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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막 7:31-37)
*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두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서, 데가볼리(Decapolis) 지역 가운데를 지나, 갈릴리 바다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공동번역에서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귀먹은 반벙어리’로 번역한다. 귀가 먹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을 배우기 힘들어 어눌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벙어리는 언어 장애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다.)
* 본문에 사용된 '말 더듬는'에 해당하는 희랍어 ‘모기랄로스’는 단어는 신약에서 이 구절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되며, 구약을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서도 단 한 곳에만 사용된다. 때문에 구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70인역에서 ‘모기랄로스’가 사용된 구절은 이사야 35:6로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 희랍어에 능통했던 마가복음의 저자는 희랍어로 번역된 70인역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이사야에 기록된 ‘모기랄로스’의 용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 속에서 살펴보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병자의 상태도 한 개인의 병만이 아니라 그 시대 민중들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7장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생각이 타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 7장 1-23절은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 몇 사람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자세히 기록한다. 이 논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따로 살펴보시기 바라고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사람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즉 “음행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의와 사기와 방탕과 악한 시선과 모독과 교만과 어리석음” 등이라는 말이다.
* 전에 구시화복문(口是禍福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할 때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중 화의 문이 될 수 있는 것이 말이다. 예수가 언급한 열두 가지 악행들 중 음행, 탐욕, 사기, 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 절반이 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들이고 살인도 말과 연관될 수 있는 악행이다. 박근혜의 어리석음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바로 그녀의 말이었고 홍준표의 음행과 탐욕을 가장 잘 드러낸 것도 그의 막말임을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런 막말, 즉 화의 문이 되는 구시화문이 아니라 복의 문이 되는 구시복문의 전형을 보여준다. 예수가 두로 지역으로 가 어떤 집에 들어가셨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곧바로 예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렸다. 그녀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수로보니게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기를 예수께 간청하였다.
* 그런데 평소 인자하시던 예수는 그 여인에게 매몰찬 말을 던진다. “아이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방출신인 여인을 개 취급하는 말이다. 심하게 모욕감을 느꼈을 텐데 자신의 자존심보다 자식을 살려야 한다는 모성애가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라고 답한다.
* 여인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답변에 예수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라고 말한다.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 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 갔다”라고 번역한다. 이는 짧은 생애 동안 수많은 논쟁을 벌였던 예수가 상대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유일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는 예수의 가르침(신학/복음)에 일치(근접)했던 여인의 깨달음(생각/사상)이 표현된 말 덕분이었다.
* 오늘 본문은 이런 흐름의 마지막에 자리 잡고 있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이 그를 데려와 안수하여 주기를 간구하자, 예수는 그를 무리로부터 따로 데려가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예수는 눈먼 사람이나 벙어리 등 감각기관이 손상된 사람을 고칠 때는 말로만 하지 않고 치유 수단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다음 주에 살펴볼 8장에서 뱃새다의 소경을 고칠 때도 두 눈에 침을 뱉고 손을 얹는다(8,22~26).
* 요 9:1~7에서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에서는 땅에 침을 뱉어서,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른 후 실로암에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한다. 고대의 기록에서는 물, 피, 포도주, 기름과 함께 이처럼 침을 치유 수단으로 사용한 경우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귀신을 쫓아낼 때나 다른 병자를 치유할 때처럼 전혀 손을 대지 않고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쳤을까?
