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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일 | 개척 교회명 | 현재 교회명 | 개척 특기 사항 | 초대 담임자 |
1893 | 교항 | 강화교산 | 이승환,이명숙 등이 양사면 교산리 이승환 댁에서 첫 예배드림 | 이명숙 |
1893 | 진촌 | 주문 | 성공회 신부 2명이 개척, 1902년 5월 감리교회로 변경 | 윤정일 |
1896 | 홍의 | 홍의 | 송해면 상도리 홍의부락 박능일 댁에서 박능일,권신일, 종순일 등과 서당학생 20여 명이 예배드리기 시작 | 박능일 |
1987 | 고비 | 없어짐 | 홍의교인들에 의해 내가면 고천리 고비부락에 교회세움 | 황양일 |
1897 1. 16 | 위량 | 건평 | 조원시(존스)선교사가 양도면 건평리 정천일댁에서 첫 예배드림 | 정천일 |
1899. 8. | 교동 | 교동 | 홍의교회 권신일 가족이 교동면 읍내리에 이주하여 교회개척 | 권신일 |
1899. 11.29 | 삼남 | 삼남 | 삼산면 매음리 대동부락에 윤정일 전도사와 교인들이 이주하여 교회 개척 | 윤정일 |
1900. 4. 1 | 망월 | 망월 | 하점면 망월리에 홍의교회 김경일이 개척, 김치정,고태연,노시좌,노제민 등이 초가 7간 교회 설립 | 손승용 |
1900. 9. 1 | 잠두 | 강화중앙 | 박능일,주선일,허진일,최족일,김봉일,김엘리사벳,이살로메 등이 강화읍 신문리 천교하(川橋下)에 여섯간 반짜리 가옥에 교회설립 | 박능일 |
또 김상임은 신학을 공부하여 전도사가 되었으며 강화전체를 이끄는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김상임을 기념하는 전도사 김상임 공덕비는 1995년 4월 5일 강화교산교회 앞 뜰에 세워졌다).
한학자로서 지식인들 사이에 신망이 높은 김상임의 기독교 개종은 강화사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1896년 송해면 상도리 홍의부락에서 서당을 운영하던 한학자 박능일(朴能一)이 종순일(鐘純一), 권신일(權信一)과 제자 20여 명과 함께 홍의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강화의 두번째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의미 이상으로 기독교 선교확장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불붙기 시작한 선교열정은 복음의 세력을 강화 전역으로 펼쳐 나갔다. 복음의 줄기는 홍의교회를 기점으로 대략 세 줄기로 형성되었다. 그 첫 줄기는 동쪽으로 강화읍을 거쳐 강화 중․남부로 연결되는 것이고, 두 번째 줄기는 서쪽으로 뻗어 하점면 망월과 내가면 고비를 거쳐 양도면 건평과 흥천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세 번째는 바다를 건너 교동을 비롯한 삼산, 주문, 장봉 등 주변 섬 지역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는 강화 사람에게는 강화 사람이 전도한다는 주체 의식의 결과였다. 한편, 서도면 주문도교회는 1893년 성공회 신부 2명(왕대인, 갈대인)이 교회를 세웠으나, 삼산면 매음리 삼남교회에 교회를 세웠던 감리교회 윤정일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1902년 5월 감리교회로 변경되었다. 「표1」은 선교초기 즉 1893~1900년 사이에 설립한 교회개척 상황이다.
3. 초기 강화의 기독교 교세
강화전역으로 확산되어 가는 기독교세는 급속도로 발전해 갔다. 1893년 양사에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진 이래 불과 7년만인 1900년에는 강화읍에 잠두교회가 설립되면서 약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고, 강화 전역에 8개의 교회와 346명의 교인으로 늘었다.
특히, 강화진위대장 이동휘 선생이 1905년 ‘기독교야 말로 쓰러져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잠두교회 김우제(金宇濟) 전도사를 방문하여 회개하고 교인이 되었으며, 전병규(田炳奎), 김용하(金容夏)등 강화의 많은 지식인과 민족운동가들이 기독교에 입문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강화 기독교의 민족주의 성향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 때문에 강화지역의 많은 지식인, 민족주의자들의 개종이 이루어졌다. 이 결과 강화의 기독교는 하층 계층의 서민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지식인 하위 계층과 양반들이 함께 다니는 계층간의 화평을 이루는 종교로 탈바꿈하였다.
「표2」에서와 같이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과 압박의 여파로 감소하기 시작한 교회와 교인수는 1920년에 각각 33개와 3,027명 이었다가 1930년에는 교회수는 40개 교회로 다소 늘었지만 교인수는 1,192명으로 급격히 감소하였다.
