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아름다운 밥벌이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빚은책들 2022.
실업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경제학에는 ‘자연적 실업(Natural unemployment)’이라는 개념이 있다. 경제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2~3퍼센트의 실업률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더 심한 경우 ‘자발적 실업’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임금도 낮고 고용 상태도 불안정한 일자리밖에 없어서 취업을 망설이며 취업을 망설이며 더 나은 직장,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대학에 다니면서 상식적으로 기대했던 수준의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이들은 ‘자발적 실업자’라고 불린다.
세계의 경제학 교과서 출판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그레고리 맨큐의 《맨큐의 경제학(원서 제목은 《경제학원론Principles of Economics》)에는 ‘자연적 실업’이라는 용어에는 실업이 자연스럽다는 뜻은 결코 포함돼 있지 않으니 오해하지 말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내 생각이 삐딱하기 때문일까? “너를 비난하자는 뜻은 아니지만~”이라는 말 뒤에 비난이 따라오지 않는 경우를 못 봤다. 마찬가지로 “내 자랑은 아니지만~”이라는 말 뒤에 자랑이 따라오지 않는 경우도 못 봤다. 맨큐의 문장을 읽으며 이렇게 거꾸로 떠올리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이봐 젊은 친구, 실업은 자연스러운 거야!” 맨큐의 진심이 그렇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를 속화된 형태로 해석하고 홍보하는 경제신문사 논설위원들이나 경영자 단체 간부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경제학을 잘 모른다고 종종 경제학자들(주로 대학교수들이다!)로부터 조롱당하곤 하는 저널리스트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아예 ‘실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단언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역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에드워드 프레스콧이 어느 콜로키엄에서 그렇게 주장했다고 회고했다(<이코노미 인사이트> 2010년 5월호에 실린 인터뷰 참조).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결국 모든 실업은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면서 자발적으로 취업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편’은 과연 있을까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지어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정치 세력이 정권을 이어받는 경우에도 정부 조직이나 기관을 떠들썩하게 재편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또한 그럴 때마다 그 정치 세력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기관 명칭에 반영된다. 예를 들어 2001년 신설되었던 여성부는 2005년에 여성가족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8년에 다시 여성부, 2010년에 또다시 여성가족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현재는 폐지 논란마저 있다). 젠더 문제를 다루는 진보적인 의제를 가족이라는 보수적인 의제와 결합함으로써 그 정치적 성향을 바꾸려는 의도다.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로 바꾸는 것은 이미 교육 문제를 인적자원의 투자라는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는 상징일 것이다.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바꾼 것은 또 어떤가? 고용노동부의 영어 명칭은 ‘Ministry of Employment and Labor’, 고용‘과’ 노동에 관한 부처다. 이것은 결국 노동부가 노동자들이 당하는 억울한 일, 부당한 일을 중립적인 국가 입장에서 도와주는 기관이 아니라 노동과 고용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부처라는 의미다. 심하게 비아냥거리자면 ‘노동을 고용하는 부처(Ministry of Employing Labor)’라고 해석될 여지도 있으니 노동자를 고용의 대상으로서만 생각하는 경영자적 잠재의식이 반영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2020년대에도 여전히 전체 취업자의 20퍼센트가 넘는다는 자영업자는 고용된 노동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안정된 정규직에서 밀려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자영업, 계급의식으로는 프티부르주아지(소자산 소유자)지만 실제 노동조건이나 전망으로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를 바 없는 많은 이들은 ‘노동자’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사과를 오렌지라 부른다고 해서 사과라는 과일의 실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때로 우리가 부르는 이름이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경우가 있다. 아니,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밝히자면 이미 대상의 성격을 머릿속에서 규정한 다음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일 수도 있다. 악이 존재하지 않고 선만 존재하는 아름다운 세계로 묘사하는 동화가 오히려 비도덕적일 수 있는 것처럼, 원주민과 백인 젊은이들의 낭만적 사랑 이야기가 살육과 정복의 어두운 역사를 감추어버리는 것처럼, 노동자가 등장하지 않는 경제학 교과서는 아마도 ‘노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노동자를 감추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혀대 경제학 교과서는 주로 미시경제학부터 출발해 거시경제학으로 나아가는 서술 순서를 갖추었다. 미시경제학이란 경제 주체가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배분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는 분과다. 중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2차 함수나 3차 함수를 주고 일정한 구간에서 최댓값과 최솟값을 찾으라는 문제를 풀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먼저 그래프를 그린 다음 그 모양을 보고 최댓값, 최솟값을 찾는다. 높은 단계로 올라가면 그래프를 그리지 않고서도 함수를 미분해 대수적으로 푸는 방법을 익힌다. 실제로 경제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수학 중 하나가 미적분학인 이유도 그와 같다.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서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배가 난파돼 표류하다가 무인도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는 경제적 합리성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진 자원을 정확하게 배분함으로써 삶을 훌륭하게 꾸려나간다. 나중에 프라이데이라는 노예를 ‘고용’하기도 하는데 로빈슨 크루소의 경제적 삶은 오롯이 혼자서 모든 걸 기획하고 실행하는 ‘기업가’적인 삶이다. 경제학적 개념을 빌려 표현하자면 그는 ‘최적화’에 훌륭한 재능이 있는 일종의 ‘미분기계’다.
