물고기들한테는 치명적인 도구였다. 족대에 걸렸다하면 씨도 남기지 않고 거의 다 잡혀 올라왔다. 갈대밑에 족대를 걸치고 발로 갈대숲을 밟고 지나가면 자잘한 물고기들이 족대 속에 갇혀 반짝거렸다. 좋아서 환호성을 지르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군용 트럭이 보였다. 우리가 손을 흔들면 미군들은 하얀 솜털이 뽀송뽀송한 팔을 내밀어 흔들었다. 그 서글서글한 눈매, 늘 웃는 얼굴, 물고기를 잡으러 와서도 미군의 그 얼굴이 밟고 환하게 다가왔다.
어떤 때는 냇가를 따라 터널 부근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터널 속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다. 날이 흐린 날이면 애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은 꼬리를 물고 마을로 펴져 나갔다. 누가 지어낸 소문인지는 모르지만 소문이 들리는 날이면 머리끝이 쭈빗했다. 간이 오그라들었다. 저 소문이 사실일까. 소문은 이상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꺼림직한 기분이 들어 터널 속을 기웃대지 못했다.
그러나 우천리와 연화동 아이들은 저 터널을 통과해 늘 초등학교를 오고가지 않는가. 우리가 저들보다 겁이 많아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용기를 내어 들여다 본 터널 속, 다른 터널과 똑 같았다. 그러나 살을 휘감는 냉기만은 어쩔 수 없었다. 소름 돋게 하는 냉기가 다리로부터 시작해 얼굴까지 타고 올라 몸 전체에 소름을 돋게 했다. 나는 그 소름이 처음엔 잔잔히 내려앉는 서늘한 그늘의 감촉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늘 소문으로 들어왔던 애기 울음소리와 퀴퀴한 냄새, 햇살 한 줌 들지 않는 서늘한 그늘이 한데 엉겨 붙어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터널 벽마다 빵빵 구멍이 뚫린 흔적을 보는 순간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누가 저렇게 구멍을 뚫어 놓았을까. 불현듯 터널 밖으로 나왔을 때 온 산을 불지를 듯 화끈 타오르는 진달래의 열기를 보았다. 숨이 막혔다. 그 진달래 열기를 따라 군용트럭이 다가오면 우리는 손을 흔들며 소리 높여 외쳤다. “쩝쩝 기부미이”
지금 와서 생각하니 터널 속에서 내 몸을 휘감았던 서늘한 냉기의 정체와 소문으로만 떠돌았던 애기 울음소리, 산자락을 후끈 달아올랐던 진달래의 핏빛 꽃잎들, 아, 그것은 모두 그 당시 몰살되었던 영혼들이 내지르는 몸부림이란 것을 알았다. 그 몸부림이 냉기가 되었고 애기 울음소리가 되었고 진달래의 핏빛 선명한 꽃이 되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아직도 노근리 참상을 숨기려고 안달하고 있었다. 지구촌 구석구석 그 소문이 스며들어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 있는 소문의 진상을 묻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터널 벽 숭숭 뚫린 구멍이 시멘트로 쳐 발린 것을 보고서야 그 구멍이 미군들이 수백 명의 주민들을 향해 갈긴 기관단총 구멍이란 것을 알고 몸서리를 쳤다. 미국은 언제까지 우리를 속일 것인가. 알고 보니 미국은 진심어린 우방이 아니었다. 철없는 시절에 우리가 본 것은 허상이었다. 깐수메와 초콜렛에 속고 껌에 속고 음흉한 웃음에 속은 것이다. 40년 전, 그 얼굴로 우리를 속인 미국이 똑같은 모습으로 아직도 그 작태를 보여주고 있으니 미국이란 나라는 정말 덩치 값도 하지 못하는 나라 같았다.
<영동문학>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