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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세상 2019-115) 『내가 왕바리새인입니다: 가식으로 뒤덮인 자아의 폭로』 (두란노서원, 2016)에서 아마존에서 22년을 사역한 허운석 선교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만사형통을 기대하고 있다면 교회,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모두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도 아담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탐심, 반역성이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교회에서 몰아낸 만사형통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탐심이요,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사형통이란 왕처럼 옷을 입고, 고급 차를 몰고 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람들에게 널리 존경을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마존 인디오 부족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받아먹어 중태에 빠지기도 하고, 온 가족이 독충에 물려 진물과 피고름으로 얼룩졌지만, 허운석 선교사는 복음 전도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2006년 폐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자신에게 독을 먹인 인디오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야 한다며 다시 아마존 정글로 돌아갔습니다. 아마존 인디오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17개 동 규모의 신학교를 세웠으며, 100여 명의 졸업생과 50여 명의 목사를 배출한 허운석 선교사는 2010년 말기 암 진단을 받고, 2013년 9월 12일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매 순간 왕이 되고자 하는,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까? 아담은 쓸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고쳐서 쓸 만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아담의 세포를 이어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죽지 못하고, 매 순간 신이 되려고 시도합니다. 누군가한테 싫은 소리를 듣거나 무시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당장에 노여워서 몸을 부르르 떨지 않습니까?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며 반격하고 때로 치명적인 독을 내뿜습니다. 그것이 ‘내가 신인데, 네가 감히 내 자존심을 건드려?’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핍박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제 상식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 와서 서로 서로 상처를 주고 받고, 서로를 핍박하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모두 말씀처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자존심의 대(大) 마왕이 되어서, 아니, 허운석 선교사님의 책 제목처럼, ‘왕(王) 바리새인’이 되어 노여움과 분노의 독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허운석 선교사는 아마존의 맹독성 살무사로, 물리면 독에 의해 뇌출혈, 신장 이상 증세, 쇼크 등이 일어날 수 있는 자라라까’에 비유합니다. 들어볼까요?
“아마존에는 ‘자라라까’라는 아주 무서운 독뱀이 있습니다. 이 뱀한테 물리면 몇 초 안에 실명하고, 재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자라라까는 사람이 조금만 자기한테 해코지하면 반드시 복수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언젠가 아마존 인디오들에게 설교하면서 자라라까를 건드리면 어떻게 반응하냐고 물었더니 ‘쉬쉬식’ 소리를 내면서 혀를 날름거린다고 흉내를 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자라라까가 어디에 있지요?’ 그러자 인디오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속에 있지요!’ 돌아보면 우리는 자라라까 보다 더 무서운 존재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교회 다니면 복 받고 만사형통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며칠씩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하고 새벽재단 쌓으면 이러한 열심과 공로로, 내가 기도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줄 압니다. 이렇게 한국교회 성도들은 기본부터 잘못되어 있습니다.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믿는 신앙의 가르침 덕분에 한국교회에는 질투와 다툼, 허영과 가식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허운석 선교사님의 글은 이 시대 한국교회에 깔려 있는 왜곡된 신앙의 가치관을 뿌리까지 뒤집어엎습니다. 진리를 가장한 자기애로, “나를 사랑하라.”라고 가르치는 한국 교회에 과연 진리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선교사님의 말을 좀 더 들어볼까요?
“옛날 학교 앞 문방구에 ‘두더지 잡기’라는 오락기가 있었습니다. 동전을 넣으면 여러 개의 구멍에서 두더지가 불쑥불쑥 올라옵니다. 그러면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그 두더지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겨 팹니다. 구멍 속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말입니다. 그 두더지 모습이 꼭 나 같습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어 끊임없이 고개를 내미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너는 들어가라. 너는 죽으라’고 하시면서 몽둥이로 나를 징계하십니다.”
