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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JANKÉLÉVITCH
LA MUSIQUE ET LES HEURES
ÉDITIONS DU SEUIL, JUIN 1988.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음악과 시간들, SEUIL, 1988.
* 이글은 장켈레비치의 쇼팽에 대한 음악철학적 비평의 한 꼭지이다. 특히 여기에서 쇼팽 음악에 대한 ‘적당하게’ 구체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이 실례의 부문이 끝이 아니라 그의 음악철학을 개진하는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앞뒤로 있는데, 내가 이 부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 부분만을 번역하였다.
4. 쇼팽과 밤
1. 스케르조, 발라드, 판타지
여태껏 가장 절묘하게 세련되고, 가장 우아하며, 가장 "예술적인" 형태에 속하는 충동적인 내용들[Des contenus impétueux] - 이것이 바로 쇼팽을 거의[presque] 독특하게 만드는 것이다. 말러와 휴고 볼프, 고통스럽고 애처로운 영혼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끝없이 하는데, 성실성이라는 서술할 수 없는 권리들이, 그들 처지에서는, 항상 모양새가 없거나 해쳐진 형태에 있는 차림새와 소홀함들의 넝마를 변명한다. 반대로, 생상스의 음악은 언제나 멋을 부리지만, 그 진실성은 언제나 그 아름다움, 즉 형식적 완벽함의 높이에 미치지 못한다. 쇼팽은 감탄스러울 만큼 풍미있고 조화로운 화음을 갖고 있는 동시에 음악의 진실을 열정적으로 겪는다; 심미적이고 심지어 멋스러운[dandy] 면까지 갖춘 그의 작품은 밤의 고독 속에서 깊이 살아가는 비극적 경험을 우리가 신뢰하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선 디오니소스의 몫, 소위 자유의 몫이 있다. 내용들의 참기 힘든 소란은 전통적인 틀을 깨뜨린다; 분노, 공포, 희망, 자만심, 이 밤의[nocturne] 마음속에 떠들썩하게 몰려드는 고뇌, 그리고 열정의 폭풍이 음악적 '장르'를 가르는 장벽을 허물어 버린다. 각각의 장르가 전체 장르가 된다. 쇼팽에게 건축학적 권능이 결여된 것은 아니었다. 소나타들과 협주곡들은 건축가로서의 그의 재능을 충분히 증언한다. 그러나 두 개의 위대한 소나타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자. B플랫 단조 작품 35번[si bémol mineur opus 35]과 B단조 작품 58번[si mineur opus 58]. 후자는 게다가 더 규칙적인 편집이 있고, 덜 영감받으며, 첫 번째 악장의 재노출 이후에, 변조된 발전부가 있는데, 이는 약간 고되고, 뒤따르는 노래하는 듯한 경이로운 발산에 비하면 매우 생경하다. 확실히 문법학자는 이 "소나타들"에서 두 주제, 재노출과 나머지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소나타 형식은 단지 프로토콜일 뿐이다. 소나타라기보다 시에 가까운 Opus 35는 네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얼마나 이상하고, 바로크적이고, 괴물 같은 “악장들”인가! 천둥소리 같은 초기 알레그로는 차차로 무거워지고, 아지타토, 소스테누토, 스트레토로 발을 구르며 얼이 빠지게 한다. 악마적인 스케르초, 일종의 메피스토 왈츠인데 트리오의 신성한 소강 상태에 의해 중단된다. 장례식 행진1; 그리고 모든 것의 끝, 모든 끔찍하고 기가 막히는 피날레는 공황[la panique]일 뿐이고, 분노에 빠진 3연음표의 떠들썩한 쇄도는 심층들 속에서 시작하여, 거대한 함성 지점 위에서, 이것을 통해 전부가 끝날 그 외침 위에서 끝난다. 이는 4막 마지막에 나오는 멜리장드[Mélisande]처럼 제 운명의 에리니에스들[les Érinyes]에게 쫓기며 어두운 밤 속으로 도망치는 사냥당하는 남자이다. 소나타 피날레, 이 숨막히는 추격전? 대신에 절망에 관한 논문이라고 말해보자. 회귀[le Retour]를 저버린 안녕들의 소나타. 이것들의 결론들을 꼼꼼히 볼뿐더러, 판명함과 우아에 마음이 팔렸고, 또 마법에 빠진 자기 섬나라 속에서 예술 작품의 아름다운 정원을 둘러싸는 데 관심을 쏟는 한 예술가에게, 궤주(潰走)와 인간 사냥의 이 피날레는 정녕 어떠한 공황의 고뇌를 재현하는가! 건반 위에서 유니종[à l’unisson, 일제히]으로 오르내리는 두 손은[274] 이상한 악몽의 모습을 그린다. 장송 행진곡[Marcia funebre]은 장엄한 행렬이라, 미사 행렬들이 줄 잡힌 걸음으로 영원한 휴식의 장으로 나아가는데, 여기 광란의 질주와 가여운 패주가 있으니 : 재앙에 놀란 인간은 몸가짐이 완전히 망가진 채로, 형상 없는 어둠들 속으로 달아난다. 시이자 환상곡이고 소나타인 l'opus 35는 새로운 전통의 기원인데, 리스트의 한 악장으로 된 화려한 단조 소나타[la géniale Sonate en si mineur]가 따라가는 바일뿐만 아니라, Serge Liapounov와 Alexandre Skriabine가 소나타-환상곡들이라고 이름붙인 더욱이 광대하고 변덕스러운 디오니소스적인 시들이 따라가는 바이다.
