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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춘계 베트남 일원 여행 >
일시 : 2018. 01. 28(일) ∼ 02. 01(목) - 3박 5일
장소 : 베트남 중부 일원(다낭, 호이안, 위에)
참가자 : 김병수, 김영주, 박소영, 박용필, 박주희, 서상희, 신교명, 이수근, 이우탁, 이윤주, 한경호. (11명)
<베트남 여행 전, 알아두면 쓸모 있는 상식 사전 >
1. 다낭의 날씨 : 다낭의 1월, 2월 날씨는 일교차가 있는 선선한 날씨입니다. 평균 최고 기온은 25도, 최저 기온은 20도로 가장 시원한 시기입니다. 종종 비까지 내리며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한 날씨를 보입니다. 일교차가 있기 때문에 아침저녁을 대비해 바람막이나 얇은 겉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다낭이나 호이안의 1월 기온은 아침저녁엔 18도 정도 낮에는 22-23도 정도 되니까 한국의 늦봄이나 이른 가을쯤 됩니다. 다낭이 속한 중부지방은 10월부터 2월까지가 우기라서 가끔 비도 내리니 우산 겸한 작은 양산 정도 있으면 좋겠지요. 자외선이 강하기에 챙이 넓은 모자와 선글라스를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상비약, 모기 퇴치제, 샌들도 있어야겠지요.
2. 환전 : 우리나라에서 달러로 환전 후 현지에서 동(Dong)으로 환전해야 합니다. 베트남에서는 상품을 사거나 음식값을 낼 때는 베트남 돈인 동(Dong)으로 내야 합니다. 달러로 환전 시에는 구권보다 신권 위주로 받는 것이 좋습니다. 간혹 찢어진 달러는 베트남에서 받지 않으니 주의하시고 또한, 동(Dong)은 큰돈과 소액권을 함께 준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베트남에서는 거스름돈을 팁으로 생각하여 잘 주지 않습니다.
베트남 동(Dong)은 우리나라 돈과 약 20배의 환율 차이가 나며, 주로 10,000동 단위를 사용합니다. 베트남 환율을 손쉽게 계산하는 방법은 동(Dong)에서 뒤의 0을 하나 없애주고 이를 다시 2로 나눠주면 됩니다. 10,000동을 0을 빼면 1,000이고 이를 2로 나누면 500이 됩니다. 즉 10,000동은 우리 돈 500원과 똑같습니다. 3명이 좋은 식당에 가서 3가지 음식과 3병의 맥주, 1병의 콜라를 시켰더니 295,000동이 나왔습니다. 0을 빼고 29,500을 2로 나누면 우리 돈으로 14,750원이 됩니다. 이는 실제 상황입니다. 1달러(1,100원 = 22,000동 정도)와 10달러(11,000원 = 220,000동 정도)짜리를 준비하고 나머지 고액권은 달러로 지니고 있다가 필요할 때 환전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집에 엔화나 유로화가 있으면 환전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환율은 금은방> 카지노> 호텔> 은행 순으로, 금은방이 가장 잘 쳐 줍니다.
3. 베트남 및 동남아 여행 시 주의할 점
1. 택시 타기 :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는 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택시는 마이린과 비나선만 타시길 바랍니다. 마이린 택시 번호는 “38 38 38 38” 이고 비나선 택시 번호는 “38 27 27 27”입니다. 이 두 개 말고 비슷하게 생긴 택시들을 탔다간 큰 봉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관광객이어서 위험한 게 아니라 현지인도 비나선과 마이린 택시만 타는 것이 현실이라 하니 되도록 가까운 호텔이나 식당에서 택시를 불러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탑승 전에는 반드시 미터기를 미리 찍고 가도록 이야기하고, 중간마다 구글 맵을 통해 위치를 확인해야 합니다. 앞자리에서 지갑을 꺼내는 순간 돈이 사라지게 되니 앞자리는 안 타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흥정을 해야 할 경우 녹음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소매치기 : 오토바이가 많은 베트남에선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지갑, 가방, 카메라는 물론 베트남에선 흔하지 않은 스마트 폰은 소매치기들의 주 표적이 되니 주의하세요. 특히 스마트 폰을 팔면 굉장한 돈이 되기 때문에 이를 노리는 소매치기가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웬만하면 길거리에서 꺼내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3. 길 건너기 : 퇴근 시간 되면 무슨 소용돌이가 돌 듯 오토바이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쏟아져 나오는데요, 게다가 횡단보도도 제대로 없고 있어도 모두가 신호등을 무시하기 때문에 처음 가시는 분들은 길 건너기가 쉽지 않으실 겁니다. 무섭다고 빨리 건너려고 하면 정말 위험하니, 길을 건널 땐 그나마 현지인 옆에 붙어서 걷는 게 가장 안전합니다.
4. 혼자 여행 간 여성이라면? : 동남아나 다른 나라를 여행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국인 여성분들은 상당히 예쁜 축에 속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남자들의 시선과 휘파람 소리, 그리고 아주 저렴한 작업 멘트들 때문에 피곤해지실 텐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반응을 보일 시 (긍정이든 부정이든) 위험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못 들은 척 지나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만일 (네..? 응..?)이러한 반응을 보이며 쳐다보면 엄청 쫓아오면서 집적대기 때문에 눈길도 주지 마세요! 기분 좋다고 반응했다간 남성들 무리에 잡혀있을 수 있습니다. 우린 별 상관없지요?
