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의 순교 순국자
구연영 구정서 부자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에 이천중앙감리교회라는 교회가 있다.
1902년 8월 설립되어 어언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이다.
1904년 이 교회에 제3대 목회자로 부임하여 성실한 전도 활동과 애국 운동을 하다 아들과 함께 순교 순국한 이가 구연영 구정서 전도사 부자이다.
구연영(호 춘경)은 1865년 6월 20일 전통적인 무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교 교육을 받으며 자라고 그가 20세 되던 해에 선향인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평리로 이사하여 10여 년 간 농사를 짓는다.
그러나 1895년 6월 그의 나이 30세 때에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해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척사위정” 외치며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는 이천 지역의 의병 운동에 앞장서 중군장이라는 충책으로 300여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일본군을 몰아내기도 하는데 그 후 강화된 일본군의 공격과 의병 내부의 분열로 패퇴하고 해산하는 일을 겪는다.
그 후 구연영은 고향에 칩거하면서 자신의 투쟁과 생각을 정리하고 1897년 2월(32세), 스스로 남대문 안 상동감리교회의 스크랜톤 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당시 선교사를 배경으로 한 기독교는 동학도, 청.일 양국 군대도, 조선 정부도 침범할 수 없는 치외 법권적인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민중의 눈에 비쳐졌는데 이런 기독교회의 힘과 교회가 하고 있는 교육과 의료 선교 활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교인이 된 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집안에서 양반, 상인의 신분적 구별을 철폐하는 등 혁신적인 행동이었으며 또 전도인으로 변신해 개인과 민족의 살 길이 신앙에 있음을 외치는 일이었다.
그는 1899년 3월(34세)에 세례를 받은 후 쪽 복음을 파는 매서인이 되어 전도에 성심을 다하고 1902년(37세)에는 미 감리교 조선 매년회에서 권사로 임명을 받아 이천 지역 24개 교회를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된다.
동시에 그의 아들 정서도 권사가 되어 부자가 함께 이천 광주 지역의 교회들을 돌보게 된다.
그 후 다시 신학 연수 과정인 신학회를 통해 목회자의 자격을 구비하게 된 구연영은 1905년(40세) 정식 전도사 칭호를 받고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이제 구연영은 전도사가 되어 이천읍 교회를 비롯한 19개 교회,1천3백2명의 교인을 지도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구연영은 민족 운동을 놓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기독교 복음과 함께 민족의 현실을 계몽하는 강연을 계속하였다.
1904년 일제의 괴뢰 단체로 설립된 일진회에 대한 정체 폭로가 그의 단골 강연 주제였다.
일진회의 내막에 숨겨진 일제의 조선 침략 정책을 폭로하며 우선 눈에 띄는 경제 침략에 대항키 위해 국채 보상 운동을 교회 조직을 통해 추진하고 아들 정서와 함께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이천의 왜인들은 구의사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을 것이요, 배일자도 근절될 것이라며 구연영 전도사를 경계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와 전덕기 목사 그리고 이회영 권사 헐버트 선교사의 합작 기획 독립 운동 계획인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이 일어난다.
일제가 그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고 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는데 이른바 정미 의병 운동이다.
이런 구국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아주 강경하였다.
이러한 때에 구연영 전도사는 이천 지역에서 2000여명의 민중이 모이는 예수교 대회(구국민중 대회)를 개최하였고 이 일로 아들 구정서 전도사와 함께 피체되어 부자가 함께 총살을 당한다.
구연영 부자의 손을 꺾고 다리를 부려 뜨려도 끝내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자 이천 장터 미류 나무에 묶어 총살을 시킨 것이다.
그 때가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16일)로 구연영의 나이 44세, 아들의 나이 25세였다.
그 날 맑게 갠 하늘이 별안간 어두워지며 뇌성벽력과 함께 한 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졌는데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의인이 억울하게 죽어 하늘이 진노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구연영 전도사에게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한다.
그의 위패는 순국선열 사당에 이준 유관순 열사 등과 함께 모셔져 있고, 지금도 이천중앙감리 교회에 이 두 부자를 추모하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신(信)은 진실한 신념으로 상제를 신봉하고 기독의 교훈으로 죄과를 회개하고 진리의 삶으로써 완전한 인간의 기초로 삼자 함이요.
망(望)은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관존민비 의타사상 직업차별 미신허례 등 악풍폐습 타파개선하며 신교육을 흡수하여 현실 만에 낙심 말고 직업에 충실함이요.
애(愛)는 진정한 애의 정신으로 경천애인을 표어로 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며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며 정의로 단결하여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조국광복의 기초라"(춘경 구연영 선생 략전,독립혈사 권지이,179면).
이것이 구연영 전도사의 신앙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