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을 적시는 샘물
― 신비주의 : 신학과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기회
루드비히 프람바흐 손성현 역
루드비히 프람바흐 목사는 뉘른베르크 교구에서 “영성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그는 신비주의와 영적인 체험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정신적인 도전이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하느님을 지성적으로 성실하게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와 신학은 여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현재다.” 신비주의자로 널리 알려진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의 말이다. 그는 이 말로서 신비주의, 명상, 신비주의적 영성실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느님을 현재로서, 실재하는 분으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내가 여기 있다” 고 말씀하시는 분 ―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을 마르틴 부버는 이렇게 표현했다―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계시는 분,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고전 12:6) 분이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가장 깊고 광대한 의미의 실재를 가리킨다. 우리가 하느님의 ‘여기 계심’과 그 실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까닭은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영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것’, ‘영적인 현존’ 속으로 들어가는 훈련이다. 프로테스탄트 신비주의자로서 유명한 찬송 “하느님이 계시니”를 작시(作詩)한 게르하르트 테르스테겐은 “현존의 순간이 너희의 거처가 되도록 하라” 고 요구했다.
‘존재하는 것’ 안으로 들어감, 현존의 순간 속에서 실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향해 나를 여는 것―신비주의와 정관을 이런 의미로 이해한다면, 지금까지 이런 경향에 대해 대체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고 있었는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십 세기 초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신비주의는 취하게 하는 잔(Taumelkelch)”이라며 경고했다. 그 후로 변증신학은 교인들에게 구원을 위해서 ‘신비주의와 말씀’ 중 택일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로부터 신비주의라는 이름으로 오해를 사고 배척당한 것은 참된 신비주의가 아니라 그것의 왜곡된 형태요 변종에 불과한 열광주의적 자기초탈이었다.
복음주의와 신비주의는 오랫동안 서로 융합될 수 없는 관계로 지내왔다. 그러나 이 둘의 결합은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는 영적인 지향으로서 점점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루돌프 오토, 에른스트 벤츠, 발터 니크, 게르하르트 베어와 같은 이들의 선구적인 노력에 이어 지금은 개신교 진영에서도, 심지어는 교회의 고위층에서도 근본적인 의미의 신비주의를 이해하려는 움직임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바이에른 지방의 주교 헤르만 폰 뢰베니히는 1998년 말 주교 보고서에서 앞으로는 “영성과 신비주의”가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비주의에 대한 이러한 놀라운 관심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교회 안팎에서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신비주의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동기는 무엇인가? 이런 현상은 “영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어떤 영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동경과 갈망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합리주의와 물질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의 한복판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영성의 필요성, 더 자세히 말하면 영적인 체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명상”이라는 말과 더불어 “영성”이라는 개념이 현재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뚜렷하게 규명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으로 암시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다시금 종교가 약속하는 것, 즉 삶의 깊은 의미, 평화, 구원 등을 생생하고 직접적으로 체험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신비주의의 핵심 내용인 “하느님을 경험하기, 하느님을 맛보기”와 맥을 같이 한다. 이제 사람들은 교리의 정당성이나 윤리적 명령과 같이 차갑기 그지 없는 학문 체계의 안내를 거부하고, 종교적 경험의 생생한 근원, 샘물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신비주의적 영성을 재발견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줄기들을 통합하여 오늘 우리 시대에 맞는 신비주의와 명상을 계발하는 것이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자세는 옳지 못하다. 특별히 다음 세 가지가 중요한 가치를 띠게 된다. 첫째, 신비주의와 명상의 광범위하고 다양한 전통과 역사를 발견해 내는 일이다. 여기서 “명상”이란 신비주의자들의 영적인 실천, 즉 고요함을 경험하는 기도, 하느님 앞에 자기 자신을 활짝 여는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 사막의 교부들로부터 시작해서, 엑크하르트, 타울러, 조이제,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개신교에서는 뵈메나 테르스테겐, 현대에 이르러서는 토마스 머튼과 에르네스또 까르데날에 이르기까지 신비주의는 늘 새로운 영적인 형태를 띠고 창조적인 발전을 이룩해 왔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도 타울러와 “독일 신학”(Theologia Deutsch)과 같은 신비주의적 경건주의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특별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의 하나됨을 가장 철저하게, 가깝게 경험하며 사셨기에(요 10:30) 기독교 신비주의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그리스도를 통한 신앙은 “그리스도-신비주의”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갈 2:20).
