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論
맹문재(시인)
천사를 만나는 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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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시인의 「천사의 똥」은 갓난아기를 <천사>라고 비유할 정도로 사랑이 극진하게 나타난 작품이다. 그리하여 갓난아기가 <똥>을 싸는 모습을 불쾌히 여기거나 회피하지 않고 <자유>로운 것으로 여기고 있고, 똥을 <싼다>라는 말을 <제일로 좋은 표준어>로 삼고 있다. 심지어 시인은 갓난아기가 똥을 싸는 행동에 대해서 <황홀>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시인은 천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천사1」「천사2」「천사3」의 연작시를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문학세계사,1990)에서 내보였고, 「천사들」「다시 천사에 대하여」라는 산문을 『알詩』(세계사,1997)에서 나타내었으며, 「신생아실에서」(『도둑이 다녀가셨다』,세계사,2000)에서도 천사를 불렀다. 그리고 『현대시학』(2004.6)에 발표한 「천사의 똥」「옹알이」에서도 확인된다.
지금까지 시인이 관심을 보인 천사는 한 대상이 아니라 복수의 대상이고, 제한된 대상이 아니라 열려진 대상이다. 그리하여 천사는 <이중섭>이나 <김종삼>을 지칭하기도 했고 시인들이 쓰고 있는 시의 행간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대상들로 방사되기도 했는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집안에 든 <아기>로 집중되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천사는 <속살이 화안하게 드러나 보이는 잇몸, 그런 모습의 말씀을 건넨다 입을 가리지 않는다 맨발로 건너오는 천사의 누더기가 꽃이 된다>(「천사1」)와 같이 오염되지 않고 맑고 깨끗한 상대인데 그 특성은 갓난아기에 이르러서 더욱 여실하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갓난아기를 천사로 여기고 집중적으로 찬미하고 있는가? 일찍이 노자는 갓난아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찬미했다. 『노자』에 대한 번역은 장기근 역 『노자/장자』(삼성출판사, 1981)를 많이 참조했다.
정기를 집중하여 흩트리지 않고 유연한 자세로 갓난아기 같을 수 있겠는가?
(專氣致柔, 能嬰兒乎? : 『노자』 제10장 能爲)
나 혼자만은 담담하고 염정하여 아무런 징조도 없으며 마치 웃음조차 모르는 갓난아기 같다.
(我獨泊兮其未兆, 如嬰兒之未孩 : 『노자』 제20장 異俗)
영구불변하는 덕에서 떨어지지 않아 순진한 갓난아기로 되돌아갈 수 있다.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 『노자』 제28장 反朴)
백성들이 모두 귀와 눈을 집중시키지만, 성인은 그들을 갓난아기로 다룬다.
(百姓皆注其耳目, 聖人皆孩之 : 『노자』 제49장 任德)
덕을 돈후하게 가진 사람은 천진난만한 갓난아기에 비길 수 있다.
(含德之厚, 比於赤子 : 『노자』 제55장 玄符)
위의 제10장에서 노자는 몸을 다스리는 법과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논하고 있는데 결국 자연에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자연적인 것이란 곧 갓난아기와 같다고, 정기를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하고 마음과 몸을 부드럽게 해 음탕한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생기를 얻는 것으로 보았다.
제20장에서는 세속적인 중인들은 마치 풍성한 잔칫상을 받은 듯 또는 봄에 높은 대에 올라가 사방을 전망하듯 즐거운 양 들떠 있지만 자신은 마치 웃음조차 모르는 갓난아기와 같다고 했다. 그 모습은 홀로 멍청하고 우둔하고 촌스럽게 보이지만 뭇사람들과 달리 만물을 키우는 어미(大道)를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았다.
제28장에서는 도를 따라 여성적인 겸허나 유약을 지키면 천하의 계곡이 되어 모든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를 지키면 어른이면서 갓난아기로 복귀하는 것이고, 현세에 살면서 무궁무진한 도에 복귀하는 것이고, 높은 왕위에 있으면서 소박한 자리로 복귀한다고 본 것이다.
