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조선으로 입국하는 세계 선교사들
1820년 이후 조선선교를 열망하는 세계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이 조선을 향하여 끊임없는 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aff,1832)를 시작으로 토마스 목사(Robert Jermain Thomas,1865)와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1866), 로스 선교사(John Ross,1887)와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1887) 목사가 조선의 문을 두드리며 복음을 전달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조선인에 의한 조선선교는 더욱더 많은 순교의 피를 흘리며 조선땅 곳곳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최창현,(성경번역,1785), 이수정(성경번역,1883), 김청송(이양자교회,1884), 백홍준(의주교회,1884), 이성하(1887), 서상륜(소래교회,1884), 서경조(언더우드동역,1910) 등 이름모를 조선인들의 영혼을 태우는 복음의 열정은 환난의 조선에 새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우처 목사의 헌신적인 노력과 영혼을 움직이는 감동의 편지를 띄운 이수정,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 헌신하는 선교사들의 간절한 염원이 미국 선교위원들을 움직였습니다.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호레이스 알렌을 선두로, 1885년 4월, 북장로교회 선교회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교 선교회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였습니다. 5월에는 감리교 선교회 스크랜톤 선교사가 입국하고, 6월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헤론 선교사가 연이어 조선으로 입국하였습니다. 1889년, 호주 장로교와 1890년, 영국 성공회, 1892년,미국 남장로교, 1896년, 침례교(동아기독교), 1898년, 캐나다장로교, 러시아 정교회, 플리머스 형제단, 1907년, 성결교(동양선교회), 1908년, 구세군이 계속해서 입국함으로서 조선반도는 십자가의 불빛으로 어둔 세상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1) 호레이스 뉴톤 알렌(Horace N.Allen,安運,1858~1932) : 갑신정변과 제중원설립
1858년 5월, “호레이스 뉴톤 알렌”(Horace N.Allen,安運)은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출생하여 웨슬리언 대학교 신학과와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미국 장로교회 의료선교사로 중국 상하이에 파견되어 1884년, 조선으로 향하였습니다. 주한미국 대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arwood Foote)는 알렌의 신분위협을 고려하여 “미국 공사관부 무급의사”(Physician to the Legation with No pay)로 임명하였습니다. 알렌은 갑신정변(甲申政變,1884) 때 급진 개화파로 부터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수술하고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광혜원”(제중원)의 설립과 함께 조선왕실의 의사와 고종의 정치고문이 되었습니다. 1885년, 고종은 최초의 서양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하고 서양의술을 교육하게 하였습니다. 병원 개원후 의학부가 신설되었을 때, 알렌은 선교사업을 추진하였으나 동료 선교사들과의 잦은 마찰로 선교사직을 사임하였습니다. 1887년, 참찬관에 임명되어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의 고문자격으로 미국에 귀국하여 조선의 독립국 지위를 국무성에 요청하였습니다. 1890년, 해외선교부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주한미국 공사관 서기관을 역임하고 총영사와 대리공사 등을 지냈습니다.
알렌에 관한 평가는 양극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학계는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자 알렌을 미국의 경제적 이익에 우선하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제중원 설립후 선교사들과의 불화로 선교활동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미국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습니다. 1895년, 운산금광채굴권과 1896년,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사업가들에게 넘겨 주는 등 철저히 미국적인 사고를 가진 알렌은 선교보다 정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순수 선교목적으로 조선에 입국한 동료 선교사들과의 마찰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1884년과 1890년, 2차례에 걸친 의료선교사 알렌의 조선 방문에는 “선교”라는 핵심 목표보다 정치적인 고려와 이익에 우선한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때입니다.
➀ 갑신정변(甲申政變,1884년,3일혁명)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불리우는 “갑신혁명”(甲申革命)은 임오군란(1882) 후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을 주축으로 하는 청년 급진 개화파가 근대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목표로 일으킨 쿠데타였습니다. 조선의 개화파는 청나라 양무(洋務)운동을 모델로 하는 점진적 개혁의 온건 개화파와 일본 메이지 유신의 방법으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급진 개화파로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온건 개화파는 서양문물과 기술로 부국강병을 이루고 전통적 종교와 사상을 계승하는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유지하며 청나라의 종속을 인정하고 정부 요직에서 개화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진 개화파는 기술과 제도는 물론 정치,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함으로서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과 민씨세력의 제거를 목표로 하는 “변법론”(變法論)을 주장하였습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김옥균(金玉均,33세), 박영교(朴泳敎,35세), 박영효(朴泳孝,23세) 형제, 서광범(徐光範,25세), 홍영식(洪英植,29세), 서재필(徐載弼,20세)의 주도로 개화당(開化黨)을 창설하여 일으킨 친일파 양반주도의 혁명이었습니다. 1884년, 베트남 문제로 청나라와 프랑스의 전쟁위기가 고조되자 한양에 주둔중인 청나라 군사 1천5백명을 베트남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를 기하여 청나라와 민씨세력을 퇴출시키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 들였습니다.
