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계가 따라올 수 없는 장인의 손
"무형문화재는 공장에서 가동되는 기계와 틀려.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려"
"딱 딱 딱~" 경기도 부천시 도심 한 가운데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집 밖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새어나온다. 그 소리를 따라 공방에 들어서자 벽면을 가득 채운 서각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방 한가운데는 얼굴에 하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노인이 나무에 뭔가를 열심히 새기고 있다. 이곳은 경기 무형문화재 서각장(書刻匠) 이규남(62)씨의 공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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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업을 하고 있는 경기 무형문화재 이규남 서각장.
서각이란 나무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그 종류는 크게 목판과 현판, 주련으로 나뉜다. 목판은 주로 옛 목판을 재현하며, 현판은 고궁과 사찰에서 쓰이는 것을 말한다. 주련은 기둥에 시나 격언 같은 것을 새기는 것을 말한다.
1968년 이규남 서각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강화도 전등사에 놀러갔다 팔만대장경판을 보게 되면서 그의 운명은 시작됐다. 팔만대장경판에 새겨진 화려한 글씨에 매료돼 순간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또 그것에서 전해오는 짜릿한 전율이 그의 머리끝을 쭈뼛 쭈뼛 서게 만들었다.
그 이후 그는 서각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 나무를 구해다 이웃집 문패를 만들어줬다.
서각을 배우기 위해서 백방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1969년부터 3년 동안 목공예 학원을 다녀보기도 했지만 서각이 아닌 목조각을 가르쳐서 그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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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규남 서각장이 사용하는 서각 칼.
"야자 껍데기에도 새겨보고 이 방법 저 방법 흉내만 냈죠. 지금 생각하면 참 조잡했어요. 그런 일들을 20년 가까이 했으니…"라며 지난날을 회고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81년 여주군청에서 이 서각장이 근무하던 시절 덕원미술관에서 오옥진(중요무형문화제 제 106호)선생의 전시가 열렸다. 작품을 보자마자 그는 "바로 이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오옥진 선생에게 찾아가 배우겠다고 청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세 번, 네 번 애타게 찾은 그가 진실 돼 보였는지 결국 오 선생의 허락을 받았다. "허락을 받은 그날 2km가 넘는 길을 걸었죠. 여주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여주군청까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각을 배울 생각에 빠져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밥 한 끼를 덜 먹고 코피가 터져도 하고 싶다는 집념 하나로 3년간을 여주에서부터 서울까지 서각을 배우러 다녔다. 이 씨는 "당시 서각을 배우는데 월급의 세배가 들어가 애들 유치원도 끊고 부인이 밭일까지 했죠"라며 "그때는 오로지 내 자신과 서각만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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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00년 된 느티나무에 8개월 걸쳐 완성한 작품 '몽유도원도'
그렇게 30년 이상을 묵묵히 오직 한 길만 걸어온 이 씨는 지난 2004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서각장(書刻匠)으로 지정됐다.
"지금도 자식들이 건강도 챙기라며 관광을 권하지만 거기 가서도 오직 서각 생각뿐이겠지" 마치 그의 인생 60년 동안 손에 숟가락 보다 칼을 더 많이 쥔 듯 했다. 그래서 인지 손금마저 희미하게 보였다.
하지만 요즘 그에겐 근심이 하나 생겼다. 기술을 계승할 보조자가 없어 서각장의 맥이 끊길 위기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은 서각부분만이 아니다. 경기도에 있는 50명의 무형문화재 중 27명 또한 기술을 이을 계승자가 없다.
이 씨 역시 보조자를 뒀었지만 두 달도 못가서 '힘들다'며 그만두기 일쑤였다. 결국 자녀들에게 틈틈이 기술을 전수하고 있으나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 경기도의 무형문화재 활성화 추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기도는 무형문화재 후계자 미지정과 경제기반 약화 등 도내 무형문화재가 겪는 어려움을 바탕으로 기존 지원정책들을 보완, 무형문화재 자생력 강화 및 활성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도는 지금까지 무형문화재 월별 전승지원금과 부천·평택·여주 등 도내 각 시군에서 열리는 문화행사와 전수관 설립 및 리모델링 사업 등에 지원을 펼쳐왔다. 그러나 도는 무형문화재 41개 종목 중 일부종목을 제외한 많은 무형문화재의 자생적 경제기반 취약이 전승기피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경기도는 기존 정책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 중이다.
경기도 이병관 문화정책과장은 "후계자가 없는 종목에 대해서는 전수장학생 제도를 활용해 전승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자립적 경제기반이 취약한 비활성화 종목에 대해서는 전승지원금을 우대 지급할 예정"이라며 또 "앞으로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 무형문화재 전승과 자생력 강화를 위한 실질적 지원책을 강구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