역사 속에서 신비주의는 언더그라운드 역할을 맡았던 적이 많았다. 그럼에도 영향력이 막강한 영적인 기류인지라 제도화한 교회는 그런 신비주의와 평온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신비주의적 영성은 종교적 체험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영적인 독특성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도 교회와 그 안에서 형성된 위계질서의 이해관계와 어울리기 어렵다는 사실은 과거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신비주의자들은 영적인 훈련의 과정에 대해 다양한 경험적 지식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런 지식들이 이 시대에 기독교 영성 이해를 위한 풍요로운 밑거름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한다.
둘째, 신비주의는 기독교에 제한된 종교 현상이 아니다. 신비주의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우리가 신비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경향이 모든 세계 종교 안에 존재한다. 유대교의 핫시디즘이나 카발라, 이슬람교에는 수피즘, 그밖에 도교, 힌두교, 불교는 근본적으로 강한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다. 세계 종교의 불가피한 만남은 이 시대의 정신적 분위기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데, 신비주의적 특성은 이 만남에 있어서 그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신비주의적 명상적 영성에는 서로 다른 점도 많이 있지만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고, 그 공통점을 통해서 다른 종교의 세계와 통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다른 이들로부터 배울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선(禪)의 영성은 기독교가 기독교 전통 속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주의적 차원을 재발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영적인 훈련의 과정에 몸가짐을 도입한 것이나, 최종적 실재를 불교에서처럼 “공”, 즉 “절대 무”로 이해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셋째, 신비주의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또 하나의 영역은 심리치료(Psychotherapie)의 영역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해낸 이래로 심리적인 역동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발전되어 왔다. 칼 구스타프 융은 “집단 무의식”이란 개념을 통해 종교적 차원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구축했다. 형상치료(Gestalttheraphie)나 사이코 드라마와 같은 “인문주의적 심리학”의 방법도 여기서는 중요하다.
특별히, “인격 전이 심리학”(Transpersonale Psychologie) 운동은 종교라는 주제와 집중적으로 씨름을 벌이고 있다. 인격 이전의 영역, 인격의 영역, 인격 전이의 영역―영성의 특별 영역―을 포괄하는 의식의 스펙트럼을 층위를 나누려는 시도가 있으며, 켄 윌버(Ken Wilber) 같은 사람은 가장 정밀한 분류를 시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 경향은 여러 종교 안에 존재하는 신비주의적 형태들도 다루고 있으며, “신비주의”라는 말에 드리워진 약간은 어두운 분위기에 밝은 빛을 비추고 있다.
오랜 전통의 기독교 신비주의, 타종교의 신비주의적 형태, 심리학·심리치료학의 인식. 이 세 가지 외에도 새로운 신비주의적 영성에 유의미한 다른 지점들이 존재한다. 철학도 여기 포함될 수 있는데, 특히 양자물리학, 우주과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인식, 그리고 예술도 신비주의와 접점을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신비주의는 어느 때나 그 시대의 예술과 밀접하게 연계하는 생명력 있는 영적 현상이다.
진정한 신비주의는 다양한 층위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것이다. 신비주의는 겉보기에 서로 융합될 수 없는 것들, 모순되는 것들을 하나로 만들기에, 단순하고 어설픈 범주화가 불가능하다.