쇼팽이 실천한 모든 "장르"에는 동일한 승인의 표식이 담긴다. 그에게는 드뷔시처럼 사물의 역사에서 정적인 이미지나 순간적인 절단이 있는 서곡이 없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소개하지 않는 도입, 보류가 중단되지 않은 진행부의 서문이 있다. 전주곡은 결코 전주를 멈추지 않는다. 우아와 시흥의 상태를 창조하려 자기 기타에서 악기 연주자가 뽑아낸 어떠한 아르페지오들, 염감을 불러일으키려, 닫힌 정원과 산문적인 일상성을 나누는 문턱을 넘으려는 그것들, 이러한 더듬거리는 음표들은 전주곡의 모든 주제를 형성한다. 서문[le préambule]이 작품 그 자체가 되었다! 간결함, 즉흥성, 즉 작품 속 음절이 싹트고 더듬거리며 끊임없이 만지작거려지는 영감받은 상태, 이것들이 전주곡의 유일한 규칙들일 것이다. 이 형식에는 형식이 없다. 이 장르는 차이가 나는 장르, 모든 장르를 담고있는 혼돈의 성운이다 : 따라서 신성한 예감은 시 작업으로 된 시적 상상작용의 모체에 잠들어 있다 : 전주곡 2번과 4번 (en mi [P275]mineur) . 9번 (en mi majeur), 13번 (en fa dièse majeur)은 진정한 야상곡이다; 7번 (en la majeur)은 마주르카이고 23번 (en fa majeur)은 즉흥곡이다. 20번 (en do mineur) 장례식 행진곡; 10번 (en do dièse mineur), 18번(en fa mineur), 24번(en ré mineur)은 스케르초들이다. 1번 (en do majeur), 5번 (en ré majeur), 8번 (en fa dièse mineur), 12번 (en sol dièse mineur), 19번 (en mi bémol majeur)은 연습곡들이다. 등등. 그리고 드뷔시의 각각 전주곡이 객체적 인상, 빛나는 진동이라면―"아나카프리의 언덕", "La Puerta del Vino", "Voiles", "Brouillards", 쇼팽의 전주곡은 무곡 또는 애가인데, 밤의 유머이며 파토스의 환상스러운 변덕, 소위 우스운 주체성이다. 그리고―아르페지오들, 스타카토들, 3도, 6도, 옥타브들...로서― 모든 피아노의 장르들을 재생산하는 에튀드들도 마찬가지이다. 야상곡(en mi majeur 3번, en mi bémol mineur 6번, en do dièse mineur 19번), 스케르초(en do dièse mineur 4번, en la bémol majeur 9번, en mi mineur 17번), 즉흥곡(en sol bémol majeur 5번, en la bémol majeur 13번, en fa mineur 25번). 즉흥곡은, 첫 번째와 세 번째 즉흥곡처럼 반짝이는 알뷤블라뜨[Albumblatt]이든, 이 작품들의 부드럽고 활기찬 생동감은 이미 포레의 특성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데, 아니면 두 번째처럼 꿈꾸는 듯한 둠카[doumka]이든, 날아다니는 변덕과 즉흥연주의 천재성을 뜻하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바로 Scherzo들 안에서 상상작용의 비행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대담하다. 네 개의 눈부신 프레스토 - 처음 세 개는 단조 [P276] 음조로 모두 보라색 불꽃과 커다란 비극적 섬광으로 타오르고 있으며1, 네 번째는 나 장조의 빛나고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미 장조의 푸른 소리의 곡으로, 아리엘의 섬을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서 공기의 정령들이 올라갔다 내려가고, 잠자리의 발레처럼 소용돌이친다... 이것은 세 개의 온불[Feu]의 시들 후에 나오는 공기의 시와 같다 : 이처럼 뷔르템베르크[wurtembergeoise] 축제의 문[la lourde]이 되었던 것, 낭만주의자들이 스케르초라 불렀고, 교향곡의 처음 두 악장 후에 기분 전환을 위해 사용하던 것이 바로 이렇게 변모했다. 멘델스존이 스케르초에 수다스러움과 유머를 도입한 것은 사실이다. 