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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52
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연중 제2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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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멸망이 아니라 영생, 심판이 아니라 구원!>
세례를 받고 신앙 생활을 한 햇수는 점점 늘어나지만, 그에 비례해서 신앙의 깊이가 그리 깊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학교에 입학하고 수도회·수녀회에 입회해서, 오랜 양성 기간을 끝내고 봉헌생활자로 살아가지만, 목표했던 바처럼 영성생활이 일취월장하지 않고, 지지부진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이유를 들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출발점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요, 우리 영성 생활의 기초이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성찰하는 작업입니다.
은연 중에 우리는 꽤나 두렵고 경직된 하느님 상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언젠가 도래할 종말을 하느님의 결정적인 심판이 이루어질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는 유다교 묵시문학의 영향 탓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신 예수님을 무지막지한 심판자로만 생각하는 것, 우리 신앙생활에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니, 언제나 경계해야 할 태도입니다.
바리사이계 유다 최고위원이었지만, 진리를 향해 열려있던 신앙인이었던 니코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유다인들 대부분은 무서운 심판자로서의 메시아 사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조만간 나타날 메시아를 정의로운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엄격한 집행자로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이요 신앙의 대상이신 하느님에 대한 그릇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으니,유다인들의 신앙 생활이 부담스럽고, 힘겨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하느님 상, 왜곡된 메시아 상을 바로잡기 위해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셨고, 공생활 기간 내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온 몸으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복음 3장 16~17절)
위 명문장은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 구원 사업의 목적, 방법, 결론을 짧게 요약하고 있는데 이를 더 간단히 요약한다면 이렇습니다.
“멸망이 아니라 영생, 심판이 아니라 구원!”
우리는 기도할 때, 언젠가 세월이 흘러 그분 대전으로 나아갈 때, 그간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의 대대적인 전환 작업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과 인간 각자를 심판하러 오신 것이 절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 육화강생의 목적은 멸망과 심판이 아니라 영생과 구원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 각자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간의 삶이 어떠했든 그분을 굳게 믿는 사람은 구원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은 벌써 그분으로부터 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내세(來世)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생활로 인해 결정됩니다. 다시 말해 영원은 현재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그 사랑의 화신(化身)인 예수님께서 어찌 연약하고 가련한 인간을 멸망시키고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하느님이나 예수님께서 심판하신다기 보다는 우리 인간 각자가 스스로 심판을 초래한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 인간 각자는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신앙 혹은 불신의 결과로 구원 혹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향해 결단을 촉구하셨고, 우리 인간 각자의 결단은 구원 혹은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고 은혜롭게도 멸망을 피하고 구원을 얻는 방법, 누워서 죽먹기 보다 더 쉽습니다. 눈을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하느님으로 고백했다면, 일체의 다른 모든 우상 숭배를 끊는 것입니다.
죽음과 사후 세계, 하느님과 심판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고 묵상하셨던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여사의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은 순식간에,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있었던 순간순간의 모습에 대한 생각을 상세하게 읽게 될 것입니다. 모든 행동을 기억하게 되고, 여러분이 내뱉은 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되돌아보는 동안, 여러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하느님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을 무시해버린 여러분 자신을 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큰 적은 바로 여러분 자신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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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나에게서 배워라>
1999년에 개봉된 ‘매트릭스’란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밤에는 해커로 살아갑니다. 네오는 무언가를 찾고 있지만 무엇을 찾는지조차 모르며 그냥 허무감에 빠져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낮에는 현실에 꽤나 잘 적응해 살지만 또 남이 보지 않는 삶에서는 약간의 일탈로써 얻는 쾌락으로 삶의 에너지를 찾아보려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찾아온 이상한 손님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총알도 피하고 천정을 걸어 다니며 벽을 통과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네오를 찾아와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진실이란 지금 네오가 살고 있는 현실이 인공지능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깨지 않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네오의 꿈을 깨게 해 주기 위해 자신들도 꿈속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네오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신기한 사건들을 접하며 조금씩 그들의 말을 믿어갑니다.
나중에 그의 스승이 되는 모피어스란 남자는 그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을 주며, 파란 약을 먹으면 그냥 다음 날 아침에도 침대에서 일어나 일상적으로 (꿈속에서) 살아가게 되고 빨간 약을 먹으면 이 현실이 모두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 시스템이고 꿈과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번 선택하면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합니다. 진실된 세상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곳은 미래의 시대입니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어 인간을 통 속에서 재배하여 인간으로부터 에너지를 뽑아내 자신들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컴퓨터를 움직이게 하는 작은 배터리에 불과했다는 끔찍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반란을 일으키면 골치 아프기 때문에 인간들을 꿈꾸게 해서 평생을 그 가상 세계에서 살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꿈만 꾸다가 에너지가 더 이상 생성되지 않으면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됩니다.
