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 − 사적 소유의 폐해
좌파의 오해와 불만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를 내세운 롤스는 당연히 우파 진영의 많은 사상가들과 대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좌파 진영에서도 그의 이론을 회의적으로 볼 때가 많았고, 특히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에 영향받은 이들이 그러했다.
이러한 회의적 시각의 일부는 롤스 사상에 대한 흔한 오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롤스의 이론을 현대 사회의 각종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대충 얼버무리거나, 심지어 “‘낙수 효과’ 이론의 철학적 비전”으로 치부한다. 사회주의 저술가 폴 메이슨(Paul Mason)은 롤스의 접근법을 “어떻게 하면 가장 덜 부정의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짐을 지울 수 있을지 연구하는 일종의 정치적 주판알 굴리기”라고 서술했으며, 이는 좌파 진영에 널리 퍼져 있는 정서이기도 하다. 앞의 두 장에 걸친 논의를 통해 롤스가 낙수 효과 이론을 동원하여 현재 상태를 정당화하는 변호자가 결코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비록 차등의 원칙과 낙수 효과 모두 일정한 조건에서는 불평등이 모든 사람에게 유리함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유사점은 그것으로 끝이다. 낙수 효과의 옹호자들은 보통 부유층을 위한 감세를 정당화하며, 그 근거로 그 이득의 일부가 하층민에게까지 전달될 것이라는 점을 든다. 하지만 차등의 원칙은 근본적으로 훨씬 더 평등주의적이며, 경제를 조직하는 목적을 최소 수혜자의 삶의 기회를 ‘극대화하는’ 데 두자고 요구한다. 낙수 효과의 옹호자들은 일반적으로 경제 성장의 이득이 자동으로 사회의 가장 가난한 이(138)들에게 미칠 것이라고 가정하는 데 반해, 롤스는 그러한 자동효과의 환상을 품고 있지 않다.
롤스가 평등에 대해 강력한 신념을 지녔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그의 사상이 단지 더 관대한 복지 국가를 정당화할 뿐이며 노동과 생산 문제에 대해서는 내놓을 이야기가 거의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롤스의 초기 저작들은 이 문제에 대해 다소 불분명한 점이 있지만, 롤스의 후기 저작은 ‘복지 국가 자본주의’를 명시적으로 거부한다. 그는 재분배만으로는 공정한 경제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차등의 원칙은 소득과 부의 문제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경제적 권력과 통제력의 불평등, 자존감을 높일 기회의 불평등과도 관련된다. 이러한 폭넓은 관점은 결국 복지 국가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로 나아가고, 유의미한 노동자 작업장 민주주의라는 문제를 의제로 내세우게 된다. 만약 여기서 비판할 점이 있다면, 롤스가 이 모든 것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 보겠지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의 사상은 진정으로 변혁적인 경제적 의제들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다.
또한 좌파 진영의 비판자들은 롤스가 인종, 젠더, 장애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침묵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는 그의 이론, 더 넓게는 자유주의 전반에 깔린 깊은 결함을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롤스는 차등의 원칙이 노동을 포함하여 사회 내에서 “정상적이고 완전히 협력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원 분배 문제를 다루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따라서 심각한 장애가 있는 이들을 위한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이 아닌 것이다. 이는 롤스의 이론에 존재하(139)는 공백이며, 다른 학자들이 이 중요한 문제를 다루어 왔지만, 롤스의 사상을 그런 방식으로 수정하고 확장하는 작업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장애인 시민들의 기본권이나 인종·젠더 문제에서 롤스의 이론은 이미 강력한 틀을 제공하고 있다. 기본적 자유의 원칙은 장애, 인종, 젠더는 물론이고 그 밖의 어떠한 임의적(arbitrary) 특성과도 무관하게 모든 시민에게 시민적·정치적 평등을 보장하라는, 오랫동안 등한시해 왔던 자유주의적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은 젠더 불평등과 인종 착취라는 역사적으로 유구한 문제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각종 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조처를 할 것을 요구한다.
롤스 사상을 향한 좌파 진영의 회의적 시각은 상당 부분 오해에서 비롯되었거나 실천적 세부 사항이 부족한 데 대한 불만에서 기인한다. 그렇지만 롤스와 좌파 비판자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도 존재하며, 특히 사회주의적 비판자들과 그러한데, 아마도 우리가 언뜻 상상할 수 있을 법한 그런 내용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들이 차등의 원칙보다 더 평등한 자원의 분배를 주장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평등한 분배의 측면에서 차등의 원칙보다 더 ‘왼쪽’으로 갈 여지가 얼마나 있을까? 물론 최소 수혜자의 절대적 생활 수준이 낮아지더라도 더 큰, 심지어 완벽한 평등을 확장하는 것을 우선하는 평등주의적 원칙들을 상상해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철저한 결과의 평등을 옹호하는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없다. 또 다른 가능성으로는 롤스의 입장이 넓게 보아 시장에 기초한 경제 제도를 지지하고 있기에, 사회주의자들이 이 점을 비판하리라 생각할 수 있다. 시장을 계획 경(140)제로 대체하는 것이야말로 소련과 (1980년대까지) 중국의 핵심적 특징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은 시장이 계획 경제에 비해 중요한 이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보통 시장을 비판할 때도 시장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품고 있는 시장의 ‘완벽한’ 효율성에 대한 순진한 믿음과, 시장 경제에 존재하는 빈곤과 불평등을 외면하는 현실을 문제 삼는다. 이 지점에서 롤스와 사회주의자들은 견해가 같은데, 롤스 역시 시장이 결코 완벽하게 효율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며, 소득과 부의 시장 분배에 맞서 강력한 평등주의적 대안으로서 차등의 원칙을 제시한다.
