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시키는 대로 정신을 맡기고
마이크에 침을 튀겨가며 맘껏 청춘을 발산하는 모습이 참 힘있어 보였습니다.
포도를 먹으러 와서는 음주가무라...
그리고 또 느낀건 중학교 다닐 때
소풍 길쯤으로 여겨지는 곳을 다시 지나가다 보니
어른이 되어 느끼는 것하고
어릴적 느꼈던 감흥하고는 乖離가 참! 많구나! 함을 느꼈습니다.
어릴때는 그저 그렇고 그런 논과 밭인데
지금엔 나의 고향의 흙이라는 애틋한 감정이 섞인 푸근함이지요
낭산은 생각보다 넓고 큰 면적이었고
농토가 많아 부자들이 많았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빨간 황토흙도
무엇이든 씨만 뿌리고 심기만 하면 쑥쑥! 잘 자랄 것 같은 옥토로 보였습니다.
.
낭산에 대한 추억이래야
중학교 때
수업시간에 하사관학교에서 들리던 뻥! 뻥 !소리....
(그곳 하사관학교 에서 훈련을 받고보니 그때 터지던 소리는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각개전투 교장에서 물구덩이에 물과 흙을 채우고
포탄 효과를 낸 다이나마이트 폭발음이란 걸 알게됨)
그리고
군인가서(지금에야 "군대간다"하지만 우리때만 해도 "군인간다"란 표현을 많이 했다)
훈련받을 때 땀을 흘려 더렵혀진 군복을 빨기위해
줄을 맞추어 옥금동 저수지로 빨래를 하러 나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옥금동 저수지의 백로(?) <흰색깔의 새 인데, 새종은 확실치 않음>
마을 앞에 수호신처럼 늠름하게 서있는 수백년 된 느티나무,
그리고 50∼6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큰 소나무 군락....,
그 소나무 그늘이 참 시원하고 좋았드랬습니다.
송진 냄새가 살포시 흐르는 그 소나무 밑에서
덜푸덕 누워 피곤한 몸을 뉘여
일요일 한시간 낮잠은
고소하고 달콤한 맛으로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크, 잘잤다!" 소리가 절로나는 맛난 잠!
그렇게 좋은 잠이 또 어디 있을까나..
一笑하고
낭산에 연루된 역사의 한 에피소드를 보기로 하지요
지난 1979년 이완용의 증손 이석형 씨는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묻혀 있던 이완용과 이항구 부부의 묘를 직접 파헤쳐
화장시켜 버렸습니다.
이완용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과거의 권세와 민족의 손가락질을 견디기 어려웠는지 모릅니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붉은 페인트로
일본 정부가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
(朝鮮總督府 中樞院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씌어 있었습니다.
이완용 부부의 관 뚜껑은 주민이 가져갔다가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해방 직후 전북 익산 백성들이 이완용의 묘지를 파헤치고 관을 끄집어내
불태웠던 적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불에 타다만 이완용 관 뚜껑을 보관하고 있던
한 주민이 이것을 원광대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설도 있음).
그러나
원광대에는 이 관 뚜껑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원광대 박물관장이었던 박순호 교수는
"소장 직후 이완용의 친척 되는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내려와 총장님을 설득해
관 뚜껑을 가져가 태워버렸다"고 밝혔습니다.
실증사학을 강조했던 이병도가
정작 '가문의 수치'를 우려해 공사(公私)도 구분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 뻘인 이완용의 관 뚜껑이라는 역사 유물을 태워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증사학의 대부로 알려진 이병도 박사가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의 조카 손자라는 사실....,
3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은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이건무 씨를 임명했습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인사들에 대한 온갖 루머와 투서가 난무하는 가운데
두 달이나 끌던 인사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예연구실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해온 이 씨가
차관급으로 승격된 박물관장에 임명된 것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긍정적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지난 30여 년 동안 박물관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이 분야의 최고 전문가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한국 사학계의 태두로 불리는 두계 이병도 박사의 손자이기도 했습니다.
이완용은 사실 우봉 이씨가 생긴 이래
그 집안에서 배출된 수많은 인재 가운데서도 가장 출세한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하게 됩니다.
할아버지(이완용)는 '가문의 영광'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쌓은 재물과 권력을 동원해 조상의 분묘를 화려하게 개축했지만,
손자(이병도)는 '가문의 수치'가 널리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부끄러운 조상의 분묘에서
나온 관 뚜껑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할아버지(이병도)는 일제가 역사왜곡을 위해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전력을 가지고 있건만, 손자(이건무)는 할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 했으니
친일 논쟁은 부당하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진짜 친일파의 경우에는 도리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강제로 실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 인사에게 예외를 허용했던 것입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제일 먼저 연행된 '친일파 1호'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조선비행기주식회사 대표)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합니다.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도 10여 개의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했지만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녕 오욕과 왜곡의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다.
김창룡과 이병도.
한 사람은 일제시대에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독립군 사냥에 나섰던 악명 높은 친일파였고, 또 한 사람은 일제가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급조한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한 역사학자 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치명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해방된 나라에서
각각 군부와 사학계의 태두(泰斗)로 변신했습니다.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짙은 안개에 뒤덮인 원효로 1가
다섯 발의 총성이 고요한 아침의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습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으며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의 최후를 알리는 소리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
김창룡의 유해가 특무부대장실에 안치된 것은 오전 9시 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제일 먼저 들이닥쳐 애도를 표했고,
나흘 뒤인 2월 3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장(國軍葬)이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그날
안양 석수동 관악산 기슭에 묻힌 김창룡의 묘지 옆에는
가로 77cm, 세로 2백cm 크기의 묘비가 세워졌습니다.
비명(碑銘)을 지은 장본인은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로 군림하던 이병도 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60세.
김창룡과 이병도의 인연은 이렇게 맺어졌습니다.
~~~~~~~~~~ 후략 ~~~~~~~~~~~~~~~
뒤의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김창룡의 특무대장이 되기까지의 출세기와, 비문내용
그리고
그일 친일행적(독립군에 관한 자료등) 과 해방후 많은 이념적인 그의 행적
김구선생 암살에 얽힌 김창룡 등이 열거되었으며,
대전 국립묘지에 추앙 받는 김구선생과 많은 독립투사 묘역과
500m 떨어진 장군묘역에 묻힌 김창룡의 묘가 나란히 있는 아이러니에 대해
쓴 글입니다.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전의 부귀영화와 절대권력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인가.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결국 한 사람의 생애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후의 평가까지 살펴봐야 한다는 진리.
실제로 '가해자' 김창룡의 삶은
'피해자' 백범 김구 선생의 그것과 대조적입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젊은 시절을 풍찬노숙으로 보냈음에도
비극적 최후를 맞아야 했던 백범 김구.
그러나
그는 사후에 온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 받고 있지 않은가.
서두에 염려를 하였듯이 고향에 얽힌 이야기인 만큼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내용은 저의 의사와는 별개이고요
단지 이완용의 묘소 화장 문제로 수년 전 뉴스거리가 있었던
내용이 생각났고요
글을 뒤적이다
우연히 낭산에 관할 글이길래 펌했습니다.
한 분이라도 관계된/불편한 분이 계시다면 즉시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2004.05.16 ,,,김범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