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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1절-18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은 공심판과 사심판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자는 공심판이 면제되지만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한 자는 공심판과 사심판을 다 받게 됩니다. 이 심판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란 인간은 절대적 자유가 보장이 되어 있어서 믿을 자유가 있고 안 믿을 자유가 있습니다. 또 롯과 같이 그렇게 육본주의로 그런 신앙노선으로 생활할 수 있는 그런 자유도 있고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들이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똑같은 인간에게 하후하박이 없이 만물들을 동원시키시고 모든 사건을 동원시켜서 대 악에서 소 악으로, 소 악에서 무 악으로, 무 악에서 소 선으로, 소 선에서 대 선으로 이렇게 나가라고 권고를 하고 계십니다. 만물을 통해서 만사를 통해서 그렇게 권고는 하시지만 인간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능력적으로 꺾어가지고 강권이나 강제성은 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믿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사람들에게 전도자들을 가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공통적으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고 하나님을 알게 했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만물을 통해서 만사를 통해서 권고를 하고 있지만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은 자기의 자유성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는 사람이냐, 안 믿는 사람이냐’ 하는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예수 믿게 하는 그 목적 그것만 단순히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믿느냐’ 하는 이것이 중요한 겁니다.
아브라함의 신앙노선과 롯의 신앙노선을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교훈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나님의 축복을 받느냐 안 받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는 아브라함처럼 그런 신앙으로 믿느냐, 아니면 롯과 같은 그런 신앙을 가지고 믿느냐’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 말이요.
오늘날 우리는 아브라함의 신앙사상과 정신을 가지고 아브라함처럼 믿어갈 수도 있고, 롯의 신앙을 가지고 롯의 신앙사상으로 롯과 같이 그렇게 갈 수도 있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66권의 성경을 통해서 또 종들을 통해서 성령님이 오셔서 계속적 권고를 하고 계시는데 롯의 신앙으로 가지 말고 아브라함의 신앙으로 가라고 성령님은 계속적으로 권고하시고 많은 종들을 통해서도 그렇게 권고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새사람이 주격이 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때가 있고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때도 있습니다. 옛사람이 주격이 될 때는 롯과 같은 그런 신앙생활이 되고 새사람이 주격이 될 때는 아브라함과 같은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좋게 보이고 또 그것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보이고 있는 게 되고 또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아브라함처럼 신앙생활을 하려고 노력들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편 롯과 같은 신앙생활의 결과를 미리 당겨서 보고, 또 아브라함의 신앙생활 한 것의 그 결과를 우리는 미리 당겨서 보고 그 속에 들어있었던 그런 신앙사상들을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롯의 결과를 볼 때에 롯은 그의 일생 동안을 심판 때까지 유황불이 떨어진 것, 롯으로 볼 때는 그건 자기의 말세지. 앞으로 또 유황불이 떨어진다고 하니까 롯의 신앙사상과 정신을 가지고 사는 그 자들은 유황불 떨어질 그 때 그 심판 때까지.
우리는 기존적인 지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예수 믿기 전의 가졌던 그 지식. 그 지식을 교회 안으로 자기가 갖고 들어오고, 예수 믿으면서도 예수 믿기 전의 그 지식 그대로 가지고 있고. 그래서 그 지식가지고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잘하면 축복을 받아서 부요해지고 행복해지고 영광스러워지고, 그러나 신앙생활을 잘 못하면 복을 받지 못해서 가난해지고 고생스럽다’ 이렇게 많은 기독자들이 혹은 많은 인간들이 그렇게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그런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잘되면 하나님의 축보이요 잘못되면 하나님의 저주라 그렇게 본다 그 말이요.
이런 개념과 사고방식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고 이방인들뿐만 아니고 이방인들 중에 이종교도 그런 지식을 가지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혹 기독교인들 중에 ‘예수 믿기 전에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못된 버릇을 고치고 나니까 불과 몇 년이 안 돼서 큰 부자가 됐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무에게 물어봐라.’ ‘저 사람은 예수 믿고 축복을 받았다네.’ 그런데 사실은 예수 믿지 않아도 이를테면 술 담배 노름하는 거 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일인데 문제는 ‘예수 믿고 축복을 받았다. 부자가 됐다’ 그렇게 갖다 붙인단 말이요.
