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랑성, 양헌수 승전비, 전등사 큰나무>
전등사는 보물을 쓸어담고 있는 절이다. 전등사 구경을 실컷 하고도 주변 언저리 구경은 또 새로 시작해야 할 만큼 구경거리가 산더미이다. 전등사 구경에 힘을 다 빼면 안 된다. 알고보면 또 입이 벌어질만한 역사와 함의를 담은 유적들이 지천이다.
1. 관람 대강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입장료 : 4,000원(전등사 입장)
관람일 : 2022.10.19.수.
2. 돌아보기
동문쪽에 주차하고 들어가며 보는 코스다. 주차장이 비교적 가까이 있어 접근하기 좋으며 삼랑성문으로 들어서서 사찰과는 다른 풍모를 접하며 들어갈 수 있다. 사찰이 곧바도 산성에 둘러싸인 경우도 찾기 힘들다. 삼랑성에서부터 오랜 소나무밭을 만난다. 소나무 담을 넘어 가로수같은 나무길을 따라가면 소나무도 느티나무도 만난다. 소나무는 일제 공출의 아픈 상처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러고도 노거수로 자라 위풍당당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노거수들은 나무 이름이 큰나무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가 되고, 관습적인 수식어가 고유명사로 변화한다. 수수하면서도 의미 있는 이름이 된다. 전등사는 큰나무 밭이다. 은행나무에 느티나무에 소나무까지 천지다. 그것도 대형 노거수들이 장관을 이룬다. 나무 구경만 하래도 입 벌리다 하루에는 다 못할 거 같다.
산성이 군사적인 목적을 넘어 아름다운 풍경화가 되어 있는 곳도 드물다. 나무와 아름다운 산성에 압도되어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만나게 되는 양헌수 기념비는 정신이 확 들게 한다. 최전선에서 나라를 지켜왔던 수비의 무게가 마음을 숙연하게 하기 때문이다.
전등사 사찰의 깊이를 만나기도 전에 초입에서부터 풍광과 역사에 마음을 사로잡혀 멍해진다. 사찰에 들어서면 온갖 문화재와 민중설화까지 어우러지는 기운에 압도되지 않게 하는 것은 오히려 노거수들이다. 종교보다 자연을 내세우는 사찰의 배려에 편히 마음 둘 자리를 얻은 덕분이다.
전등사에 이어 여기서는 주변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어본다. 전등사 얘기는 바로 앞 꼭지에 있다.
*삼랑성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길이는 2,300m에 달하며 자연활석을 이용하여 축조된 성이다. 성 내에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전등사가 있으며 고려 고종 46년(1259)에는 이 성안에 궁궐(이궁)을 지었으나 현재는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다. 조선 현종 1년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를 설치하였는데, 무너진 것을 1998년 강화군에서 복원하였다. 조선 고종 3년 병인 양요시 양헌수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승지 이기도 하다. 이 성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이 있고 남문을 제외한 3개 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하나 영조때에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였다 한다. 남문의 문루(종해루)가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6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다음백과 전재)
*정족산성(삼랑성)
마니산의 한 줄기가 뻗어나가 서쪽 온수리에서 다시 이룬 세 봉우리가 정족산이다. 세 봉우리가 다리가 셋 달린 솥 같다고 해서 정족산(鼎足山)이다. 옛 솥은 대부분 다리가 셋이어서 정족은 다리 셋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정족산성의 다른 이름은 삼랑성이다. 삼랑성은 4문이 있었는데 현재 남문 종해루(宗海樓)만 복원되어 있다. 종해루는 바다를 머리로 삼는 누각이라는 듯으로 볼 수 있겠다.
성안에는 고려시대에는 임시 궁궐인 가궐(假闕)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 사고와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이 있었다.
