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어 이야기 / 김석수
최근 카투사(KATUSA)로 군 복무했던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휴가 특혜 의혹이 불거져 정국이 시끄럽다. 나도 한 때는 카투사여서 관심이 갔다. 아마 선발 시험이 처음 생겼을 때 내가 응시를 했던 것 같다. 단풍잎이 떨어질려고 할 즈음에 상무대에서 영어와 국사 시험을 봤다. 나중에 호랑이 같은 고참들에게 군대에 시험을 치고 들어온 녀석들이라고 코피가 터지도록 혼날 줄 몰랐다.
논산훈련소에서 살을 에이는 듯한 눈보라를 마주하고 땅이 얼음장같이 꽁꽁 얼어 버린 계절에 유격훈련까지 받았다. 매화꽃이 필 무렵 밤중에 배낭을 메고 트럭에 실려 평택 미군 부대로 갔다. 그곳에서 미군 복무 규정과 에티켓 그리고 간단한 군사 영어를 배웠다. 깐깐한 교관들이, 양식 먹는 법과 침대와 침구류 정리하는 법까지도 꼼꼼하게 가르쳐 주었다. 짬밥만 먹다가 양식을 먹으니 배가 놀랐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팝송과 이상야릇한 냄새로 잠시 외국에 왔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대부분 실내에서 훈련이 실시되어서 매섭게 추웠던 훈련소 시절보다 훨씬 좋았다.
벚꽃이 질 무렵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 카투사는 식당뿐만 아니라 이발소나 차량 정비소까지 다양한 곳에서 근무한다. 나는 운이 좋게 대민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실에서 행정 통역 일을 하게 됐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지만 통역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군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말을 영어로 통역하는 것도 영 서툴렀다. 영어를 잘하려면 우리 말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은 병원에 미군 장교를 따라가서 통원 치료 환자를 통역하는데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에서 병원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라고 풀어서 설명했더니 옆에 있던 미군이 '아웃페이션트(outpatient)'라고 말해 주면서 웃었다. 듣고 보니 너무 쉬운 단어다. 사무실 회의를 하면 어떤 때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근무 끝나고 막사에 돌아오면 기진맥진했다. 내가 명색이 영어 선생인데 그렇게 영어를 못하나 하는 자괴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일단 부딪치기로 했다. 모르면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고 물어 본다. ‘새치기하다’는 말을 모르면 점심 시간에 식당 앞에서 줄을 서 있다가 새치기를 해 보면 미군 입에서 ‘새치기 하지 말라(Don’t jump up the line)‘는 말이 바로 튀어나온다. 내성적이라고 생각했던 내가 영어 말을 배우려고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신을 보고 놀랐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일 년을 지나고 나니 미군 말이 귀에 들어왔고 미국 영화가 자막이 없어도 대충 이해되었다.
내가 영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 겨울 방학 무렵이다. 아버지는 중학교 가기 전에 영어 알파벳은 알고 가라며 읍내 장날 서점에서 영어 철자를 공부할 수 있는 책을 사다 주었다. 덕분에 선수학습을 하고 중학교에 갔다. 다른 아이들보다 영어가 친근하게 느껴졌고 쉬웠다. 한 학기 동안 알파벳을 다 알지 못하는 급우도 더러 있었다. 고등학교 가서도 영어는 비교적 상위권을 유지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가 학교 인근 교회에 미국 원어민이 온다며 함께 가자고 해서 처음으로 외국인을 만났다. 물론 그 앞에서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얼굴만 빨개지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선생을 해야 한다며 사범대학으로 진학하라고 권했다. 대학은 하루가 멀다 하고 휴교하고 캠퍼스는 최루가스가 난무하는 시절이라 차분하게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영어 회화 강사로 호주에서 온 원어민이 한 명 있었는데 말 잘하는 여학생이 독차지했다. 그렇다고 영어 읽기와 쓰기 공부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전공보다는 다른 데 관심이 많았다. 대학 시절을 돌이켜보면 영어 공부를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되었다. 학교 보다 군대에서 더 많이 영어를 배웠던 것 같다.
제대할 무렵 내 영어 실력은 나도 모르게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군대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배운 영어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많은 도움이 됐다. 지난여름에 교감 선생이 된 제자를 만났다. 그는 중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면서 원어민과 이야기하는 나를 보고 선생님이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아마 군대에서 같은 방을 사용했던 미군 친구가 내가 근무하고 있는 시골 학교를 방문하자 그를 교실에서 잠깐 소개한 것이 제자에게 동기 부여가 된 것 같다.
영어 덕분에 3년이나 해외에서 근무 할 수 있었다. 이곳저곳 다른 나라 여행도 많이 다녔다. 그때마다 대학보다 군대에서 배운 영어가 효용성이 높았다. 패키지보다 자유여행을 좋아한다. 작년 여름 아내와 함께 영국 런던과 스코틀랜드를 기차로 여행했다. 영국 계관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고향 그래스미어(Grasmere)에서 배를 타고 스파게티를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내가 영어권 나라만 오면 고향에 온 것처럼 행동한다고 가끔 놀려 댄다.
여행하면서 만난 낯선 외국인과 친구가 되어 각자 관심사를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다. 지난겨울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만난 대학 교수는 서울에도 몇 번 다녀갔다면서 나와 친구 하자며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라고 했다. 그는 경제학자답게 브렉시티(Brexit) 때문에 유럽 전체가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고 영연방에서 스코트랜드가 독립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영국 보수 집단들이 예전에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 환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텔레비전 비비시(BBC) 월드 뉴스 채널도 자주 본다.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더 객관적으로 알 수 있고 무엇이 지금 지구촌 화제가 되는지 이해하기 쉽다. 원어민처럼 잘하지 못하지만 영어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코로나가 없어지면 해외에 나가 새로운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다. 영어는 내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어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큰 창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