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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백리길을 걷다.
걷고 싶은 욕망이 가슴에 꽉 차 있는 것일까? 걷는 것은 즐거웠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시절에는 고향 대전시에서 시와 군의 경계인 대덕군 유성온천(지금은 대전시로 편입됨)까지 걸어가곤 하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백두대간을 종주하였고 그 이후에는 거주지의 주변에 조성된 서울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고양 누리길, 강화 나들길 등을 걸었지만 이제껏 백릿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남들은 산악 마라톤을 하고 더 나아가서는 42.195km의 장거리를 마라톤으로 완주하는데 걷기 전문가로 일컬으면서 백릿길을 걷지 못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4년 전(2017년 4월) 고양 누리길 1~5코스와 평화 누리길 고양 구간 1코스인 47.44km를 걷기 동지인 김헌영 씨와 함께 걸은 적이 있지만 둘이 아닌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해 보고자 재차 도전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걱정이 앞서는 것은 2020년 4월 혼자서 이 코스를 혼자서 걷다가 33km를 걷고 발바닥에 물질이 생겨 통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포기하였기에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출발지인 솔고개에 섰다.
소나무가 많아 솔고개로 부른다는데 오늘날에는 도로가 개설되어 그 많던 소나무는 간데없고 오로지 지명에서 옛 정취를 느끼고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북한산 둘레길인 충의 길을 알리는 대문이 세워져 있다.
충의忠義! 범인으로는 함부로 쓸 수 있는 용어가 아닌데 시작부터 충의 길이 눈앞에 나타나 가슴을 무겁게 한다. 충의 길을 걸으려면 그 인품과 덕행, 학식이 충의란 이름에 걸맞아야 하지 않을까? 평생 국가를 위해 일해본 적이 없고 오로지 사기업을 위해 종사한 사람이었기에 충의라 두 글자에 부끄러웠다.
겸허히 고개를 숙이며 스쳐 지날갈 뿐인데 또다시 효자길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어제 내린 비로 계곡에는 물소리가 묵은 때를 씻어주어 발걸음은 가벼운데 생전에 부모님께 지은 죄를 참회하여야 하는 불효자였기에 더한층 무거웠다.
父命呼 아버지께서 부를 때는
唯而不諾 늦거나 불손하게 대답(諾)해서는 안 된다.
手執業則投之 손에 일거리를 잡고 있으면 그것을 놓고
食在口則吐之 음식이 입에 있으면 뱉고
走而不趨 달려가야지 종종 걸음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이곳에는 구한말 효자로 이름난 박태성 씨의 효에 관해 일화를 기록해 놓고 길손들을 일깨워 주고 있어 더욱 가슴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아, 지나간 후 애달프다 서러워하는 아둔한 사람이여!
충의길, 효자길에서는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고 물소리가 산기슭에 가득하여 걸음걸음 힘차게 내디디며 내시묘역길을 지나 북한산성 탐방 센터에 이르렀다. 솔고개에서 이곳까지를 서울시에서는 북한산 둘레길로 명명하였지만, 고양시에는 북한산 누리길로 부른다.
이제 한북 누리길을 걸어간다. 한북은 한강의 북쪽을 뜻한다. 한강이 북쪽이란 한강의 북쪽 울타리가 되는 한북정맥을 뜻하는 것이다. 한북누리길은 우리나라의 모든 산의 근본이 되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어간 백두대간의 분수령(강원도)에서 한강 하구인 교하의 장명산 까지 뻗어내린 산줄기인 한북정맥의 산등성이(마루금)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노고산 구간의 중고개에서 숫돌고개(여석현)까지 걸어가는 길이다.
마음은 우리 땅을 걷고자 하는 열정이 충만한데 새로 구매한 등산화에 적응이 되지 않은 건지 발목관절(속칭 복숭아뼈)에 통증이 온다. 지난번처럼 발바닥에 물질이 생겨 걸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니어서 아픔을 참으며 걸어가지만, 걱정이 앞선다.
한북 누리길은 동네의 뒷동산답게 각종 체육시절이 설치되어 있었고 북한산을 조망할 수 있는 조망대가 있었다. 산길이지만 높지 않고 완만한 산세가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산등성이가 계속되어 힘차게 걸어간다.
아쉬운 것은 거리가 다소 짧아 걷기에 힘이 솟을 때 그 길이 끝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자 발목이 시도록 걸어보고 싶어 오늘 또다시 백릿길을 걷고 있다.
