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중대 화엄사상과 화엄종
의상은『법계도』를 중심으로 부석사와 태백산 소백산 등지에서
여러 제자들에게 화엄사상을 강의하여 신라 화엄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 대표적인 제자들이 십대제자로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
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常元)·능인(能人)·범체(梵體)·도신(道身)들이다.
표훈은 의상의 지도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전개하기도 했던 고제(高弟)였다.
그러나 경덕왕대에 활동한 자취를 보여주어 직제자가 아닐 수도 있다
진정은 기층민 출신으로 문하의 사상을 주도하던 제자였다.
지통(655~?)은 가노(家奴)로서 화엄을 깨치고 관행을 닦던 수행인으로
스승의 강의를 기록한『추동기』(혹은『錐穴問答』,『要義問答』)를 지었고,
도신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도신장(道身章)』(『一乘問答』)을 남겼는데,
일부가 남아 있는 이들 저술은 의상과 지엄이나 제자들의 문답과 학설들이
실려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이들 문헌과 『화엄경문답』은 비슷한 내용을
전하면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분량이 어느정도 남아 있는『도신장』을 보면
이들이 의상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사상을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외에상원은 의상 문하의 강의에서 많은 문답을 남겼고,
양원은『법계도』에 주석을 남겼다.
다시 이들에 이어
신림(神琳)과 법융(法融) 등이 의상의 화엄전통을
널리 계승하여 8세기에 왕성한 흐름을 이루었다.
성기사상의 중요한 전적으로 평가되는『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은
그동안 법장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그 문체와 인용 문헌이나
삼승인이 성불한 후 일승에 들어간다는 극과회심(極果迴心) 또는 방편을
중시하는 반정(返情) 등의 사상이 의상 계통의 사상과 공통점을 보인다.
의상의 강의를 필록하였다는
『추동기(錐洞記)』(『지통기(智通記)』)의 내용이『화엄경문답』과 일치하는 점에서
이를『추동기』의 이본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화엄경문답』의 일승연기법 해석은『도신장』의 것과 같지만,
시불(十佛)설은 의상계『고기』에서 말하는 범부의 오척의 몸을 중심으로
시불을 해석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의상계문헌과는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의상계 화엄의 교리적 특색은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인『대기(大記)』·『법기(法記)』·『진기(眞記)』를 모아
편집한『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과 그 계승
관계에 있는 균여의『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총수록』은 의상계 화엄사상이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이론 토의를 거치며 부단히 전승되던 사실을
알려준다.균여 저술의 인용이 있어 고려 중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생각되는『총수록』은 2차에 걸쳐 편집되었다.
1차적으로『대기』와『법기』와『진기』의 주석서를 모으고,
다시 이에 부수적인 보충 자료를 추가하여
2차 편집이 이루어져현재와 같은 구성이 되었다.
세 주석서는『법기』『진기』『대기』의 순서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균여는 특히『대기』를 기반으로『원통기』를 저술하였다.
의상계 화엄에서는 중국의 화엄과는 다른 독자적인 사상 경향도 나타난다.
무주(無住)의 개념이 무자성과 같이
상즉상입의 근거로서 의상의 직제자로부터
균여에 이르기까지 널리 수용되었다
.의상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오해인(五海印)설은
선종과 지론 및 삼론학의 영향이 나타나며,
이는 의상 문하에서『화엄경』을 절대시하고
경문을관심석(觀心釋)하는 특색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의상계 화엄에서 강조된 구래성불(舊來成佛)과 무주(無住) 등은
중국 화엄에서는 볼수 없는 특징이다.
의상계 화엄에서는 원효의 사상을 그에 미치지 못것으로 보는 경우가있
예를 들면 진리를 오척(五尺)과 같은 구체적인 것으로이해하였기 때문에,
일심 등의 추상적인 원리로 파악하는『기신론』과 차별화를 의도하여 원효 계통과는
다르게 파악했다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의상을 계승하는
화엄종단에 의해 건립된 전교십찰(傳敎十刹)은 화엄의 성세를 대변한다.
부석사(浮石寺)·화엄사(華嚴寺)·해인사(海印寺)·
범어사(梵魚寺)·옥천사(玉泉寺)·미바라사(毘摩羅寺)·
미리사(美理寺)·보광사(普光寺)·보원사(普願寺)·갑사(岬寺)
·화산사(華山寺)·국신사(國神寺)·청담사(靑潭寺)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시기에 따라 그 위상이 다소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