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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하니, 경주다
류인혜
경주는 내게 다정한 도시다. 전국의 도시마다 추억이 많지만 경주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묵직함에는 비할 수 없다. 전국구 경주는 서울에 비교하면 명동과 같은 곳이다. 명동과 이웃한 동네-충무로․소공동․북창동, 좀 더 영역을 넓혀서 을지로 입구와 남산까지는 그 시대가 만들어 가던 문화의 내면을 보려고 헤매던 곳이다.
그곳에서 영화와 연극을 관람하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으면서 예술이 주는 감동의 무한한 영역을 경험했다. 또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그림책을 사고, 크고 작은 전시회를 관람하며 그림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 명동에 있었던 문예서점에 자주 들락거리며 출판에 대한 최신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이 모든 일들이 글을 쓰는 일의 기본이 되었다.
서울의 명동바닥에서 소곤거리고 복닥거리며 새로운 문명이 주는 재미를 누렸다면, 전국구 경주는 내면으로 숨어들었다. 한순간에 지나가버리는 흥미로움이나 새로운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뼈 속까지 깊이 스며드는 각성이었다. 두 도시가 주는 상반된 감정, 너그러움과 긴장이 서로 호응하며 앞서 달려가고픈 정신의 성장을 도왔다.
포항을 향해 가다가 경주에서 쉬었고, 울산을 향해가면서도 당연히 경주에 들렸다. 경주와 함께 일어난 사건은 아주 많아서 뒤섞여 있다. 두서가 없어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 해야만 된다.
첫 번째 방문인 초등학교 수학여행에서부터 경주는 바짝 다가왔다. 분황사 3층탑 앞, 불국사 계단, 안압지 등에서 찍은 기념사진이 남아있다. 남들이 다가는 수학여행이 초점이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분황사에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일행을 만났던 일이다. 신문과 영화관의 뉴스에서 보았던 분을 실제로 대하는 놀라움과 검정색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움직여가던 그 광경이 강하게 각인되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친구들은 가까이 가서 악수까지 하며 환영을 했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들에게 멀리 떨어져 서 있어도 가슴이 크게 뛰었다.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과 같이 떼를 지어 움직이는 무리는 주변에 두려움을 준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만남이 강한 무리에 대한 경계를 가져다 준 계기가 아닌가 싶다.
어느 날 경주근교의 양계장을 방문했다. 같은 교회, 같은 학교에 다녔던 후배가 목회를 하는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내려갔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쩌나, 만나서 손이라도 잡아주어야 한다고 나섰다. 소록도, 음성, 부평 등 소문으로만 들었던 한센 병자들의 거주지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보문호 주변이 개발되자 그들은 오래 살았던 집단 거주지를 떠나게 되었다. 새로운 곳에 자리 잡았으나 부근 마을의 주민들에게 거부당하고 있었다. 한센병은 치료가 되면 전염 되지 않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 않았다. 그들이 닭을 키워 얻어낸 계란도 가까운 동네 사람들은 그냥 주어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선물로 받은 계란 두 판을 서울까지 들고 와서 식구들에게 먹이고 나도 먹었다.
서정주님의 시 <문둥이>를 외웠고,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을 걷다가 신을 벗으면 발가락 하나 떨어져 나간다는 한하운의 <전라도 길>을 읽으며 울었지만 막상 그들의 실상을 듣자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 곁에서 예배드리며 위로의 말씀을 전하는 후배 부부의 결단에 놀랐다.
다른 뚜렷한 정신의 매듭은 개인시집 《은총》을 발간한 후의 경주여행이다. 젊은 시절에 같이 책을 읽고 시를 쓰며 시화전을 열었던 친구들이 오랜만에 그곳에 모였다. 울산에 거주하는 친구의 안내로 경주 시내를 돌아보고 석굴암에 올랐고 현대호텔에서 일박을 하며 보문호숫가를 산책했다. 일부러 들고 간 시집을 대하는 친구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떨어져 지낸 세월만큼 생각과 처지가 확연히 달랐던 것이다. 각자 현재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애를 썼다.