「표2」 선교 초기의 강화기독교세
연 도 | 예배당 | 교 인 수 | ||||
계 | 입교인 | 학습인 | 원입인 | 세례아동 | ||
1893 | 1 | 11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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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1896 | 2 | 101 | 67 | 27 |
| 7 |
1900 | 8 | 346 | 97 | 219 |
| 30 |
1910 | 39 | 3,230 | 1,010 | 2,094 |
| 126 |
1920 | 33 | 3,027 | 1,004 | 608 | 908 | 507 |
1930 | 40 | 1,192 | 490 | 151 | 5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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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 43 | 3,230 | 532 | 446 | 1,455 | 610 |
일제의 압제가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1938년대에 들어서는 교세가 다시 1920년대 이전수준으로 회복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어 강화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두터운 신앙심을 보여주고 있다.
4. 영국성공회의 강화선교
감리교회가 양사면 바닷가 교항부락에서 발판을 굳히기 시작할 무렵 강화읍성에서는 영국국교인 성공회가 서서히 뿌리는 내리고 있었다. 성공회 선교단원들은 1890년 9월 3일 와일스가 제물포에 도착하고 이어 해군 군종사제 출신인 코프 주교와 랜디스(Eli Barr Landis)가 뒤따라 왔다. 그들은 곧바로 제물포와 서울 정동에 교회를 세우고 의료사업을 펼쳤다. 서울과 제물포에서의 의료와 사회복지사업을 통하여 선교의 터전을 마련한 성공회 역시 감리교회와 같이 다음 선교지의 눈길을 강화로 향하였다.
1893년 봄 코프 주교는 강화선교의 발판을 갑곶나루터에 두기로 결정하고, 그해 7월 워너(L.O.Warner) 신부를 파송하면서 갑곶에 회당겸 선교사 사택을 마련하였다. 1894년 1월 20일 코프 주교가 이 집을 성니콜라회당으로 축복함으로 강화 최초의 성공회 회당이 되었다.
성공회 강화선교본부의 첫 번째 책임자 워너가 본국으로 돌아가고 대신 트롤로프(Mark. N. Trollope)신부, 힐러리(F.R.Hillary)부제, 로스(A.F.Laws)의사와 피어슨(Pearson)인쇄공 등 5명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이들은 곧 강화읍내에 고가를 구입하여 성바우로회당(강화읍성당, 강화읍 관청리 422)을 마련하고 선교와 교육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1896년 11월에 수 십 명의 입교자들에게 망세를 주었고, 1897년 11월 7일엔 인천의 성미카엘 성당에서 김희준, 김군명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 영세식을 선교 7년 만에 처음으로 한인에게 베풀어진 것이었다. 김희준은 이후 견진을 받고 1915년 최초의 한인 사제로 서품되었다.
교세가 날로 발전해 나가자 트롤로프 신부는 1899년부터 성당건축을 시작했다. 700평의 대지위에 동서길이 10간, 남북길이 4간 총 40간 규모의 전통 한옥 고건축 기법으로 지었다. 1900년 11월 15일 역사적인 강화성당 축성식(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1호)이 있었으며 이는 성공회가 본격적인 한국선교의 뿌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강화에 선교기지를 마련한 성공회 선교사들은 강화가 한국의 ‘이오나’(Iona)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오나가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이었음에도 563년 에 사도 콜롬바(Columba)가 이곳에 도착, 수도원을 세우고 선교활동을 벌인 것에서 시작되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전역에 복음이 확산된 것처럼 강화가 한국선교의 전초기지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실제로 적어도 성공회 선교에 관한 한 강화는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던 것이다.
1900년 강화읍에서 의료선교에 전력을 다하던 로스(盧仁山)와 힐러리(吉康 後)가 길상면 온수리 난저골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와 의료봉사를 하였는데, 1903년 한 해 동안 3,541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 온수리 신자들은 1911년 11월 30일 길상면 온수리 505에 자력으로 성당을 건축하였다. 1905년에는 유지 유영흥(劉永興)이 선원면 냉정리에 기도소를 설치하고 조․만도를 인도함으로서 냉정리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강화 전 지역에 전파되어 각 지역마다 교회가 들어서게되니 1915년에는 2개의 성당과 15개의 회당, 9개의 학교와 2,000명에 달하는 교인으로 성장하였다. 결국 거대한 성공회 조직을 효과적으로 관할하기 위해 북구․남부 2개의 전도구를 분할하여 강화읍, 냉정리, 다운리, 송산, 삼흥리, 석포리, 김포, 통진, 내리, 여차리 교회를 북부전도구로 속하고, 온수리, 넙성리, 덕진, 초지, 광성, 동검도 교회를 남부전도구로 속하도록 하였다. 성공회는 감리교회와 함께 동반 성장을 이루면서 강화가 한국선교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5. 강화교인의 신앙형태
1) 성서 중심의 신앙
강화 교인들은 성서 중심의 신앙을 가졌다. 이는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 열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려는 신앙실천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성서를 읽고 감동받아 개종하고, 사경회를 통해 신앙이 더욱 깊어지는 현상은 다른 지역에서도 나타나는 것이지만, 성서를 읽되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 기록된 말씀을 계시로 인식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현상은 강화 교회의 독특한 현상이다.