5. 한국인 : 낯선 외국에서는 가끔 우연히 한국인을 만나는 게 참으로 반갑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더욱 조심하셔야 하는데요, 한국인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기꾼이 대단히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베트남에서 제일 위험한 건, 한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직업을 물어본 후, 관련된 것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고 커피를 마시자고 합니다. 그 이후로 다른데 술을 먹으러 가자고 하거나, 집에 가서 먹자고 하면서 같이 이동할 것을 권유하는데, 물론, 그중에는 정말 좋은 착한 한국 사람을 만나서 재미있게 놀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기를 당하거나, 카지노 등 도박을 하자고 권유하는 경우가 빈번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6. 음료수 : 베트남의 수돗물은 석회분이 많이 들어 있으므로 반드시 끓인 물이나 생수를 사서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얼음의 경우, 완전하게 세균을 죽일 수 없으므로 불결한 식당에서의 얼음물을 주의하며, 노점에서 파는 물이 섞인 음료수는 마시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 그 외, 한국보다 떨어지는 위생관념, 그리고 식당에서 물티슈가 유료로 제공되는 곳도 있으니 물티슈나 손 세정제를 단체로 가지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7. 팁 : 외국을 여행하시는 데 있어 우리 한국인들에게 제일 불편해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팁(TIP)인데 나라마다 조금씩 표현방법이 다르긴 하지만 거의 전 세계의 공통된 국제관례입니다. 베트남의 경우, 호텔 룸 메이드를 위해 $1/방당/매일 아침, 그리고 호텔 체크인 시 포터에 $1/방당, 택시나 가이드는 1일 3-5$을 팁으로 지급합니다. 서비스가 좋았을 때 팁을 지불하나 서비스가 좋지 않았다면 지급하지 않아도 무관합니다. 하지만 팁을 주게 되면 엄청난 대접을 받게 되니 포터는 5,000-1만 동, 레스토랑에서는 요금의 10% 정도를 팁으로 줍니다.
8. 사진촬영 : 군사 시설 및 국가 보안 지역을 제외한 모든 곳에 대한 사진 촬영이 허용되나 간혹 특별한 지역의 경우 금지되므로 사진 촬영 전에 안내문을 참고하여야 합니다(하노이에 있는 호찌민 묘소의 경우 사진 촬영 금지지역임).
9. 분실 주의 : 공항에서 수화물을 보내실 경우에 종종 캐리어 안에 있는 물건을 훔쳐가기도 한다 하니 카메라나 아이패드 등 기타 고급 품목들은 직접 보관하시길 바랍니다. 공항은 혼잡하므로 모든 소지품에 대한 주의가 요망됩니다. 특히, 면세품점이나 기내에서 산 물건을 담은 비닐가방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으며 여권 및 출입국 카드를 분실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합니다. 호텔은 특급 및 일급 호텔의 경우 방마다 SAFETY BOX(금고)가 있어 현금 및 귀중품을 이곳에 보관하면 안전하고 2급 이하 호텔의 경우 현금이나 귀중품은 RECEPTION에 보관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미는 꼬마들에게 과자를 주는 선심을 베풀면 이들에게 순식간에 포위를 당하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공항, 호텔 등 공공장소에서 걸인 행세를 하는 어린이가 소매치기로 변할 수 있으니 모든 소지품에 대하여 주의하여야 합니다.
10. 여권 지참 : 베트남 여행 시 모든 호텔에서는 여권을 받아둡니다. 외국인은 입국 후 48시간 이내에 체류하고 있는 숙소를 통해 담당 경찰서에 체류신고기 됩니다. 베트남 공안 당국이 입국자의 체재 중 활동을 감시할 수 있으므로 업무상 보안 유지 및 언행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입국 시 기재한 출입국 카드 사본은 출국 시에 반드시 반납하여야 하므로 출국 시까지 잘 보관해야 하며 여권분실에 대비하여 사진 2매와 여권을 복사하여 따로 지참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트남 정부는 모든 외국인에게 지방 여행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지만, 외국인이 여권 및 체류 신분증 없이 지방 여행을 할 경우 벌금을 징수당하며, 호텔 체크인은 물론 경찰들로부터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이 여행을 삼가야 할 지역은 통신이 끊기는 중부 고원 지방과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와의 국경 지역, 기타 국경 산악 지대 등입니다.