자신이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기계에 의해 재배당하며 꿈만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꿈속의 세상에선 외로운 사람으로 남습니다. 이것이 꿈이라고 말하면 모든 이가 적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냥 이 시스템에 길들여 살아가는데 너무 익숙해 있기 때문에 이 꿈을 깨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컴퓨터가 만들어낸 절대 이길 수 없는 요원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에게 걸리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꿈에서 죽으면 현실에서도 죽습니다. 정신이 죽으면 육체도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만이 이 엄청난 진실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은 큰 죄책감을 줍니다. 그들과 맞서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을 깨워야 합니다. 그들을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이 먼저 이 세상이 꿈임을 완전히 믿는 것입니다.
네오는 가짜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스승 모피어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 세계가 꿈인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온갖 무술을 다 연마하고 모피어스와 대련을 하지만 결코 모피어스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네오는 그것이 모피어스의 힘과 민첩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숨을 헐떡입니다. 그때 모피어스가 말합니다.
“내가 빠르거나 힘이 센 게 내 근육 탓일까? 여기서?(꿈의 세계란 뜻. 꿈속에서 어떻게 숨이 찰 수 있느냐는 질문) 네가 지금 공기를 마신다고 생각해? 다시 해봐! 생각하지 말고 인식을 해."(여기가 꿈이란 현실을 믿으라는 것)
그때야 네오는 무언가를 깨닫습니다. 자신이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 가상일뿐이라고 믿고는 있지만 지금까지의 삶에 너무 적응이 되어있다 보니
자신은 저렇게 힘이 세고 빠른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지식, 사람이 새처럼 절대 날 수 없다는 지식,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어야 한다는 지식 등이 자신을 사로잡아 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으려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자신을 완전히 버릴 수 없기에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모피어스는 계속 말합니다.
“그래. 네 마음을 풀어주는 거야.
나는 문까지만 안내할 수 있지.
그 문을 나가는 건 네가 직접 해야 돼.
모든 걸 버려.
두려움. 의심. 불신까지. 마음을 열어.”
이 세상은 교육이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는 도구로 전락했습니다. 이 세상이 허상이고 이 세상과 싸워 이겨야한다는 것을 결코 가르치지 않고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낙오자로 만들어버립니다.
아이들이 조금 더 자고 아침이라도 먹고 학교에 등교하라고 하면 성적이 떨어져 큰일이라도 날듯이 그런 정책에도 반대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다그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이 세상 법칙에 순응하며 살도록 교육을 합니다. 자격증이 있고 전문가가 되어야만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며 그 꿈에서 깨지 못하도록 합니다.
물론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그런 교육들이 참 깨달음을 방해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교육하는 것은 자녀들의 성공입니까, 아니면 행복입니까? 장수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생명입니까?
다시 영화로 돌아옵니다. 모피어스는 네오가 이 세상을 구원해 줄 예언된 자라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오라클이라는 예언자에게 데려갑니다.
그런데 오라클은 네오를 보며 그가 예언된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피어스가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이라고 믿으며 목숨을 바칠 것인데 그를 살리려면 네오가 대신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모피어스는 네오를 살리기 위해 요원들에게 잡힙니다. 모피어스가 죽음에 임박하자 네오는 자신이 예언된 자가 아니라고 고백하며 모피어스를 구하기 위해 컴퓨터가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적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을 절대 이길 수는 없는 일이기에 대신 죽기 위해 들어간 것입니다. 모피어스를 구하고 그는 총을 맞고 죽습니다.
그러나 그가 구원자로 끝까지 믿고 있는 그를 사랑하는 트리니티란 여자의 입맞춤으로 다시 눈을 뜹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세상은 수많은 코드로 이루어진 가상현실이었습니다.
믿고만 있었던 것이 실제 허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만나면 무작정 도망을 쳐야만 했던 적들도 모두 가짜였던 것입니다. 두려움이 계속 가짜들을 이길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더 이상 그것들은 네오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네오가 참으로 구원자였던 것입니다. 참 구원자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까지도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인 것입니다.
