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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면
(롬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 1: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롬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은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진노가 담겨 있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진노를 영어로 wrath는 ‘격노, 분노, 복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흔히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하는 가장 큰 단어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속성에는 사랑과 더불어 노여워하는 진노의 감정이 공존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은 혼합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規制)하셨습니다. (레 19:19)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 민족 중에서 여인을 아내로 맞아 들였어도 그것을 끊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라 10:11에서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그 분의 속성 중 대표적인 사랑과 상반되는 진노가 함께 갖고 계시다면 이것은 자기모순(矛盾)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기반으로 거룩이 나오고 진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를 기초로 하여 이뤄지는 것으로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노도 사랑을 바탕으로 나온 것입니다.
칼 브라이트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진노 속에서 구체화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보고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 보존되기 위해서는 죄악이 틈타오면 안됩니다. 인류가 하나님께 타락한 이 후로 죄를 이겨낼 수도 없었고 죄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습니다. 죄를 이길 수 있고 죄를 멸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면서 죄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또 다시 들어와 죄악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한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의 모습이 아닙니다.
언제가 Internet YouTuve를 보다가 감동적인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검은 구렁이 한 마리가 갓 때어난 새끼 토끼에게 달려 들어 두 마리를 물어뜯어 죽이고 남은 한 마리를 물려고 하자 마침 이 광경을 본 어미 토끼가 구렁이와 사투(死鬪)를 벌이는 내용입니다. 구렁이가 도망가면 끝까지 좇아가 구렁이를 물고 짓이기며 죽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시는 죄에 종노릇하지 않기 위하여 악을 진멸하고 악에 대하여 무섭게 진노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한 면입니다. 그 자녀들을 어떻게 살려 내셨지요? 그 분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그 피의 대가를 치루시고 사망에서 건져 내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마그마라고 하는 암석이 녹아 있는 고온의 물질이 있습니다. 이 마그마가 지표면에 흐르면 그것을 용암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굳으면서 자기장을 띤 광물을 만들어내고 이 자기장은 지구의 방향을 잡아 주고 태양풍을 막아 주어 생명을 살리는 구실을 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원리가 하나님께 작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광로 같이 뜨겁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그 사랑으로 살림을 받고 방향을 정하는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치 않고 죄악을 쌓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미칠 때는 용암이 무서운 흐름으로 모든 것이 초개(草芥)와 같이 불살라지는 진노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곳곳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무섭게 피어오르는 화산폭발, 지진, 쓰나미, 폭풍, 홍수 등입니다. 이것을 피할 재간이 없습니다. 이러한 재앙 앞에 인간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력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는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시점에 걷잡을 수 없는 형태로 임하게 됩니다. (살전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세상 참 살기 좋은 세상이 왔어요. 모든 것이 잘 갖춰져서 평화스러워요. 바로 그 때 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진노의 때라는 것입니다. 마치도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식은땀이 흐르는 사건이 떠오릅니다. 1987년 12월 29일 새벽 3시 쯤 만삭인 제 아내가 살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화장실을 가야 되나” 하고 말이죠. 그러다가 5시가 넘어서 진통이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급히 이웃에 살고 있었던 여자 집사님께 부탁을 하여 4살 된 큰딸과 함께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 천호동으로 차를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봉고 자동차는 18년 된 차라 몹시 낡아 범퍼는 덜렁대는 것을 철사 줄로 묶어 놓았던 차였습니다. 가다가 고장이 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제 아내가 뒤에서 아이가 나올 것 같다고 아우성입니다. 이거 보통 큰일 아닙니다. 아이가 나오겠다는데 이걸 어떻게 막는다는 말입니까? 지금도 그 때 생각하면 정신이 어찔합니다. 참는다고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조금만 참아요!”를 연발하면서 산부인과 병원에 간신히 도착하여 들어가자마자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의 모습임을 우리에게 경고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 진노의 순간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고 늦출 수는 더군다나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이 진노의 때에 그냥 죽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악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사랑에 대한 부산물로 나온 것이라면 악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파생되어 나온 부산물(副産物)입니다. 마치도 빛은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그림자는 만드시지 않았음도 빛과 더불어 그림자도 함께 생겨 난 것처럼 말이죠. 사람에게 들어 온 악은 죄의 형태로 영혼에 달라붙어 그 사람의 본질을 만들어 버립니다. 내 영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변화시킨 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운 것은 영원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죄에 대한 영향력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면 영원토록 죄를 다스려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것입니다.