11. 상품구매 : 선물을 살 때는 여러 상점을 둘러 본 후에 물건값을 확인한 다음 물건을 고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외국 관광객에게 높은 가격의 물건값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에서 물건을 구매할 경우에는 정찰제가 아니라 흥정제이므로 요구하는 가격은 원래 가격의 2~3배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따라서 부르는 가격의 절반 정도에서부터 흥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12. 생활풍습 : 불교 사원에 들어갈 경우에는 신발을 벗고 사원에 들어가며, 집에 들어갈 때도 신발을 벗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의 행동에 따라 같이 하며 발바닥을 불상이나 다른 사람으로 향하도록 하지 않도록 합니다. 반바지는 어린이나 일을 하는 남자들을 제외하곤 입지 않았으나 현재 많은 서구인에 의하여 반바지를 입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나 내륙 지역은 아직 스며들지 않았기에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13. 금기사항 : 야간 유흥업소에서 과음, 지나친 행동으로 인하여 바가지요금을 내게 될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하며, 야간 단독외출은 신변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라오케 등 야간 유흥업소에서 과음, 지나친 언동, 실수 등으로 불미스러운 일을 당할 수 있으므로 주의하여야 하며, 특히 오만한 태도나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언행, 폭행, 돈 자랑은 삼가야 합니다.
14. 전압과 와이파이 : 전압은 우리와 같은 220V이므로 별다른 플러그가 필요 없다. 그러나 여행을 자주 다니시는 분은 여러 가지 다기능 플러그 하나 정도 미리 사 두는 것이 좋습니다. 와이파이는 2개 준비했다고 하니 개인별로 준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조 배터리는 폭발의 위험이 있어서 기내에 꼭 가지고 탑승하여야 합니다.
4. 간략한 베트남의 역사 < 다음 백과사전 인용 >
베트남의 역사는 BC 200년경 베트남어를 쓰는 민족 언어집단이 남베트(Nam Viet, 南越)라는 독립 왕국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한동안 베트남 북동부와 중국 남부를 지배했으나 BC 111년 중국의 전한(前漢)에 점령되었다. AD 1세기에는 인도와의 접촉으로 인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푸난 왕국이 메콩강 삼각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6세기에 멸망했다. 939년 드디어 북부지역이 약 1,000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13세기에 3차례 몽골의 침략을 받았으나 모두 물리쳤다.
1407년 중국에 다시 정복되었지만, 거국적 저항운동으로 1428년 마침내 중국인들을 몰아냈다. 레[黎] 왕조 치하에서 중국식 관료주의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경은 점차 남하했다. 1757년 양분되었다가 1802년 후에 통일왕조의 황제(嘉隆帝)가 된 구엔 안[阮映] 장군에 의해 통일되었다.
19세기 후반 베트남은 서서히 프랑스에 정복되어 1883∼1939년에는 식민지로, 1939∼45년에는 속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1945년 공산주의자 및 민족주의자들이 호찌민[胡志明]의 영도 아래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다. 7년 동안 프랑스는 독립을 반대했고 호치민이 프랑스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종결되었다. 같은 해 7월 21일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를 경계로 해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며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임시 분할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남베트남 내 친(親)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1964년 미국의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의 개입과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곧 베트남 전쟁(1955∼75)을 불러일으켰다.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실을 입은 후 197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미군이 철수했다. 그러나 전쟁은 곧 재개되었으며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남베트남 정부는 붕괴하고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으며, 1976년 7월 2일 마침내 두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지만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결국, 반전 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역에서 퇴각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베트남 해방 전선은 전쟁을 재개하여 사이공을 북베트남군이 점령하고 남베트남 정부 대신 남베트남 임시 혁명정부가 세워지면서 끝이 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한국어식으로 음차한 월남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을 포함한 베트남인 150만 명이 사망했고, 미군은 사망자 6만여 명,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쟁 이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그 자녀들이 장애를 갖게 되는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있고,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1978년 베트남군과 캄보디아군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수천 명의 화교가 정부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베트남을 탈출하면서 캄보디아·중국과의 관계가 악화하였다.
1979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부를 무너뜨리고 친 베트남 정권을 수립했다(크메르루주). 이에 대응해 중국군이 베트남의 북쪽 국경을 따라 공격을 개시해 베트남의 영구 군사시설을 닥치는 대로 파괴하면서 약 40km 정도 진격해 들어왔다. 베트남은 캄보디아로부터 병력을 끌어오지 않고 중국군의 진격을 막았지만 9일간의 전쟁으로 큰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1980년대 초 베트남은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많은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며 인도차이나반도 대부분을 장악했고, 이에 따라 몇몇 국가와의 관계가 상당히 악화하였다. 한편 폴 포트의 추종자들은 캄보디아 내 베트남군에 대항해 끊임없이 전투를 벌였으며, 마침내 베트남은 단계적으로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해 1989년 철군을 종료했다.
심각한 경제 상황과 소련에서 전개된 유사한 개혁 조치들에 힘입어 198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은 민간 기업들에 대한 자유화 조치들을 비롯한 일련의 경제 개혁을 감행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많은 아시아 및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했으며, 이로써 국제적인 고립상태에서 벗어났다.
5. 베트남의 문화 < 자료원 : 외교부 발췌 >
1. 사회 : 베트남 사회의 특성을 간략히 요약하면, 우선 국민성은 근면하고, 성실하며, 친절하고, 용기가 있다고 스스로에 관한 자긍심이 대단히 강하다. 이는 근세에 외세의 침략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부심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베트남 사람들의 주요 특성으로는 중국에서 전래한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한국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즉, 가족 간의 우애와 헌신, 자기 자신의 명예를 매우 중시하며, 교육에 대한 열망이 높으며, 부모, 스승, 연장자에 대한 존경심과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높아 보인다. 최근에는 동남아시아에 불기 시작한 한류의 영향으로 베트남도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는 상당히 좋아 외국인으로 살아가는데 큰 애로는 없다.