예수 안 믿어도 술 담배 끊는 사람 많지요? 노름 하지 않고 자기 중심 바로 가지고. 그렇게 해서 그 정신 버리고 자기 집안살림 잘 살면 부자 될 수 있다 그 말이요. 그런데 ‘예수 믿고 부자 됐다’ 그렇게 갖다 붙인단 말이요.
어떤 사람은 딴 사람보다 조금 더 부지런한데 ‘그래서 예수 믿어 축복을 받았다.’ 딴 사람보다 좀 부지런한데 그 부지런 한 것은 빼버리고. 일반 안 믿는 사람도 부지런한 사람 잘 사는 사람 많이 있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지를 않고 부지런한데다 생각을 두지 않고 ‘예수 믿고 축복을 받았다’ 그렇게 갖다 붙인단 말이요. 그러니까 ‘술 담배 끊고 자기중심을 잡고 생활을 잘하니 부자가 됐다’ 그렇게 안 붙이고 부자 된 걸 예수 믿고 부자가 됐다는 거기다 붙인단 말이요. 자꾸. 우리는 ‘부자 됐다. 가난하게 됐다’ 하는 그 이면에는 ‘부자 됐다. 가난하게 됐다’ 하는 그 물질성을 보지 말고 사람이 바로 되는 그 면을 먼저 보는 거지요.
많은 인간들은 자꾸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물질축복 받는다. 부자 된다’ 그리로 자꾸 붙인단 말이요. 거의가.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니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시키면서 롯은 신앙생활 잘못한 사람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유황불 벼락 맞았으니까. 유황불에 집안이 홀딱 다 망했잖아요?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럴 정도로의 신앙생활을 잘못한 사람이지만 죽을 때까지 복 받고 잘 살 수도 있더라 그 말이요.
어떤 부흥강사는 ‘예수를 잘 믿으면 축복 받아 부자가 되어 잘 산다’ 그런 부흥강사 많이 만나보았을 겁니다. 부흥강사는 그렇게 말을 하는데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 잘못 믿어도 부자가 되어 잘 산다’ 하는 그런 말을 한단 말이요. 그러니까 성경은 부흥강사의 말을 반대를 하고 있지요. 그렇지요?
부흥강사는 성경에 안 맞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안 그렇다고 그러는데 부흥강사 자기는 그렇다고 그런단 말이요. 듣는 청중들은 교인들은 성경에 안 맞는 말인지 맞는 말인지도 잘 모르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거니’ 그렇게 어리석게 믿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예수 믿는 이치는 알려고 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고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병 낫는다. 세상에서 뭐든지 잘 된다’ 하는 식으로 말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나보다’ 하고 그런 생각들을 교인들이 그러고, 그런 생각들은 교인만 그러나? 안 믿는 사람도 그러고.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 그러는데 교회 안 나올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성경이야 뭐라고 말했던 간에 생각할 것 없고 세상사람들 좋아하는 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축복 받고 부자 되고 잘 사는 이것을 초월해야 되는 겁니다. 오직 구원만 잡고 살다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사람 바로 만들어지는 그걸 갖다가 구원이라 그런단 말이요. 그렇게 살다보면 부자도 될 수 있고 박사도 될 수 있고, 그러면 그것만 되느냐? 가난뱅이도 될 수도 있고 풀무불 속에도 들어가 수 있고 사자굴 속에도 들어갈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옵니다.
‘거지가 된다. 부자가 된다’ 이것 상관 말고 성경은 말하기를 ‘너는 구원만 붙잡고 살아라’ 그렇게 말을 한단 말이요. 하나님은. 그러니까 우리는 결과적이면서 영원적인 심판이 있음을 알고 살면 됩니다. 궁극적 세계 결과적 세계 죽음 저 너머에서 열매를 따먹으려고 생각을 해야지 임시성 임시적인 이 세상에서 예수 믿는 자기의 열매를 따먹으려고 하니까 자꾸 하나님 말씀하고는 안 맞는다 그 말이요. 물론 때로는 하나님께서 임시적인 이 세상에서도 맞보기로 조금 주는 때도 있습니다. 이 세상이 전부 다가 아니라 그 말이요. 예수 믿는 게.