순교자들처럼 자신을 몇 번이고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야 이 세상에 얽매여 살아가는 노예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허상이라는 것을 보여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 되시는지를 설명하십니다.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켜 광야를 지날 때 백성들은 모두 사막의 삶에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들을 물어죽게 하시기 위해 불뱀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여 용서를 청하자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에 달아놓고 그것을 바라보면 뱀에 물렸어도 죽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 장대에 매달렸던 뱀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그분을 믿는 누구나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당신이 뱀이 되시는 것입니다.
뱀은 곧 이 세상에서 살아보려는 우리 자신입니다.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허상에 불과함을 믿으려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까지 가차 없이 내어던지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 참으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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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햐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 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꼬스로아스 왕은 613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노획해 갔다. 15년 후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그 십자가를 찾아온 날을 기념하여 축일로 정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황제가 이 십자가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성지 입구에 서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 옆에 있던 총주교인 즈카르야가 그 옛날 예수께서 입으셨던 옷으로 갈아입고 맨발로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권하여 결국 원래의 성지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9월 14일에 지내는 것은 이 날 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3,13-17 :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을 한다. 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로 하여금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이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그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오늘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 8,28; 12,32), 하늘의 영광에로 올려졌다는 뜻(사도 2,33; 5,31; 필립 2,9)으로 이중적인 높임의 뜻이 있는 것으로 서로 분리가 될 수 없다. 우리들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들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에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즉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의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에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용기와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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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의 묵상
세상에 피 흘림 없이 태어나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피 흘리는 것이 부모이고 그 피 흘림 덕분으로 태어나는 것이 자녀입니다. 무성 생식을 하는 아메바와 같은 동물도 자신의 살점을 떼어 줌으로써 자녀를 탄생시킵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나의 피를 흘려주어야 나와 같은 생명체가 탄생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아담도 하와의 탄생을 위하여 옆구리가 찢어져 피를 흘려야만 하였습니다.
교회가 탄생하기 위해서도 피 흘림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느님 아드님의 십자가 죽음이 요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옆구리를 창으로 찔려 ‘피와 물’을 쏟으셨습니다(요한 19,34 참조). 하느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듯이, 예수님의 피와 물로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교회는 세례-견진-성체의 입문 성사로 탄생한 하느님의 백성이며,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솟아나온 피와 물이 곧 ‘성사’이기 때문입니다(전례 헌장 5항 참조).
그러니 교회가 탄생한 자리가 ‘십자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누군가의 죽음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또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져 아담과 한 몸이 되었듯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피와 물로 만들어져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룹니다. 그 덕분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등에 십자가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키는 역할에 참여할 때 진정한 십자가 현양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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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인한 율리아노 신부님]
<하느님의 세심함>
예전에 어느 선배신부님에게서 십자가와 불상을 비교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편안히 앉아서 누가 바라보더라도 인자한 눈으로 계시는 부처님상과 십자가에 매달려서 가시관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예수님상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물론 약간 편협한 견해이긴 하나 부처의 가르침은 고통의 단초가 되는 집착을 끊음으로 인해 해탈할 수 있는, 스스로의 구원 안에 이르는 편안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껴안음으로 인해 행복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음을, 세상을 껴안음으로써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 살기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고 제대로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피하기는 쉬우나, 십자가를 선택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십자가를 껴안기는 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선택할 때, 십자가를 껴안을 때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시간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십자가를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중심에 십자가가 놓여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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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형수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하여 지고 가신 거룩한 십자가를 경배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싣고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복음은 두 번째 대화 부분입니다. 우선 예수께서는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설명하십니다. 바로 '사람의 아들은 높이 들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에는 민수기 21장 4절에서 9절에 나오는 사건 이야기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당신에게 불평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시려고, 야훼께서는 그들에게 치명적인 불뱀들을 보내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회개와 그들을 위한 모세의 간구를 들으셔서,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그 다음에 불뱀에게 물린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나 장대 위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지는 것을 구리뱀이 높이 들려지는 것과 비교하십니다. 높이 들려진 구리뱀은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생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높이 들려진 사람의 아들은 신앙을 가지고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높이 들려진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리신 예수님이시라고 매우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질 때 예수님의 참된 본질이 계시될 것이고, 모든 사람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셔서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을 때만 높이 들려지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부터 영광을 받으실 때에도 높이 들려지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승리하시는 왕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인간이 이 구원의 원천에 참여하는 것은 그 원천인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졌다는 것을 믿음으로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상으로 파견하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 신앙인들은 죽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죄가 많은 곳에는 실로 은총도 풍성하게 내려집니다. 죄가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이 새로운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열치열' 곧 열은 열로써 다스린다는 말도 있듯이, 인간의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치유되었으며 인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은 이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
성서에 이 구절만큼 우리의 가슴에 큰 감동을 주는 구절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떤 부모도 남의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희생시키지는 않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고 있는데, 하나 있는 아들을 적지에 보내어 죽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울부짖는 당신의 아들을 못 본 체하시고 죽음의 길을 걷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당신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신(神)이십니다.