지역별로 베트남인의 특성이 약간씩 다름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북부지역 사람들은 근면, 성실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조직에 대한 순응력이 높지만, 남부지역 사람들은 외국 문화의 개방이 비교적 빨라 자본주의적인 비즈니스 마인드가 높고, 개방적이며, 특히 메콩강 삼각주 지역의 풍부한 농수산물의 영향으로 낙천적인 성격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의 특징으로는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활발한 모계사회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활력이 강하며, 가정에 헌신적이고, 자녀 교육에 매우 열정적이며 가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오랜 기간의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 터득한 삶의 지혜였을 것이다. 즉, 남성은 전쟁터에서 오랫동안 지냈기 때문에 홀로 가정을 지키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사회생활이 여성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을 많이 볼 수 있고, 특히 주변의 회사나 상점에서의 중심 활동을 하는 여성을 쉽게 많이 볼 수 있다.
2. 의복 문화 : 오랜 기간 베트남인의 생활에 영향을 끼친 외국의 문화와 전통문화가 잘 어우러져 지금의 베트남 문화가 형성되었다. 일상생활 중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전통 의상과 음식 문화를 간략히 소개한다.
아오자이 : 전통 민속 의상인 아오자이는 윗도리(아오)가 긴(자이) 옷이라는 뜻이다. 18세기 중국의 청나라로부터 전래한 치파오를 베트남의 기후와 체형에 맞게 개량한 것이 지금의 아오자이 기원이라 한다.
그 후 프랑스 식민시대에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고 얇은 천으로 현대적인 감각으로 디자인하였다고 한다. 젊은 여성은 흰색이나 밝은색, 나이가 든 여성은 검은색이나 어두운 색깔을 즐겨 입는다고 한다. 베트남 여성의 날씬한 체형과 어울리는 전통 문화의 하나라 할 수 있다.
3. 음식 문화 : 베트남의 비옥한 토지와 동남부 해안에서 산출되는 풍부한 식재료로 다양한 음식 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중국, 인도, 프랑스 등의 동서양 문화가 결합한 독특한 음식문화로 발전되었다. 쌀과 국수, 바게트가 기본으로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등의 육류와 수산물 등의 원재료로 약 500여 요리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음식의 특징은 기름기가 많지 않으면서 너무 맵지도 않고, 담백한 맛이 있어 우리나라 사람의 기호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북부 지방은 중국의 영향으로 프라이팬에 간장을 사용하는 볶는 요리가 많지만 남부 지방은 풍부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며 스프 요리 역시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주요 요리는 포(쌀국수), 껌(밥), 반미(베트남 바게트 샌드위치), 고이구온(월남쌈), 반쎄오(베트남 부침개), 짜조(스프링 롤) 등이 있다. 그리고 향신료를 간략히 소개하면, 느억맘(베트남 멸치액젓이나 각종 생선 액젓) 과 하늘고추(청양고추보다 매움) 같은 다양한 향초와 채소 등을 맛볼 수 있다.
6. 베트남에서 무얼 사 올까 :
다낭 : 공항 옆 페바 초콜릿. 롯데마트의 하오하오라면(핑크와 보라색이 제일 맛있다고 함. 180원-300원), 포보라면(500원), 건망고. G7커피(블랙-15개 1000원, 믹스커피- 17개 2,300원 정도) 칠리소스(300-500원), 노니차, 과자류. 라이스페이퍼. 타이거 맥주(400원), 라루맥주(450원). 달리치약(2100원 정도).
한마켓 : 캐슈너트. 다람쥐똥 커피.
호이안 : 입체카드(6장-20만 동 이하), 부채(4만 5천동 이하), 마그네틱(2만 동), 코코넛 그릇(4개 14만 동), 컵 받침(6개 세트 18만 동), 올드타운에서 하와이안 셔츠(만 원 정도), 진주 목걸이(12,000원 정도) 각종 그릇(뽁뽁이 넉넉히 가져갈 것) 라탄 제품(대략 6,000원-8,000원 정도). 호이안 지갑(1달러).