《한여름 밤의 꿈》과 특히, 슈만의 곡이 너무 점잔빼고 있게 보이게 하는 멘델스존의 《스케르초 아 카프리치오》 바단조는, 스타카토, 피치카토, 프레시시모의 왕국을 그려내며, 헬리콘의 모든 꿀벌들이 윙윙거리는 세계를 형성했다. 다만 그곳에는 비극의 차원이 부족했는데, 바로 그 비극이 첫 번째 스케르초의 번개 같은 화음과 함께 나타난다. 이 첫 번째 스케르초는 네 곡 중 가장 멘델스존적인 곡이기도 하다. 스케르초의 징후들 - 변덕, 시흥, 어두운 아이러니, 자유로움 - 은 스케르초라는 제목이 붙지 않은 쇼팽의 많은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번뜩이는 섬광들로 가득 찬 세 번째 소나타(바단조)의 눈부신 피날레는 일종의 다섯 번째 스케르초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다른 섬광들, 비극적인 공구(恐懼)의 섬광들이 두 번째 것인, 스케르초 B플랫 단조의 하늘에 줄무늬를 넣는다: 세 번째 소나타가 첫 번째 스케르초와 같은 조[le ton]로 쓰여졌다면, 두 번째 스케르초는 두 번째 소나타와 같은 조를 선택했다. 두 팔로 피아노 전체를 누비는 제멋대로인 비르투오소의 연주가 돋보인다. 이러한 광채들, 폭력들, 감탄 부호들은 번개의 요동들이다 -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북극과 남극 사이에서 번쩍이는 볼타의 불꽃이 어둠을 가르는 것이다. 이러한 암울한 섬망의 전기 충격에 의해 신경은 심하게 요동친다... 낭만주의 유럽이 노발리스와 자연철학 이후로 전기와 갈바니즘의 발견에 얼마나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을까? 고전주의 시대의 '주피터' 교향곡들이 알지 못했던 이 갈바니즘의 유체는 프레데리크 쇼팽의 네 개의 스케르초를 전기 충격으로 가득 채운다. 마치 멘델스존의 기상곡[les caprices 변덕들]이 마비가 풀린 것처럼, 쇼팽의 작품에서는 감정이 갈바니즘의 격동처럼 격렬해진다.
네 개의 스케르초는 그 높은 긴장도와 속도로 구별되며, 네 개의 발라드는 보다 긴 호흡의 작품으로서, 그 발산의 서정적 확대를 통해 구별된다. 이들 열정 가득한 거대한 표출[l'épanchement]은 차례대로 애절하고 격렬한데, 그리하여 모든 음조와 옥타브를 넘나든다. 리스트의 두 개의 발라드와 마찬가지로, 쇼팽의 네 개의 발라드는 환상곡이나 소나타-환상곡들과 혼동되는 경향이 있다. 이 네 작품 모두 바르카롤의 유연한 리듬을 채택하고 있으며, 모두가 광란의 가속도로 끝나고 (특히 네 번째는) 고도의 비르투오소적 기교를 펼친다. 어디에서도 소나타의 강하게 구조화된 골격은 찾아볼 수 없다. 네 곡 중 가장 디오니소스적인 곡인 바장조의 두 번째 발라드는 슈만에게 헌정되었는데, 이는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 발라드는 우습게[humoresque] 열광스럽기 때문인데, 모든 그의 작품은 대조되는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두 분위기[deux humeurs]들을 나타낸다 : 즉 피에로와 아를레킨, 유제비우스와 플로레스탄을 강렬한 극성의 긴장 속에서 서로 대면시키고 충돌시킨다. 첫 번째 분위기는 목가적인 감미로움, 푸른 하늘, 거의 봄에 가까운 상쾌함이 F장조의 상냥한 목가(牧歌)로 내뿝어지는데, 이는 정점에서 갑자기 녹아 내리는 A단조의 거친 프레스토 콘 푸오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 그것을 무너뜨려라. 운명의 예상치 못한 타격들처럼, 갑작스러운 재앙처럼 조용한 행복의 뱃노래를[barcarolle] 깜짝 놀래켜 발작하게 하는 것처럼. 폭풍은 조금씩 잠잠해지고, 부드러운 조절 음계를 통해 짧은 전원시가 무구하게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분노와 공포, 흑색 섬망으로 인해 달콤한 안단티노가 다시 한 번 목을 조른다. 이 교대, 트레몰로들이 위협하는 으르릉거림 아래에서, 제 차례에 고뇌를 통해 얻어낸 목가가 라단조로 다시 나타나는데, 이는 섬망, 거친 분노, 헐떡거림, 약동일 뿐인 프레스토에 이른다. 