홍의교회(송해면 상도리 934) 초기 지도자인 종순일과 주문교회(서도중앙교회:서도면 주문도리 717)의 박두병, 박순병 형제 등이 마태복음 18장 21절 이하를 읽고 감명을 받아 자기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모아 차용증서를 불태우며 빚을 탕감해준 것, 강화읍교회(강화중앙교회)의 김씨 부인이 마태복음 18장 15절 이하를 읽고 노비문서를 불살라 자기 종을 자유케 한 것, 송가교회(삼산면 상리 673-2)의 속장 신응권, 조마리아 부부가 귀신들린 거지 여인을 정성껏 돌보아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한 것, 그리고 장봉도에서 시작되어 마리산 참성단에서 끝나는 마리산 부흥회의 모든 과정이 예수의 생애와 초대 교회 역사를 모방하여 실시된 것 등이 강화 교인들의 성서 중심적 신앙 양태를 보여주는 예들이다.
또 강화읍교회 초기의 교인들은 더러 성경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께서 맹인을 고치실 때 흙에 침을 뱉어 맹인 눈에 바르셨던 것처럼, 진흙으로 고약을 만들어 치료를 실시한 경우도 있다. 선교사들은 이런 행동들에 대해 아름다운 행위라고 보고 성경말씀을 믿으려는 교인들의 신앙자세를 칭찬하였다.
이러한 신앙의 실천은 강화복음의 원동력이 되었던 바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민중사회에 새 바람을 일으켰고, 교인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특히 하층 계층의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해방의 종교,‘희망의 종교’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김씨 부인의 모범적 신앙에 대하여 《신학월보》의 기사 내용이다.
제목 : 우리나라에 드문 일
강화읍내〔강화읍 잠두교회〕에 김씨 부인은 년방 팔십에 자녀와 친속이 업고 홀노 과거하야 다만 복섬이라 하는 녀종을 다리고 세상을 지내더니 일일은 예수씨의 복음을 듯고 스사로 죄를 깨다라 회개하고 주를 밋기 작정한 후 언문을 알지 못함으로 성경을 보지 못하야 주야근심하고 날마다 언문을 힘써 공부하야 나종에 언문 성경을 보기에 이르러 성경 뜻을 상고함애 종 두는 것시 또한 큰 죄인줄을 깨닷고 갈아사대 우리의 주인은 하날에 계시고 우리는 다 한 형제라 내가 엇지 감히 하나님 압헤서 주인이 되여 죄를 범하리오 하고 하로날은 교중 형제를 청하야 그 종 복섬이를 불너 안치고 마태복음 十八장 十五절브터 二十절까지 읽은 후에 조흔 말삼으로 몃마듸하신 후에 종문서를 불사르고 그 종의게 닐너 갈아대 내가 금일브터는 너를 종으로 알지안코 내의 딸노 아노라 하고 주일마다 한가지로 례배당에 열심으로 다니시니 종되던 녀자가 깃분 마음이 충만하야 친어마니갓치 섬기며 날마다 왼 집안이 화목한 것치 충만하니 하나님께 만만 감사할 일이로다. 우리 대한에 비복을 둔 사람들은 이 부인을 본바다 비복들을 노아주고 자기도 노힘엇기를 바라노라 《신학월보》, 1903.7, 297-298쪽
2) 돌림자 신앙
강화의 초기 교인들은 한결같이 이름자의 끝이 ‘일’(一)자로 끝난다. 잠두교회(강화읍, 강화중앙교회)를 개척한 주선일, 김각일, 김봉일, 허진일, 최족일, 박능일 등이 그러하다. 이런 현상은 강화 전 지역이 공통적이었는데, 홍의교회의 김경일을 비롯한 교동읍 선교개척자 권신일, 길상지역 선교개척자 종순일, 고부와 상도교회 개척자 황양일, 위량(건평)교회 개척자 정천일 등 초기 강화선교를 주도하였던 이들 대부분이 ‘일’자로 끝나는 이름을 가졌다.