< 여행의 출발 >
♠제 1일 (2018. 01. 28. 일) 대구 – 베트남 다낭공항
2018년 1월 28일(일요일) 대구공항에서 20시에 약속대로 모두 모여 수속을 밟고 면세점에 들어가 놀다가 22시 40분 발 다낭행 TW 0149편 비행기를 탔다. 도착 예정시간은 29일(월요일) 03시 30분이니 비행시간은 4시간 50분이다. 부치는 짐은 15kg까지 허용이 되고 한국 출발 세금, 공항 이용료, 출국 납부금, 국제 질병 퇴치 기금 등 네 가지 세금을 포함해 왕복 항공료가 427,200원이다. 시차가 2시간 있으니 베트남 시각으로는 2시간을 빼서 오전 1시 30분이 될 것이다. 여기서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우리 삶의 불확실성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니 ‘된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비행기는 28일 22시 40분 정시에 출발하였고 거의 5시간 걸리는 비행시간 동안 서비스로 제공되는 것은 종이컵에 담긴 물 한 잔이다. 저가항공의 설움과 허기를 달래기 위해 캔맥주를 주문했는데 1캔에 4,000원이다. 비싸고 말고를 따지기 이전에 그마저도 1인당 3캔 이상은 판매하질 않는다. 다행히 대구공항 로비에서 신교명 선생이 가져온 모과 담금주를 김병수 선생과 같이 한잔을 했으니 망정이지, 게다가 둘은 공항 밖까지 진출해 순댓국과 각 소주 1병 정도를 더 마시고 왔으니 망정이지 라고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29일 새벽 03시 30분 비행기는 정시에 도착하였으나 수하물이 나오질 않아 거의 1시간을 허비하였고 입국 수속하는 베트남 군복을 입은 젊은 애가 옆의 부하 애와 잡담을 해가면서 하는 통에 또 거의 1시간이 날아가 버렸다. 안 그래도 바글바글한 입국장이 무더워 짜증이 나는데 중국 애들이 새치기하는 것이 눈에 거슬려 도착과 동시에 귀국하고 싶을 정도로 짜증스럽다.
겨우 공항을 나오니 “청도”란 팻말을 거꾸로 들고 서 있는 젊은 가이드가 눈에 띄었다. 베트남에서도 터키처럼 반드시 외국인 단체 관광의 경우 자국민 1인을 동반해야 한다는 관광규정이 있어 우리나라 가이드는 50세의 김해 출신의 ‘윤용주’란 사람이었고 현지인 가이드는 28세 ‘밍’이란 영어를 전공한 잘 생긴 젊은이였다. 그리고 또 웬 부부가 나타나 김병수 선생과 이우탁 선생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데 아마 학부형인 듯했다.
4성급의 ‘므엉탕 다낭호텔’에 도착해 허기진 배를 채울 곳이 어디 없을까 했지만, 그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이 있을 리 만무했다. 현지 시각으로 새벽 4시쯤 방 배정을 받고 대강 씻고 나오니 윤 가이드로부터 오늘 조식을 늦어도 9시까지 하라는 메시지가 와 있다. 시간을 보니 오전 6시 8분이다. 컵라면과 마른안주로 간단하게 도착 기념주를 하고 7시경에 취침했는데 의외로 잠이 오질 않는다.
< 도착 후 가진 조촐한 주안상. 가져간 사발 라면 1개, 육포 몇 조각, 세 남자가 이 아침, 참소주 1병의 안주로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리로 된 소주잔의 호사는 포기할 수 없어 한국에서 철저히 포장해 2개를 가져갔다. 도자기 잔과 비교해 보라. 얼마나 빈부의 격차가 눈에 와 닿는가! >
♠제 2일 (2018. 01. 29. 월) 다낭→ 호이안 → 다낭
현지 시각 10시경에 식사하러 갔다. 사람들이 엄청 많았는데 4/5는 한국 사람인 듯 보였다. 가이드 말로는 하루에 한국에서 6,000명씩 들어온다고 하니 한국 사람이 다낭을 점령한 듯하다. 내일도 이곳에서 식사하느니 만큼 음식물 배치를 자세히 보아 두어 식사에 미진함이 한 점 없도록 해야 한다. 베트남 하면 쌀국수니까 일단 쌀국수 한 그릇과 계란 프라이 하나를 가져왔는데 하필이면 ‘피쉬’를 선택해 비린 맛이 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수(향채)의 빈대 맛. 이 냄새와 향을 극복해야 중국과 동남아 여행이 편해지는 것이다. 카레를 정복해야 인도와 스리랑카 쪽이 정리되듯이.
< 둘째 날 조식으로 선택한 것인데 만두가 맛이 없기는 상당히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만두가 맛이 별로다. 차라리 옥수수가 맛이 있다. >
일부러 고수 비슷한 것이 있어 가져와 먹었다. 취두부나 두리안이나 벌레 튀김도 모두 사람이 먹는 것인데 먹어보지 않은 내 미각에 익숙하지 않아 거부하는 것이니 익숙해질 때까지 훈련할 작정이다. 소고기는 잘 없고 닭과 돼지고기 요리가 많다. 디저트로 가져온 과일은 개량하지 않아서인지 당도가 우리보다 많이 떨어진다. 그래도 식후 마시는 베트남 커피는 여느 전문점 못지않게 정말 맛과 향이 있다.
아침에 이우탁 선생이 한사람 당 용돈으로 500,000동씩 준다. 베트남에서 가장 큰 화폐 단위인데 우리 돈으로 25,000원 정도이다. 이 돈으로 무얼 살 수 있을까 상당히 기대된다. 베트남에서 발행되는 은행권의 액면은 500,000동 100,000동 50,000동 20,000동 10,000동 5,000동 2,000동 1.000동 500동 200동의 10종류이고, 5,000동 2,000동 1,000동 500동 100동 권은 동전으로 발행된다.
