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의 행복
대학의 철학과 강사인 홍미영은 가르치던 철학과 과목이 인문학과로 편입되며 실직하고, 엄마의 병원비와 은행 이자를 내다 결국 개인파산을 신청한다. 실존을 가르치던 대학 강사는 기초생활수급자이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으로 전락하며 생계를 국가에 의탁하는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리는 것을 경험한다. 미영을 라오슈(老師, 스승)로 따르던 중국 유학생 메이린은 가끔 편지를 보내오지만, 그녀는 답장은 쓰지 않는다. 메이린은 한결같이 미영을 추앙하지만 라오슈를 벗고 미영을 입은 지 오래다.
“사는 게 이토록 무서운 거니, 메이린?”
죽음을 두고 라오슈는 “죽음은 존재를 완성하고 성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추상적인 과정”이라 말하고, 제자인 메이린은 “죽음은 채워지지 않는 식탁의 빈자리”라고 각자가 서로에게,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 되뇌인다. 소설은 삶의 기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부재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지켜내는 내용이다. 이지훈 평론가는 “행복은 완수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 행복은 우리의 삶을 따라 끊임없이 유예된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 다시 말해 산책뿐이다”라고 논한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산책이다. 산책할 준비가 되었는가. 낯선 세계를 발견하고, 우리 안의 부재를 감당할 준비가 되었는가를 소설은 질문한다.
아브라함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자아실현에서 온다. 그러나 자아실현은 가장 상위 단계의 욕구로,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의식주와 안전을 확보했을 때 가능하다. 학과 통폐합으로 오랫동안 해오던 철학 강사 자리를 잃고 개인 파산을 신청한 미영은 임대 아파트로 간다. 기초생활 수급자가 된 그는 편의점에서 일하며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자신을 알아보는 옛 제자 앞에서 스스로를 부정하고, 아내와 사별한 편의점 사장을 보며 삶을 위탁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기도 한다.
그의 옛 중국인 제자 메이린은 독일의 소도시에서 답장이 없는 편지를 보낸다. 미영을 교수님이라는 딱딱한 명칭 대신 '라오슈(老師)'라고 부르며 따르던 그였다. 과거 한국인 친구를 잃고 힘겨워하던 메이린에게, 미영이 건넸던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일종의 버팀목이 됐다. 그저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산책을 할 뿐이지만 "마침내 살아 있다"고 말한다. 이런 메이린의 이메일에 답장할 수 없는 미영은 실존을 위협당한 순간 메이린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낀다. 삶에서 가장 괴롭고 비참한 순간, 연령도 국적도 다른 두 사람은 서로의 삶 속에서 빛처럼 반짝인다.
미영는 대학강사였으므로, 듣는 사람이 아닌 말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라오슈가 학생들에게 쏟아냈던 말들은 희망의 말들로 그득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줄곧 생존은 해결하되 세상이 인정하고 우대해주는 직업에 연연해하지 말라고, 눈 가린 말들처럼 정해진 트랙을 달릴 필요 없다고, 속된 세계로의 편입을 선택하지 않는 자유를 지키는 한 어떤 형태의 가난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 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해왔다. 학생들은 대체로 잘 들어주었으나, 중국에서 온 유학생 메이린은 라오슈의 인생과 죽음에 대한 언어들에 대하여 항의했다. 아니요, 손을 뻗어도 만질 수 없고 머리를 맞댄 채 웃으며 이야기할 수도 없는 거예요. 그냥 끝이라고요. 끝. 아무것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는 것. 아시겠어요? 공감은 했지만, 그게 다였다. 라오슈에게 세계는 관념과 추상위에서 존재했으므로 그녀가 하는 말도 허공에 떠돌았다. 그녀는 말하는 사람 이었으므로, 자신을 벗어난 말들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메이린은 듣는 사람이었다.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친구가 남기고 간 말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메이린은 자신에게 닥친 고통의 언어로 들어온 말들을 똑같이 내보낼 수 없었다. 아팠다. 메이린은 그 아픈 말들을 삼켰고, 그 자신에 머물게 했다.
뒤늦게 라오슈는 입과 거주지를 국가에 의탁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나서 자신이 그동안 했던 말들은 선생으로서의 존재와 신념을 모두 부인하는 언어였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았다. 삶을 알지 못하는 추상의 언어들은 모두 쓰레기로 전락했다. 관습과 습관에 복종하며 사는 건 심연을 모른 채 표면만을 훑는 가짜 방식이라고 믿어왔던 라오슈의 신념은 현실의 언어로 재규정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관습과 습관에 복종하며 사는 삶도 얼마나 지켜내기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고, 어쩌면 가짜의 방식을 의지하며 괴로워할 필요 없는 고요만이 오늘을 견디게 하는 행복은 아니냐고 그렇게 라오슈는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삶이 주는 균열을 감지했으며 이제야 고통을 담은 삶의 언어로 물을 수 있게 되었다.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레고르를 진짜 벌레로 만든 것은 주변인들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합니다. 미영의 몰락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절대 빈곤을 두려워 하는 제가 가장 두려워 하는 노년입니다. 아빠가 계셨더라면, 이 소설을 읽고 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 한편 다행이다 생각이 드는걸 지울순 없습니다. 내가 아빠를 벌레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지금은 주거지와 입을 나라의 처분에 맡기더라도 미영이 느꼈던 절망은 느끼지 않으려고 합니다. 읽고 쓰는 것을 놓지 않으며, 내면을 다져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더라도, 내가 볼 수 있는 곳의 마이크를 꿈꾸는 삶을 살거예요. 희망을 놓지 않겠습니다.
한때는 죽음에 매혹된 적도 있었다. 그녀가 흠모했던 철학자들은 죽음을 전제한 존재의 성찰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의 책을 읽으며 젊은 시절을 보냈고 그들처럼 미래의 죽음을 떠맡으며 강인한 현재를 살기 위해 애썼다. 그녀에게 죽음은 구체적인 단절이 아니라 존재를 완성하고 성숙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추상적인 과정이었다.(130)
살아 있는 동안엔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면 좋겠구나. 그 순간, 라오슈의 그 말이 알을 깨고 나오는 작고 연약한 생명체처럼 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눈을 뜨고 깃털을 돋우는 듯했습니다. 떠올릴 때마다 경이로운 그 말을, 라오슈, 저는 한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127)
개는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허공에서 뚝 떨어진 돌멩이가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승용차가 또다시 클랙슨을 울리며 그녀 곁을 지나갔다. 피곤했다. 그녀는 다시 걸었고, 길이 갈라질 때마다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살고 싶어.
목적 없이 뻗어 있는 길 한가운데서 그녀는 속삭였다. 미치도록.......
미치도록 살고 싶어.
메이린, 부르며 그녀는 흐느꼈다.(140)
저는 두려웠습니다. 답장이 오지 않는데도 수년에 걸쳐 라오슈에게 꾸준히 이메일을 보낸 건, 돌이켜보니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또하나의 부재를 감당하게 될까봐, 온몸을 내던져 부딪힐 장벽도 없이 그 어쩔 수 없는 부재에 잠식될까봐 저는 무서웠습니다. 그러니 저는 라오슈가 아니라 제게 닥칠지 모를 가상의 고통을 걱정한 것입니다.
저는 살아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