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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낭비 / 사 42:1-9, 요 12:1-11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마리아가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값비싼 향유를 부어 발을 씻겨 드리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고난주간의 문턱에 서서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이 조그마한 사건을 깊이 생각해 보고,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예수께서 선교사업을 3년간 하시고 난 후, 군중들의 실망과 헤롯 안티파스의 권모술수 때문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배신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게 된 고난 사건 무렵에, 팔레스타인의 식민종주국인 로마제국에는 큰 정변이 일어났다. 당시 권력을 휘둘렀던 폭군 세자누스가 디베리우스 황제와의 권력 투쟁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대 총독으로 로마에서 파견되어 왔던 빌라도에게도 큰 타격을 주었고, 유대의 산헤드린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빌라도는 바로 실각한 세자누스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었고, 그로 인해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유대 산헤드린이 불안해지는 것은 로마제국 내의 정변이 바로 이들의 종교적 권력구조에 변혁을 초래할 가능성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빌라도 뿐 아니라 헤롯 안타파스 왕도 역시 똑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다. 더욱이 곧 닥쳐올 유월절인 해방절에는 거의 연중행사처럼 되어있는 유대 민족주의자들, 열심당원들의 항의 데모가 예상되었다. 그래서 이 불안한 정세 속에서 민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가 빌라도와 헤롯 안티파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산헤드린의 의장이자 성전의 대제사장인 가야바는 언제나 무사안일주의자였다고 한다. 무슨 방법으로든지 사고나 사건만 없으면 된다는 정치적 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야바는 유대 민족이 가진 반로마 제국주의의 감정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로마제국과의 타협을 통해서만 이 산헤드린의 권력구조가 유지된다는 이율배반 속에서 살아가는 위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마의 세자누스가 실각하고 사형에 처하게 되어 그 영향이 로마 식민지 유대 땅에 파급되면 제일 먼저 희생을 받는 것이 사두개인들이며, 또한 가야바와 산헤드린이 타격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의 해방을 기념하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대 지방의 정세가 이처럼 어수선한 때 바라바라는 사람이 로마제국에 항거하는 음모와 행동을 하다가 잡혀서 예루살렘으로 압송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요단강 가에 모인 많은 순례자들의 민족감정을 자극시켜서 주위의 분위기는 한층 긴장되어 갔다. 바라바가 과연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역사적 증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눅 13:1절 이하에 보면 갈릴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에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바로 바라바가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막 15:7절에 보면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어수선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가야바는 그의 부하들을 시켜 예수님의 행동을 일일이 감시했다. 왜냐하면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에게서 민족의 해방을 성취할 메시야를 찾아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가야바의 부하들은 이러한 군중들 사이에 끼여 들어서 예수님께 때로는 논쟁을 걸어보기도 하고, 그의 발언을 책잡아서 체포할 구실을 찾아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잘 파악한 가야바는 곧 산헤드린을 소집하여 예수를 잡아 죽이는 것이 민심을 가라앉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요 11:47절에 보면 가야바가 이 회에서 중대한 발언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만일 예수를 이대로 방치해 두면 민중들이 그를 따라 다니게 되고, 그 결과로서 로마인들이 유대땅에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유대 백성들을 짓밟으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가야바는 서슴지 않고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거 온 민족이 멸망을 면하는 편이 우리들에게 더 이롭다는 것을 모릅니까?’ 하고 반문했던 것이다. 이 발언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서 그 시각으로부터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은 확실하게 실천에 옮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오늘 본문 말씀에 기록된 것 같이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예수의 발을 씻는 일이 벌어졌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조촐한 만찬회를 가졌다. 이때 갑자기 마리아가 3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행사였으며 현실과는 매우 어긋나 있는 아름답고도 흐믓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사건이다. 이 상징적인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한 교훈을 배울 수가 있다. 이 기름은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일년 내내 일해서 받을 수 있는 삯에 해당하는 기름이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기름을 부으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 기름을 부었으며, 무엇 때문에 이런 낭비를 했겠는가? 유대 나라의 풍습에 의하면 임금이 왕 위에 오를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고 한다. 그리고 또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시체에 기름을 발랐다고 한다. 아마도 마리아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예수가 진정한 민족의 해방자로서 메시야 왕의 자리에 오르실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와 전혀 다른 뜻으로 이 상징적 행위를 해석하셨다. 민족을 해방시키는 메시야로서 이 기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시체가 되는 몸으로서 이 기름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기름부은 행위를 아름답다고 칭찬하셨다. 죽음을 향해서 한 발자국씩 전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과 인간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마리아의 생각이 어쩌면 이같이 다를 수가 있었을까? 그리스도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영광의 메시야로서 받들어서 하늘 위의 보좌에 앉으신 임금으로 모시는 마리아의 심정과,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자신을 비워서 만민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수치의 죽음을 감수하시려는 그리스도의 심정은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듯이 여호와의 말씀이 ‘내 생각은 너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의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신 말씀 그대로인 것이다.
