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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경성기생 `행화`.
경성 히노데상행(日之出商行) 발행. 고전에는 `말을 알아듣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로 불렸던 기생들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대부들의 노리개였던 그녀들의 가련한 삶이 애잔하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고전에는 '말을 알아듣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로 불렸던 기생들도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사대부들의 노리개였던 그녀들의 가련한 삶이 애잔하다.
조선 후기의 학자 정동유(1744~1808)의 만필집 <주영편>에는 소론의 핵심 인물로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광좌(1674∼1740)와 함경도 안변(원산 남쪽의 군) 기생의 러브스토리가 담겨 있다.
이광좌가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안변에 머물 때 기생을 가까이 했는데 수청을 들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이광좌는 기둥에 선을 그으면서 "키가 이곳에 이를 때 다시 보자"고 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다시 안변에 들렀다가 그 기생과 재회를 했다.
기생이 나이가 차고 키가 이미 그 선을 넘어 드디어 수청을 들게 하였다. 이광좌는 훗날을 만나기를 기약하는 징표로 그녀에게 부채를 건넸다. 기생은 관찰사의 약속을 믿고 절개를 지켰고 그렇게 몇 해가 흘렀다.
어느 날 안변의 관기 하나가 이광좌에게 만나 뵙기를 청했다. 그녀는 "몇 해 전 대감이 인연을 맺은 기생의 언니"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동생은 부채를 보물처럼 간직하고 애써 정절을 지키면서 대감이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그리움이 이기지 못해 죽었다"며 "동생이 임종을 앞두고 부채를 대감에게 돌려 드리라고 해서 이렇게 갖고 왔다"고 말했다. 이광좌가 부채를 펼치니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기둥에 선 그은 옛 은혜 마음속 깊이 새겨, 이별할 적 넋이 사라질 듯 슬펐다오. 상자 속에 담긴 둥근 부채 한 번 보소서, 절반은 맑은 향기요 절반은 눈물일 테니."
이광좌는 매우 놀라면서 자신의 무심함을 후회했다. 그리고는 장례 비용을 넉넉히 쥐어주고 후하게 장사 지내게 했다. 이광좌는 21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했다. 그가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된 것은 1712년, 39세 때의 일이다. 갓 어린 티를 벗었던 안변기생과는 나이가 최소 20세 이상 차이 났을 것이다.
사진2. 한강변의 능수버들과 기녀의 정한(閑情).경성 히노데상행(日之出商行) 발행.국립민속박물관소장.
조선 중기 어숙권이 지은 수필집 <패관잡기>에도 기생들이 다뤄진다. 서울 기생 소춘풍은 단아한 자태와 빼어난 용모로 사대부들에게 사랑 받았다. 그녀는 젊은 시절 선비 이수봉과 연인 관계였고 성종의 손자인 흥원군과도 염문을 뿌렸다. 그리고 중년에 접어들면서 최국광의 첩이 됐다.
하지만 소춘풍은 곧 큰 병이 들었다. 최국광은 "죽기 전에 소원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했다. 그러자 소춘풍은 드닷없이 젊은 시절 첫사랑 이수봉이 보고 싶다고 고백했다. 최국광은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는 그녀가 죽은 뒤 경기도 고양의 선영에 고이 묻어줬다.
장례가 끝나자 이번에는 옛애인이었던 흥원군이 제물을 들고 와서 그녀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최국광은 담담하게 제사를 허락했다. <패관잡기>는 최국광에 대해 "도량이 넓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치켜 세웠다.
역시 서울 기생인 상림춘은 당대 최고의 거문고 명인이었다고 <패관잡기>는 소개했다. 상림춘이 어느덧 일흔두 살이 됐다. 그렇지만 거문고 솜씨는 전성기와 다름 없었다. 다만 거문고를 타다가 옛일을 떠올리며 눈물을 떨어뜨리곤 했다.
그녀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노비 출신의 화가 이상좌를 찾아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다. 상림춘은 이상좌가 그려준 그림을 들고 여러 사대부들에게 시를 구하러 다녔다.
옛 애인이었던 참판 신종호가 먼저 그림 위에 시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정호음도 "아리따운 꾀꼬리 같은 노래가 비 지난 뒤에 꽃 사이에 매끄럽다"는 시를 지어주었다. 여기에 많은 선비들이 화답해 그림은 큰 시축(여러 시를 적은 두루마리)을 이뤘다.
사진3. 기생집. 캘리포니아 디지털 박물관.
인조 때 우찬성을 지낸 죽천 이덕형(1566~1645·한음 이덕형과는 동명이인)의 수필집 <죽창한화>는 막강한 권력을 악용해 힘없는 기생들을 골탕 먹이는 황해감사(관찰사)의 엽기 행각을 고발한다.
황해감사는 이웃의 수령과 기생들을 불러 유두놀이(여름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풍습)를 열었다. 그런데 장난기가 발동한 감사는 기생 중 건강한 열 명을 골라 설사약을 소주에 타서 연거푸 마시게 한 뒤 한 방에 몰아넣고 문을 굳게 잠가 버렸다. 기생들은 일시에 설사가 났고 결국 참지 못하고 방에다 연이어 실례를 했다.
똥 속에 누워서 원망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고 고약한 냄새는 방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이때 감사는 그 고을수령과 함께 이것을 엿보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날이 저물어 비로소 문을 열어주니 모두 똥이 몸과 발에 묻어서 모양이 귀신과 같았으므로 부끄러워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다만 울 뿐이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고서 그 황해감사는 죄를 받았다고 <죽창한화>는 전한다. 이덕형도 황해감사를 지낸 경력이 있다. 엽기 감사 이야기는 이덕형이 감사 재직 당시 주변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기자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 - 16.힘없는 기생에 설사약 먹여 갑질한 엽기 관찰사 .[해어화1] / 매일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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