제49장에서는 도를 터득한 성인은 고정관념이나 독단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이 항상 백성들과 같은 마음으로 생성화육을 하도록 만들어준다고 말했다. 성인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보아 주관적인 가치나 자기중심의 선악으로 백성을 분별하는 일이 없어 순진하고 소박한 갓난아기의 상태로 돌아가 언제까지나 천하를 무사태평하게 한다고 믿은 것이다.
제55장에서는 덕을 잘 터득한 사람을 갓난아기에 비유했다. 순진무구하고 소박한 상태에서 허정과 유약을 지킴으로써 대자연과 잘 조화되어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다고 보았다. 만물은 대자연 속에서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자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위와 같이 노자가 갓난아기를 찬미한 것은 세속적인 때가 묻지 않고 자연스러운 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노자는 갓난아기를 자신이 생각하는 道에 가장 잘 부합하는 대상으로 여긴 것이다. 도의 체득에 관한 노자의 견해는 “滌除玄覽”(『노자』제10장)으로 집약시킬 수 있다. 척제라는 말은 때를 말끔히 씻고 닦아낸다는 것이고, 현람이라는 말은 마음의 거울을 가리킨다. 따라서 척제현람이란 깊고 영묘한 마음에 묻은 때를 씻어낸다는 뜻이 되는데, 그 거울을 갓난아기로 본 것이다.
정진규 시인이 「천사의 똥」에서 갓난아기를 찬미하고 있는 것은 노자의 관심과 같은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세속의 물정에 오염되지 않은 갓난아기를 단순한 父情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도를 구현하는 이상향으로, 그리고 시작품에서 추구해야 할 심미적인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은 시인의 다음 산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더 분명한 그들의 모습은 요즈음 우리집에 넘치고 있다. 우리집 사람들은 요즈음 일상의 말이 내는 소리가 아닌 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한없이 놀라고 있다. 그것은 실제로 한 천사가 우리집에 당도해 있기 때문인데, 그는 생후 3개월의 아기이다. 우리 집안사람들이 내는 그 소리는 아직 세상의 말을 모르는 아기와 교감하는 소리이다.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근원의 말, 그 첫 물줄기이다.
―「천사들」 부분
이처럼 시인이 갓난아기를 천사로 찬미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근원의 말, 그 첫 물줄기>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시인이 시란 <천사 훔쳐내기>라고 또 다른 산문인 「다시 천사에 대하여」에서 정의한 근거는 이 점에서 해명될 수 있다. <천사 훔쳐내기>는 다음의 작품에 잘 나타나고 있다.
술工場에 다니고 있는 나는 가끔 기쁘게 술을 훔쳐낸다 그런 날은 李仲燮과 金宗三을 만나러가는 날인데 그들은 언제나 毒한 소주만 훔쳐오라고 했다 훔친 물건을 그들은 더 좋아했다 반듯한 것 떳떳한 것은 언제나 그들을 거북하게 했다 감춰진 것 훔쳐내기, 그게 제일 재미있는 일이라고 도둑日記를 써보라고 그들은 내게 권했다 나는 말을 잘 들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정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저승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언제나 앙숙이었다 낡은 석유 풍로에 밥도 따로따로 지어먹었다 金宗三은 내가 훔친 술값으로 낡은 레코드 한 장씩을 언제나 내주었고 李仲燮은 가끔 銀箔紙 그림 한 點씩을 아깝게 내주었는데 자기 것이 더 비싼 거라고 우기지는 않았다(「천사·2」 전문)
시인에게 있어 천사의 말이란 <상처의 말>이 아니라 <흉터의 말>이다. 상처의 말은 아물기 전의 말이어서 또다시 <傷>과 <淫>을 낳지만, 흉터의 말은 흉터에 이르기까지 통과한 시간과 공간이 있는 체험의 집으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생성의 토대가 된다. 그리하여 천사의 집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알>처럼 완전한 것이어서 황홀에 이른다.
2
정진규 시인의 「천사의 똥」에서 관심을 끄는 또 다른 면은 <황홀>이다. 그동안 시인은 <황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황홀」「황홀한 잡것들」「맨발-알9」를 『알詩』에서 내보였고, 「이순」(『도둑이 다녀가셨다』)이나 「천사의 똥」등에서도 나타냈다. 시인이 표명한 <황홀>이란 이성적 직관에 의한 것인데,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노자는 황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도를) 형상 없는 형상이라고 하고 물체 없는 형상이라 하며, 이를 황홀이라 한다.
