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제 존자는 중국 선불교의 초조 달마(達磨) 대사가
아직 중국에 오기 전 인도에서 교화한 제자였고,
대화 상대인 이견왕(異見王)은 달마 대사의 조카였다.
그러니까 이견왕은 남인도 향지왕(香至王)의 아들로서 달마 대사는 이견왕의 숙부였다.
이견왕은 처음에는 불교를 탄압했지만, 뒤에 바라제 존자의 감화를 받아 불교를 후원했다고 한다.
그 달마 대사의 제자 바라제 존자가 달마 대사의 조카인 이견왕을 교화한 대화 내용이 유명해서
<직지심경(直指心經)>과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보리달마조’ 등에 실려 있다.
대화 내용은 ‘마음의 실체’에 대한 규명이 뛰어나다.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바라제 존자가 대답했다.
“성품을 보는 이가 부처입니다.”
“대사는 성품을 봤습니까?”
“나는 이미 성품을 봤습니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하는 곳에 있습니다.”
“성품이 어디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요?”
“슬픈 일이 있으면 울고, 기쁜 일이 있으면 웃으며,
기분이 나쁘면 화도 내고,
즐거우면 즐거워하는 마음이 모두 성품이며, 불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작용이 있습니까?”
“만약 왕이 작용을 안다면 성품이 아닌 것이 없으나
왕이 작용을 하지 아니하면 그 본체 자체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작용할 때에는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태중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있으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고 말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고 하고,
코에 있으면 향기를 분별하고,
혀에 있으면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무엇을 잡고,
발에 있으면 걸어 다닙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세상에 꽉 차지만,
거둬들이면 하나의 작은 먼지 속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이라고 알고,
모르는 사람은 혼(精)이라고 부릅니다.”
왕이 이 게송을 듣고 마음이 곧 열렸다고 한다.
위의 대화 내용은 마음의 실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마음과 성품과 불성을 같이 보고 있다.
그래서 성품을 보는 것이 곧 부처(見性成佛)라는 것이다.
이 성품이 누구에게나 모두 있으나 누구는 볼 수 있고,
누구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이견왕의 화두이다.
그래서 질문한 내용에 대한 답이 “성품은 작용하는 곳에 있다.”는 것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보고 듣는 일이며, 울고 웃는 이 사실이다.
봄에는 온갖 꽃을 감상하고, 가을에는 밝은 달을 즐기며,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겨울에는 흰 눈을 바라보는 그 사실이다.
또한 슬픈 일이 있으면 울고 기쁜 일이 있으면 웃으며,
기분이 나쁘면 화도 내고 즐거우면 즐거워하는 그 사실이다.
이것이 마음이며, 이것이 성품이며,
이것이 불성이며, 이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작용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가 불성의 작용을 하는 사람이므로 그대로가 부처이다.
이 사실 외에 달리 다른 부처는 없다.
경주 석굴암 부처님이 아무리 훌륭하다하더라도 울 줄 모르고 웃을 줄 모른다.
춥고 더운 것을 모르며 화도 낼 줄을 모른다.
그러한 부처님보다는 설사 무식하고 장애인이고 늙고 여러 가지로 병들었으며,
소견이 좁고 답답하고 멍청하고 숱한 모순과 복잡한 감정과 약점들을 다 가지고 있는
이 못난 중생이 수억 만 배 값진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바라제 존자는 이러한 사실을 이견왕에게 깨우쳐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