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노루의 댄스판타지소설]
광무(狂舞)(42회)
21.일장춘몽 광무(狂舞)(1)
백장미 학원의 자체 파티겸 정기 모임 날.
댄스러브 동호회 회원들과 학원생들이 어울려서 즐겁게 댄스를 즐기고 있었다. 라틴댄스도 하고 가끔씩 양념으로 지르박 부르스 같은 사교춤 음악도 나와서 흥을 북돋웠다.
팬지는 자이브를 출 때가 가장 생기발랄하고 즐거워 보였다. 탄력 있게 뛰는 베이직이 경쾌해 보였다. 그녀는 룸바도 제 맛 나게 끈적거리게 잘 소화해 냈다.
박달재는 샤넬과 단독 시범이 예정되어 있어서 복장을 갖춰 입고 구석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그는 이번 시범을 위해서 댄스파티 전용 턱시도까지 준비를 했다. 턱시도뿐만 아니라 선수들이 대회 때나 입을 법한 제비꼬리처럼 기다랗게 늘어진 연미복까지 동시에 한 벌 맞췄다. 나중에 왈츠를 잘 하게 되면 전문 파티에 참석할 때 입을 요량이었다. 그보다도 사실은 턱시도 제작하는 전문 업체의 사장의 꼬드김에 홀랑 넘어간 탓도 있었다. 어차피 댄스를 하게 되면 언젠가 필요할 거니까 싸게 해 줄 테니 맞추라고 유혹했다. 그러면서 "사장님은 키도 훤칠하게 커서 연미복도 너무 잘 어울릴 겁니다. 그걸 입으면 여성들한테 인기가 짱일 겁니다."라는 댄스복 제작업체 사장의 달콤한 말에 넘어 간 것이었다.
그가 새로 맞춘 턱시도를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나오자 회원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워했다. 훤칠하게 큰 키에다 턱시도 안에 우윳빛 새하얗고 주름진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다. 그 주름 블라우스 위에 나비 모양 빨간색 넥타이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잠시 후에 드레스로 갈아입은 샤넬도 등장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보라색이었다. 평소 연습할 때 입었던 세미 드레스보다 훨씬 화려하고 빛이 났다. 그들 두 사람의 의상으로 인해서 학원의 파티장이 훤해지는 듯 했다. 두 사람의 의상도 화려했지만 워낙 키가 늘씬해서 복장이 잘 받쳐 주었다.
학원 내에서 그들 식구끼리 하는 소규모의 세미 파티였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화려한 의상으로 인해 정식 파티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회원들이 너나없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복장을 갖춰 입고서 둘이서 정식 홀드를 해보았다. 정지된 상태에서 서 있는 모습은 경력이 오래 된 프로페셔널 선수 폼이었다. 본인들도 공연히 선수라도 된 것인 양 마음이 들뜨고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박달재는 평소 연습할 때와는 달리 몹시 긴장되었다. 계속 몸을 움직이고 스트레칭 하면서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다. 심호흡도 자주 했다.
한참 동안의 제너럴 타임이 지나고 동호회 회장을 맡고 있는 종치기님이 음악을 껐다. 그리고 그가 사회자로서 마이크를 잡았다.
"회원 여러분 제너럴 타임을 잠시 중단하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방송을 하고 잠시 기다렸다. 떠들썩하게 댄스를 하다가 갑자기 음악이 꺼지고 방송 멘트에 모두들 흥이 깨져서 플로어에서 물러났다.
사회자가 손에 들었던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회원 여러분 즐거웠습니까?"
사회자 종치기가 회원들을 휘이 둘러보며 물었다. 회원들은 일시에 "네에~!"하며 큰 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에~, 즐거우셨다니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여러분 아시다시피 우리 댄스러브 동호회와 백장미 학원의 자랑이자 오늘의 주인공인 박달재군과 샤넬양의 왈츠 단독 시범이 있겠습니다!"
그가 멘트하자 회원들이 "와아!"하고 함성을 지르며 두 사람을 향해서 시선을 일제히 돌렸다.
"자, 두 분은 나와 주시겠습니까! 원장님 음악 준비해 주세요."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박달재가 샤넬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 했다. 그리고 플로어 가운데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긴장을 감추려고 계속 심호흡을 하면서.
박달재가 스타트를 위해서 출발선에 섰다. 그의 앞에는 샤넬이 마주 보고 섰다. 그의 준비를 자세를 보고 백장미 원장이 눈으로 신호를 했다. 음악을 틀어도 되느냐고 물어 보는 신호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선수들 준비 되었으면 원장님 음악 큐!"
무선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 종치기님이 백장미 원장에게 음악을 요청했다.
팬지가 "오빠 파이팅!"을 외치며 손가락으로 브이자도 들어 보였다. 스마일과 데이지도 손으로 입 나팔을 만들어서 응원의 환호를 외쳐 주었다.
회원들은 촬영을 위해서 휴대폰을 들이 밀고 이미 동영상을 찍는 이들도 있었다. 거의 다 휴대폰을 준비해서 그들이 시범을 시작하면 촬영할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원장이 사회자의 신호를 받고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 시작하라고 손짓으로 박달재에게 사인을 보냈다. 시범 곡으로 선정한 체인징 파트너의 전주가 흘렀다. 그가 평소 가장 좋아 하던 곡이었다. 그 곡으로 언제나 연습을 해서 익숙해져 있었다.