물론 경제학에서 수학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수학적 표현이 갖는 특성상 변수와 변수의 관계는 확정적인 관계로만 나타난다. 그런데 하나하나의 변수는 경제적 삶을 영위하는 사람의 의도와 행동, 무엇보다 서로 다른 의도와 행동이 충돌함으로써 결정되는 것이다. 그저 노동을 2단위, 자본을 2단위 투입해 생산물이 4단위 나온다는 식으로 경제학적 표현을 쓴다면 그 노동 2단위를 뽑아낼 때 발생하는 노동자와 고용주⋅원청기업과 하청기업⋅기업과 소비자⋅노동자와 소비자 같은 수많은 갑과 을의 갈등과 협력 과정, 노동자를 두 시간 더 부리려고 고용주나 중간관리자가 가하는 유무형의 압력 따위는 간과돼버린다. 원청기업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하청기업주의 약한 권력이 작용했을 수도 있고, 노동자의 서비스에 심각하게 이의를 제기한 소비자가 있을 수도 있다.
전직 CIA 수사관들이 쓴 《거짓말의 심리학》이라는 책을 보면 수사 대상인 용의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신호 중 하나가 ‘질문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위공직자 청문회에 나온 후보자들이 위법행위 사실을 묻는 야당 의원의 추궁에 “제가 기억하는 한, 그런 적이 없습니다”라며 부정한다든가 “제 업무와 관련된 일에만 답하겠습니다”라며 답변을 거부하는 것은 십중팔구 자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 즉 위법행위를 시인하는 신호라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생산함수라는 수학적 모델을 다룰 때는 고려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고려하지 않는다’라는 말 속에 도리어 고려해야만 하는 갈등이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로빈슨 크루소는 누구와도 협력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없이 자기 머릿속으로 치밀하게 세운 계획을 과단성 있게 실행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는 경제, 나아가 사회를 정교하게 조직하기만 하면 합리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기계처럼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을 내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꿈은 단지 세계 지배를 꿈꾸는 할리우드 영화 속 악당의 전유물이 아니다. 매우 잘 설계된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것만 잘 운용하면 사회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꿈, 억압과 피지배에 대한 울분과 가지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대의 정신으로부터 출발했던 수많은 혁명가들이 세상을 얼마나 끔찍한 곳으로 만들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경제학을 로빈슨 크루소식 이야기로 보는 관점에 격렬한 반감을 보인 인물이 바로 카를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는 인간이 유적(類的) 존재라는 사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무슨 일이든 함께 모여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면서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무시한다.
기업 구조가 그렇고 경제 구조가 그렇듯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CEO, 최고경영자는 소수다. 그리고 대부분은 CEO의 지휘를 받으면서 일하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 CEO조차 노동자의 협력을 얻어내지 못하면 자신의 기획을 성공시킬 수 없다. 우리의 삶, 우리의 일을 혼자 정교하게 기획하고 기획한 바대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최선의 상태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환상인 줄 모르고 주장한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속임수다. 혼자서 해낼 수 있다는 어리석음 혹은 속임수는 자기 ‘프로젝트’의 성패에 따른 과실이나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자기 책임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효과를 낸다. 이는 근대사회를 지탱해온 능력주의 원칙의 어두운 면이기도 하다.
내가 취업하지 못한 것, 내가 비정규직인 이유는 내 ‘스펙’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도록 일해도 한 달 수입이 100만 원밖에 안 되는 것은 내 ‘생산성’이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결국, 잠을 줄이고 노력하여 부족한 내 스펙, 부족한 내 생산성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에서 존중받는 노동자의 자리는 없다.
경제학 교과서와 경제적 담론에서 빠져 있는 노동자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단지 노동력을 공급하는 ‘아무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노동자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우리 거의 모두는 노동자이기에.5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