롯은 육본주의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도 그 지방의 큰 부자로 유황불이 떨어질 때까지 잘 살았습니다. 소돔성의 유황불 심판이 끝난 후에는 수치스러움만 남았습니다. 그 수치스러움은 영원히 천추의 한이 되는 수치스러움입니다. 하지만 유황불이 떨어지기 전에는 좋았지요. 뭐 어제 잠깐 보니까 영자의 전성시대가 나오데. 그런 것처럼 소돔 고모라성에 롯의 전성시대가 열렸던 모양이지? 그러니까 심판이 죽음이 오기 전에는 좋았더라 그 말이요.
롯이 자기에게 오는 심판이 나쁘고 죽음이 나쁠 테지. 자기의 그 전성시대가 이 세상에 잠깐 사는 동안에는 그게 좋았더라 그 말이요. 그런데 심판이 왔어요. 심판이 있다 그 말이요. 우리 인간에게는. 심판이 온 연후에는 아브라함처럼 못 산 것이,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더라 그 말이요. 누가? 롯이 그랬단 말이요. 롯이 심판 받은 연후에 ‘아, 내가 왜 삼촌 아브라함처럼 신앙생활을 안 했던고.’ 그때사 후회한단 말이요.
그러면 롯 자기보고 누가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처럼 살지 말라고 그랬습니까? 자기 자유로 그렇기 살았지. 오늘날 교회들이 롯처럼 살라고 하는 그런 교훈이 90% 이상이 됩니다. 참 희한하게 돌아가지요? 아브라함을 좋아하면서 아브라함을 따르면서 롯의 정신 사상을 갖고 있어. 그러니까 ‘아브라함처럼 믿으면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된다’ 그런 마음을. 이게 무슨 마음이요? 그게 아브라함 마음이요, 롯의 마음이요? 확실합니까? 그게 롯이란 말이요. 그 롯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 말이요. 롯처럼 살으라고.
옛날 4천 년 전에 성경을 통해서 롯은 우리에게 말을 해주고 있지요. 오늘날도 롯처럼 살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롯을 들어서 롯의 사건을 들고 또 롯이 말하기를 그 사건 속에서 말하기를 ‘기독자야, 너희들은 나처럼 살지 말아라’ 그렇게 말을 하고 있단 말이요. 4천 년 전에 벌써 한 그 말이 계속 나오면서 그 롯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다 그 말이요. 고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교훈과 롯의 교훈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교파가 문제가 아니고 교단이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지향성의 교훈이 무엇이냐 그 말이요.
롯의 정신 사상을 싫어하면서도 롯의 뒤를 따르고 있어. 그러니까 유황불 벼락 맞은 그것만 자구 생각을 하고 싫어하는 거지. 그런데 속에 역시 롯의 사상이 들어 있어가지고 물질을 잡았지요?
아브라함과 롯은 출생지가 똑같고 출발시간이 똑같고 코스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길이 어디서 달라지느냐 하면 13장에서 달라지더라 그 말이지요.
우리가 창세기 12장을 가만히 보면 자체 구원. 하나님의 성품을 진하게 입는 거. 민감하게 입고 민첩하게 입고 민활하게 입고 영적인 면에 예민해지는 것. 13장에서는 소유구원. 거기에서 지상저축 소유주의로 살지 말고 천국저축 소유주의로 살아라. 14장에서는 점령구원이 나옵니다. 천국저축법이 나오고 천국사용법이 나오고 천국점령법이 나오고. 여기에서 점령구원에서 연관구원이 이루어지는데 복음의 도를 모르는 자에게 깨우쳐서 자기와 관련을 맺고 나가면 수입이 대단히 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감화를 받아가지고 구원을 잘 이루고 살면 그 사람의 수입이 나에게 오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은 온 세상을 다니면서 많은 연관구원을 이룬 한 사람입니다. 투자도 중요하지만 연관구원 한 이치를 깨닫는 대로 그대로 써먹으면 수입이 큽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최후의 결론과 롯의 최후 결론이 어떻게 됐느냐’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을 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이제 15장에서는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리다가 한 번 떨어졌지요? 큰 거는 다 쪼갰는데 아주 작은 새 한 마리, 그것까지 쪼개야 하는데 그거 쪼개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까짓 것’ 했단 말이지. 이까짓 것.