다리의 통증도 잊은 채 한북 누리길을 하산하려니 여석정이란 정자가 세워져 있다. 정자에 올라 올 때마다 가슴 치며 아파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치욕이 감춰진 숫돌고개(여석현)를 바라다본다.
지금은 통일로의 한 길목으로 자동차 통행이 빈번한 곳이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에 씻을 수 없는 참패를 한 곳이다. 전쟁에서 패배는 할 수 있지만, 그 패배가 부끄러울 때 치욕이 되며 그 치욕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도 빨리 숫돌고개의 전투를 망각해 버렸다.
숫돌고개에서 참패한 명나라 군대는 조선의 구원병이란 본래의 사명을 외면하고 조선의 염원을 무시한 채 일본군과 강화협상을 전개하여 민족의 자주 역량이란 화두를 남겨주었건만 그 교훈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치욕을 어찌 말로 다하랴!
그런데 어떤 자는 숫돌고개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숫돌고개 전투에서 참패한 것이 부끄러워 숫돌에 칼을 갈며 복수륻 다짐했던 고개라 한다. 오오. 통재라! 부끄러움은 감추면 치욕이 되고 드러냄은 교훈이 되는데 허위조작은 무슨 망령인가! 여석정을 내려와 삼송역에 이르렀다..
삼송은 세 그루의 소나무를 뜻하는데 예전에 왕릉 내에는 적송이라 불리는 큰 나무를 심는데 인근의 서삼릉에 세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 삼송이라 불렀고 오늘 걷고자 하는 길이 서삼릉을 거쳐 서삼릉 누리길이라 부른다.
서삼릉은 인근 서오릉과 함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왕릉으로 세계문화유산이다. 서삼릉에는 조선 제11대 임금인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과 제12대 왕인 인종과 그의 비인 인성왕후의 무덤인 효릉, 제25대 왕인 철종과 그의 비인 철인왕후의 예릉이 모여 있다. 그중 효릉은 일반에게 개방되지 않았고 희릉과 예릉을 둘러볼 수 있다
서삼릉에서 유의하여야 할 것은 태실비이다. 일제는 전국 명산에 흩어져 있던 산자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던 태실을 죽은 이를 위해 조성한 공동묘지처럼 일렬로 모아놓고 비석을 세웠는데 그 한쪽에 일본의 연호까지 새겨 놓았다.
아픈 역사의 슬픈 단면이 어디 이곳뿐이랴!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것처럼 이 땅에 산재에 있는 일본의 민족문화파괴에 관한 사례를 집대성하여 남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
고구려인의 힘찬 기상을 심어주려는 것일까 ? 서삼릉 입구의 한옥 식당 마당 한구석에 실물 크기와 똑같이 광개토대왕 비를 세워놓았다. 호태왕, 이름만 들어도 어깨가 쫙 펴지는데 비석까지 대하니 마음이 상쾌하였다.
코다리찜 안 먹고 가면 후회합니다. 라고 써놓은 음식점을 지날 때 다리의 통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등산화를 벗고 등산화끈을 최대한 헐겁게 조여 맸다. 등산화 가죽 부분과 통증 부위의 마찰을 피하여 통증을 완화하고자 했다.
지난번은 행주산성에서 발길을 돌렸는데 오늘은 원당역에서 전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날씨도 더웠다. 서삼릉 담장인 철 팬스에는 관람금지구역인 효릉을 참배할 수 있는 안내 현수막을 걸어 놓았다.
다리가 아프기 때문일까 다소 지친 몸으로 원당역에 도착하였다. 전철의 계단은 집으로 돌아갈 것을 유혹하고 있지만 두 발은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선 점심을 먹으면서 휴식을 취하고 다리 상태를 관찰하고자 했다.
더운 날씨였지만 더운 것으로써 더운 것을 다스리고자 以熱治熱 추어탕으로 점심을 대신하며 잠시 휴식을 취하였지만, 발걸음이 상쾌하지 않았지만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행주 산성을 향하여 걸어갔다.
들을 때마다 가슴을 울먹이게 하는 상라산의 아기 장수 이야기를 새기며 걸어간다. 아기 장수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지략과 용맹을 펼쳐 보일 기회조차 박탈당해야 했던 민중의 한이 가슴속 깊이 다가온다.
