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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내는 영원할까요? / 호 9:1-17
여러분들이 길을 나서게 되면, 사거리나 넓은 도로를 건널수 있도록 만든, 횡단보도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횡단보도를 서로간의 약속을 실천하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자동차의 약속,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과 자동차를 운행하는 사람과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횡단보도를 유심히 보면 그 앞에 정지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눈이 나쁜 사람도 잘 보일 수 있도록, 아주 두껍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정지선은, 모든 차량이 보행자를 위하여, 반드시 그 곳에서 서겠다는 약속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최근 차량 우회전 법은 무조건 일시정지를 해야한다고 되었습니다. 그런데 횡단보도가 있는 사거리를 유심히 바라보고 서 있노라면. 정지선에서 일시정지하는 차가 있는 반면에, 아예 무시하는 차들도 있어, 보행자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제 우회전하는 덤프트럭에 치어 대동맥 수술의 대가인 서울 아산병원 흉부심장혈관외과 주석중 교수가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교통안전진흥원의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지선에서 정확하게 정지하는 준수율이 22.6%라고 나와 있는 반면에, 정지선을 무시하고 횡단보도까지 와서 멈추는 차량들이 53.1%, 아예 횡단보도를 몇 미터씩 침범하는 차들이 24.3%였습니다. 결국 정지선을 무시하는 차들이 무려 77.4%라는 통계가 나와 있어, 교통사고의 상당수가 횡단보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정지선이란 사회적인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면 모두가 행복하고 편안하지만, 그 약속을 어기면 불행한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행위, 곧 사회적 약속이 깨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불안을 느기는 주체는 사람입니다. 자녀들을 아침마다 학교로 보내는 부모들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를 말할 때 기준은, 1차적으로는 GDP 곧 국가총생산이나 국민총소득 같은 것들을 비교하여 평가하지만, 사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외적 통계나 수치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77%가 넘는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을 가 보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수준을 넘어서서, 보행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감동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김없이 정지선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멈춥니다. 더 놀라운 것은 보행신호가 끝나고 자동차가 가도 되는 상황에서, 어떤 보행자가 뒤늦게 횡단보도에 뛰어들면, 그가 건너편 인도에 올라갈 때까지, 절대로 차를 움직이지 않고 기다려줍니다. 자기의 권리이지만 남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유보하고 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의 문제가 보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을 하지 않아,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가 깨어진 상태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조화가 깨어진 인생에게는, 기쁨도 행복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어, 점점 어둠의 권세에 종노릇하게 되고, 결국 사탄의 권세에 붙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라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가 항상 기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뻐하지 말라 하십니다.
1절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뻐하지 말라 하셨습니까? 그들의 기뻐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사람처럼 기뻐한 게 문제였습니다. 아니 이방 사람들이 어떻게 기뻐해서 하나님이 막으신 걸까요?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타작마당입니다. 원래 타작마당은 시끄럽고 요란한 법입니다. 기계화가 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타작하는 일이야 말로 무척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술입니다. 술김에 힘든 줄 모르고, 고된 일을 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누가 트집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술이 거나해지면, 남녀가 어울려서 음란한 짓을 벌이는데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원래 비가 귀한 지역입니다. 그런데 추수 때 청춘 남녀들이 알몸 제사를 드리면, 바알 신이 기뻐하게 되고, 그래야 다음 해에 비가 많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께는 억장이 무너지는 극도의 아픔인데 말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음행을 하고 값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부요한 삶이, 음행의 값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이, 바알과 음란한 짓을 하고 얻은 값이라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수고하여 번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번 돈은, 바알이 준 음행의 값입니다. 일터에 나가서 적은 소득이라도, 의롭게 번 돈은 하나님이 주신 값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번 돈은, 바알이 준 음행의 값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신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싸움터에 나갈 때는 여호와를 의지했고, 논밭에 나갈 때는 바알을 의지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는 여호와보다, 바알 신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가나안에 들어오게 하신 여호와도 잘 섬겨야 하지만, 가나안에 살 동안은 바알에게도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이 그들처럼 이중적일 때가 있습니다. 사실 예배와 삶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삶이 더러우면 예배도 더럽습니다. 삶이 깨끗하면 예배도 깨끗합니다. 깨끗하지 않는 삶을 살면서 드리는 예배는, 아무리 거창해도 더러운 예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심은 교회 안에서만 보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드린 후 나머지 돈의 씀씀이를 보면 압니다. 교회밖에서의 물질관과 경제관을 보면, 그 사람의 진짜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공관과 처세술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이 어떠한가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차 배부르고 등 따뜻해지면, 이런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하여, 모세를 통하여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우리는 달랑 십계명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왜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없어 합니다. 