(눅 23: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진노의 날이 얼마나 무섭고 떨렸으면 거기서 벗어나기를 원하여 산들이 자기에게 무너져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패션 오브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통하여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 참혹함을 제 두 눈으로 보기가 너무나 어려웠던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역사상 인간이 치루는 형벌 중에 가장 무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장장 6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전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남의 죄를 지고 십자가의 형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면 죄 아래서 태어나 죄의 모습을 지니고 살았던 죄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는 불을 보듯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중에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라고 여겼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면 어떤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까요?
본문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라고 못 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알레데이아’(ajlhvqeia)입니다. 이것의 본래 의미는 “가려져 있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 분의 뜻을 전하시는데 신비롭고 감춰져 있는 것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요즘 이단들의 잘못은 자기들만이 비밀한 것을 가지고 있어 그곳에 신비한 진리를 만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가려져 있지 않고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 법을 어기고 사람들이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불의입니다. 내게 향하신 진리는 이 땅에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이제는 하늘의 생명되신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나라를 향하여 사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는 나를 통하여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런 진리에 순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님을 따라 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즉 희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마땅한 것인데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것 이것이 불의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 다른 사람의 구원받기 위해 자기를 복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여기서 내 몸을 쳐 할 때의 ‘치다’라는 단어는 ‘휘포피아조’(uJpwpiavzw)는 ‘눈을 멍들게 하다’는 뜻으로 ‘거칠게 다루다’의 뜻이 있습니다. 당시의 권투 선수는 권투할 때 소가죽 띠로 만든 갑을 끼면 더 잘 때릴 수 있었는데 바울은 이처럼 자기를 혹독하게 다뤄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를 원했습니다. 단 한가지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통하여 네가 구원받기 이해서는 나를 그렇게 다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 향한 진리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을 “모든 경건하지 않음”이라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ungodliness’ 이 단어는 ‘하나님을 몰아내다’의 명사형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지배하지 않습니다. 제 생각이 옳습니다. 자기가 정의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으니 모르는 것 아니냐고 항변하지 마십시오!
19~20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자기를 만물 가운데 드러내놓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에 분명히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핑계치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분명히 나타나는데도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허망하여지고”는 쓸모없는 것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쓸모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린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라는 책에서 별을 세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하늘의 별을 세고 세어 자기의 소유를 삼고 있음을 뿌듯해 하는 사람입니다. 어린왕자가 묻습니다. "별들이 누구 거지?" 라고 하자 "모르겠는걸.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겠지. 그러니까 내 것이지. 내가 제일 먼저 그 생각을 했으니까." 이런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움켜 잡으려고 합니다.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의 수만큼 행복도 수없이 많은데 그것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삽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이 뜬 구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그 나라가 이뤄지기까지 세상의 행복은 그럴듯하게 포장된 허상(虛想)에 불과합니다. 참 행복은 낮은 것 보잘 것 없는 것에 숨겨져 있지 밤하늘의 별처럼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어린왕자의 이야기가 미련함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술꾼이 살고 있는 별에 이르러 빈병 한 무더기와 술이 가득 차 있는 병 한 무더기를 앞에 놓고 말없이 앉아 있는 술꾼을 보고 그가 “뭘 하고 있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술을 마시지." 침울한 표정으로 술꾼이 대꾸했습니다. "왜 술을 마셔요?" 어린 왕자가 그에게 물었더니 "잊기 위해서지." "무엇을 잊기 위해서예요?" 그랬더니 "부끄럽다는 걸 잊기 위해서지." "뭐가 부끄럽다는 거지요?"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 자신이 미련함을 압니다. 그러나 거기서 벗어날 길도 모르고 벗어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받으면 덜 억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를 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부여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안에서부터 올라옵니다. 그러나 의미를 모르면 허망해지고 마음이 어두워져 세상의 허상의 별빛을 쫓아 그렇게 헤매다가 진리를 놓치고 사는 것처럼 비극인 것이 없습니다.
저의 큰 딸이 시댁에서 나온 지 벌써 7개월 째 접어듭니다. 이 아이가 밥상머리에 앉아 묻는 동일한 질문은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얼까요?”그럽니다. 그러면 저는 똑같이 답변합니다. “이미 네게 나타났는데 네가 순종하지 않아 보이지 않는 것 뿐이지”라고 말입니다. 이 아이는 자기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행복을 주워 담기를 원하는데 말이죠. 이것이 허상을 쫓는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모르고 그렇게 살다가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실상(實相)되신 예수님을 쫓아 살아야 되는데 허상을 쫓아 평생을 허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이것처럼 억울한 것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잘 산 것처럼 스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살 때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왜 지옥에 와야 됩니까?”라고 항변하며 억울해 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지옥의 모습을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하였을까요. 우리게 주어진 시간과 환경은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세심한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불의에 빠져 인생을 마감하는 것처럼 처참한 것은 없습니다. 지옥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지옥과 같은 고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경험하는 지옥은 축복이지만 불의로 진리를 가로막은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형벌의 지옥입니다. 내 주위에 예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는 그런 사람에 대한 의무감은 무엇일까요?