여러분들, 그런 거 많이 있을 수 있지요? 예를 든다면 김장 때 큰 무는 두 조각 세 조각 자르지만 작은 거는 ‘이까짓 거’ 하고 그냥 집어넣지요? 그런 것처럼 ‘이까짓 것.’ 그게 이제 시은자란 말이요. 시은자적 정신. 그래서 15년 동안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졌습니다. 그 후에 회개를 해가지고 철저한 수은자로 살았습니다. ‘나에게 있는 소유를 죽기 전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다 투자하고 갈까?’ 이래서 그게 이제 특수신앙인데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 드릴까?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까?’
보편 신앙이 또 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언제 이루어 주시렵니까? 언제 이행하시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랬지요? ‘너에게 씨를 주겠다’ 그러니까 ‘그거 언제 주시렵니까’ 그 말이지요. 그런데 이제 16장에서 보면 약속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 그 말이지요. 그 약속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약속을 이 아브라함이 지긋하게 견디지 못하고 약속을 받기 위해서 인본주의를 써가지고 이스마엘을 받았다 그 말이요. 큰 마누라 내버려두고 작은 마누라 얻어가지고 아들을 낳았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받는 방편을 변칙을 썼다 그 말이요.
본처의 아들이 출생 때 아브라함은 백 세였고 이삭이 날 때에 이스마엘은 16세 정도 됐나 봅니다. 그 이스마엘을 낳을 때는 이 아브라함이 86세 정도 되었고 이삭을 낳을 때는 백 세 정도 된 거지요. 아마 그 나라의 풍습에는 서자가 먼저 태어나도 본처의 아들이 늦게 나아도 본처의 아들이 장자의 권리를 가졌던 모양이요. 이 이스마엘이 ‘이 집 재산은 다 나의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나았다 그 말이요.
갈대아 우르에서는 눈이 감겼었지만 벧엘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아브라함은 신령한 이치를 깨달아 나갑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느니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낀다. 자식들도 부모의 사랑을 입느니만큼 부모의 사랑을 진하게 느껴요. 그 면에 대한 것을 진하게 입으면 진하게 느낀단 말이요. 두 번째는 구원을 강하게 입은 것만큼 내발적 기쁨에 충만한 자가 된다. 자기 속에서 기쁨이 넘친단 말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나가면 인간 자기 속에서 기쁨이 넘친다 그 말이요. 세 번째는 실력을 갖춘 것만큼 그 나라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네 번째는 천국에도 격차가 있다는 것. 이것을 깨닫고 나니까 깨닫지 못한 자가 가련하다 그 말이요.
신령계에 많은 사람들이 물론 들어갑니다만 많은 사람이 들어간다고 해서 내가 누릴 몫이 감소가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지요. 세상에서는 다섯 사람보다도 열 사람 먹는 것이 각자 자기에게 돌아오는 유익이 적지요. 이 세상은 유한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국의 법은 주면 줄수록 이거는 사랑이 많아집니다. 이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자기 혼자만 누리고 살고 싶은 그런 생각이 안 나고 ‘누구랑 같이 누려볼까’ 하는 그런 생각이 난다 그 말이요.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그 신령세계를 보는 것같이 믿었단 말이요. 믿음의 선진들도. 그 히브리서에 나오지요? 그래서 숙부로서 또는 주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자기 조카에게 또는 자식에게 권장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신령계를 깨달으니까. 자기만 갖고 싶은 생각이 안 나고 남에게 주고 싶다 그 말이요.
선악과라고 하는 이 선악과는 어디든지 보면 선악과가 있는데 롯도 아마 선악과가 아주 좋아보였던 모양이지요? 세상 그 명예 영광 영웅심. 선악과가 뭐냐? 선은 선인데 악이다. 생명과는 생명의 결정체요, 선악과를 먹고 나면 나타나는 결과성이 나오는 겁니다.
엘리에셀은 좋은 신앙의 유산을 탐을 냈고 이스마엘 서자는 물질유산 경제유산을 탐을 냈습니다. 어느 유산이 더 값어치가 있지요? 신앙유산 경제유산 물질유산. 불신세상 사람들은 경제유산에 탐을 내지요. 성경에 보면 신앙유산을 탐을 내는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아브라함은 그 좋은 세계를 누구에게 소개시키고 주고 싶을까? 약속의 자녀 약속의 아들 이삭을 신앙의 아들로 철저히 길러나갑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서자를 내어 쫓으라고 그랬지요. 하갈과 그의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했지요.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하갈을 광야에 내쫓아 버렸습니다.