지폐의 모델이 모두 베트남 건국의 영웅 호찌민인 관계로 시각적 구분이 쉽지 않다. 특히 20,000동과 5,000동권은 도안 및 색상이 유사하므로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500,000동 100,000동 50,000동권은 플라스틱 재질의 얇고 강인한 이른바 첨단 폴리머 지폐이다. 일반 지폐와는 달리 이는 지폐끼리 달라붙는 성질이 많으므로 돈 주기 전에 손가락으로 잘 확인하여야 한다.
< 다낭의 용다리. 다낭을 흐르는 강 이름이 “한강”이다. 한강 하류를 가로지르는 다리는 5개인데 그 중 랜드마크가 되는 것이 용다리이다. >
다리를 건너 다낭 시내의 구시가지에 있는 까오다이교(高臺敎) 사원으로 가니 비가 슬슬 시작해서 우산을 준비하고 사원 내로 들어갔다. 까오다이교는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 도교에서 모티브를 얻어 발전한 민간 종교로 베트남 중남부 지역에 백만 명 정도의 신자가 있다고 한다. 프랑스 식민 관리로 일했던 응오 민 찌에우(Ngo Minh Chieu)가 동서양 종교 서적을 탐독하고 베트남 현실에 맞는 종교를 창건하게 되는데 1919년부터 신자를 모집하기 시작했고, 1926년 공식적인 종교가 되었다.
교리는 도교와 유교적 요소가 혼합된 대승불교에서 기인했다. 따라서 최종 목적은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 이외에 타 종교에서 주장하는 호혜와 애정 등도 종교 교리를 실천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이다. 당 중심 윗부분에는 예수, 마호메트, 고타마, 공자 등이 함께 있는 초상화가 있고, 그 아래에 사람의 한쪽 눈이 그려진 천안(天眼)이 신비스러운 빛을 내 뿜는다. 미국 1달러 뒤편에 있는 그림과 거의 똑같다. 모든 종교의 교리를 다 받아들였으니 아마 가장 교리 면에서는 훌륭한 종교가 될 것 같은데 세계적 종교로는 발전하지 못했으니 우리로 보면 최제우가 창건한 동학(東學)과 시대적으로나 민족적 색채로나 교리적 측면에서나 유사점이 있다고 하겠다.
< 까오다이교 사원 중앙에 모든 것을 다 본다는 천안(天眼)이 자리 잡고 있다. 눈 위에 무슨 글자가 있고 그 위에 예수, 마호메트, 고타마(싯다르타 붓다), 공자 등의 성인들이 사이좋게 함께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한 액자가 붙어 있다. 현실에서의 종교도 이러하면 얼마나 좋을까? 남과 싸우라고 하는 종교는 어디에도 없는데 왜 인간은 종교로 말미암아 싸움이 끊이지 않을까? >
< 까오다이교 사원 안에 화려하게 핀 부겐베리아, 일명 종이꽃. >
< 우리는 엉뚱하게도 성당의 뒤편으로 들어가 정말 예쁘다는 앞부분은 보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
본격적으로 비가 시작되어 우산을 쓰고 다낭대성당으로 이동했다. 다낭 대성당은 규모는 작지만, 성당 건물로는 특이하게 분홍색이 칠해진 본당이 돋보이는데 교회 첨탑에 프랑스의 상징인 닭 모양의 풍향계가 있어 닭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인구의 9%가 천주교 신자라는데 프랑스 신부들이 좋은 일을 많이 해서 베트남 공산당에서도 천주교는 크게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현재의 베트남어 이전에는 한자를 사용했는데 “Ngoài ra tiếng Việt còn có nguyên âm đôi.”와 같은 글자를 만든 사람이 프랑스의 신부라 한다. 위의 베트남어의 뜻은 “그 밖에 또한 베트남어에는 이중모음이 있다.”란 의미이다. 그러나 개신교의 경우 독선적이며 배타적 성격으로 사회 전반의 융합을 깬다는 점에서 철저히 막고 있다고 한다.
다음의 갈 곳은 대리석 산이란 의미의 마블 마운틴(지옥문 동굴)관람인데 비가 와 미끄러우니 앞으로 갈 천당에는 가지 말고 가지 못할 지옥만 구경하고 오라고 한다. 대리석 동굴에 여러 가지 조각을 새겼는데 그 솜씨가 그리 정교하지 못하여 큰 감동을 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알록달록한 조명으로 말미암아 어떤 조각상은 흉물스럽기까지 하다. 지옥이라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어둡지만 부드러운 조명과 일정한 스토리를 가지고 관람하도록 배치하는 것이 관광객에게 유기적인 느낌을 줄 것인데 조각들을 여기저기 흩어 놓아 전체적으로 산만한 느낌이다. 게다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베트남어만 적어 두어 조각품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왕전에 모셔진 시왕들. 불교에서는 사후에 육신을 벗어나서 자신의 전생업보(前生業報)에 대해 심판받는다고 보고 있다. 100일 되는 날, 소상과 대상을 당할 때마다 그 십대왕에게 차례로 선악업(善惡業)의 심판을 받는다. 이는 불교의 독특한 주장이라기보다는 도교 등에서 강한 영향을 입은 것으로 시왕사상은 민간신앙으로서 전수되어 왔다. 각 사원에 명부전(冥府殿)과 시왕전(十王殿) 등이 거의 필수적으로 건립된 것이 그 증거라 하겠다. >
대리석 산 구경을 마치고 한식 및 현지식을 겸한 간단 뷔페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별다른 음식은 없고 한식의 경우 비빔밥에 조갯국과 튀긴 쌀국수와 채소, 돼지고기 볶음 등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중에 베트남 소주라고 하는 ‘넵머이’를 12,500원에 주문해 마셨다. 나중에 보니 식당에 따라 어떤 식당은 10,000원, 어떤 곳은 7,000원 등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맛은 누룽지 맛이라 여선생들도 맛을 보았는데 별 거부감 없이 마셨다. 500mL 용량에 도수가 30ᅌ의 소주라고 하지만 사실 보드카이다. 롯데 마트에 700ml 짜리가 있어 샀는데 나중에 보니 700mL는 40ᅌ였다. 용량에 따라 도수가 달라지는 건 처음 보는 경우라 이해가 안 되었다.