한국교회는, 아니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몽둥이를 맞아야 합니다. 교만과 자만이 끊임없이 머리를 들고튀어 나옵니다. 목회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성도들에게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 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교사님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젊은 사도 요한에게도 이 같은 요구를 하셨습니다.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라는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수천 명을 하나님의 품에 돌아오게 하는 일도,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사도 요한은 그보다 크고 위대한 일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이왕이면 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도 알아주고 사람들도 인정해 주는 그런 일이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기대와 다르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발 네가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통해 나를 나타낼 테니 너는 조금 물러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럴 수 있습니까? 보통은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하고 고개를 쳐들지 않습니까? 나 역시 그랬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목을 길게 빼고는 ‘하나님, 저는 좀 더 인정받는 자리에 서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인정하시고 사람들도 알아주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하며 완고하게 버텼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징계하시고 막대기로 연단하셨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막대기와 몽둥이로 연단하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허운석 선교사님의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두들겨 맞는 것이 내게는 즐거움입니다. ‘오늘도 내가 잘못하다가, 두더지 방망이로 한 대 맞았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내게는 없습니다. 그렇게 두들겨 패서 나를 언약 백성으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짜라는 것, 내가 주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두더지처럼 내가 적나라하게 벌거벗겨져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나의 모난 것이 깎이고 다듬어져야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사실 허운석 선교사님의 말대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때마다 일마다 기도하고, 틈만 나면 기도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선교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에 기도하러 간다고 생각합니까? 사실 하나님을 훼방하고 대적하러 나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기도하려고 손만 모았다 하면 ‘하나님,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합니다. 우리가 달라는 이것, 저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 수 있는데도, 입만 열었다 하면 내 마음에 드는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달라고 조릅니다. 그런데 기도하다 보니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 들립니다. 내가 얼마나 죄인 중에 괴수인지를 들켜 버립니다. 그렇게 기도는 내 죄를 들키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것 없이 은혜만 받았다며 ‘할렐루야’ 합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을 대적해 싸우다가 환도뼈가 부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항복하고 평안을 얻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야곱처럼 밤을 새워 조르다 환도뼈를 다치고 나서야 ‘주님, 잘못했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 하며 항복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마침내 평안을 얻습니다. 야곱의 상한 환도뼈란 무엇입니까? 바로 환난이요, 질고요, 시련입니다. 시련을 당해 고통을 겪어 봐야 나의 죄성이 눈에 보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함이 드러납니다. 그제야 돌이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고 회개하며, ‘나를 돌보시고 지키시는 은혜가 너무 감사합니다.’하고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떼쓰고 조르면 불쌍히 여겨서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렇게 기도하는 우리를 두들겨 패서 회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허운석 선교사가 하나님 품으로 갈 때, 아마존에서의 장례식을 촬영하기 위해 한국의 CGN TV 직원들이 아마존까지 가서 각계 인사들과 주민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허운석 선교사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죽음과 투쟁하면서도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사명을 완수한 그리스도의 제자.” “자신의 것을 다 쏟아서 모든 것을 나눠 준 진정한 그리스도인.” “평생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의 삶을 살아 낸 십자가의 일꾼.”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을 깨운, 기도의 본을 보인 기도의 용사.”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회개에 이르게 한 하나님의 사람.” “썽가브리에우 다 까쇼에이라의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이의 가슴에 사랑의 화신으로 온 선교사.”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며 살았던 한 사람.” “진실로 인디오 형제들을 깊이 사랑했던, 두려우면서도 자애로웠던 영적인 어머니.” “기독교를 반대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옥토로 변하게 하고 아마존 선교의 문을 열은 하나님의 전사.” “끝까지 인디오 형제들을 사랑하여 자신의 유골을 이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긴, 죽음으로 더 큰 사랑을 보여 준 사랑의 증인!”
허운석 선교사의 삶이 이토록 ‘복음의 증인’, ‘십자가의 일꾼’, ‘사랑의 화신’, ‘진정한 기도의 용사’임을 잘 보여주는 회상입니다. 마지막으로 허운석 선교사의 말을 들어볼까요?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는 사람치고 안 망하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했고 신앙적으로도 존경을 받는 어떤 분이 최근 어려움을 당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내가 해준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하면 왜 망할 수밖에 없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영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해 내 것을 한몫 단단히 챙기겠다는 탐심이 가득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사업에 실패하고 입시에 실패하고 취업에 실패했다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실패한 그 자리에서 드러난 나의 악한 본성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생명의 계보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한때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하와이 열방대학을 다니며 열심을 냈으나, 어떤 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서 괴로워했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니까 욕이 막 나오죠? 차라리 하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지요? 맞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죄성과 반역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하고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가진 재물을 다 잃고 자랑스러워하던 가정이 풍비박산 나야 비로소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말은 모두 허공에 치는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세상은 내 안의 가식으로 뒤덮인 자아를, 저 십자가의 사랑 앞에 철저히 드러낼 때 가능합니다. 우리 안에 펄펄 살아 역사하는 ‘왕 바리새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릴 때, 하나님 앞에 들통 날 때, 그 때 다른 세상이 가능합니다. 그때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죄를 들켰을 때, 자기 연민으로 치장하고 변명할 것이 아니라, “네, 주님. 저는 고쳐서도 쓸 수 없는 인간입니다! 완전히 죽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라고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 계시는 허운석 선교사님의 이러한 삶에 기반 한 신앙고백이 한국교회를 다시금 새롭게 변화시킬 것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참다운 그리스도의 제자로 이끌 것입니다. 다른 세상은 멀지 않습니다. 지금 함께 죽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아니, 내 안의 왕 바리새인을 죽이고, 교만을 죽이고, 자신의 의를 죽이십시오! 그때 주님께서 내 안에서, 그리고 당신 안에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다른 세상의 시작입니다
출처/최병학목사 얼굴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