출 20:1-2절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이 욕심이 많아서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이 속 좁은 분이어서 그런가요?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이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건가요?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셨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들을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실 자격이 충분히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할 이유 역시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 백성 삼으신 후, 천국 시민의 윤리 강령을 주셨습니다. 그게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후, 자녀의 지침을 주셨습니다. 그게 말씀입니다.
2절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하나님이 심각한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하나님이 무척 기분이 상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지금 뭘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떠나 바알에게 가서 제사하면, 바알이 타작마당을 풍요롭게 해 줄것으로 알지만, 그렇게 안 될 걸.” “술틀에서 포도주가 많이 나올 줄 알지만, 어림없을 걸.” “머지않아 너희 집에 새포도주가 떨어지고 말 걸.” 그들의 축제가 언제까지 지속되지 못할 것이란 뜻입니다.
3절 ‘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내보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이 보통 땅입니까? 하나님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는 땅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의 꼴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추방당해 갈 곳은 이름만 들어도 끔찍한 애굽입니다. 애굽은 400여년간 종살이하던, 지긋지긋한 곳을 상징합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이 자유를 잃고, 종살이를 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끌려갈 곳은 앗수르입니다. 머잖아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가, 온갖 고생의 쓴 물을 마시고, 더러운 음식을 먹을 거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음식이란 우상 숭배한 음식, 곧 율법에서 금한 음식입니다. 포로생활을 하면서, 어떻게 좋은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때 모든 것이 풍요로웠던 가나안 생활이 얼마나 그리워지겠습니까?
4절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부어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의 제물은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아서,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그들의 떡은 자기의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그들의 처지는 더욱 불쌍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제물이 없어서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음식이 부정한 것이기에 굶어죽지 않으려면 먹긴 해야겠지만,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아픔이 있습니다.
5절 ‘너희는 명절 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
보통 때도 그렇지만, 특히 하나님께 거국적으로 제사 드리는 명절이나 절기가 오면, 더 견디기 어려울 거라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날이 올 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음껏 드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배 때, 하나님 앞에 조금이라도 드릴 수 있다는 게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6절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그들의 앞날은 고생길이 열렸습니다.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겠지만, 살아남은 자들이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합니다. 생존자들을 애굽에서 받아주기는 하겠지만, 다시는 가나안에 돌아오지 못하고, 놉이 매장지가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애지중지 모았던 보물이, 그때 쓸모없어지게 되고, 그들의 장막은 황폐하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그쯤 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잃고라도, 다른 것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잃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잃었지만, 다른 것을 얻었습니까? 하나님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치게 되고, 하나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7절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온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하나님을 버린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형벌의 날이 다가왔음을 말해줍니다. 죄지은 만큼 당할 날이 성큼 다가왔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그들이 불쌍해서 자기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선지자들을 수차례에 걸쳐 보내주셨습니다. 호세아, 아모스, 미가, 요엘, 이사야 등 많은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거기로 가면 안된다.” “그렇게 살면 필경 망하게 된다.” “지금이라도 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거듭 거듭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지자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했습니다. 오히려 조롱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한 선지자들을 미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참 선지자를 배척할 때, 거짓 선지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거짓 선지자의 사명은 백성들을 미혹하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했습니다. 듣는 이들의 귀만 즐겁게 했습니다. 여호와도 잘 섬겨야 하지만 바알도 잘 섬겨야 한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여호와에게 잘 보여야 하고, 농사할 때는 바알에게 잘 보여야, 양쪽에서 다 축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8절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 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
문제는 그들이 참 선지자들보다, 더 신령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세워진, 참 선지자들을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치듯, 선지자들을 잡기 위해, 모든 길목에 덫을 놓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도, 선지자들의 말을 거슬렀습니다.