목가는, 사실일진저, 마지막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조의 회색빛으로 만료된다; 전혀 잠잠해지지 않은 고요. 대위법을 작동하려는, 화해하게 하려는, 진정케 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다. 대립주제는 종합주제로로 해소되지 않는다. 전체 비극적 운명을 구성하는 모순의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분위기들은 풀리지 않는 이원론 속에 병치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대립주제는 리스트나 휴고처럼 대조의 마니교적 효과가 아니라 경험되고, 죽도록 경험되는 것이다. 그리고 80소절의 자장가가 첫 번째 스케르초의 광란의 돌진을 잠들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스케르초에 최종적인 평온함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번째 발라드의 부조리한 찢어짐도 다시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천재적인 환상곡 파 단조 Opus 49는 2년 전에 4번째 발라드 Opus 52에 형제와 같이 가까울 정도로 이 모든 섬망의 요약과 같다. 환상곡이라는 제목이 붙을 만하다 : 그 도약들을 조절하는 권능은 온이성이나 온로고스라기보다 온상상작용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Opus 49는 Fantasiestück이며, 광적 환상곡 작품이다 : 왜냐하면 그것은 물론 이것, “속이는 권능”이 신성한 광기의 영감, 오이아파비아가[Oeia pavia]가 되기 때문이며, 그것이 이것, 디오니소스제의열광같은[orgiaque]것, 열띤것, 환상적인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환상을 보는 호프만에게 야릇한 생각을 받아쓰게 했고, 그리고 마법사 노발리스의 후계자 슈만에게 규칙을 벗어던지는 그러한 몽상들을 받아쓰게 했다. 부제에 "환상"이라는 단어가 나타날 때마다 그것은 엄격함의 완화, 승인, 시적인 근사를 고지한다. 베를리오즈는 반항적으로 가장 자유분방한 환각이 발전부를 대신하는 교향곡을 "환상적[fantastique]"이라고 부른다 : 뮤즈를 인도하는 아폴론[Apollon musagète], 아편과 몽환에 만취한 채, 디오니소스처럼 비틀거리니.
"폴로네즈 환상곡"은, 호전(好戰)의 행진이 우수들과 야릇한 생각들[les lubies], 부드러움들과 엄청난 광기의[lunatique] 도약들을 알게 될 것임을 표현한다; 몽환적인 루바토는 종종 리듬들을 완화한다; 사실 나는 l'opus 61에서 폴란드인의 서사적이고 군인과 같은 엄격함을 어떠한 무심함이 누그러뜨리는지 모른다. 스크리아빈이 소나타-환타지라고 부르는 황홀경과 카오스의 시들, 그 방대한 디오니소스제의 작곡들 속에서 리듬들은 쇠락에 돌입한다. Fa 단조의 조성이 발라드 4번과 협주곡 2번 모두에서 나타나는 만큼이나 이 환상곡에서는 여덟 가지 근본적인 요소들이 구별될 수 있다 : 한 걸음씩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일종의 장례 행진곡인 치명적인 서주; 9개의 서로 다른 음조를 거치며 고양되고 전개되는 큰 변조들의 아르페지오들; 심지어 건반들 위로 파우스트의 폭풍우를 풀어놓는 두 번째 소나타를 불러들이는 걱정, 고뇌, 좌절이라는 길고 숨막히는 주제 : 이것이 환상곡의 중심 주제이다. 희망의 주제는 A플랫 장조의 빛살을 퍼뜨리는 날카로운 음조 속에서 이에 응답한다; 그런 다음 [P280] 나타난다 : 거의 리스트 식의 반음계 테마. 왕성한 긍정의 테마; 먼 곳의 영웅적인 행진과 유사한 열광의 테마; 마지막으로 쇼팽의 경우처럼 찬송가를 모아들인 음향들. 전쟁, 믿음, 죽음, 열병과 무기력, 의심과 열렬한 희망, 새로이 자포자기, 그리고 무한한 피로, 이것이 이 소란스럽고 심오한 페이지에 요약되어 있는 인간의 운명 전체이다.
