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篆刻)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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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우개 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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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5명 수다 떠는 떼톡방에서 한 녀석이 말했다.
"평생에 진정한 친구 2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 하는데 우린 5명이나 되니 썩 괜찮은 삶 아닌가.
이 말을 한문으로 표현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군."
그리하여 각자 끙끙 머리를 맞대 조잡한 문장을 지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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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生得二朋
浮生已成功
吾等有五友
可謂壯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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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친구 둘 얻으면
덧없는 인생 성공이라 했거늘
우린 벗이 다섯이니
가히 장한 삶이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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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를 거듭하고 한학 하는 분 조력을 받아 어설프긴 해도 엉터리를 조금 벗어난 오언절구를 완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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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生百年內
信朋惟難得
於吾有友五
可謂不空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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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생 백 년을 산다 해도
참 벗 얻기 어려워라.
우리 벗이 다섯이니
인생 헛 살지 않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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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좀 아는 분이 보면 피식 웃겠으나 나름대로 운율과 격식을 갖춘 시가 되었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글이 완성되었으니 글씨도 쓰고 싶어진다. 괴발개발 글씨를 그렸다. 모두 협력해서 지은 글이지만 그중 처음 발제하고 애쓴 석야(石也)군을 공동 저자로 하여 낙관을 찍기로 하였다. 내 도장이야 그간 파 둔 게 몇 개 굴러 다니지만 석야의 것은 새로 장만해야 한다.
인장석 사러 시내 나갔다 오기 귀찮아 지우개에 카터칼로 새겼다. 뭐 그런대로 쓸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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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만 가질 수 있고 금값의 열 배나 호가한다는 전황석에 새겨 준들 받는 사람이 하찮게 여기면 지우개보다 못할 것이요, 백원짜리 지우개에 파서 선물했더라도 값지게 여겨 소중히 사용한다면 수만금 전황석이 뭐 별거겠는가
..
원래 이런 짧은 오언절구엔 가(歌)를 붙이는 게 아니라지만, 윤선도 오우가를 흉내내어 장난삼아 붙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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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황당인보기 (田黄堂印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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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석 얘길 하다보니 젊은 시절 읽은 정한숙의 단편 전황당인보기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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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진은 친구 석운이 관직에 오르자 귀한 돌 전황석에 석운의 도장을 새겨 선물한다. 석운은 그 보물을 지우개 도장 만큼이나 하찮게 여겨, 측근을 시켜 시중 도장가게 주인에게 인면 깎아내고 결재 도장으로 파 달라 한다.
강명진의 제자인 도장가게 주인은 스승의 작품임을 알아보고 다른 돌에 결재 도장을 새겨주겠노라 하고 전황석을 스승에게 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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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자에 친구들과 전각 얘기하다가 전황당인보기가 떠올라 고딩 때 국어 교과서에서 본 글이겠거니 하고 말 꺼냈는데 다들 그거 교과서에 없었단다. 김승한 군이 기억력의 알파고답게 소상히 설명한다.
"그 글이 우리 시절 교과서에 없었고 여타 참고서에 실렸었다. 교과서엔 정한숙 선생이 전광용 정한모와 함께 동인지 활동하며 이런저런 글을 썼다 하는 정도로만 언급됐었지. 그분 나 대학교 때 교수였는데 괄괄하고 사람 좋은 분이지. 보길도 여행 가서 함께 소주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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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공부 잘하던 놈들이 교과서에 없었다면 없던 거라 우길 수가 없다.
김승한 고대 국문과 다닐 때 학교에서 방언 탐사 여행 핑계로 보길도 가서 내게 엽서를 보내왔었다. 바닷바람 듬뿍 머금은 생선회가 값은 만 원인데 맛은 십만 원이라며.
그러고 보니 그때 술자리 함께했다는 분이 그 유명한 정한숙 선생이란 얘기다.
언어라는게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정한숙 선생이나 양주동 정비석 같은 분들이 그런 예스러운 문체로 글 쓸 수 있는 마지막 작가들일 테고 우린 그 글 이해하고 재미와 감동 느낄 수 있는 마지막 독자일 것이다.
요즘 애들에겐 그저 입시용으로 외워야 할 난해한 고문(古文)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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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 읽기 전엔 전각이란 게 한낱 문방구 구석에서 막도장이나 파는 하찮은 일로 여겼었는데, 실은 서예만큼 중히 대접받던 고아한 예술 분야였던 거다. 정한숙 선생은 친구의 정성을 무시하고 전통 가치를 폄훼하는 세속 현상을 비판하는 뜻으로 전황당인보기를 썼을 것이다.