21장에 보면 돌잔치 후에도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언제 죽어도 나는 죽을 것이니 죽기 전에 옮겨놓자. 죽음이 오기 전에 신앙유산을 이삭에게 넘겨주자’ 이런 마음을 먹고 있는데 22장에는 이삭의 나이는 잘 모르겠지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를 드리라고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왜 했을까? ‘너의 아들 이삭을 나에게 바쳐라.’ 그냥 뭐요? ‘내 자식 데리고 가시오.’ 사람에게 건네주듯이 그게 아니고 ‘바치라’ 하는 거기에는 ‘아들을 번제로 잡아 죽이라’ 그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 사랑할까, 아들을 더 사랑할까’ 하는 그걸 몰라서 그거 시험하려고 그랬나? 하나님이 몰라서 말이요. 하나님이 가만 생각하니까 ‘저 아브라함이 아들을 더 사랑할까, 하나님인 나를 더 사랑할까? 저 아브라함 속에 무슨 마음이 들어있을까? 어느 쪽을 더 사랑할까?’ 그걸 몰라서 아브라함을 시험한 겁니까? 성경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아.
하나님은 인간을 테스트 안 해도 다 알고 계시지요. 속 중심을 다 아시는 분. 그렇지 않아요? 우리 마음을 다 아시는데 뭐 우리를 꼭 시험해야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지요.
아브라함 소원이 무엇이었을까? 모르긴 해도 아마 번제로 드릴 때에 이삭의 나이가 30으로부터 33세 정도 보여지는데 사람 하나를 태우려면 장정이 나무를 짊어져도 그 나무를 다 못 짊어지지요. 그렇지 않아요? 사람 하나 태우려면. 그러니까 나무를 많이 짊어져야 되는 거고.
이삭은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30세 이상으로 보고, 요셉의 나이가 또 30세, 다윗의 공생애가 또 30세 정도 되는 모양이지요? 취임식이 30세 정도 되는 모양인데. 그러니까 출생 시부터 약 29년간 아브라함과 불목상태로 되어 있었어요. ‘이렇게 하나님과 불목상태로 돼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이걸 풀고 가야 되겠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생각을 했단 말이요. 하나님이 안 나타나니까 아브라함이 몸이 되게 타는 거지요.
여러분들은 혹 경험자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교역자들 세계에 그런 것도 더러 있는데 어떤 깨닫는 그게 안 오면 몸이 막 달아요. 특히 주일날 설교는 해야 되겠는데 깨달음은 오지 않고 그럴 때 사람 아주 미친다고. 앞으로 주일학교 교사들도 그런 경험 더러 할 거야.
혹 여러분들도 개인적인 신앙생활에서도 자기에게 깨달음이라든지 어떤 영적인 면에 은혜 받는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것을 경험한 사람은 그런 맛을 자꾸 보려고 그래요. 물론 이제 진짜 은혜가 있는 것이지만 또 잘못된 감정에 이끌리는 그런 것도 있어요. 그런 건 주의해야 되겠지요.
과거에는 15년 만에 하나님이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을 이제 만나볼 수 없으니까 이스마엘을 내쫓은 죄인가? 하나님이 나타나주지를 않는단 말이요.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보고 ‘아브라함 당신도 별 것 없구나. 노년에 아들 하나 낳더니 신앙생활을 못한다’ 하고 평을 한다 그 말이요.
아브라함은 생각을 합니다. ‘현재 내가 자기고 있는 모든 것, 먹고 마시는 것, 내가 죽음이 오기 전에 이삭은 굶어죽지 않을 것이고 그러니까 이삭에게 넘겨줄 필요가 없다.’ 경제유산 말이요. ‘죽음이 오기 전에 죽음 저 편에 옮기자. 하나님과 불목상태로 돼 있는데 하나님과 화목을 하자.’ 화목을 하고, 두 번째는 ‘내 수권범위 내에 있는 전부를 천국으로 다 옮겨놓자.’ 그래서 세 번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바톤을 이삭에게 넘겨주는 그런 허락을 받자.’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취임식 위임식을 하고 가자.’ 그런 것이 아브라함에게 소원이라면 그 마음의 준비는 다 됐단 말이요. 행동만 하면 되는 거고.