9절 ‘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이스라엘의 부패 정도가 기브아 시대 못지 않았습니다. 기브아 시대란 사사 시대에 기브아에 사는 불량배들이, 한 레위인의 첩을 강간한 사건을 빌미로, 이스라엘과 베냐민 지파가 싸워, 베냐민 사람들이 크게 희생당한 것을 말합니다. 그때는 하나님은 있으나,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영향력을 잃은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버린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조지 스웬돌’은 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죄는 그 본심을 숨기고 겉으로는 환영한다. 죄는 유다처럼 미소지으며 입맞춤하지만 결국에는 배반하고, 죄는 겉으로는 정중하지만 요압처럼 결국 아브넬을 죽이고 만다.” 가룟 유다가 주님한테 찾아와서, 미소를 지으면서 입맞춤까지 했습니다. 사양사람들도 입맞춤은 아무나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과는 그냥 악수 정도를 나눕니다. 조금 친하면 볼에다가 입맞춤 하고요.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입에다가 입맞춤합니다. 지금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보통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입니다’라고 사람들 앞에 거짓된 애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팔아먹기로 일을 끝낸 뒤였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성도들을 표현할 때 쓰는 말중에 ‘거북이 크리스천’이란 말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느릿느릿한 사람들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보통 짐승들이 먹이를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있는데, 새는 평균 9일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다고 하고, 개는 20일을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무려 500일을 먹지 않고도 견딘다고 해서 붙여진 말입니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빈둥대면서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 바로 ‘거북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입니다. 장기간동안 기도도, 전도도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일껏는 말입니다. 이런 이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10절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그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났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스레 여겼는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어떻게 보셨는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무화과나무는 한번 심으면 보통 몇 년씩 지나야 첫 열매가 맺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열매가 열렸습니다. 그러면 나무를 심은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흥분하여 드디어 무화과가 열렸다고, 아는 사람들에게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민족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기대를 거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줬습니다. 실망시킨 정도가 아니라 배신을 때렸습니다. 좋은 포도를 기대했더니 들포도를 맺었고, 잘 익은 무화과를 기대했더니 중간에 낙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결혼한 사이임을 잊었습니다. 10절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자신이 임자가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을 잊고, 아무 남자의 품에 안겨 자기 몸을 더럽혔습니다. 신부로서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가증한 일입니다. 자격없는 사람이 신랑의 은혜로 신부가 되었고,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신랑에게 받았음에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랑을 버리고 몇 번이고 집을 뛰쳐나간 고멜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끌어안으려는 호세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얼마나 끈질기게 사랑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11-12절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이제 하나님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에브라임이란 말의 뜻은 “창성함” 또는 “두 배로 결실함”입니다. 그런데 창성함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갈 거라고 하셨습니다. “창성함”이 “쇠잔함”으로 바뀐다는 말입니다. 자꾸 해산해야 창성해지는데, 아이를 낳기는커녕 아이를 배지도 못할 거라고 합니다. 혹 아이를 낳아 기를지라도, 사람 구실하기 전에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에브라임의 영광은 사실상 끝난 것입니다. 언제 이 일이 일어난다고 했습니까?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하나님이 떠나는 때”보다는, “하나님이 손 떼는 날”이 더 와 닿습니다. 에브라임은 자기들이 잘해서 창성해진 줄 알았습니다. 자기들이 복 받을 일을 해서 두 배로 결실한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 떼시고 나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것이 화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손 떼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손 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떼면 화(禍)가 되고, 손을 대면 복(福)이 됩니다. 우리 교회와 가정과 일터를 하나님이 손 대주시기를 바랍니다.