음악의 전주곡이 시작됨과 동시에 남성이 왼손을 들어서 여성을 불러 들여야 한다. [원 투 쓰리, 투 투 쓰리]까지 홀드를 끝내고 [쓰리 투 쓰리]에서 반동을 시작해서 [포 투 쓰리]가 되면 예비보를 차고 나가야 박자를 맞출 수 있다.
그런데 음악의 전주곡 네 소절이 다 흘러지나 가는데도 박달재는 우물쭈물 하다가 박자를 놓치고 출발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백장미 원장이 알아서 음악을 스톱 시켰다. 마이크를 잡고 있던 사회자가 재치 있게 위기를 넘겨주었다.
"자 우리 선수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 너무 긴장을 했나 보네요. 우리 모두 격려 차원에서 힘찬 박수를 부탁해요!"
사회자의 안내에 맞춰서 회원들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자 선수들 심호흡 한 번씩 하시고... 음악 다시 한 번 주세요. 부탁해요 원장님!"
사회자가 백장미 원장에게 음악을 다시 요청했다.
박달재가 다시 자리를 잡자 원장이 음악을 다시 틀었다.
첫 음이 흐르기 시작 했지만 박달재는 또 음악을 못 맞추고 출발도 못 했다. 그는 이미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도 않았다. 음악도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완전 멘붕 상태였다. 머릿속은 하얬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았고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열심히 연습해왔던 첫 걸음 스텝도 생각이 안 나서 한 발짝도 뗄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지켜보는 회원들이나 지도 강사인 백장미 원장이 더 난감했다. 음악은 또다시 정지 되었다.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음악이 세 번째 다시 시작되었다.
이제는 박달재의 자력으로는 불가능 할 것 같았다. 체인징 파트너의 전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그의 앞에서 대기하던 샤넬이 재치 있게 얼른 그에게로 다가와서 컨택을 하고 홀드를 완성 시켰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서 반동을 시작해서 예비보까지 완료했다. 박달재는 로봇처럼 아니 마네킹처럼 그녀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따라 했다. 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로.
그는 전혀 정신이 없었다. 음악도 안 들렸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그를 쳐다보는 회원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빛나는 것만 얼핏 느꼈다.
어떻게 돌았는지 그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루틴을 다 돌고 음악이 끝나고 있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회원들의 기념 촬영 요청이 들어와서 정신없이 포즈만 취해줬다.
박달재는 완전히 망쳐 버린 시범을 그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준비하고 연습한 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당황하고 못했는지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결과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쪽 팔린다는 자책감만 들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게 끝난 상황이었다. 그는 그저 창피하기만 했다. 이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자리에서 빨리 피하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학원 자체 세미 파티도 끝났다. 이번 주 다가오는 일요일에 엘리트클럽의 가면무도회 행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개인레슨을 한 타임 끝낸 백장미 원장이 학원 사무실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살짝 단잠에 빨려 들었다. 깊은 잠에 빠져 드는데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비너스 일어나. 백장미 일어나 봐."
그녀는 자신을 비너스라고 부르는데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학원에서 그녀에게 비너스라고 닉네임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을 빼고는...
그녀를 비너스라는 닉네임을 거침없이 불렀던 사람은 장승백 뿐이었다.
그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지금은 그녀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살아생전처럼 그녀를 비너스라고 부르며 깨웠다.
흠칫 놀란 그녀가 눈을 뜨고 쳐다보니까 그녀의 바로 앞에 그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장승백 바로 그였다.
"나야, 유아존. 장승백."
그는 살아생전처럼 매력 넘치는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빠, 오빠가 어떻게?"
그녀는 한 번 더 흠칫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분명 그였다, 장승백. 더 이상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잘 살고 있었지?"
그가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그제야 그녀도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오빠가 어떻게?"
그녀는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우리 장미 보고 싶어서 왔지."
그는 미소를 잃지 않고 그녀에게 다정스레 말했다.
"나도 오빠 많이 보고 싶었어.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이제 안 떠날 거지? 장미 곁에 있을 거지?"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말문이 터졌다. 그리고 그가 안아주는 포근한 그의 품에 꼭 안겼다. 비록 살아생전에 다른 여자 문제로 그녀의 속을 썩이고 애를 먹였지만 막상 눈앞에 나타난 그를 보니까 그런 건 순식간에 잊어버린 듯 했다.
"이리 와 봐. 우리 연습해야지, 왈츠 연습. 곧 엘리트클럽에서 시범 있잖아. 연습을 너무 안 해서 오랜만에 장미랑 연습하려고 왔어."
그러면서 그녀를 사무실에서 학원 홀로 데리고 나갔다. 그녀는 그가 이끄는 대로 엉겁결에 이끌려 나갔다. 어느새 유아존은 댄스복으로 갈아입고 댄스화도 신은 상태였다. 살아생전 평소에 학원에서 레슨을 하거나 그녀와 연습할 때 그 복장 그 모습이었다. 그녀도 학원에서 평소 레슨 할 때 입고 있는 댄스복에다 댄스화를 신은 상태였다.
"자, 이리 와 봐. 한동안 우리 연습을 안 해서 몸이 굳었을 거야."
장승백은 벽사를 향해서 스타트 준비 자세를 취하고 섰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마술에 걸린 것처럼 이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