아기 장수가 죽으면 민초들의 그 원한은 누가 풀어주는 것일까? 그런데 그 아기 장수를 가진 자의 사주로 민중의 손으로 아기 장수를 불로 지지고 살갗을 배겨내고 가슴에 돋친 날개를 부러트려 죽게 하고 뒤늦게 울부짖으며 후회하는 아기 장수의 설화에서 우리의 자화상이 담겨 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미륵은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 것일까 ?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별들이 새그물과 같이 촘촘히 온 하늘에 펼쳐져 있다는 상라산을 내려서니 도시 속의 농촌 지역이었다.
이곳은 택지 개발에 따른 아파트 숲이 이룬 화정마을의 반대쪽으로 예전의 농촌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개발 이전의 화정마을을 상상할 수 있는 곳으로 널따란 밭이 펼쳐있고 고개를 들면 우리의 북한산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주말농장을 가꾸고 있는 사람들의 바쁜 손놀림을 보면서 지령산에 진입하는데 체력을 시험해 보고자 앞에 가는 사람보다 앞서가고자 했지만 앞지를 수가 없었다. 지쳐 있음을 확인하고 완주를 자신할 수 없어 천천히 걸어갔다.
이제 성사천을 걸어간다. 거친 모래가 깔린 맑은 개울을 바라보니 힘이 난다. 하지만 발걸음은 무거웠다. 다리 교각 아래에서 과일을 먹고 진행하였다. 아파트 단지 속에 있기 때문인까? 천변을 걷는 사람이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저들이 30km를 걸어온 것을 알면 놀랄걸. 이란 철없는 생각을 하며 성사천을 지나 봉대산에 오른다. 평지길에서 비록 100m도 되지 나지막한 산일지라도 오르막으로 이어지기에 발걸음을 천천히 떼었다.
시멘트 바닥길을 걷다가 두툼한 흙이 쌓인 산길을 걸어가니 발바닥이 편하였고 등산화끈을 헐겁게 맨 것이 효과가 있었던지 다리의 통증이 사라졌다. 다소 지쳐 있어 경쾌하게 걸어갈 수 없을지라도 완주할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봉대산은 예전에 고양시의 고봉산 봉화를 받아 서울 안산의 봉화로 연결해주던 혜포봉수가 있었다. 일망무제의 바다를 보려면 등대가 있는 곳이 제일이며 산의 조망은 봉수대가 있었던 곳이 제일이라는 말처럼 이곳은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유장하게 흐르는 한강, 그리고 둔치공원과 방화대교와 한강의 조화가 아름답고 농촌의 들녘이 평화스럽게 느껴진다. 고개를 멀리 들면 고양의 고봉산과 서울의 북한산, 관악산. 인천의 계양산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아름다운 풍광을 가슴에 안고 강고산을 넘어 내려서니 강매 석교가 반긴다. 한강 연안 서부지역 사람들이 창릉천을 건너갈 때 오고 다니던 다리로 고양시에서 현존하는 다리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였다.
이곳 강고산 마을의 풍물은 안산이다. ” 고려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할 때 삼송리 숫돌고개에 이르렀을 때 기러기 한 마리가 갑옷에 똥을 싸고 날아가는 것을 활로 쏘아 떨어트렸는데 그 기러기가 떨어진 지점이 바로 이 작은 동산이었다 하여 기러기 안雁자를 써서 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위 고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기러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을 자기의 절조로 지키는 고려의 충신이라면, 이성계에게 똥을 쌌다는 것은 이성계를 따를 수 없다는 의지이고 활로 쏘아 기러기를 죽였다는 것은 자기에게 협력하지 않는 고려의 지식인들 도륙했다는 것이며 기러기가 죽은 곳을 안산이라 한 것은 고려 충신을 혼백을 모아 묘지를 조성하여 그들의 얼을 흠모함이 아니겠는가?
반대자들을 화해와 포용의 도량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생명을 앗아가야만 했을까? 반대자의 처지에서 보면 그들이 옳고 내가 그른 것이요, 나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옳고 그대가 그른 것인데 나만을 옳게 여기는 것은 아집에 사로 잡혀있는 것이다.