오랜 친구들과의 여행은 이제 다른 모양으로 살고 있는 환경을 비교할 수 있어 깊은 의미를 주었다. 아무리 각별한 사이라도 내 인생이 다른 사람의 인생과 섞일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남의 염병보다 내 고뿔이 더 중하다는 속담을 이해했다.
마음이 어떠하든지 산책을 하던 길의 벚나무 단풍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아름다움도 잠시, 결국 떨어져서 밟히는 낙엽으로 향하는 우리의 연륜이 벅차서 <경주의 가을>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썼다.
가장 큰 자취로 남게 된 경주의 추억은 2012년 9월의 국제펜대회이다. 1970년 처음 우리나라에서 펜대회가 열릴 때, 신문에서 기사를 오려 스크랩 하며 결심했다. 언젠가는 나도 저곳에 설 것이다! 목적을 가지고 몰두하여 그 일이 꿈처럼 이루어졌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자유토론, 세미나와 낭독회 등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며 문인으로서 세계를 향해 당당히 어깨를 폈다.
새벽마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 물안개 자욱한 보문호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책했던 혼자만의 시간은 선물에 따라온 덤으로 소중했다. 가장 만족했던 부분은 호텔에서의 식사였다. 깨끗한 옷을 입고 단정히 앉아서 정중한 도움을 받아가며 맛을 음미하는 즐거운 시간을 만끽했다.
어느 날 점심으로 나온 배추백김치와 어울린 불고기의 마력 같은 맛은 오감을 자극했다. 여러 날의 빡빡한 일정으로 입맛을 잃은 분들도 일으켜 세웠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부르짖는 ‘어머니 맛’이라는 환호처럼, 숯불을 피운 풍로에서 구워지던, 불 냄새가 스미고 식감이 부드럽던 바로 그 불고기 맛이었다. 경주의 숯불불고기는 전에도 맛을 보았지만 솜씨 있는 주방장이 만든 수준 높은 맛을 경험한 것이다.
국제펜대회 이후 경주시에서는 기념 도서관을 건립했다. 모아 둔 책들을 기부하고 개관식에도 참석했다. 그곳 마당에 놓을 의자를 증여받고 있다는 경주시장님의 수필의날 축사를 들었다. 경주에 와서 편히 앉아서 쉴 내 의자에 대한 유혹은 또 다른 의미의 매듭이 생기는 일이다.
잊어버린 척 시침을 떼고 싶지만 경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건을 빼놓으면 은혜를 모르는 매우 나쁜 사람이 된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 여행비를 내지 못해 떠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잘 다녀오라고 인사는 해야 되었다. 기차역으로 배웅을 나가자 일행 중에 아버지의 친구 분이 있었다. 무조건 집으로 가서 여행 준비를 해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얼떨결에 숨이 차도록 달려와서 허둥지둥 보따리를 챙겨나서는 나에게 할아버지께서는 100원을 주셨다. 그 돈으로 할아버지께 효자손을 사드리고도 얼마 남았다.
경주에 도착하자 여관으로 아버지의 경주중학교 친구 분들이 오셨다. 그분들은 선생님이신 친구를 만나러 와서 일부러 나를 찾으신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잘하라고 누누이 당부하여 대답은 하면서도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다음 날 불국사로 걸어가던 중 소나무 그늘에서 쉴 때, 아버지의 다른 친구 분이 슬그머니 용돈을 챙겨주셨다. 아버지 주변에 의리를 지키는 경주중학교 출신 분들이 그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 그때는 부끄럽기만 해서 아무 말도 못했지만 친구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살펴주신 그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요즘은 긴 다리를 놓아 김유신 장군이 바짝 당겨져 있지만 그때 수학여행에서는 김유신 장군의 무덤을 보러 냇물을 건너서 갔다. 경주 시내의 많은 무덤을 보고도 또 다른 무덤 하나를 보려고 물을 건너 산길을 하염없이 걸어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복 바지를 걷어 올리고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시건방진 폼으로 건너던 물속에서 사진을 찍은 후에야 부끄러움이 많이 진정되었다.
