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코스 화순 ~ 모슬포 올레(총 15km : 4~5시간)
바람 부는 송악산, 바람 불었던 섯알오름
화순금모래해변→소금막→산방연대→사계포구→송악산→섯알오름→알뜨르비행장→하모해수욕장→모슬포항
▲ 사계포구를 지나다 바라본 형제섬은 속에 담은 이야기를 다 꺼내놓은 채 서로를 마주보며 웃는 모습이다.
화순항 건너편에는 산방산이 볼록 솟아 있다.
그 곁에 화순 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두 명의 기수가 모래사장에서 흑모래를 날리며 말을 달리고 있다. 말은 천천히 뛰는 듯했지만 어느새 해변을 한 바퀴 돌아 코앞으로 다가왔다. 푸른 바다를 뒤로 하고 달려갈 때는 적갈색 말과 빨간 옷을 입은 기수가 아침 햇살을 맞아 은백색으로 빛났다. 바다와 말. 두 사물이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화순은 남제주 화력발전소 3·4호기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움집터와 옹관묘 등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2세기까지 탐라 형성기의 거점마을로 추정되고 있다. 해수욕장 한쪽에는 범상치 않은 퇴적암층이 바람막이처럼 둘러쳐 있고 끄트머리에는 너럭바위들이 널려 있다. 바위들 위를 뛰어다녀도 발바닥이 편안하다. 뒤돌아보면 박수기정과 남제주 화력발전소, 화순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으로 보면 형제섬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올레 10코스는 경로가 변경돼 지금은 소금낙-항만대-산방연대-설큼바당을 거쳐 사계포구로 이어진다. 사계포구를 지나면 형제섬이 더욱 가까이 다가선다. 일제 시대 때 건조하다 만 죽항에 올라 보면 형제섬 사이의 바윗돌마저 뚜렷하다.
해안선을 따라 조금 더 가다보면 화순 해수욕장에서 부둥켜 우는 것처럼 보였던 형제섬은 속에 담은 이야기를 다 꺼내 놓은 채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이다.
바람이 불면 모래 파편들이 얼굴을 때린다. 한 무더기 억새꽃이 바람에 몸을 비비고 있고 형제섬은 대형 수석처럼 바다위에 떠 있다.
‘대형선풍기’ 송악산
사계 해안도로를 따라 주욱 가면 송악산이 보인다. 그러나 먼저 눈에 와 닿는 것은 송악산 아래에 뻥뻥 뚫린 구멍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를 최후의 항전지로 삼은 일본이 특공부대를 배치해 바다로 들어오는 미군 함대를 자살 폭파 공격하기 위해 어뢰정을 숨겨 두었던 진지동굴이다. 안에는 一자, H자 U자 모양으로 동굴식 갱도를 뚫어 놓았다. 지금은 응회암층으로 돌조각이 부서져 떨어질 우려가 있어 일부 동굴에만 들어가 볼 수 있다.
돌아 나와 오름 능선을 오른다. 20여 분 오르면 송악산이다. 주봉의 높이가 104미터로 그리 높지 않지만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분화구들이 모여 오름을 형성하고 있다. 분화구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정상까지 오르다 보면 연인들이 서로 무언가 대화를 나누며 어깨를 맞대 걷는 모습이 조그맣게 보인다.
연인들은 이윽고 어깨동무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바람이 세기 때문이다. 간혹 송악산은 대형선풍기를 틀어 놓은 듯하다. 분화구 저 너머의 가족 동반객들은 강풍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아예 웅크리고 앉았다.
제주판 킬링필드 ‘섯알오름’
오름에서 내려오면 길은 섯알오름과 알뜨르비행장으로 이어진다.
섯알오름은 제주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1950년대 아무것도 모르는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집단학살 당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른바 ‘4·3’의 상흔이 남아 있는 제주판 ‘킬링필드’이다. 돌아서서 오다 보면 백조일손 묘역을 가리키는 표지판도 보인다. 훗날 유족들이 어렵사리 백서른두 명의 시신을 찾았으나 누가 누구의 유골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칠성판 위에 머리뼈, 팔뼈, 다리뼈를 적당히 맞춰 안장하고 이 묘역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 불렀다. 백조일손은 조상이 다른 백서른두 명의 할아버지 자식들이 한날 한시에 죽어 뼈가 엉키어 하나가 되었으니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알뜨르 비행장은 군국주의 망령이 어린 곳이다. 1930년대 일본이 송악산 아래 들판에 건설한 군용 비행장이다. 2002년 근대문화유산 제39호로 지정되었는데 제주도는 앞으로 평화의 대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어떻게 보면 섯알오름과 알뜨르비행장은 해질 무렵 갈 길이 바쁜 이방인에게는 중간 이정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적인 평화의 섬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제주도로서는 상처와 한을 보듬어야할 원대한 노선의 시작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60년 전 역사의 비극이 TV 대하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고 석양은 벌겋게 지평선을 물들이며 저물어간다. 하모 체육공원으로 가는 길. 말동무가 그립다. 나 혼자 걷고 있는 걸까. 생각하는 순간 저만치서 배낭을 멘 한 젊은 여성이 뒤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