신비주의는 매우 감성적이기도 하다. 신비주의, 특별히 여성 신비주의에서는, 에로틱하다고 느낄 정도로 격정적인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나타난다. 도로테 죌레는 “종교와 신비주의의 관계는 에로스와 성(性)의 관계”라고 말한다. 신비주의는 가슴의 언어, 황홀경의 언어, 부드러움과 느낌의 언어, 시(詩)의 언어로 말한다. 신비주의는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며, 인간을 높은 곳과 깊은 곳, “영혼의 어둔 밤”(십자가의 성 요한)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신비주의적 체험의 길을 간다는 것은 깊고 깊은 실존적 과정에 나를 내맡김을 뜻한다. 이 길은 개개인마다 다른 형태로 주어져 있는 어떤 특정한 근본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어떤 위기, 혹은 일종의 영적 죽음이라고 할만한 것을 거쳐 새롭게 기초를 세운 해방된 정체성에 이르게 되는 철저한 벗어남의 과정을 말한다. 합리성에 입각하여 주로 머리를 쓰는 것이 익숙한 신학과 교회로서는 느낌을 끌어들인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중요한 자극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사색과 지식을 배제하지 않는다. 개별적인 경우에는 감성과 지성, 어느 한 쪽에 비중이 쏠리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 둘은 결합되어 있다. 마이스터 엑크하르트나 니콜라스 쿠자누스는 빼어난 학자요 사상가였다. 동시에 이 두 사람은, 하느님 인식의 견지에서 사유의 한계점까지 사색을 이끌어간 철학적, 신학적 신비주의의 뛰어난 대변인이었다.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모든 현상들과 구별되지 않음을 통해서 구별되는 역설적인 존재다. 쿠자누스는 이런 사상을 “非-타자”(Non-aliud)론에서 발전시키니, 그에 따르면 하느님은 우리의 지적인 인식 범주, 즉 분별지(分別智)를 근원적으로 초월하시는 분이다. 칼 바르트의 말대로,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他者)다. 그러나 그분이 전적인 타자인 것은 바로 그분이 “非-타자”, 즉 타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오직 “반대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 속에서 고요히 하느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하느님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신비주의는 하느님을 단순히 인격적 상대자로 이해하는, 너무나도 신인동형론적이고 인격적인 하느님 이해에 대한 교정 역할을 부득불 맡게 된다. 하느님은 단순히 하나의 ‘너’ 이상인 분이다. 가톨릭 신학자인 위르겐 쿨만의 “하느님 당신 우리의 나”(Gott Du unser Ich)라는 표현은 하느님은 모든 관계방식을 포괄하심과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으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신비주의 영성은 인간의 내적 체험을 중시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진정한 신비주의는 개인주의적 내면성을 뛰어넘어, 더불어 사는 세상,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인간들을 위한 참여로 나아간다. 존재하는 모든 것과의 결속을 말하는 신비주의적 근본 체험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연대로 표출된다. 신비주의는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을 위한 참여를 독려한다.
한 개인의 내면만을 맴도는 신비주의는 사이비 신비주의에 불과하다. 투쟁과 정관은 동전의 양면이다. 신비주의는 생명을 적대시하고 불의가 만연한 이 세상에 대한 반항이요 이기적인 소유중심적 사유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 사회 체제에 대한 저항이자 인간과 자연의 행복한 공존을 꿈꾸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정치학이다”(클라우스 오이리히).
칼 라너는 “미래의 기독교인은 신비주의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기독교인으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이 옳다면, 아니 많은 변화가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기에, 개신교 교회와 그 신학도 이러한 도전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물론 촛불이나 켜놓고 어떤 명상적인 분위기를 예배 의식에 끌어들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의 복잡한 측면들을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다양한 자극을 받게 되고 그에 상응하는 다양한 체험지향적 영성과 신학의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교회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들을 다시금 “잃어버린 차원”(틸리히)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을 제공해달라는 것이다. 교회 공간, 특별히 도시에 있는 교회는 고요함이 깃든 명상적인 공간으로 재발견되어야 하며 열려있어야 한다. 쫓기는 듯한 강박과 뭐든 넘쳐나는 세상 한복판에 영적인 오아시스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