(是謂無狀之狀, 無物之象, 是謂恍惚 : 『노자』제14장 贊玄)
커다란 덕의 모습은 오직 이 도만을 따르니, 도라는 것은 오로지 황하고 홀하다. 홀하고 황한데 그 가운데에 모습이 있고, 황하고 홀한데 그 가운데에 무엇이 있다.
(孔德之容, 惟道是從,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 『노자』 21장 虛心)
‘황홀’의 사전적 개념은 <① 빛이 어른어른하여 눈이 부심 ② 사물에 마음이 팔려 멍한 모양 ③미묘하여 헤아려 알기 어려움> 이기문 감수, 『동아 새국어사전』, 동아출판사, 1992, 2660쪽.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이 중에서 노자가 말한 황홀은 ③에 해당된다. 황홀은 無形이고 無象이며 이름을 지을 수 없는 것으로 곧 도의 특징을 지닌다. 도는 무형의 실체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대이다. 노자가 도를 천하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이름은 알 수 없고 억지로 자를 붙여 도라 하고 억지로 이름 지어 대라 했>(吾不知其名, 强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 『논어』제25장)듯이, 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형의 실재로서 인식할 수도 없고 이름 지어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무형의 도가 만물을 낳는다. 무형, 무상의 도 속에 유형의 만물이 무궁무진하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잡을 수 없는 것이지만 현상세계에 나타나고 작용한다.
정진규 시인이 <천사>에게 느끼는 <황홀> 역시 위와 같은 도의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싼다는 말에는 참을 수 없는 황홀이 있다 그게 자유라는 몸이다 제일로 좋은 표준어이다 기저귀를 차고 있지만 오오, 자유를 받아내는 기저귀, 오오 천사의 똥! 새들도 날아오르면서 찌익! 황홀을 흉내낸다 싼다
시인이 느끼는 <황홀>은 만져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지만, 그것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천사>가 <똥>을 <싼다>라는 것에 실재한다. <똥>을 싸는 것은 파괴와 생성이 한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이고 향내가 퍼지는 것과는 정반대적인 것이지만, 만물이 생성되기 위한 썩는 일의 시작이기에 <황홀>할 수 있다. 썩는 것으로부터 모든 유형의 만물은 생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싼다>는 행위는 지극히 <자유>로운 것이다. 세속의 이해관계가 없고 자연의 질서가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지극히 순수하고 필연적인 것이다. 마치 <이를테면 滿開의 영산홍 한 그루, 그를 이 봄에도 어김없이 만날 수 있>(「황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싼다는 말에는 참을 수 없는 황홀이 있>음을 경험하는데, 그것은 대지에 뿌리박으려는 한 인간의 지극한 모습이다. 곧 <흉터의 말>을 체득하는 것이다.
네 마음의 들판을 맨발로 헤매이다 돌아온 지금, 발바닥에 박힌 황홀한 가시! 부어오르지 않았다 곪지도 않았다 네가 만든 내 살 속의 새로운 뼈, 뼈가 되었다 우리 몸 속 뼈 이백여섯 개, 그보다 하나가 더 많은 그 하나를 그 하나의 황홀을 나는 갖게 되었다 새살도 돋았다
―「맨발-알9」
시인의 <황홀>은 이처럼 오랜 세월 <맨발로 헤매이다>가 <발바닥에 박힌> <가시>와 같은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 <가시>는 살을 부어오르거나 곪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살이 돋게 하고 뼈를 만들게 한다. 단선적인 인식을 뛰어넘은 이 결과는 <황홀>을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다. <황홀>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고 경험할 수만 있는데, 그것은 상처로서가 아니라 흉터로서만 가능하다. <미주알 빠>(「암탉-알24」)지는 고통을 감수한 인간만이 생명의 위대함을 알 수 있듯이, 자신을 <천사>로 만드는 흉터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경험한 <황홀>은 생명의 박동을 느끼도록 한없이 새뜻하고 따뜻하다.
맹문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