우리들의 신앙고백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사도신경을 외우거나 기도를 하거나 성찬식을 하거나 세례를 받는 일 모두가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형태가 무엇이든 자기의 심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모두 넓은 의미의 신앙고백이다. 노래를 하든 사랑을 속삭이든, 또 서로 싸움을 하든, 인간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진실된 말, 거짓된 말 모두가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백의 밑바닥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역시 언제나 하나님의 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 따른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행위도 하나의 신앙고백의 형식이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하는 한 여인의 갸륵하고 아름다운 행위가 바로 그녀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고백마저도 예수 그리스도를 한없이 고독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갈 길,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는 길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고백이었기에 예수를 무한한 고독의 심연에 머물게 했다. 결정적으로 산헤드린에서 자기를 잡아 죽이기로 한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행진하는 고독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독을 모르는 인간은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의 고독의 결정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하는 기도에 나타나 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선고이다.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고 행하는 일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무서운 심판자의 선고인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데 누가 나타나서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당신은 모르고 있소’라고 한다면, 이것은 단순한 모욕적인 말이라기 보다 그가 하는 일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비판은 바로 그러한 심판인 것이다. 빛이 세상에 있으나 어둠이 이를 깨닫지 못하더라는 요한복음이 말씀은, 어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인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인간이 자신을 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람은 다 자신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자신을 아는 일이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알고, 내가 자신을 돌이켜 보아서 아는 길 밖에 없다. 남의 눈을 통해서 나를 안다거나 나 자신을 돌이켜 본다는 것은 결국 빛을 통해 어둠을 본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남의 눈을 통해서 저신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돌이켜 보지 못한체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이 바로 빛을 깨닫지 못하는 어둠의 세력의 본체인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로마 관원과 유대교 신자들이 바로 이러한 무리들이었다. 사탄은 언제나 이러한 독선과 교만을 낳게 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고백은 언제나 우리 자신의 회개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형제를 실족하게 하고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하지 않았는가? 예레미아 애가에는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심하고... 여호와께로 올라가자. 내 백성의 파멸로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나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나의 고난으로 생각하기를 원한다면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일깨워 주시고 주님의 고독을 이해하게 하시고, 땅보다 높은 하늘의 생각과 같은 주님의 생각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는 독선과 허영, 그리고 이해관계에 얽매여서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오늘도 이 땅 거리거리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들이 다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움직이는지 알고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오늘도 이 무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기름을 부었을 때 옆에 있던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했다. ‘왜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습니까?’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도둑이어서 돈주머니를 맡은 것을 기회로 거기 들어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기 때문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가룟 유댜는 현실주의자였으며, 모든 것을 이해타산으로 따지는 효율주의자였다. 한푼이라도 손해나는 일을 기피해 왔으며, 누구하고 딱 부딪치면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 이기주의자였다. 그가 주님을 끝까지 따라다닌 것은 자기 눈으로 그리스도의 끝장을 목격하겠다는 심정에서 였다. 그것은 이 현실주의자에게는 크나큰 도박이었다. 예수가 진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민족적 메시야라는 것이 최후 순간에 나타나게 될 경우 거기에 따르는 이해득실을 벌써 계산에 넣고 있었으며, 만일 예수가 끝끝내 무력하고 아무런 지도력이 없는 것이 입증되면 즉시로 배반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여인이 향유를 붓고, 주고 받는 말에서 그는 마지막 결심을 한 것이다. 마태, 마가복음을 보면 유다는 그 직후에 예수를 배반하고 대제사장에게서 돈을 받고 그를 넘겨주기로 결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리아가 영광의 메시야를 위해서 기름붓는 것을 예수께서는 죽음에 이르는 자기에게 붓는 것이라고 타일렀다. 이때 현실주의자인 유다는 즉각적으로 모든 사태의 귀결을 예견해 버렸다. 그리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300데나리온이면 빈민선교를 위해 쓸 수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좋을텐데 왜 이런 낭비를 하느냐고 질문했던 것이다. 분명히 유다에게는 값진 향유를 이렇게 쓰는 것은 낭비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에수께서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눌릴 자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시고, 때로는 궁색한 살림 속에서 저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평소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이러한 비싼 향유를 팔아서 저들을 도와주지 않고, 이렇게 써버린다는 것은 예수의 선교생활에 대해 기본적인 회의를 갖게 한 것이다.
현실주의자들에게는 명분보다 실리가 문제이며 실리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낭비인 것이다. 성전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시간이 낭비요, 성찬식에서 나누어 먹고 마시는 것은 떡과 포도주의 부질없는 낭비인 것이다. 그들은 한푼을 헌금하면 거기에서 어떤 성과가 나타나야만 흐뭇해지며, 인생의 모든 문제를 이와같이 이해타산으로 따진다. 손해보는 일을 한다는 것은 바보스럽고 멍청한 인간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낭비, 위대한 낭비가 무엇인지 모른다. 마리아의 향유는 아름다운 낭비이다. 아름다운 낭비를 할 줄 모르는 인생의 결말은 어두운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나 향유를 돈으로 환산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을 부정하는 일인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일은 하나님에 대한 제물, 곧 신앙고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교회가 하는 봉사사업과 일반 불신자들이 하는 자선사업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아름다운 낭비이며, 신앙고백 때문에 고난을 받는 일은 위대한 낭비이다. 사실 우리의 현실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일은 이러한 아름답고 위대한 낭비로부터 온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이해관계에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잘먹고 잘살아보기 위해서 부정한 수단을 쓰다가 법망에 걸려드는 사건이 가끔 언론에 보도된다. 잘산다는 일, 행복스러운 생활이 결코 물질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질적인 가치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많다. 참으로 잘사는 생활, 행복스러운 생활, 아니 평화스럽고 아름다운 나라를 이룩하는 길은 아름답고 고상하며 위대한 낭비를 할 줄 아는데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며, 진실을 찾아서 거짓을 버리며, 빛을 위하여 어둠이 세력과 마주서서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도록 애쓰며 기도하는 것이다.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 기름 붓는 이러한 낭비가 결코 낭비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지기 위해 파종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팽팽한 생존경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생활 속에 그윽한 향기를 풍겨주는 아름답고 희망에 찬 하나님의 백성들의 제사인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찬송으로써, 기도로써, 그리고 복음의 증언자로써 이 제사를 계속해야만 하다. 그리고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한 시편 기자와 같이 두려움없이 반석이신 주 하나님을 의지하고 우리의 갈 길을 한걸음씩 믿음으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1997-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