그 분이 神이신 이유는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이라기보다, 마치 우주처럼 신비한 분이시기 때문이라기보다 당신의 사랑으로 사람들과 맺은 결혼 약속에 충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단지 인간처럼 같이 살다 싫어지면 이혼 서류에 도장 하나 찍고 돌아서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神인 것입니다.
그 분은 수천년도 넘게 인간에 대한 당신 사랑에 충실하셨고, 지금도 그 분은 우리 각자에게 충실한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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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한종민 야누아리오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세상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는 “하느님께서 독생 성자의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음” 을 기억합니다.
“십자가” 라는 단어는 예수님께 참 잘 어울립니다. 십자가는 잘 알려진 것처럼 사형의 도구입니다. 사형의 도구인 십자가 예수님께 잘 어울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치워질 수 없는 잔임을 깨달으신 후 그 십자가를 기꺼이 가슴에 껴안으십니다. 그리고 또 그 십자가에 기꺼이 몸을 내어 놓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기꺼이 몸을 내어 놓으신 것은 사람에 대한 구원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기꺼이 몸을 내어 놓으신 것은 성부 하느님께 대한 순명입니다.
순명은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순명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에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일치는 현존으로 발전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성부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십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현존하심으로써 성부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상징되는 구원을 가져다 주십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상징, 성부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우리에게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십자가가 주어진다는 것은 고통과 아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를 예수님처럼 껴안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늘 업(業)으로 생각합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지금 나에게 이 십자가가 주어지는지 의심을 품고 원망을 합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늘 부정하고 저주하고 원망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멀리 치워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처럼 우리의 십자가를 우리 안에 받아들일 때 그 십자가는 덕(德)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에 영원한 생명, 구원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과 사람을 위한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사람을 위한 공덕으로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성부 하느님께 대한 예수님의 순명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순명에서 우리는 성부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됩니다.
이 현존에 대한 깨달음은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 구원을 더 깊게 깨닫도록 합니다.
오늘 교회는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가 구원되었음을, 그리고 그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통해서 교회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느끼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어떻게 깨닫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업(業)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성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순명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구원을 가져다 주고 세상과 사람을 향한 우리의 공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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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십자가>
요한 3,13-17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십자가>
십자가는
바라보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매달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살기 위한 ‘죽임’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매다는 이의 광기어린 폭력에 저항하는
매달리는 이의 무력(無力)의 힘입니다
십자가는
살리기 위해 주님께서 죽으신 곳이며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죽어야 할 곳입니다
십자가는
땅의 사람이 하늘로 오르는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찰나의 죽음을 건너
영원한 생명을 향한 다리입니다
십자가는
황금빛 찬란한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아니라
핏빛 물든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십자가는
거부하는 이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짊어지는 이에게는 모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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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이고, 지고, 안고…>
프란치스코 성인 오른손에는 항상 무엇이 들려있나요? 십자가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어느 날 동네를 지나가고 있는데, 우물가에서 어느 자매가 항아리에 물을 담아서 머리에다가 이기 전에 나뭇가지를 그 위에 놓더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 자매에게 묻습니다.
“물 위에다가 나뭇가지를 띄웁니까?”
그러자 자매가 대답합니다.
“출렁거리는 물 위에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띄울 때, 아까운 물이 흘러넘치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쌓이고, 자꾸 의심으로 미움, 원망에 흔들리면…. 그 심중에 십자가를 놓으셔야 합니다. 머리, 가슴, 팔, 다리에 십자성호를 그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가 달리셨던 십자가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이요, 능력입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고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고, 또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그러기에 무슨 일을 앞두고,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십자성호를 그으며, 은총의 어좌인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또한 그 자비로 적당한 때가 되면 하느님에 도움을 입은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 님들!
