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의병운동과 기독교 의병장 출신 구연영 전도사의 순국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의병운동과 멀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 만큼 민족운동의 흐름에서 밀려났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다른’예를 발견함으로
교회는 다시 민족운동의 흐름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의병운동에 참여했거나
이 운동과 연결되어 희생당한 기독교인들이 그들이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감리교인들이었다.
1907년 8월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가장 극렬한 저항운동이일어난 곳이 강화였다.
강제 해산 당한 이곳의 구한국 진위대가
일본군과 조직적인 저항을 벌였던 것이다.
이곳 의병운동을 지휘한 연기우 . 지홍윤 . 유명규 등은
과거 이동휘 휘하에 있던 장교들이었다.
일진회원이었던 강화 군수 정경수를 처단하는 것으로 봉기를 시작한 강화 의병은
갑곶에서 인천 주둔 일본군 헌병대를 맞아 8명을 사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이 증원되고 포위 작전이 전개되자
의병 지휘부는 강화를 탈출하여
통진 김포 연안 지역에서 계속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의병장들이 탈출하고 없는 강화에 진입한 일본군들은 잔인한 보복을 가했다.
민가를 뒤지면서 수상한 남자들은 무조건 체포하였다.
일본군이 민가를 수색할 때 일진회원들이 안내를 맡았다.
그러다 보니 일진회에 밉보인 사람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그런 식으로 강화 감리교인 삼형제가 희생되었다.
강화읍 잠두교회 교인이었던 김동수와
그의 동생 김영구 ,
그리고 사촌인 김남수 등 삼형제가 일진회원의 지목을 받아 체포되었다.
이들이 실제로 의병에 가담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이들은 일진회의 주목을 받아오던 ‘불순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