< ‘넵모이’라고 읽었는데 우리나라에 수입된 이름이 ‘넵머이’라고 한다. >
다음 코스로 가기 전 가이드가 여러 가지 옵션을 제시하기 시작했는데 아오자이 패션쇼와 저녁식사 대신 다금바리 회정식, 그리고 바구니 배 시승이었다. 비키니 패션쇼라고 해도 베트남 애들 외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지경인데 – 민족별 여성의 외모에 관심이 많은 내가 그래도 괜찮게 생겼다고 생각한 베트남 아가씨는 이번 여행에 불행히도 한 명밖에 없다. – 아오자이 패션쇼라니 사정없이 통과. 그리고 무슨 다금바리를 이야기하는데 제주도에서도 가짜 다금바리를 파는 판국에 베트남까지 와서 속을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비용이 우리가 지급하는 저녁식사 외에 1인당 5만 원 정도 추가되니 그야말로 엄청난 바가지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이 젊은이들과 같이 가면서 어떤 사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모양에 빠지니 가만두고 보았다. 결국, 1인당 40달러의 추가 경비를 내고 바구니 배만 타기로 했다. 모든 것은 말하지 않아도 순리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으니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지혜라 하겠다.
< 베트남 평균 월급이 500만 동이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25만 원이다. 배 하나에 두 사람이 타니 8만 원, 세 번 왕복하면 한 사람 봉급이니 팁까지 계산하면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산 호구들은 워낙 단순하여 계산할 줄 모르니 자기들이 얼마나 바가지를 쓰고 바가지 배를 타는지 모른다. 결국, 호구는 호구를 불러 바구니 배는 사진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
베트남의 모든 물가는 1달러부터인지 몽키 바나나도, 망고도, 밀짚모자도 일단 1달러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면 2달러라고 한다. 여선생들은 꽃장식의 밀짚모자를 2달러 정도로 산다. 작년 중국 칭다오 야시장에서 비슷한 모자를 5,000원 정도 한 거로 기억하는데 그곳보다 더 싸다. 버스를 타고 투본강 나루터에 가니 토끼, 원숭이, 개, 물고기 등 검은 흙을 빚어 만든 토기를 자기 띠에 맞게 고르라고 해 선물로 준다. 꼬리 부분에 구멍이 있어 부니까 오카리나처럼 소리가 난다. 유람선을 타고 신나게 달리니 우리가 바가지 쓴 것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가이드가 깎은 망고를 선물로 준다. 모두 고마워하며 먹는데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을 순진한 우리 선생님들은 모르는 것 같다. 가이드는 이런 우리가 얼마나 흐뭇할까? 마치 내가 닭들을 보는 것처럼.
< 투본 강은 상당히 폭이 넓다. 그리고 물이 탁하여 그야말로 탁류이니 우리의 한강처럼 맑은 강물이 흐르는 것은 보기 힘들다고 한다. >
배가 호이안(會安)의 구시가지 나루터에 도착하니 이곳에서는 200여 년 전 흑단으로 지어져 수차례 홍수의 범람에도 썩지 않고 보존된 중국 광둥 성의 어부였던 진기(進記)라는 상인의 집이 있다. 그는 실크와 계피, 차, 목재와 한약재를 팔아 이처럼 부를 축적해 흑단 나무로 집을 지어 그 집이 후대에 문화재가 되도록 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볼 때 엄청난 사치의 결과가 시간이 흘러 관광지가 되고 드디어는 보존해야 할 문화로 남게 되었다.
< 호화로운 집기들. 자개와 도자기보다 흑단이 더 값어치가 있게 보인다. >
좁은 골목을 거쳐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에 도착하니 중국인들이야 원래부터 용을 좋아하거니와 온 집에 용을 조각해 두었다. 사당 후면에도 구룡 조각이 있으니 색색의 타일로 꿈틀거리는 용과 삼국지의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장면을 대형 벽화로 걸어두었다.