* 주석을 찾아보니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어 있다. 그 중 예수는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직접 접촉하심으로써 당신의 뜨거운 사랑을 표시하셨고, 그를 위해 당신께서 지금 힘쓰고 계신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 주셨으며, 귀먹고 어눌한 자가 능동적으로 믿음을 지닐 수 있게 도와주시기 위해 이 같은 행동을 취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인상적이다. 양 귀에 손가락을 넣은 것은 귀가 열릴 것이며. 혀에 손을 댄 것은 혀가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 예수는 이런 행동 후에 하늘을 우러러보시고서 탄식하시고, 그에게 “에바다”라고 말한다. 먼저 “탄식하시고”라는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한숨을 내쉰 다음”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하늘을 우러러봄이나 탄식 또는 한숨 쉼 등은 초인적인 힘을 이끌어내려는 모습을 묘사하는 문학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마가는 이 병자를 깊이 사랑하고 그의 고통을 공감하기를 원하는 예수의 애정을 탄식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는 ‘열리라’는 뜻을 갖는 아람어이다. 마가는 예수가 아람어로 한 말을 자신의 기록을 읽는 이방 독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디아노이크데티’라는 헬라어로 그 뜻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이 '에바다'라는 말은 단지 닫힌 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굳어진 혀에도 영향을 미치는 명령어라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자 곧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똑바로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 예수의 이런 명령은 그 병자의 심령 뿐 아니라 그 닫힌 귀를 뚫어 들리도록 만들었고 굳어진 혀를 풀어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많은 목사들이 이를 한 병자를 고친 이야기로 해석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한 명의 병자보다 더 큰 집단 즉 로마제국이나 유대교 지배세력에 의해 할 말 못하고 침묵하던 민중들에게 입을 열어 말할 수 있는 권리나 자신감을 회복시켰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 이는 '말 더듬는'에 해당하는 희랍어 ‘모기랄로스’가 70역에 유일하게 사용된 이사야 35:6(“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과 그 바로 앞 절(“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을 연결해 생각하면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메시아의 시대에 이뤄질 일들 중 하나를 상징한다는 말이다.
* 유명한 눅 4:18-19을 보면 예수가 선지자 이사야 61:1-3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대목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 35절을 보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린 사람은 말을 똑바로 하였다. 즉 이 사람은 말을 전혀 못하던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듣지 못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대로 듣지 못한다는 말은 육체적 장애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정보의 부족이나 식견의 부족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말을 똑바로 하게 되었다는 말 역시 발음의 정확성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바로 앞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생각을 논리적으로 밝힐 수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 예수는 사람들에게 이 치유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말리면 말릴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퍼뜨렸다. 마가는 당시의 정황을 “사람들이 몹시 놀라서 말하기를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훌륭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하신다’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창조 기사의 마지막 구절(창1:31)을 연상시킨다.
* 어쩌면 이는 예수의 사역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리려는 마가의 의도를 반영하는 구절일 수 있다. 예수가 공생애 동안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이뤄지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복된 소식이고 이는 새로운 창조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포로 된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눈먼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되고, 억눌린 사람들이 풀려나는 세상이 바로 그에 해당한다.
* 그리고 성경이 전하는 하나님나라는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며,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르며,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르는 세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에스겔 선지자의 책망처럼 볼 눈이 있어도(눈이 성하면서도) 보려고 하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두 귀가 성하면서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겔 12:2).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 그 이유는 체제의 억압 때문이기도 하고 신념이나 용기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예수의 시대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 시절에도 해당된다. ‘귀머거리처럼 장님처럼’이라는 의미의 사농사맹(似聾似盲)이나 듣고도 못 들은 체한다는 청약불문(聽若不聞)이라는 말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온 시대 역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당당하게 말할 수 없어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며 살아온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 지금은 그렇게 사는 여성들이 없겠지만 시집살이의 고됨을 상징하는 말로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눈봉사 삼년”이라는 말이 일상처럼 사용된 적도 있었다. 여성의 권리가 많이 신장되어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불평등으로 인해 아직도 수많은 여성들이 알게 모르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벙어리처럼 살아야 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이 우리의 참담한 현실이다.
* 최근 자신이 2010년 법무부 간부 안태근 검사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창원지검 통영지청의 서지현 검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서 검사의 폭로 이후 각계의 응원과 격려가 쏟아지는 동시에 자신도 같은 피해를 당했다고 고백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여성들이 우리 사회의 하류층이 아니라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전문직 여성들이라는 사실이다. 서 검사에게 공개편지를 보내 성폭행 피해 기자처럼 말이다.
* 우리와 은근히 비슷한 수준인 미국에서도 작년 말 할리우드의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 사실이 여성 배우들의 용기 있는 고발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동안 돈과 권력을 가진 남성의 힘에 눌려 벙어리처럼 살아야 했던 여성들이 이제야 용기를 낸 것은 뒤늦은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을에 대한 갑의 횡포가 사라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이 벙어리처럼 살아야 했던 이유는 그런 부조리한 행위를 보고도 장님처럼 귀머거리처럼 행세했던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폭행 피해 기자는 동료 기자들이 말렸다고 하지만 서 검사는 동료 검사들이 뻔히 지켜보는 가운데서 치욕적인 성추행을 당했고 권력과 조직의 힘에 눌려 오랜 세월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폭행 피해 기자 역시 피해 폭로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다.
