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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설교 받기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11:1-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 하느니라. 9-10
Now a certain man was sick, Lazarus of Bethany, the village of Mary and her sister Martha. It was the Mary who anointed the Lord with ointment, and wiped His feet with her hair, whose brother Lazarus was sick. So the sisters sent word to Him, saying, "Lord, behold, he whom You love is sick." But when Jesus heard this, He said, "This sickness is not to end in death, but for the glory of God, so that the Son of God may be glorified by it." John 11:1-4
Jesus answered, "Are there not twelve hours in the day? If anyone walks in the day, he does not stumble, because he sees the light of this world. "But if anyone walks in the night, he stumbles, because the light is not in him." 9-10
8장에서 11장까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심,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안식일에 고치심, 수전절에 성전 솔로몬 행각에 거니심, 그리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이 그것입니다.이 중 수전절에 관계된 기록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는 세상의 빛이다.”는 표현을 하십니다. 수전절은 이방인에게 성전이 더럽혀진 것을 막카비가 회복하고 성전을 깨끗이 하는 데 기름이 닳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여 빛의 날이라고 하는 성전 청결 절기이니 역시 이 날 성전에 거니신다는 행동 자체가 곧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Some incidents had been written through Ch 8 to Ch 11 like below. The Lord would not condemn the woman who were seized while she was in adultery, the Lord cured a man who was born in blind in Sabbath, He walked the Temple in the Feast of the Dedication, and He made the dead Nazarus alive. Except for the Feast of Dedication, He described himself as the light of the world. The Feast of the Dedication is the day to celebrate that Israel cleansed the Temple that had been dirty by the Gentile, lighting it, while the oil was not out during the period of cleansing. So Israelite called this day as the day of light. So the action of Jesus to walk in the Temple is to reveal He was the light.
이 세 가지 기사에 등장하는 세 인물, 즉 간음 중에 잡힌 여인,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그리고 죽은 나사로가 모두 나 자신을 가리킨다는 데에 큰 이견이 없이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간음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즐겨 행하며 늘 자행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죄인 됨과 자신과 세상과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기도 하고 결국 우리의 심령까지 죽어버린 나사로와 같습니다. 물론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신 주님은 일부러 이틀을 더 유하시고 거기 도착하셨을 때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따지기 전에 이 상태, 즉 죽은 것이 확실해진 상황은 우리의 삶에서 확인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These three characters, the woman in adultery, blind from the birth, and the dead Nazarus, indicate I myself, that might be acceptable in our understanding. We used to commit adultery with the worldly thing intensionally, and we are blind not to see myself, world and the truth, and as the result, we are dead in soul. Of course, according to the scripture, we know the Lord postponed to visit the place of sick Nazarus on purpose for two day more, while when the Lord arrived there, it was already four days had been passed after death. But before we would discuss about the reason why, the situation of death reveals our living, that is not difficult to figure out.
가르침, 즉 교리가 믿는 이들의 신앙과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아무리 신령하더라도 그것이 믿는 이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듣기 좋은 이야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참된 가르침은 삶과 인격의 변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세 가지 기사는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는 변화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간음하는 모습, 소경됨, 그리고 완전히 죽어 있음이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때마다, 또 수전절에 다니심으로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표명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변화를 이끄는 유일한 비결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Teaching, doctrine, would give great influence to the faith and living, that is not too much excessive. But if it is without practical improvement or change, it is just like a tale. True teaching should be revealed through the change of personality. The three miracles of the Lord reveals the change to be fulfilled in our livings. Adultery, blindness, and death reveal the situation of us. At each time, including the Feast of the Dedication, the Lord revealed Himself as the light of the world. And that is the only way to lead the change of our lives.
물론 당시처럼 주님이 세상에 계시다면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지 현실적인 상황과 조건 상 주님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을 수는 있었겠지만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오늘은 주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상황에서 이 말씀이 어떻게 유효한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 각자와 연합하시고 삼위일체로서 우리 삶에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막상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삶과 인격의 변화에 어떻게 역사하시나 하는 것은 참으로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처럼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라는 것인지 내지 말고 있으라는 것인지 참 애매합니다.
Of course, when the Lord was in this earth, it must not be so difficult to understand this Word, only thing they would suffered was about the situation to accept the Lord. But today when the Lord is not in this earth, we have to think about how this Word is effective. The Lord has been unified and works as the Trinity today. But in fact, it is not easy to recognize it and to figure out how it works to our lives and personality. We might be confused to be enthusiastic or not, just keep waiting.
하지만 위의 세 인물 주변의 사람들이 한 행동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열심, 그것이 아닌가 합니다.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돌을 들어 치려는 이들에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십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고쳐주셨지만 그 사실보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주님마저 죄인으로 정죄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었을 때 누이들이 한 일은 죽은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무덤에 묻고 큰 돌로 막아 이를 확정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동조하며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과연 우리의 열심,그것이 이것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Searching these three persons above, we can figure it our to reveal our enthusiasm. It must not easy not to condemn the woman in adultery. For those who were about to stone the woman, the Lord said that anyone who are innocent stone her first. When the Lord cured the blind, Jews judged the Lord as Sinner because it was Sabbath. And when Nazarus was dead, his sisters just confirmed his death to put hims in the tomb and stoned it, while others just weep, that is not different from our enthusiasm.
의사는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만 생명의 자생력에 도움을 주는 의료행위를 하고, 부모와 교사는 아이의 인격을 신뢰하고 바른 길을 제시해 줄 뿐입니다. 서퍼는 좋은 파도를 보고 기다려서 거기에 적절한 시기에 올라타는 실력을 닦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릴 때와 농약을 칠 때, 가지치기를 할 때와 꽃을 따 줄 때를 따라서 수고를 합니다. 모든 것은 수고와 함께 그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때라는 것은 비단 시간의 요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A doctor can serve patient to be cured while they are alive, parents and teachers would provide right way to they kid, trusting their personality. A surfer is waiting for a good wave to take it on just in time. A farmer would do their effort according to the proper time to spread seed, water it, and make harvest. Of course, this time reveals not only physical time but also the trusting for the providence of God.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과 삶이 다르지 않으니 우리 신앙도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 자신이 수고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수고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만 바라고 있는 것은 농사짓지 않는 농부나 죽어가는 환자를 보고 방치하는 것, 아이에게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섭리에 대한 신뢰와 스스로의 수고가 합하여 질 때 우리의 신앙과 삶은 풍요로울 것이고 이러한 삶이 이웃과 나누어질 때 거기에 충만한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And so are our lives, faith either. Our own effort absolutely will be needed. But the effort should follow according to the providence of God. If we would not do anything, only waiting for the work of God, that is to let a patient go without cure, not giving a chance to be learn to kids. When our effort would be unified with the trusting for the providence of God, our faith and living will be prosperous and fullness will be given to the fellowship.
결국 주님의 말씀은 내가 빛이니 너희는 빛 가운데 다니라는 말씀이고 이 빛은 주의 임재와 연합과 동행 안에 있음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살라는 말입니다.
첫댓글 빛가운데 거하고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