<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 나관중(羅貫中)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사기꾼이 아닐까? 별 볼 일 없는 촉나라의 유비, 관우, 장비를 역사적 근거도 없는 충과 의를 바탕으로, 역사적으로 기록된 위나라 조조와 사마의를 모사꾼으로 만들면서까지 대단한 중국인들로 포장해낸 재주꾼이니 기원후 200년경의 중국인의 수준이야 지금 중국 유커들의 행동을 미루어 짐작하면 야만에 가까운 무례와 무질서와 소란으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듯하다. 끔찍하게도 지금의 중국인들은 소란스러운 장비(張飛)의 DNA만 유전된 건지도 모르겠다. >
사당을 나와 우측으로 가니 일본인들이 지었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내원교(來遠橋)가 보인다. 입구 좌우에는 원숭이 상(像)이 있었는데 출구 쪽에는 개 상(像)이 조각되어 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다리를 원숭이해에 짓기 시작해 개해에 완성한 것을 기념한다고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중국인은 개 쪽에 살고 일본인은 원숭이 쪽에 살아 그야말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의 관계였음을 드러낸 것이라고도 한다. 마지막으로 일본 왕들이 개와 원숭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뜻한다는 설도 있다. 첫째의 경우, 굳이 그렇게 하는 것보다 연도를 교각에 새기는 것이 쉬울 것이고, 두 번째의 경우 그렇게 원수지간이라면 다리를 놓아 교류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현재 이 조각상을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아 과거의 사정을 유추해 보았다. 이 두 조각상 모두 앞에 꽃과 향초가 놓여있음을 보아 둘 다 신앙의 대상임을 일 수 있기에 세 번째의 설 즉, 일본 왕들이 개와 원숭이에서 태어났음을 믿고 이 둘을 신앙의 대상으로 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일본인 조상이 개와 원숭이라, 요즘 일본인들의 행동을 보면 근거 있는 이야기 같다.
< 1593년 중국인 거주지와 연결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세운 다리이다. 입구와 출구에는 각각 원숭이 상과 개 상이 있는데, 일본 왕들이 개와 원숭이에서 태어났다는 설과 원숭이해에 다리가 건설되기 시작해 개의 해에 완공되었다고 해서 이 조각상을 세워 두었다는 설이 있다. 다리 가운데에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까우 사원이 있다. >
< 원숭이와 개 상, 앞에 놓인 것으로 보아 단순한 동물 조각이 아니다. >
다리를 건너 약 2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강변 주변과 이제 막 문을 열기 시작하는 야시장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이 옮겨졌는데 온갖 사람들이 다 와서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베트남인과 서양인을 제외한 동양인의 3/4은 한국 사람이다. 개중에는 아오자이를 입고 다니는 젊은 여자들도 있는데 거의 95%의 확률로 한국인이라 보면 된다. 그녀들은 4만 원 내지 5만 원의 돈으로 아예 아오자이를 한 벌 사서 입고 다니는 것이다. 베트남의 다낭은 드디어 한국 여행객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래서 상인들도 한국말을 거의 알아듣는다. 흔히들 월남전 당시 우리나라가 미국 편에 서서 북 베트남인들과 싸운 기억으로 해서, 딱 깨고 이야기하자면 무고한 양민 학살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으로 해서 조금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아 마음 한편에 있으나 이들은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지 않을 뿐 아니라 현재가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족이 학살당했다면 어찌 그 참혹한 광경을 잊겠는가. 잊을 수 없이 아픈 기억을 덮고 살아가되 그 흔적은 남아 있는 법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일본인이 아니라 양심적 한국인이라는 증거이다.
< 저녁 무렵이 되자 노점상들이 투본 강과 바다 사이의 큰길 좌우에 자리 잡고 본격적 장사를 시작한다. 앞의 치마 입은 여자는 한국인이고 그 뒤 원색의 옷을 입은 배 나온 남자도 한국인이다. 그 뒤에 뒤돌아선 가방 멘 남자도 한국인이다. 왜냐하면, 베트남 사람들에게 이날은 엄청 추운 날이라 전부 긴소매 옷을 입고 심지어는 두꺼운 잠바를 입은 사람도 많았다. >
< 젊은 아가씨인지, 아낙인지 모르지만 제법 예쁜 베트남 여인이 하는 노천 리어카 꽂이 집에서 3명이 자리를 잡았다. 3명은 누구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참이슬 소주는 우리가 가져간 것이 아니고 진열장에 번듯하게 있어 주문한 것이다. 터키와 대만 같은 곳에서 거의 2만 원 하는 소주를 여기서는 양심적 한국인에게만 양심적으로 우리 돈으로는 4천 원에 팔고 있었다. 8만 동. 타이거 맥주가 6만 동인 걸로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대강 40만 동 정도 쓴 것 같은데 우리 돈 2만 원이다. >
< 더운 나라인지라 저녁으로 나온 음식에 튀김 종류가 많다. 그래도 길에 다니는 월남사람은 모두 날씬하다. >
롯데 마트에 가 시장을 보는데 다낭에서 좀 산다 하는 사람은 다 나왔는지 엄청 손님이 많다. 우린 타이거 맥주와 안줏거리, 나는 개인적으로 ‘넵머이’ 700mL 두 병, 선물용 라면 등을 샀다. 호텔에 투숙해 닭 안주로 간단하게 입가심 술을 한잔한 후 잠자리에 드니 어제부터의 피곤까지 합쳐 덤벼들어 언제 곯아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 중허리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