이 진노에서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구원을 이루게 해 주실 분은 예수님 한 분외에는 어떤 누구도 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없습니다. 내 영혼 속에 찾아 온 죄악은 무엇으로 씻을 수 없습니다. (렘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 말씀은 반어법(反語法)적인 표현입니다. 흑인이 피부를 표범이 그 가죽의 무늬를 바꿀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들어 온 죄는 세상의 무엇으로도 씻어낼 수 없습니다. 오직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만 가능합니다. 그것도 죽어서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죄를 대신하셨기에 우리는 육체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시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했습니다. 그 분께 어떻게 피합니까? 주님이 나의 피할 바위라는 것은 관념적인 표현인데 이를 실제화 시킬 수 있는 방안이 나와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구원의 뿔되시고 산성 되시는 주님께 피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그 해답은 앞 절인 시편 18:1에 있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말씀을 성취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받아들여 그에 대한 응답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냐 하면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히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하였습니다. ‘징계하다’는 헬라어로 ‘파이듀오’(paideuvw)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아이라는 ‘파이스’(paiv")와 상태를 나타내는‘유오’(euw)가 합쳐져 ‘어린아이와 함께 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채찍질 하다’는 ‘마스타고오’(mastigovw)는 원래의 의미는 ‘껍질을 벗기다’ 그러면 이 말씀을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어린아이같이 다뤄 여러 못된 습관들을 벗겨내어 그의 아들로 삼으신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다루시는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좁혀 가자면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찔림을 받습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나와 상관없이 보면 아무런 변화를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 들여 적용하면 그 말씀이 내게 살아있는 말씀되어 나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제 오후에 돌잔치에 참석했습니다. 부모가 어린아이가 어떻게 자라기를 바랄까 하는 염원을 담아 말씀을 아이가 뽑도록 하였는데 마침 (창 12:2)의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누가 되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기를 격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결과만을 바라보고 그 과정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되려면 그가 겪었던 과정도 내가 겪어야 될 것을 결심하여야합니다. (갈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적용입니다. 성경의 인물을 나를 대입시켜 그의 허물과 잘못을 내 안에서 찾아내고 그 인물의 결단을 나의 결단으로 받아들여 끊임없이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훈련을 통하여 나의 인격도 삶도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중의 중요한 요소가 바로 회개입니다. 열심히 회개하면 주님의 사랑이 내게 강물같이 들어오고 그 사랑 안에서 나의 인격과 나의 삶이 변화됩니다. 이런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주님께 피하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 없는 신앙은 된 것 같지만 그 자리에서 맴돌 게 됩니다.
중국의 워치만니 계통의 지방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형제들을 대학 때부터 사귀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서 10:13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오 주 예수여!”외치면 주님의 영이 그 안에 들어와 그 분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 분들은 모이면 주문 외듯 “오! 주 예수여!”를 외칩니다. 그 분들은 성경지식도 많고 믿음도 좋은 것처럼 자기의 신앙고백도 유창하게 하는데 주님의 모습이 그 안에 드러나 보이지 않고 뭔지 모를 위선자같이 느껴졌습니다. 주 예수를 외치면 주님이 내 안에 찾아 오셔서 나는 간곳없고 예수님이 마치도 장갑에 손을 끼우는 것처럼 나를 점령하여 주님의 신성이 찾아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 위험한 믿음입니다. 신비주의에 빠지기 쉬운 믿음입니다.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이 회개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에게 임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인에게 임하는데 어떻게 회개 없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실 수 있단 말입니까?
마태복음 3:7에서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했습니다. 회개 없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입니다. 성경지식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말씀에 순종하는 회개가 빠졌습니다. 회개 없는 신앙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 없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를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재앙의 소식을 접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내게 미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얼음판에서 나는 미끄러지지 않는다고 자신하고 가다가 미끄러지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끄러질 수 있다고 하여 조심하면 설령 미끄러져 넘어진다 하더라도 피해를 훨씬 줄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런 재앙이 닥칠지라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나는 재앙의 날을 대비해서 어떤 안전장치를 만들어 놓고 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