양헌수 승전비
<양헌수 승전비>
인천광역시 기념물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을 물리쳐 승리를 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프랑스는 조선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 삼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는데 당시 순무천총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 포수 500여 명을 매복 시켰다가 밤에 기습 공격하여 물리쳤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4년(18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 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부총관·금위·어영 등을 거쳐 형조판서·금위대장·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비는 긴 직사각형으로, 윗변을 둥글게 다듬었다. 고종 10년(1873)에 세운 것으로, 비각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국가문화유산 포털 전재)
*양헌수 1816년(순조 16) ~1888년(고종 25)
자는 경보(敬甫), 시호 충장(忠莊), 경기도 양평 출생,
병인양요 때 큰 공을 세웠고, 병인양요를 기록한 일기를 남겨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병인양요 일기
양헌수 '병인양요 일기' 서울시 문화재 지정 추진
연합뉴스 2013. 9. 26.
서울시는 1866년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했던 양헌수 장군의 일기 등 기록물을 시 문화재로 지정하는 계획을 26일 공고했다.
기록물 중 '병인일기'는 장군이 제주목사에서 동부승지의 발령을 받아 돌아온 1866년 9월 3일부터 정족산성 전투를 거쳐 같은 해 10월 26일 부총관에 임명되기까지를 기록한 53일간 일기다. 아깝게도 53일 중 13일간 기록이 사라졌으나 일기 끝에 장군이 프랑스함대 제독에게 보낸 격문인 '전격양박도주' 1편이 실렸다.
필사 상태가 깨끗해 당시에 쓴 일기의 원본은 아닌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족산성 전투과정을 알려주고, 저자의 문집인 '하거집(荷居集)'에는 없는 내용이 수록돼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시는 설명했다.
또 다른 기록물인 '정족산성접전사실'은 정족산성에서 적과 전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어 귀중한 자료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가 강화부를 점령하자 양헌수 장군은 몰래 정족산성에 들어가 일제히 포격했다. 이 전투로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을 포함해 약 7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조선군은 전사자 1명과 부상자 4명에 불과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정족산성 전투 승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격퇴한 사례로 해당 기록물들을 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외에 양헌수 장군의 문집인 하거집도 시 문화재로 지정될 전망이다. 조선시대의 무장으로 문집을 남긴 사례는 충무공 이순신을 비롯해 몇 명에 불과하다. (연합뉴스 뉴스 전재)
전란 속에서 강화도는 평탄하지 못했는데, 전등사도 마찬가지였다. 1627년(인조5년) 청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정묘호란 때 조선은 조정을 강화로 옮겼고, 다행히 청군은 돌아갔다. 이때 조정은 강화도를 개발하고 전등사를 중수했다.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를 관리하는 사찰이 되었다. 1707년 유수 황흠이 사각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로 정했다. 고종 때는 강화도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전등사에 포명 부대의 군량미를 쌓아두는 포량고(砲糧庫)를 세우기도 했다.
움푹 패인 상처가 보인다. 송진 공출을 위한 소나무 위해 흔적은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아산의 봉곡사 진입로에도 상처입은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은행나무
사찰은 대장경 보호소만이 아니다. 노거수가 편히 숨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철종각 앞 죽은 고목은 달마대사 조각상이 되었다.
전등사 느티나무. 전등사는 나무도 품고, 조선왕조실록도 품고, 법보도 품었다.
절마당 느티나무
전등사 마당에는 400살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전등사는 조선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15년 재건하였다. 그때 심은 나무로 추정되는 이 느티나무는 대웅전 뜰 앞에서 한여름에는 시원한 그늘 쉼터를 제공해준다. 마치 동구에 드리운 느티나무를 연상케도 하여 편안한 느낌을 준다.
한국에 노거수로 가장 많은 수종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와 팽나무로 모두 정자나무이다. 팽나무는 제주도에 가면 많이 볼 수 있는데 신목으로 숭상되는 경우가 많다. 정자나무의 80%는 느티나무이다. 사람들은 느티나무를 보면 편안함을 느낀다. 동네에서 늘 보던 나무이기 때문이다. 전등사에 와도 역사의 무게에 눌리지 않을 수 있는 것도 느티나무 덕이 아닌가 한다.
앞 명부전과 뒤 약사전. 명부전 앞까지 느티나무가 드리웠다.
느티나무 옆 범종루
사찰 건물 곳곳이 큰나무와 어우러져 누가 주인인지 구분을 힘들게 한다.
산성 주변에는 소나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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