상인께서 ” 군자는 화이부동 君子 和而不同”이라고 하였다. 서로 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 그들의 차이점을 인정하지만 서로 다른 길로 가지 않고 조정하고 타협을 이루어 냄이 정치의 요체임을 새기면서 창릉천이 한강 하구에 흘러드는 합수머리에 우뚝 솟은 덕양산 기슭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 있었던 곳이다. 덕양산은 비록 100여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급경사의 가파르게 솟았고 둘레가 창릉천과 한강 물이 감돌아 범접할 수 없는 하늘이 만들어준 천연의 요새인데 민民. 관官, 군軍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군과 대적하였으니 어찌 승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천시가 지리만 못하고 지리가 인화만 못한곳(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곳임을 올 때마다 느끼면 고양시정 연수원을 향하여 걸어가는데 한강의 풍광에 감탄사가 절로 난다.
” 조선백자의 미美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 미美 /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라고 김원용 박사는 말하였는데 이곳의 아름다움도 와서 보고 느끼라고 말하면서 가슴에 지니고 지나간다.
아쉬웠던 것은 진강정에서 차 한장을 마시며 한강 물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수리공사중에 있어 아쉬운 마음으로 행주 역사공원에 이르렀다. 선비의 절개를 매섭게 지킨 생육신 남효온 선생의 시비가 반긴다. 두 손을 모으고 고양시정 연수원에 이르렀다. 고양 누리길 1~5코스 걷기를 마치고 최종의 목적지 평화 누리길 고양 구간을 걸어간다.
시정연수원에서 길 찾기에 다소 주의를 요하는 곳이다. 한 강기슭에 조성된 공원으로 진입하여 행주대교에 이르러야 하는데 행주대교까지는 편안하게 이르렀는데 행주대교에 이르러 공사 중에 있어 엉뚱한 곳으로 진행하다가 되돌아와야 했다.
행주대교로 되돌아와서 가는 방향을 멀리 바라보니 자전거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여 그 길을 향해 걸어갔더니 평화 누리길 자전거 도로가 있었다. 통일을 상징하는 자유로 옆에 조성된 자전거길은 일자의 아스팥트길로 뻗어 있어 자전거를 타는 사람인들에게는 신나게 달려가고 싶은 충돌이 일 것 같았다.
하지만 40km를 걸어온 피곤한 몸에는 심적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은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가고 지친 나는 황소걸음으로 한 발씩 내딛지만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수년 전 고양시에서 주관한 걷기에 참가하여 걸어갈 때 신나게 걸어갔는데 오늘은 피곤함에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잠이 오지 않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자에게는 길이 멀다 하였는데 지금의 나눌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되돌아갈 수 없고 오로지 가지 않으면 아나 되는 길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지금은 자전거 전용도로가 되었지만, 예전에 군부대가 있었던 이곳에는 지금도 그때의 흔적인 초소가 몇 미터 간격을 두고 있어 바람을 피하며 진강정에서 마시지 못했던 커피를 마시니 힘이 솟는 것 같았다.
강바람이 다소 강하게 불었지만 50km, 120리 걷기를 축하해 주는 포근한 바람으로 가슴에 안으며 걸어가노라니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을 증명하듯 어느새 발걸음은 호수 공원 한얼 광장에 이르러 우려했던 고양 누리길 1~5코스와 평화 누리길 고양시 구간의 걷기를 완주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택이 있는 강선마을까지 1.6km이다. 걷기가 끝났다고 생각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무사히 50km를 완주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발걸음이 경쾌하다. 수없이 다녔던 길로 친구보다 익숙한 길에서 기어이 해냈다는 자긍심이 걸음걸음 가득하였다. 부픈 마음을 안고 아직 어둡지 않았을 때 자택의 강선마을에 이르러 대장정의 걷기를 마치었다.
● 일 시 : 2021년5월18일 화요일 맑음
● 동 행 : 나홀로
● 행선지
- 07시39분 : 솔고개(고양시와 의정부시의 경계)
- 08시30분 ; 밤골 탐방 센타
- 09시16분 : 북한산성 탐방 지원 센터
- 10시01분 : 중고개
- 10시56분 : 삼송역 5번 출구
- 12시29분 : 원당역 1번 출구
- 14시06분 : 베달골 테마파크
- 15시00분 : 봉대산 고스락
- 15시48분 : 바람 누리길 시점
- 16시20분 : 행주산성 역사공원
- 17시22분 : 김포대교
- 18시52분 : 한얼광장
- 19시21분 : 자택
● 총거리 및 소요시간
- 거 리 :49.34km
- 소요시간 :11시간4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