위임식을 하려면 그만큼 잘 길러야 되겠지요? 인정을 받으리만큼 말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날 때에 이삭을 받으실 수 있는 데까지 그 차원을 올려놓는다 그 말이요.
‘네 독자 이삭을 바치라.’ 참 이 때에 만일에 이삭을 육덩이로 길러놓으면 어떻게 될 뻔 했겠느냐? 모르긴 해도 이삭이 아버지에게 한 말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한 것을 보면 진리로 잘 만들어져 있고 사랑으로 잘 만들어져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아요.
시험해보자. 아브라함의 신앙실력을 시험. 이삭을 시험하는 그런 시험보다도 세상사람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신앙을 아브라함만큼 알지를 못합니다. 또 두 번째는 이삭을 이삭만큼 모르기 때문에 그 이삭을 또 아브라함에게 보여주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30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단 말이요. 만약의 경우 종종 나타났더라면 화목할 마음이 그만큼 불탈 정도로 나타나지를 않았을 것같고 종종 나타났다면 모르긴 해도 이삭의 신앙이 그만큼 자라지를 못했을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이 두 실력이 소색이 없으리만큼 신앙의 관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작전으로 하나님께서 나타나지 않으신 것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최대로 인조사랑 아닌 신조사랑으로 아들 이삭을 교훈했는데 남들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에게 빠져가지고 신앙이 빠졌다’ 그렇게 말하니 하나님은 속이 상하지요. 아브라함은 그 자식에게 신앙교육을 철두철미하게 시켜나갈 때 안 믿는 사람은 자식에게 빠졌다고 그런단 말이요. 그러니까 신앙이 없다 그 말이지. 그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니까 속이 상한다 그 말이지.
사랑하는 종들이 무시를 당하면 하나님은 속이 상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성도들이 무시를 당하면 하나님이 속이 상해요. 자식이 어디 가서 남에게 무시를 당하면 부모가 속이 상하지요. 여러분들이 우리교회 교인으로서 성경을 몰라가지고 여호와의 증인이나 딴 교인들보다도 성경을 모르고 그렇게 신앙대결이나 성경 다툼이 있을 때 말못하고 가만히 있으면 목사님이 속이 상하는 거지. 그런 것처럼.
‘신앙생활 잘하는지 못하는지 시험을 한 번 쳐보자.’ 그 시험을 치기까지 죽음은 점점 다가오지요? 하나님은 안 나타나지요? 저축은 해야 되겠는데 심부름꾼은 안 오지요? 이삭을 취임식을 해야 되겠는데 불러주지를 않지요? 이 아브라함이 얼마나 속이 탔을까?
이제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를 때에 그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하나님께서 부를 때에 그 때 그 기회를 놓칠 새라. 화목의 조건을 거는데 라면 하나 삶아놓고 화목할까요? 소 한 마리 잡아놓고 화목을 할까요? 무엇을 하나님 앞에 놓고 화목을 해야 이 아브라함의 마음이 시원하겠느냐?
화목의 조건은 최고의 값어치 있는 것으로. 최고의 값어치 있는 것이 뭘까요? 아브라함의 경우에 최고의 값어치 있는 거. 아들 이삭. ‘네 아들 이삭을 나에게 바쳐라’ 했을 때에 아브라함이 통쾌하고 기뻐했을까요? 기뻐했지요. 인간의 세계에서 이게 이해될 일입니까? 도무지 이해되는 게 아니요. 그렇지요?
소유보다 값어치 있는 것은 목숨. 아들 이삭 속에 전 재산이 다 들어있고 자기 목숨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목숨이 또 들어있고 시간이 들어있고 재산이 들어있고 목숨도 들어있고. 누구 속에? 여러분들, 자식 좋아하는 그 부모, 부모가 죽을지언정 자식을 죽게 하지 않는 그 부모의 심정. 그 부모의 전부 아니요? 그 자식을 기르느라고 시간 목숨 정력 물질 다 바친 거 아니요? 그게 똘똘 뭉쳐놓은 전부지.