* 이런 전문직 여성들조차 그토록 무방비로 억울한 일을 당하고 침묵해야 하는 사회에서, 그런 사회적 지위조차 갖지 못한 더 많은 여성들은 어떤 비참한 일을 당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불합리한 일은 여성을 비롯한 이 사회의 약자들이 여전히 일상적으로 당해야 하는 차별과 불평등, 사회적 억압 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며, 우리 사회가 변하기 위해 헤쳐 나가야 할 적폐가 엄청나게 울창하고 질기다는 반증이다.
* 그러나 메릴 스트립이 말한 것처럼 한 번 열린 문은 다시 닫히지 않을 것이다. 이는 예수에 의해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똑바로 하게 된 사람이 다시는 이전처럼 어눌하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자명한 일이다. 예수가 살던 시대나 ‘사농사맹’이 당연시되던 조선시대는 생존 자체가 불투명해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최우선 과제인 사회였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생존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세상에서는 문화적 다양성은 위협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방인과 같은 외부인은 자신들의 몫을 빼앗아 갈 위험한 국외자로 인식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예측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전통적인 남녀 역할 구분과 성별 기준을 고수해야 한다. 경제적, 신체적 안정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을 무조건적인 남성 지배의 권위에 종속해야 하고, 백성을 무조건적인 국가 권위에 종속해야 한다.
*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어느 한구석에서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성폭행 당한 여성을 자신과 가족을 욕되게 했다는 이유로 가족이나 이웃이 돌로 쳐 죽이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여성의 고통에 공감하기는커녕 사회가 앞장서서 더 큰 벌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그런 모습이 없지 않다. 용기를 내어 성폭행 사실을 폭로한 여검사는 말도 안 되는 마타도어(흑색선전)를 견뎌내야 했다.
* 어제 오전 불이 난 세브란스병원의 발화 원인은 지난달 26일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 화재의 경우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병원 측의 대처와 ‘스프링클러’ 작동에 따른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고 한다. 병원측의 신속하고 침착하게 대응 여부와 안전설비의 유무 등 기본적인 부분에서 차이 때문에, 발화 원인은 유사했지만 밀양 세종병원 화재는 4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참극이 된 반면, 세브란스병원 화재는 인명피해 없이 마무리됐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상적인 되기 위해서는 이런 안전장치가 잘 가동되어야 한다. 여성들은 물론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등 이 사회의 약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장님(시각 장애인)처럼 못 본 척하고 귀머거리(청각 장애인)처럼 못 들은 척하며 벙어리(언어 장애인)처럼 침묵하는 사람들이 다수라면 그런 안전장치는 가동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사회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작동되지 않는 밀양 세종병원처럼 되고 말 것이다.
* 우리는 예수처럼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노력하면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을 수 있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사회가 만들어질 때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이 넓어질 것이고 예수가 전했던 하나님나라의 임재도 앞당겨질 것이다. 우리 하늘씨앗교회가 그런 정의로운 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동참하길 바란다.
* 그런 의미에서 ‘에바다’라는 예수의 명령은 2천 년 전 한 병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그 명령은 볼 눈이 있어도 보려고 하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며, 말할 입이 있어도 말하려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 시대의 약자들에게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이기도 하다. 여성들의 저항은 이제 ‘미 투’를 넘어 ‘미 퍼스트’로 이어지고 있다.
* “나도 당했다”라는 선언을 넘어 이제는 “나부터 나서서 막겠다”는 선언이다. 나는 이런 여성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이 시대의 ‘에바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문제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 부당함 등에 대해 눈과 귀와 입을 열라는 시대적 예언 즉 ‘에바다’를 외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노력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나라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기 바란다.
* 하나님나라는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리며,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르며,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르는 세상이며, 포로 된 사람들이 자유를 얻고, 눈먼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되고, 억눌린 사람들이 풀려나는 세상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와 같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