‘일’자돌림으로 끝나는 이름은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하고 관심있는 일로서 강화교인들의 결단력있는 신앙정신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돌림자(字) 신앙은 예수믿고 기독인이 되면서, 거듭남과 헌신의 표시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예수를 믿기 시작한 교인들이 주안에서 서로 형제 됨을 결의하는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일자돌림 이름은 홍의교회를 중심으로 1896- 1898년 어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기독교의 세례는 중생(重生), 즉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이는 또 신생(新生), ‘새로 태어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선교 초기에 다른 지방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후 성경속의 인물 이름을 따서 사용하였던 것과 같이 강화 교인들은 특이하게도 세례와 함께 자기이름을 ‘일’자가 들어간 새로운 이름을 지어 사용함으로써 종교적 의미를 깊이 새겼던 것이다. 또한 ‘일(一)’자 돌림자로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부자(父子) 간의 종(從)적 관계에서 형제(兄弟)간의 횡(橫)적 관계로 변하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당시 봉건적 사회구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破格)이요, 혁명(革命)적인 사건이었다. 그만큼 초기 강화교인들에게 세례 받음과 교인이 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박능일, 김경일, 김봉일, 권신일, 종순일, 정천일, 주광일 등 초대의 일곱 교인들은 성경속에서 일곱 글자(能.信.敬.奉.順.天.光)를 선정한 다음, 각자가 그중 하나씩 뽑아 자기 성(姓)에다 조합하여 박능일(朴能一), 김봉일(金奉一) 등으로 불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부자간에도 돌림자로 개명하였는데, 잠두교회를 개척한 주선일의 아들 성일(聖一) ․ 창일(昌一) 형제가 있고, 김은일(金恩一) ․ 환일(還一)형제는 본처전도사 김봉일의 아들이며, 권충일(權忠一) ․ 인일(仁一)형제는 권신일(權信一)의 아들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3대에 걸쳐 일자 돌림자를 사용한 가족이 있다. 홍의교회 교인 권문일(權文一)의 아들 권혜일(權惠一)과 손자 권재일(權재一) . 권현일(權현一) 형제 가족이 바로 그들이다.
이와 비슷한 일로 강화 본도 교인들이 이름 끝자에 ‘일’자를 사용하였던 것과 같이, 교동 교인들은 ‘신’(信)자 돌림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신’자 돌림은 교동 구역에서만 사용하였는데, 그 사용 동기는 홍의에서 교동으로 건너가 교회를 개척한 권신일(權信一)의 ‘신’자를 따 돌림자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예수 믿는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였으며, ‘신’자를 사용하므로서 신앙공동체 의식을 굳건히 다졌다.
‘신’자 돌림 교인의 수는 ‘일’자 돌림 교인 수에 비하면 훨씬 적은 편이다. 그러나 방달신(方達信)과 그의 아들 유신(有信), 재신(在信) 등 삼부자는 강화읍교회의 김봉일 ․ 김은일 ․ 김환일 일가와 주선일 ․ 주성일 ․ 주창일 일가와 같이 한 가족이 ‘신’자 돌림으로 개명하여 높은 신앙심을 보이고 있다. 또 방달신 가족과 황한신, 황흥신, 황학신 등은 단순히 이름을 고쳐 부른 것이 아니라 호적까지 고침으로써 구원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다졌다.
삼산면 서검도 검교회의 고경신, 석모리 항포교회의 구인신 등 삼산지역 교인들도 ‘신’자 돌림으로 개명하였는데, 이는 이 지역이 교동구역으로 속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별 분포로는 황씨가 가장 많고 방씨, 서씨가 다음으로 많다. 교동에 최초로 복음을 전파한 권신일 일가와 함께 초기의 교동선교를 주도한 문중들이다.
3) 민족적 신앙 - 의병운동과 3.1 운동
외세 침략으로 민족 수난의 역사를 뼈저리게 체험한 강화 사람들은 강한 민족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의식의 바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기에, 강화 교인들은 복음과 민족 구원을 일치시키는 민족적 신앙을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었다.
강화 교인들은 학교를 설립, 운영하며 강화 근대 민족 교육의 신기원을 이루었고, 민족을 위해 헌신하였다. 특히 이러한 민족적 신앙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 것은 당시 강화진위대장으로 근무하던 이동휘(李東輝)의 개종이었다. 나중에 만주에서 무장독립투쟁을 이끌게 되는 이동휘는 강화읍교회에 출석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1동네 1학교를 역설한 강화의 바울 이동휘의 열성은 강화 전역의 지식인, 민족주의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교회와 학교의 설립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하여 '교회 옆에 학교, 학교 옆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한때 강화 전체에 사립학교만 72개나 되는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 기독교 학교에서 배출된 학생들은 교회와 사회 지도자로 활약하며 강화의 민족운동을 이끌게 된다.