합리적 규율의 무질서와 패배는 오히려 자장가[Berceuse]에 있는 마법의 효과이다. 리스트의 D플랫 장조 자장가와 발레키에프의 자장가, 가브리엘 포레의 가라앉는 음악들은 다소 직접적으로-이 유명한 페이지에서부터 진행한다. 그러나 포레에게 영혼의 고요와 침착으로의 유도를 뜻하는 잠으로의 초대와 달리, 쇼팽에게 최면술은 경직된 형식들의 해체, 모든 리듬들의 액체화와 형식 없는 순수 내용들의 해방과 다른 것이 아니다. 넋을 놓고 졸음에 몰리게 하는 마비를 방법으로 해서 말이다. 명석한 자, 《페넬로페》와 《아폴론 찬가》의 고대 그리스 음악가는 결코 현기증을 통제하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정확성에서 평온함을 찾는다. 쇼팽은, 아아, 그 “넓고 부드러운 평정”을 찾을 시간이 없겠다, 이는 열세 개의 야상곡과 하나의 레퀴엠이 우리의 고뇌에 쏟아붇는 향유였는데. 이 달래지지 않고, 타협이 없는 작품 속에는, 올림피아의 현자들이나 스토아주의자의 수긍[acquiescentia]을 위한 자리는 없다. 사람들이 말하건대, 장수 자체가 이미 가브리엘 포레에게는 지혜로운 가르침이다! 누가 꽃피울 때 결핵으로 꺾여버린 짧은 인생의 장엄한 리듬들을 그렇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탁월하게도 포레 식 템포, [P281]그것은 알레그레토의 조용한 속도로, 성급히 열띠거나, 미치듯 급강하는 일 없이, 마치 들판을 산책하는 것처럼 적당히 활기차다. 그러나 쇼팽은 Scherzos의 현기증 나는 프레스토에서 자장가의 척추가 없는 것 같은 센차 템포로 열광하여 통과한다 : 잠의 현기증은 견고한 리듬을 무너뜨리고 음표의 우글거림을 종용한다; 보이지 않는 최면술사가 감각을 마비시킨 음악은 카덴차의 급격하고 화려한 악구들[les traits], 3도 16분음표 3연음들, 그루페토들, 스타카토 코드들, 작은 음표의 급격하고 화려한 악구들 및 32분음표의 소나기 사이에 졸리게 꾸물거리고 있지만, 왼손은 완고한 베이스로 이러한 장엄한 통행들을 박자에 맞추어 연주한다. 자장가, 모든 우수들의 서설(recesnsion)은 느리기보다는 홀려있다; 평화롭기 보다 매료되어 있다 : “우울하고 현기증 나게 우수어린 왈츠” 모든 것이 전복되고, 모든 것이 난파선의 관능적인 실신 속 어둠에 잠기고 빙빙 돌면서 심연에 빠진다. 1845년의 자장가를 들으면서, 현대인들은 제 걱정의 진정제를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항상 깨어있게 하는 불면증이 전혀 치료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자체로 스스로 증명했다. 그러니 깨어있으라!걱정에 빠진 사람은 아편과 해시시로만 잠들 것이다 : 왜냐하면 잠은 그를 끌어들이는 휴식이 아니라, 그를 아연실색하게 하는 비-존재[le non-être]이기 때문이다; 카오스로의 회귀에 대한 유혹과 비-존재. opus 60 뱃노래의 유동성은, 19개의 야상곡들의 반음계적 루바토처럼, 모든 엄격함의 포기를 스케르초들에 만취한 의식에게, 영속하는 그러한 움직임[악장] 이후에는, 만성이된 낮잠에, 넘어간 의식에게 권유한다. 돌체 스포가또[Dolce sfogato]: 이러한 8분음표 7연음들은 그것들 식으로라면 퇴폐의 징후가 아닌가? [P282]감각들[의미들]의 패주는 과한 고양되기, 과한 희망, 과한 고통을 남기는 무한한 권태[l'infinie lassitude] 속에서 이루어진다; 일종의 죽음인 넋이 나가는 무질서[le ravissant désordre], 일종의 죽음인, 그것이 인간을 차지한다.
[P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