사적 소유를 인정할 것인가?
롤스와 사회주의적 비판자들 사이의 진정한 의견 차이는 사적 소유의 역할에 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특징이자,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않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형태의 사적 재산을 폐지하는 것은 실제 사회주의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의제이다.(*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의복이나 주택 같은 ‘개인 재산(personal property)’을 소유하는 데는 반대하지 않으므로, 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지칭하는 말로서 ‘사적 재산(private proper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겠다.(저자 주) 반면 롤스는 좀 더 실용주의적 접근을 취한다. 그는 기업과 원자재의 사적 소유가 본질적으로 정의롭지 않다는 생각을 거부하며, 지금의 자본주의의 문제는 사적 재산 자체가 아니라 소유가 부유한 엘리트들의 손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롤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사적 재산을 완전히 폐지(141)하고 일종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나 시장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방안을 살펴본다. 그러나 그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탐구한 것은 스스로 ‘재산 소유 민주주의(property owning democracy)’라고 부른 체제의 이점이다. 이는 재산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되, 완전히 평등하지는 않더라도 널리 분산된 사회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롤스를 비판할 때 일반적으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볼 때 롤스 이론의 근본적인 문제는 사적 재산을 존속을 허용하고, 그 결과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해 사적 소유의 무엇이 그렇게 문제인 것일까?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사적 재산 자체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롤스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이 존재하는 한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을 따르면 사적 재산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적 재산을 보장하는 경제에서는 필연적으로 일부 사람들이 막대한 부를 쌓고 대기업을 통제하게 마련이며, 정치 과정에서도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롤스 자신이 정치적 평등이야말로 기본적 자유라고 주장했으니, 그의 관점에서 볼 때도 결국 사회주의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강력한 논거가 될 것이다.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와 페이스북(메타)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같은 억만장자들의 엄청난 부와 정치적 영향력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5장에서 보겠지만, 사적 재산을 폐지하지 않고도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첫째, 조세 제도를 통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직(142)접적으로 줄이고 둘째, 정치 과정을 광범한 경제적 불평등으로부터 차단할 수 있는 조처를 취하는 것이다. 후자의 예로는 개인이 정당에 고액의 정치 자금을 기부할 수 있는 제도를 없애고, 그 대신 공적 자금 지원 체계를 세심하게 설계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사적 재산에 관해 좀 더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면 마르크스로 돌아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마르크스에게 사적 소유는 생산수단, 곧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정의롭지 않다. 사람들은 ‘착취’라는 용어를 빈곤선 수준의 최저임금, 만연한 고용 불안, 열악한 노동 조건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노동의 불공정함을 총칭해서 쓸 때가 많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정통 사회주의자들에게 ‘착취’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의 일부가 자본가에게 이윤의 형태로 전유되기 때문에 노동자가 착취당한다는 뜻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자신을 위해 일할지 아니면 자기 노동을 팔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이는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경제에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자신을 생산적인 존재로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이나 장비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자본가들에게 자기 노동을 파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이러한 형태의 착취에 대한 전통적인 사회주의의 해법은 생산수단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유권을 노동자나 국가로 이전하여 자본가들에게 돌아갔을 가치를 노동자들 사이에서, 혹은 사회 전체와 공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143)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이 근본적으로 정의롭지 않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한 가치 전체에 못 미치는 몫을 받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이 과연 자본주의 문제에 대해서나 경제의 공정한 모습에 대해서 사유하는 최상의 방식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철학자 윌 킴리카(Will Kymlicka)가 주장했듯이, 이 이론은 “너무 약하고 또 동시에 너무 강하다.” 설령 착취를 없애더라도 우리의 경제가 여전히 불공정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너무 약하다’. 모든 기업을 노동자나 국가가 소유하고, 노동자가 생산에 기여한 가치만큼 정확히 보수를 받게 된다면, 이 사회에서 마르크스가 규정한 착취는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회는 여전히 노동자마다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가 서로 다르다는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가령 저숙련 판매원과 고숙련 변호사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도 시장 경제에서 해결하지 못한다. 19세기에는 마르크스가 기업 소유자와 노동자를 뚜렷이 구별되는 계급으로 보고 둘 사이의 격차에 초점을 맞춘 것이 합리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오늘날 소유자와 노동자의 경계는 과거보다 뚜렷하지 않다. 또한 최근 몇십 년 동안 심화된 불평등은 대부분 서로 다른 유형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임금 격차로 벌어진 것이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활동까지도 잘못으로 선언한다는 의미에서 ‘너무 강하다’. 특히 이 이론은 다른 누군가를 고용해서 이윤을 얻는 행위가 언제나 잘못된 일임을 함축하는데, 그러한 행위가 필연적으로 피고용인의 노동 일부(144)를 전유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사적 소유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타인을 고용하고 거기에서 이윤을 내는 것이 과연 ‘본질적으로’ 부당한 것일까?