그러니까 한꺼번에 하나로 저축할 수 있는 시간이 온 거지요. 천국의 큰 부요, 신앙가로서의 합격, 세 번째 계대를 잇는 것. 그 위임식 방편을 똘똘 뭉쳐가지고 모리아 산에서 하는 겁니다. 이게 기가 막힌 위임식이요. ‘아들을 어떻게 죽이나? 아들을 어떻게 바치나?’ 아브라함 속에는 그런 생각이 나는 게 아니요. 밤새껏 장작을 패어가지고 화장을 하려니까, 아들 잡아가지고 하나님 앞에 화장해서 태워 죽여 올리려니까 밤새껏 장작을 패야 될 거고. 어쨌든 아침 일찍이 떠났어. 그 마음 변치 않고 일찍 떠났어. 서둘러서 기뻐서 하는 그게 들어있지요.
거기에서 아내보고는 말을 안 했지요. 사라보고. 아기엄마보고는 말을 안 했단 말이요. 그러니까 양심의 정리가 되면 그 신앙에 방해되는 것은 의논을 하지를 말아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 그런 소리도 간혹 들을 거요. 방송에도 그런 소리 한 번씩 나오더라고. 가만 보니까 여자들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바치는데 남편이 돈 벌어오거든. 그러니까 거기서 떼어가지고 십일조 바치려니까 부부간에 생각을 하니까 양심에 찔리거든. 그러니까 ‘남편에게 말을 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그 문제 가지고 얘기하더라고요. 남편이 뭐라고 그러겠어요? 하나님 앞에 십일조 내는 거 뭐라고 그러겠어? ‘당신 돈 벌어서 내라’고 그래? 내지 말라 그 말이지. 하여튼 그런 말 주로 잘 나와요. 신앙 면에 방해되는 거 불신자하고 의논할 거 없습니다. 자기 식구들하고도.
삼일 길을 갔습니다. 하겠다고 해놓고 시간이 가면 사람의 마음은 해이해지기 쉽지요? 그런데 새벽 같이 떠나서 삼일 동안이나 되는 그 때도 하루 이틀 지나면서 상당히 마음이 갈등이 오고 변해질 것 같아요.
그런데 부자간에 가는 그 모습을 하나님의 시선은 바라보고 있는 거지요. 그래, 모리아 산으로 가는 이 아브라함과 이삭을 쳐다보면서 하나님께서 천국천사들보고 자랑을 한 것 같아. 하나님의 전 마음의 총 집중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있는 겁니다. 또 산에 중간쯤 가가지고 종들과 나귀를 내버려두고 갔지요. ‘여기서 기다려라.’ 데리고 올라가면 방해를 받을 테니까. 하나님께서는 성의 없는 제사는 안 받지요.
나뭇단을 지고 이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 아들이 말한 거 있지요? 그것도 시험의 말입니다. ‘나무와 불은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참 아버지로서 아들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 마음이 아마 덜컥 할 것 같아요. 이제 그런 얘기는 안 나왔지만 평소에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신앙적인 교훈의 사상을 생각하면서 아마 대화를 지어본다면 ‘나무와 불은 여기 있는데 제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물었을 때에 아브라함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의 그 신앙관을 물어봄직도 한 겁니다. 아들에게 묻기를 ‘하나님을 제일 가치 있게 제일 잘 섬기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을 제일 가치 있게 여기고 제일 값어치 있게 섬기는 게 뭘까요? 사람의 제일 큰 영광 되는 게 뭐지요? 신앙문답에도 있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것. 그게 뭘까요? ‘네 몸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라’ 그거 아니요? 자기 전폭을 드리는 거 아니요? 자기 전폭이 전 일생이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는 거지요. 드림이 된다는 거. 제물이 되는 거.
모르긴 해도 롯의 두 딸에게 두 딸의 신앙관을 묻는다면 뭐라고 두 딸이 대답을 할까? 롯의 두 딸의 신앙관. 딸이니까 이제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에게 돈 많은 남자. 그것도 빌딩을 많이 갖고 있는 남자. 가난뱅이 달라고 그러겠어? 부자이고 학식 많고 돈 많고. 모르긴 해도 부모들 거의가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는 그런 신앙관이 아니야. 아버지가 그럽니다. ‘삼일 전에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너를 받으시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너의 생각은 어떠냐’ 하고 아들에게 물으니까 아들 왈 ‘나 같은 죄인, 덜 되고 미숙한 이 못난 몸을 이 추한 몸을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십니까?’ 그 참 그 말에 하나님이 감동이 된단 말이요.
