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회 光州를 차단하라
5월21일 오후 4시를 전후해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하면서 `光州'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중단되고 시민들은 해방공간을 갖게 된다. 반면 계엄군은 `光州 완전고립'과 `폭도 섬멸'을 위한 또 다른 준비를 하는 출발점이 된다.
항쟁후인 80년 6월 30일 특전사령부가 작성한 `光州소요사태 진압작전 전투상보'는 당시 작전 개요에 대해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2군 계획'이라고 밝힌 작전계획은 ▲1단계:학교점령, 소요군중 선무 및 해산, 국가보안목표방호▲2단계:폭도고립 및 자단을 위하여 시가지 외곽 봉쇄▲3단계:전 특전여단 병력 K-57(光州비행장)기지로 철수 집결, 기동타격대 임무 수행▲4단계:폭도 근거지 및 주요 보안목표에 대한 기습 특공작전 실시, 보병에게 인계후 철수 등으로 기록했다. 물론 이 계획은 처음부터 이렇게 나눠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여러 조건들에 따라 변경하면서 작전 최종결과 구분한 것이었겠지만 어쨌건 21일 군의 외곽철수는 5.18기간 동안의 사태전개에 한 분수령이 된다.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완전진압에 실패한 계엄군은 21일 오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곽으로 일제히 철수한다. 당시 光州에 있던 병력은 3.7.11공수 3개여단 10개대대와 20사단 병력 등 약 2만여명이었다.
신군부는 21일 오전 李熺性계엄사령관 주재로 대책회의를 갖고 게엄군 외곽철수를 확정짓는다. 이어 그날 오후 3시 35분 李계엄사령관 전교사에 `사태의 전국확산 방지, 선무활동으로 시민.불순분자 세력을 분리, 지휘체계의 일원화로 사기진작, 교도소는 끝까지 몸으로 방어, 光州 외부 도로망 차단, 光州시의 지역 자제 촉구 선무활동 전개'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한다. 곧이어 4시부로 그 동안 형식적으로 31사단장에 배속돼 있던 3개공수여단의 지휘권을 전교사령관에 넘기는 한편 전교사령관을 尹興禎중장에서 蘇俊烈소장으로 전격 교체한다.
이같은 과정을 두고 `과잉진압으로 시민 흥분 유도-외곽차단으로 외부전파 차단-무정부 상대 야기후 명분 조성-재진입후 완전 진압'이라는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그때부터 光州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시키는 봉쇄작전에 돌입한다. 光州는 고립무원이 되고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계엄군은 참상을 밖으로 알리기 위해 외곽으로 나오거나 외지에서 멋모르고 들어오던 시민과 양민들에게 무참한 총알세례를 퍼붓는다.
공수부대 3.7.11여단과 20사단.31사단 병력은 光州로 통하는 주요 7개도로를 봉쇄한다. 부대별 배치를 보자.
▲31사단=오치(1개중대)▲3공수여단=교도소(順天방향) 1개여단은 潭陽.輿水.順天방면으로 통하는 문화동▲7.11공수여단=所台동(和順)방향 1개여단은 池元동 주남마을 부근 ▲20사단=극락교(光州-松汀간 도로) 白雲동(光州-木浦간 도로) 톨게이트(光州-全州) 통합병원 입구 화정동 등엔 각각 1개 대대씩, 7공수의 경우 朝鮮大를 거쳐 소태동에 도착한 뒤 너릿재 터널 봉쇄임무를 수행한다. 3공수도 全南大서 光州교도소로 철수, 31사단과 임무교대를 한다. 그날 오전 10시에 光州에 도착해 있던 20사단은 61연대가 光州-木浦간 도로를, 62연대는 통합병원과 송정리 비행장에 배치됐으며 光州-全州간 톨게이트와 비아 송신소를 장악한다.
이렇게 해서 이날 밤 늦게 또는 22일 새벽부터 외곽봉쇄임무에 들어간 계엄군은 그야말로 철저한 봉쇄로 시경계를 넘나드는 무고한 양민학살전을 벌인다.
당시 21일의 무차별 집단발포를 경험한 시민들은 이같은 학살을 외부에 알리거나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지방으로 지방으로 내닫는다. 또 21일 밤부터 22일 새벽 사이에는 全南일원으로 진출했던 무장 시위대가 羅州.和順 등에서 다시 光州로 진입하기 위해 이들 도로를 자주 통행하게 된다. 그런데 계엄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이들과의 충돌은 뻔한 일. 계엄군은 눈에 보이는 대로 무차별 사격으로 통행을 저지한다. 시위대 뿐만아니라 일반차량과 인근 거주 주민들에게 조차 총탄을 퍼부어 무고한 양민들이 살해된다. 그날(21일) 오후 계엄사령관이 발표한 자위권보유천명 지시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계엄군이 21일 밤부터 자행한 양민학살의 참상을 보자.
黃남열씨의 증언이다. "22일 새벽 5시께 光州에 있던 아들을 데리고 木浦로 가던 길이었다. 송암도 공단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주둔해 있던 계엄군들이 검문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빨리 木浦로 가야 되는 상황을 얘기하여 그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남평다리 못미친 곳에 있는 야산에 매목중이던 계엄군이 '정지'라고 외치자 즉시 차를 멈췄다. 차가 멈추자마자 30여명의 계엄군이 4-5분에 걸쳐 차를 향해 집중사격을 했다. 그때 운전사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우리 가족 3명은 온몸에 부상을 당해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풀빛刊.光州 5월민중항쟁사료전집) 잘 알려지지 않은 양민학살사건도 있다.
22일 새벽 4시40분께 光州시 北구 光州교도소 뒤편 호남고속도로상. 전날 밤 11시께 慶南 진주를 출발해 홍도관광길에 나선 경남5가 3077 관광버스에 타고 있던 朴경구씨(당시 52.경남 양산군 기장면 죽성리 234)와 같은 마을에 사는 沈석수씨(당시 66)등 죽성리 주민 30여명은 청천병력과 같은 일을 당한다.
총상 후유증으로 82년 숨진 沈씨 부인 李옥분씨(71)의 증언. 들뜬 기분으로 고속도로를 지나 木浦로 가기 위해 시내로 접어든 일행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문화동 주유소 부근쯤 왔더니 전복된 버스가 불타고 있고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예감이 이상했던지 버스기사는 차를 돌려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했고 교도소 뒤편 미루나무가 많은 부근에 이르자 느닷없이 콩볶는 듯한 총알세례가 쏟아졌다. 급히 차를 멈췄지만 사격은 계속됐다. 朴씨가 총에 가슴을 맞아 쓰러졌다. 사격이 계속되자 안되겠다 싶어 하얀색 의자 커버를 뜯어 창밖으로 흔들었더니 사격이 멈추고 M16을 든 대위 1명과 중사 1명.사병 1명이 다가왔다. 군인들은 사정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빨리 외곽으로 나가라고 했고 놀란 일행은 일단 潭陽으로 와 응급치료를 했으나 총상이 심해 南原도립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진주로 옮겼다.
이들 외에도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에 의해 무참히 숨져간 사례는 많다. 특히 교도소앞 金成洙씨 일가 총격사건, 3공수여단의 潭陽 창평거주 임은택.고규석씨 총격사건, 20사단 화정동 주택가, 양민학살사건, 통합병원앞 총격사건,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 등 참상은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