13절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과거의 영광스러움이 이제는 더한 슬픔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아름다운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 화려했던 영광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지금은 자식들을 살인자들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끔찍한 상황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자식들이 전쟁터에 끌려가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여호와여, 그들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 하나이까?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손을 써서 잉태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에선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차라리 자궁은 죽은 애나 배고, 젖가슴은 말라붙게 하여 주십시오.” 어디 이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15절 ‘그들의 모든 악이 길갈에 있으므로, 내가 거기에서 그들을 미워하였노라. 그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내 집에서 그들을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여기 ‘길갈’은 또한 북쪽 이스라엘에 있어서 우상 숭배의 중심지의 하나로 되어 있었습니다. 길갈은 본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온 후 첫 진지였던 곳으로, 그들의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기념 장소’였고,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는 선지자 학교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호세아와 아모스 선지자 시대에 내려와서는 벧엘과 더불어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어있었습니다. 왜 선지자를 길러내어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을 일으켰던 길갈, 가나안 정복에서 첫 진지로 기념의 장소였던 길갈이, 모든 악이 거기에 모여있는 우상 숭배의 장소가 되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에 사랑하지 않으면, 그 속에 물질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상을 섬기고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모든 악이 거기에서 발생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악이 길갈에 있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그들을 하나님의 집에서 쫓아내고,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지도자들도 하나같이 반역했다고 하나님이 분개하십니다.
16절 ‘에브라임은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나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의 잔을 쏟으셨습니다. 에브라임이란 나무는 도끼로 찍혀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애써 아이를 낳아도, 낳고 보면 죽은 아이일 것이라고 하십니다.
17절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선지자는 여기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라고 하시면서 ‘나’와 ‘그들’을 선지자 자신이 구별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이제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듣지 않는 그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건만, 그들은 벌써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 앞에 몸을 던지고, 복되고 복된 길갈을 악의 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벌써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자격을 잃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다’는 ‘거절한다, 물리친다, 혐오한다, 경멸한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지 않으신다면, 벌써 고아와 같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작심하고 망하게 하시면, 사람에겐 아무 대책도 없습니다. 제일 무서운 말씀이 나옵니다.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하나님과 함께 가신다면 광야 길도 외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통이 있어도 힘들지만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도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버림받으면 그걸로 끝장입니다.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맙니다. 이걸 절망이라고 합니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걸 실망이라 합니다. 모든 희망이 떨어지고 맙니다. 이걸 낙망이라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은 유랑하게 됩니다. 이리 저리 떠도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난민으로 살게 됩니다. 그들이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결정적으로 말해주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모든 키(Key)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왜 이런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계십니까? 가정에서, 아니면 가문에서, 친구중에서, 첫 열매로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정절을 버리지 말 것을 호소하고 계십니다. 그 신앙의 첫 열매인 그 정절을 다시 찾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세워 말씀하시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잊지 말라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모셔야할 자리에 앉아 있는 우상을 다 내어버리라고 호소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경건한 마음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를 부르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찾으시는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전보다 더욱 충성하고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영원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지 않은 하나님의 인내를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갈보리교회 성도들이 ‘주님 앞에, 주님 곁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라고 분명히 고백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먼저 가정의 파수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교회의 파수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하시고, 순결한 믿음을 지니게 하여 주옵소서.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언제나 주님 앞에 기뻐하심을 입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이 영원하지 않은 하나님의 인내를 기억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명히 분별해 가면서, 주의 뜻을 이루어 가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