이래서 아들에게 허락을 받아가지고, 허락 아닌 순종적이지요? 이삭을 이제 바친다. ‘어떻게 죽이느냐’ 하는 그런 것보다도 이렇게 되기까지의 이삭 아들 독자 외아들이 아버지의 그 말에 고분고분 순종이 되면서 그렇게 기념물이 될 수 있는 그런 신앙으로 길러지는 만들어지는 그게 중요하더라 그 말이요. ‘칼을 들고 때려죽였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는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 그렇게 고분고분 순종되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로 바쳐지기까지의 그런 신앙으로 자라나온 그 담대 그게 그렇게 중요한다.
이삭의 이력, 그 아브라함이 30년 동안을 쌓아 나온 거, 이삭에게 쌓아 나온 거. 그러니까 이삭의 이력이 되고 이삭의 사상이 되고 이삭의 행동이 되고 이삭의 믿음이 되고. 이게 중요하다 그 말이요.
그 죽이려고 하는 그 순간에 죽이지 말라는 소리가 들릴 때에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 칼을 들고 아들 목을 따려고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죽이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그 아들을 드림에 있어서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났을까요? 기뻐서 쾌히. 그런데 죽이지 말라고 그랬을 때에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땠을까? 이게 인간의 세계에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신앙의 세계에서 이해가 되는 말이지.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이 간이 털컥 내려앉는 것같단 말이요. 뭐가 잘못돼서 안 받으시느냔 말이지. ‘바친다고 하는 것은 이리 저리 생각해봐도 완전히 결정되었는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렇게 들어간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죽이지 말라고 한 것을 죽이면 살인이란 말이요. 그러니 죽일 수가 없어. 수풀에 있는 양을 잡아서 드렸지요. 드려놓고서도 아브라함이 한이 차지를 않는단 말이요. 걱정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맹세를 한단 말이요. ‘너의 아들 이삭을 네가 바쳤지? 너의 재산 다 바쳤지?’ 다 바쳤다. 그런데 바쳤는데 그대로 있어.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땅에서도 부자고 하늘나라에서도 부자다. 바쳤는데 부자가 돼 있어. 희한하지요? 그러나 롯은 땅에서도 가난하고 하늘나라에서도 가난뱅이. 남은 것은 수치만 남고. 어째 이런 결과가 나오지요? 신앙의 사상과 정신이 아니면 그 이해 불가능이야. 하나님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의 택한 자녀들 백성들에게 절대로 손해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생각을 해봐요. 우리가 일반적인 세상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자기 고향의 논밭 집을 다 파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 대학교 보내는 그 시골사람들 봤습니까? 그 뭐지요? 그게? 그 뭐요? 무엇이 들어서 그러는 겁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어때요? 보면 물론 잘못된 교회도 많고 잘못된 목사도 많고 교인들도 많아요. 순 아주 속에 물욕심만 들어가지고. 우리는 사람 하나 바로 만들어놓는 여기,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반듯하게 만들어 내놓는 여기에 신경들을 쓰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라’ 그러면 자기 잡아 죽이는 것같아가지고 펄쩍 펄쩍 뛰지요? ‘교회 가자’ 그러면 펄쩍 펄쩍 뛰지요?
딴 것이 다 날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 하나 바로 만들어지는 이게 천하의 모든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인데. 이보다 더 귀중한 일이 있습니까? 없는 거지요. 그런데 불행스럽게도 오늘날 교회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오늘날 기독자들이 예수를 믿는 것을 어떻게 하고 어떤 식으로 믿고 있는 건지? 안타깝기만 한 겁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신앙의 사상과 그렇게 산 결과, 그리고 롯이 그렇게 인본주의 육본주의로 살아간 그 결과를 미리 당겨놓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그 신앙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다 그 말이지. 아브라함이나 여러분이나 똑같습니다. 아브라함도 인간이고 여러분들도 인간인데 그렇게 살지 말라는 그게 있습니까? 어떻게 살던 우리에게는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