아! 언니이야기를 빼놓을 뻔했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언니는 어떤 연줄로 경주우체국에 취직을 했다. 알뜰하기 짝이 없던 언니는 월급을 받게 되자 객지의 동생에게 조금의 용돈을 보내주어 움츠리고 있던 내 기운을 돋아 주었다. 새로 나온 우표도 가끔 편지봉투에 넣어 주어 그것이 더 기뻤다.
여름방학 때, 언니를 만나기 위해서 경주역에 내려 벌판 같던 역전광장을 지나 경주우체국까지 걸어갔다. 그 길이 얼마나 멀고 또 더웠던지 천지가 하얗게 보였다. 수필의날 행사에서 양동마을을 방문했을 때, 모두 무더위에 지쳐 혼이 났던 이야기를 했다. 원래 경주에는 비가 잘 오지 않고 무덥다. 그 한 여름 무더위의 빛이 바랜 하얀 세상을 수필가들이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언니는 여름휴가를 내고 사라져 우체국에도, 물어물어 찾아갔던 자취방에도 없었다. 혼자 할 일이 없으니 언니의 원피스를 빌려 입고 시외버스를 타고 포항 송도해수욕장으로 가서 수영복 입은 사람들 틈을 걸어 다니다가 심심하여 유람선까지 타보았다. 다음날은 불국사를 거쳐 석굴암까지 올라갔었다. 덕분에 석굴암의 부처님과 벽에 조각된 보살님들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혼자 다니던 이틀 동안에 관심을 갖고 접근하던 여러 종류의 낯선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났던지, 버스 옆 자석에 앉았던 군인아저씨는 일부러 내려가서 커다란 포도송이를 사와서 권하기도 했다. 그 짧은 여행은 내게 홀로 설수 있도록 담력을 키웠다.
불국사는 경주의 대표적 문화유산이며, 우리나라의 보물이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서 3권까지 경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3권에는 불국사에 관한 기사가 상, 하로 나뉘어 들어 있다. 모름지기 불국사를 보려면 그 책을 들고 현장에 서야 될 만큼 유익하고 자세한 설명이다.
수필의날 행사의 일환으로 불국사를 찾았다. 수백 명의 회원이 줄을 서서 경내로 들어갈 때, 경로 대상자와 아닌 사람을 단박에 가려내던 어느 여인의 눈썰미가 화제가 되었다. 경주의 불국사이기에 가능했던 신기명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석가탑과 다보탑 보기를 포기하고, 주차장 주변의 의자에 앉아 잘 자란 나무들을 보았다. 저쪽 나무그늘 밑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모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경주의 많은 유적들은 그렇게 방문하는 사람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옛날 옛적의 이야기는 아무리 풀어도 끝이 없다.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가 지니고 있는 것은 그런 넉넉함이다. 고향으로 가서 이웃 아주머니를 만난 듯 편안하다. 경주를 생각 만해도 마음이 꿈틀거리는 이유는 경주는 그렇게 나를 감싸 안으며 사람의 도리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경주를 통해서 겪은 사건들은 내게 염치를 알게 했으며, 아무리 부끄럽더라도 그 부끄러움이 자존심을 뛰어넘어 감사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되는 이유를 깨닫게 했다.
경주는 만날 때마다 내 인생에 필요한 보물을 한 가지씩 내어준다. 수십 년 놀던 마당, 경주에 서면 신을 벗고 맨발로 달리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수필의날 문집 《신라의 꽃》 2013년
류인혜(柳仁惠) innhea@hanmail.net
《한국수필》 1984년 봄호 수필 <우물>로 추천완료
《현대시조》 1985년 여름호 시조 <낮도깨비>로 추천완료
한국수필작가회 제9대 회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이사 역임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서로다독독서포럼 회원
수필선집 《마당을 기억하며》, 테마수필집 《나무에게 묻는 말》, 시집 《은총》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PEN문학상, 제11회 한국문협작가상
첫댓글 경주에 대한 추억의 편린들이 감동적입니다. 저도 어린시절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래도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감사합니다. 류인혜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