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을 건드린 아이가 오히려 천당에 간다.
한 사람은 북을 치고 한 사람은 목탁을 치니 맑고 탁한 청탁(淸濁)의 소리는 다르나 무지(無知)의 어리석은 것은 같도다. 화상의 판단이 어찌 시비선악(是非善惡)에 있으리오. 눈보라 치는 천 길 절벽위에 해와 달이 또한 밝도다. <경허선사(鏡虛禪師)> |
경허 스님이 가야산 해인사에 계실 때 당시에 24세의 젊은 수행자인
용성(龍城) (속명 백상규/白相奎, 법명 진경/震鏡) 스님이
조실 방으로 가서 경허 스님께 말씀을 올렸다.
조실스님! 시자의 버릇 좀 고쳐 주십시오,
당시 조실 스님의 시봉을 하던 시자는 나이 어린 장난꾸러기였다.
이 아이가 일주문 옆에 있는 벌집을 자꾸 건드리며
대중이 벌에 쏘이게 하는데 재미를 붙여 자꾸 벌집을 건들렸다.
용성 스님은 몇 차례나 장난꾸러기 시자를 불러
주의를 주어 보았으나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조실 스님을 찾아가
그 시자의 못 된 버릇을 고치도록 크게 호통을 쳐 주십사 하고 간청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시자가 벌 건드리는데 재미를 붙여 대중들이 모두 벌에 쏘였습니다.
그 아이를 그냥 두었다가는 우리 절이 벌집이 되겠습니다.
조실 스님 그 아이를 불러 올까요? 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경허 스님은 한참 말이 없으시다가
“벌집을 건드린 아이는 천당에 갈 것이요, 말리는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니라.”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로써 젊은 용성 스님의 간청은 완전히 묵살되어 버렸다.
조실 스님이 버릇없고 불량스런 시자를 편을 들어 몹시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며
조실 스님에게 법을 배우는 것 까지도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다.
경허 스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가르침을 받은 용성 스님은 그 뒤로는
여기에 반발심을 품었음인지
경허 선사의 무애행(無碍行) 역행(逆行)을 싫어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허 스님의 법하(法下)를 떠나 제방(諸方)으로 전전하다가
당시에 그 신심을 잡은 것은 경허 스님의 제자인 수월(水月)스님의 착한
보살고행(菩薩苦行)에 감화를 받은 바 있어
수월 스님의 수행정진을 본 받아 크게 신심(信心)을 발하여
천수주력(千手呪力)을 10만번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후에 용성 스님은 서울 봉익동(鳳翼洞)에 절을 건립하고 별립교단(別立敎團)을 창설하였다.
부처님을 대각(大覺)으로 부르고 절 간판을 대각교단(大覺敎團)으로 붙이기도 하였다.
대각교단에서 신도들을 교화하고 승려를 지도하였는데 불(佛)자를 쓰는 대신
각(覺)자를 썼으며 경전 번역 사업에 힘을 쏟아 불경 보급에 전력하셨으니
그 출중한 실력은 일찍이 경허 선사로 부터 단련되고 훈습 받은 성과로 여겨진다.
백용성 스님은 3.1독립만세 운동의 주축으로 일제에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성자이고
경허의 제자 가운데 만공(滿空)의 불사(佛事), 용성(龍城)의 역경(譯經), 혜월(慧月)의 개간(開墾)일컬어
당대의 3대 걸출한 승(傑僧)이라고 한다.
[출처] 경허법어(鏡虛法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