전각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 일독을 권한다. 인터넷에 전황당인보기를 치면 전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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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도 한 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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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우이동 골짜기에서 자취생활한 적이 있다. 배고프고 돈 없지만, 정신은 맑았던 내 인생의 황금기...
화계사에서 장미원 가는 골목을 지나다 김홍도의 세한도 비슷한 분위기의 단정하고 아담한 집 대문에 李基雨라는 문패가 걸려 있는 걸 보았다.
설마 그 유명한 전각 대가 철농(鐵農) 이기우 선생이랴 싶어 무심히 지나다녔는데 어느 날 반쯤 열린 대문 사이로 툇마루에 앉아 계신 중로의 어르신이 보였다. 염치없이 쓰윽 들어서서 꾸벅 절하며
"혹시 철농 선생님 아니신가요?" 하고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
허걱!.. 철농 선생을 이렇게 뵙다니.. 이 순간엔 빵빠르와 함께 비둘기 날고 애국가 울려 퍼져야 하는거 아냐?
"젊은 분이 어찌 절 알아보시오? 학생인가 본데 무슨 공불 하시우?"
선생은 툇마루 한쪽을 손으로 권했다.
"아, 예.. 전 한청입니다."
"한청이라면..."
"문학 역사 철학을 문사철이라 하고 문학청년을 문청이라 한다지요. 전 한심한 청년 한청입니다요. 핫핫핫.."
선생은 아무 말씀 없이 비 개어 짙푸른 북한산만 허허로이 바라보셨다. 농담꺼리도 안 되고 함부로 농할 어른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주둥이에서 튀어나온 괴물 같은 단어라니... 이걸 어떻게 주워 담는단 말인가. 나는 썰렁하고 어색한 분위기에 스스로 무람하여 꾸벅 인사드리고 도망치듯 대문을 빠져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런 객쩍은 헛소리로 대한민국 전각 대가분과의 소중한 만남에 코를 빠뜨렸는지 참 한심한 노릇이다. 동네 고매하신 어른과 사귈 기회를 망쳐버리고, 혹시 전각 스승으로 사사할 수도 있는 기회를 차버렸는지 이따금 그때 일이 떠오르거나 도장 팔 일 생기면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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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현군이 단우(丹牛)라 호 지었다며 전각 얘길 꺼내기에 장난삼아 포자布字 몇 개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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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회 모임으로 인사동 나간 김에 인재(印材)를 사와 감히 책상머리에 앉았다. 인상(印床)은 버려진 가구를 주워와 만들었다.
전각이란 말 그대로 전서(篆書)를 돌에 각(刻)하는 것이니 전서 공부가 먼저 되어야 할 것인데 전서가 무엇인지조차 모를뿐더러 집도법(執刀法)도 모른다. 스승의 작품 최소 20번 이상 모각(模刻)이 기본이라 하지만 뭣 모르고 몇 번 칼 휘둘러 본 게 전부다. 그래도 옛날엔 어느 정도 파 진 듯 했는데 이젠 눈도 침침하고 손도 무뎌져 자꾸 튕긴다. 닭 잡듯 서툰 칼질로 그럭저럭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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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황당인보기 식으로 표현한다면 잡(雜)하고 (濁)한 것은 나의 생(生)이요, 뭉치고 비뚤비뚤한 것은 품(品)이요 지(志)이다.
옛날 우이동 골짜기 철농 선생 뵌 자리에서 분위기 망쳐버린 생각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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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에 안 들어 하나 더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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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첫댓글 동고공의 글 참으로 맛갈스럽다.
우이동 골짜기에서 자취생활하던 시절이
배고프고 돈 없지만, 정신은 맑았던 인생의 황금기라 하였는데..
지금도 그 때 못지 않다고 보고 있다네...
19회의 보물, 동고 이승남!
그대에게 영광이 있으라!
세한도 그린 이를 김정희 아닌 김홍도라고 오기誤記한 나의 무식이, 망원경과 현미경을 겸비한 방철린 군의 4.0시력에 딱 걸렸습니다. 여러 번 퇴고하면서 우째 걸러내질 못했으까...계속 욕 먹으며 반성하는 의미로 낯 뜨거움 무릅쓰고 본문 내용 수정 않은채 그대로 둡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