10월17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때 개화당의 행동대가 의정국 북편 민가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쿠데타는 시작되었습니다. 우정국 행사에 참석중인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에게 치명상을 입힌후 고종을 경우궁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후 좌찬성 민태호, 해방총관 민영목, 지중추부사 조영하, 전영사 한규직, 후영사 윤태준, 좌영사 이조연 등 명성왕후 측근들을 차례로 제거하였습니다. 10월18일에는 일사천리로 신정부 요인명단을 발표하였습니다. 우의정 홍영식, 전후영사겸 좌포도대장 박영효, 좌우영사겸 우포도대장 서광범, 호조참판 김옥균, 병조참판 서재필, 도승지 박영교를 임명한 고종은 창덕궁으로 귀궁하였습니다. 10월19일, 개화당은 청국과의 사대관계 청산 및 자주권 확립, 전통적 신분제도 폐지,지세제도 개혁, 자유주의 상업의 발전, 입헌군주제를 통한 내각의 강화 등 국가제도를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혁신정강 14개 조항을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나 3일만인 10월19일 오후, 청나라 군대는 창덕궁을 포위하고 일본군과 총격전 끝에 고종을 구출하였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공사관에 피신했다가 21일, 제물포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급진 개화파와 손을 잡았던 일본은 청나라와의 정면 충돌에 부담을 느끼고 공사관 소실과 공사관 보호명분으로 “한성조약”(漢城條約,1885년11월)을 체결하고 실익을 추구하였습니다.
➁ 광혜원(廣惠院,제중원,1885) 설립
1876년 고종은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며 의료 근대화 작업을 병행하였습니다. 1881년 조사시찰단이 일본에서 서양식 병원을 탐방하고 1884년 한성순보는 서양의학 교육기관 설립과 병원 개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때를 같이 하여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가 병원설립을 제안하고, 갑신정변으로 치명상을 입은 민영익을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의 서양의술로 회복시킴으로서 병원설립이 확정되었습니다. 1885년 2월29일, 한성 재동(현,헌법재판소)에 국립 “광혜원”(廣惠院.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립하였습니다. 당시 “홍영식”(洪英植)의 자택을 압류하여 광혜원으로 사용하였는데, 광혜원 명칭을 백지화하고 3월12일,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개원을 하였습니다.
의료선교사로 구성된 제중원은 의술을 기반으로 선교사들이 엄숙히 지켜야 할 “예배”와 “성경”과 “말씀”과 “기도”와 “전도”가 병행되어 있었습니다. 제중원을 방문하는 환자와 가족들이 복음에 관심을 가졌을 때 그들은 매우 적극적인 복음사역자들이 되었습니다. 초기 조선인들의 사고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의료기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파란눈의 미국 의료선교사들은 유교적 전통을 계승한 한의원이 감당하지 못한 치명적인 질병을 극복하고 치료함으로서 기독교가 유교를 능가하였다고 믿었습니다. 이로서 의료선교와 교육은 조선인들에게 다가가는 가장 가까운 복음사역의 도구가 되었고 조선은 근대화와 함께 기독교가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중원 개원후 일일 환자의 급증으로 40병상의 병원에 260명의 환자가 내원하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사이며 복음의 열정이 강한 “스크랜톤”(Scranton,W.B.)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후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이며 장래가 촉망되는 복음사역자 “헤론”(Heron,J.H.)이 파견되어 함께 동역하였습니다. 1886년, 미국 북장로회는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여성의료선교사 “엘레스”(Elless, A. J.)로 하여금 왕실 여인들의 진료를 보게 하였습니다.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보다 확대됨으로 인해 1886년 10월, 한성 남부 동현의 왕실 소유 부지(현, 을지로2가 한국외환은행본점)에 신축 건물을 지어 제중원을 이전하였습니다.
1887년, 의료선교사 알렌은 동료선교사와의 갈등으로 의료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의 수행원(참찬관)으로 귀국하였습니다. 그후 헤론이 병원선교를 전담하고, 부인과는 “호르톤”(Horton, L. S.) 선교사로 교체하는 등 일부 조직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1890년, 알렌은 의료선교사 자격으로 조선에 재 입국하였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직으로 발탁되며 병원선교는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해 헤론이 병으로 사망하고, 캐나다에서 파견된 장로교 의료선교사 “빈턴”(Vinton,C.C.)이 이어받고, 1893년에는 “에비슨”(Avison,O.R.,魚丕信)이 뒤를 이었습니다. 1894년, 고종은 병원 운영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제정 투명성을 보장하기 어렵게 되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병원의 모든 권리를 이양하며 의료선교 사업기관으로 분리되었습니다. 1904년,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재정지원으로 제중원은 남대문 밖 복숭아골로 이전하여 현대식 병원을 건축하고 병원 명칭도 “세브란스 병원”으로 변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