강화 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는 1907년 정미 의병운동과 3.1운동에서 두드러진다. 일제는 1907년 7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내정을 장악하고 이어서 구한국군 부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그 결과 강화에 주둔하고 있던 진위대도 해산 당했는데 이 때 강화에서 군대 해산을 거부하고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무장저항운동이 일어나 사흘 동안 강화의 치안, 행정 마비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투입된 진압 과정에서 평소 일진회와 적대적 관계를 맺고 있던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희생되는 일이 생겼다. 강화중앙교회의 김동수(金東秀) 권사와 그의 동생 김영구 성도, 그의 4촌 김남수(金南秀) 권사 등 3형제는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중 더리미(加里尾) 해안에서 살해당하였다. 더리미는 배를 타야하는 갑곶 나루에서 남쪽으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한적한 해안이었다. 이들의 순국은 민족을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있던 당시의 교회의 모습을 대변한 것이었다. 이로써 교회는 의병운동과 관련하여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되었다.
강화의 3.1운동은 길상면의 길직교회(피뫼교회, 강화초대교회:길상면 길직1리 782)의 이진형(李鎭亨) 목사와 온수리에 살던 유봉진(劉鳳鎭) 권사, 선두(다로지)교회(길상면 선두 1리 255)의 황유부(黃有富) 전도사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황도문(黃道文) 등이 주도하였다. 위의 4 사람과 장명순, 장윤백, 염성오, 유희철 등은 길직교회에 모여 서울의 시위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강화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후에 길상결사대원으로 불리게 된다. 이와 함께 강화읍교회의 김유의 전도부인, 고익진, 주성일, 조기신, 김영돈 등 합세하므로서 지방단위로는 전국에서 제일 큰 규모의 시위를 보였다. 이들은 3월 18일 강화읍 만세 시위와 그 후의 야간 봉화 시위를 주도하였다. 총 시위 횟수는 11회이며 참여인원은 1만 4천 ~ 2만 4천 명에 이르며 체포된 사람은 1백여 명이고 이 중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43명이다.
또 표면적인 만세시위가 불가능해 지자 서울 인천 등에 유학갔다가 돌아온 학생들 즉 강화읍교회 청년들은 교회에서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조구원(趙龜元), 조봉암(曺奉岩), 오영섭(吳永燮), 고제몽(高濟夢), 구연준(具然俊), 김영희(金永橲), 주창일(朱昌日), 김한영(金漢永) 등 8명으로 지하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형을 살았다. 이를 소위 ‘공범8인조’ 혹은 ‘예수교도8인조’사건이라 불렸다. 청년들은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격문을 만들어 벽에 붙이거나 일본인 경찰에게 협박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활동하였다.
4) 토착적 신앙
토착적 신앙이란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강화 교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과정에서 자주적이고 주체적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외래의 종교가 아닌 우리 민족의 종교로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졌다. 강화 교회의 초석이 된 김상임은 한학과 역서에 능통하여 <<정감록>>에 나오는 난세에 구원받을 곳인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으려고 노력하던 중 십자가의 도를 그것으로 해석하여 개종하였다고 하며, 김종우(金鍾宇) 감독의 할아버지이며 강화 6군자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홍천의 유학자 김용하(金容夏)는 대대로 숭상하던 공자를 예수교 예배당에서 만나게 되었고, 자리를 옮긴 공자를 따라 그도 향교에서 예배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들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강화 교인들은 기독교를 동양의 전통 종교를 보완,! 완성하는 종교로 이해하고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토착적 신앙 양태는 1898년 1월 홍의교회에서 치러진 강화 최초의 기독교식 장례인 고씨 부인의 장례식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교인들은 상청을 차리거나 신위를 모시는 등 우상과 관련된 의식은 철폐하는 대신, 기독교식 의식을 창안했다. 장례식에 참석한 교인들은 상복을 입되 남자들은 두건에 십자가를 그려넣는 십자건(十字巾)을 썼고, 여자들은 상복 저고리에 십자가를 수놓았으며, 묘비 대신 십자패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성공회의 강화읍, 온수리 성당과 1923년에 건축된 감리교의 서도중앙교회 등 초기 예배당 건물이 전통 한옥 건물 양식을 취하고 있음도 강화 교인들의 토착적 신앙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강화 토착 교인들의 집에서 지붕 모서리 혹은 용마루에 십자가 모양의 장식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강화 기독교의 토착 신앙화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