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해서 간접적으로 이윤을 거두는 사람은 어떻게 봐야 할까? 상당한 교섭력을 행사하는 고액 연봉의 경영진이나 전문직도 불공정한 착취를 당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까? 마르크스 이론의 힘은 노동자들이 노동을 팔지 못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 기대고 있지만, 복지국가의 존재로 인해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정통 마르크스의 착취 관념은 중증 장애인, 돌봄이(대부분은 여성이다), 비자발적 실업자처럼 전통적인 유급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사유할 때도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임금 관계(wage relationship)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타인에게 내주도록 강제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정의롭지 않다. 그런데 이 논리에 따르면, 실업자와 돌봄이를 돕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 역시 일종의 착취가 아닐까? 결국 이러한 세금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일부를 그 생산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전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사회주의 철학자 코언이 지적했듯이, 마르크스의 착취 이론은 ‘우리가 스스로 생산한 가치에 대해 자연적 권리를 가진다’는 자기 소유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로버트 노직과 같은 사상가들이 옹호하는 생각과 상당히 비슷하며, 결국 사회주의자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노직과 동일한) 결론들에 이르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145)의 사회주의자들은 고소득 노동자와 저소득 노동자 사이의 불평등을 중대한 문제로 여기며, 역사적으로 볼 때도 사회주의자들은 실업자와 돌봄이에 대한 지원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해 왔다. 여기서 핵심은 사회주의가 자유지상주의와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당연히 둘은 다르다. 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통 사회주의의 착취 관념은 자본주의의 무엇이 정의롭지 않은지를 설명하기에 우려스러울 정도로 불완전하며,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반대할 만한 결론으로 치닫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철학자 코언이나 경제학자 존 로머(John Roemer) 같은 일부 ‘수정주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정의와 공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사회주의적 이론들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평등에 관한 윤리적 신념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소유권에 대해서도 좀 더 실용주의적 접근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사적 재산 자체를 잘못으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물이 지나치게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사실이나 폭력과 강제를 통해 재산이 축적되어 온 방식에 초점을 맞춘다. 이 이론들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이 책에서 다 다룰 수는 없으며, 분명하게 말하고 싶은 점은 이러한 견해가 롤스의 관점과 대단히 유사하다는 사실이다.
노동의 소외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사적 소유에 대해 다른 문제를 지적하는데, 바로 ‘소외’를 낳는다는 것이다. 착취가 사적 소유로 인해 소득 분배가 불공정해지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면, 소외는 자본주의(146) 경제에서 노동이 인간으로서 펼칠 수 있는 우리의 잠재력을 어떻게 저해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소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사적 소유가 소외를 야기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일부는 노동의 상품화가 그 근원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노동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노동의 상당 부분이 너무 지루하고 반복적이라서 내적 만족을 느낄 기회가 거의 앖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소외를 종식하고 모든 사람에게 유의미한 노동을 보장하려면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노동자나 국가가 소유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외에 관한 사회주의적 관념은 자유주의자들이 그동안 너무나 자주 무시해 온 노동의 성격과 조직 문제에 주목한다. 그런데 롤스 이론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데 있다. 롤스는 경제적 권력과 통제력의 불평등을 중요하게 다루고, 특히 노동이 개인적 성취, 사회적 인정, 궁극적으로는 자존감을 얻을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고려한다. 롤스는 자신의 원칙들에 따라 조직된 사회라면 “[노동] 분업의 편협하고 비인간적인 특성들이 상당 부분 극복될 것이며”, 모든 사람이 유의미한 노동을 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부여받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뒤이은 장들에서 우리는 이를 현실에서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 살펴볼 것이다.
롤스의 자존감 개념은, 적어도 노동의 맥락에서 볼 때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에 관한 고유한 ‘자유주의적’ 설명을 제공한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롤스는 모든 시민이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 사회의 특별한 책(147)임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때때로 특정한 종류의 ‘비소외적’, 자기주도적(self-directed) 노동을 유의미한 삶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인 양 물신화해 온 데 반해, 롤스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을 인간에게 의미 있는 여러 원천 중 하나로 여길 뿐이다. 유의미한 노동의 기회를 보장해야 할 사회적 책임은 실용주의적 인식에 기반한다. 즉 우리 대부분에게 어떤 형태로든 노동은 불가피하고 보통 우리의 아주 많은 시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근본적인 방식으로 형성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실천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이 기회를 보장할 방법은 사적 소유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가 빈곤에 빠질 걱정 없이 나쁜 고용자를 떠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새로운 형태의 작업장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148)
ㅣ출처
자유와 평등
대니얼 챈들러 지음, 홍기빈 옮김, 교양인 2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