이고 지고, 이고 지고 가십시다. 출렁이는 물 위에는 십자 나무를 이고, 거친 물살 앞에서는 십자 나무를 지고, 욕심과 험담이라는 바람일 때는 십자 나무를 안읍시다. 이고, 지고, 안아야 사는 십자 나무! 흔들림 없이 설 수 있는 십자 나무 지팡이여! 나의 자랑은 내 이마의 인호로, 내 가슴의 인장에 불도장으로 박혀있는 십자 나무여! 아멘.
십자 나무를 붙들고 노래합니다.
“저는 주님을 모른 다 세 번 부인할지라도 주님은 저를 모른 다 부인하지 마소서.교만하고 어리석어 저 주님을 믿노라 했으나 제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 줄 이제 압니다.자비하신 주여, 저를 버리지 마소서. 심판도 용서도 잘 알지 못하지만, 어느 땐가 죄인을 부르실 때, 제 이름도 불러주소서. 자비하신 주여, 저는 주님을 모른 다 세 번 부인할지라도 주님은 저를 모른 다 부인하지 마소서.” 아멘.
- 세 번 부인할지라도 -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고, 지고, 안고 은총의 어좌인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자비를 입고, 은총을 얻어 고운님들이 바라는 적당한 때가 되면 주님에 도움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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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54)
♧♧ 시편 49편 15절….
"그들은 양처럼 저승에 버려져 죽음이 그들의 목자 되리라. 아침에는 올 곧은 이들이 그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은 저마다 자기 처소에서 멀리 떨어진 채 그 모습이 썩어 저승으로 사라지리라."
* 그들은 양처럼 저승에 버려져 죽음이 그들의 목자 되리라...
이 구절에서...다윗은 육체의 안일과 만족만을 위해 재물을 좇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행위의 결과는 스스로 죽음의 길로 좇아가는 것과 같음을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순순히 좇아가는 양의 행위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 저승으로 사라지리라...
이는 즉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 자세의 여부가 선과 악, 징벌과 축복 여부를 결정한다는 구원사적 인생관의 측면에서 볼 때, 이기주의적이고 현세 지향적인 사람들은 필연코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뜻합니다.
* 아침에는 올 곧은 이들이 그들 위에 군림하고...
여기서 ‘올 곧은 이...’는 육체의 안일과 만족만을 위해 재물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대조되는 주님께 충실하게 사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아침’은 이 구절 앞부분의 ‘죽음’과 대조되는 말로서 하느님의 최후의 심판 이후 새롭게 시작되는 시대를 말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부활 이후에 맞이할 내세를 가리킵니다. 결국 이 구절은...불완전한 이 세상에서는 육체의 안일과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잘되기는 하나 내세, 즉 세상 끝 날에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올 곧은 이’가 만사형통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 시편 49편 16절….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저승의 손에서 나를 기어이 빼내시리라. 셀라"
이 구절은...15절의 연장으로 올 곧은 이들 중 한 사람인 다윗 자신도 영생을 분명히 얻을 것을 확신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빼내시리라...’라는 말은 ‘데려가다.’ ‘구원하다.’라는 뜻으로 하느님께서 에녹을 데리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에로 데려가신 것처럼(창세기 5장 24절. 참조), 모든 의로운 이들의 영혼을 영원한 죽음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요한 14장 3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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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해결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부정적인 결과만 지레짐작하며 속만 끓이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런 이들과 함께 있으면 힘이 빠지지요. 희망의 말은 의욕을 불러일으키지만, 부정적인 말은 의욕을 꺾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위인은 ‘부딪혀보고, 시도하라.’라고 말합니다. 시도하지 않은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를 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의욕을 키우는 사람인지, 아니면 의욕을 꺾어버리는 사람인지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원칙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원칙은 ‘내가 받아들인 것만 변화시킬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즉, 나 자신이 거부한 것은 내게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용서할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용서를 거부한 것이지요. ‘돈 없이는 못살아!’라고 말한다면, 돈 없는 삶을 거부한 것입니다.
‘저 사람이 싫어!’는 무엇일까요? 나의 이웃을 거부하는 말입니다. ‘나는 할 수 없어!’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거부하는 마음은 그대로 내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는 전혀 이루어질 수 없고, 그 부정적인 마음만 자기 안에 남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 변화의 시작이 바로 받아들임에 있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거부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구원의 길은 절대로 열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주님의 다 할 수 없는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들어 올린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이 죽지 않았던 것처럼, 십자가로 들러 올려진 주님을 믿는 사람만이 몸과 마음으로 죄를 지어 자초한 모든 죽음에서 영원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고 기뻐하면서, 축제의 예복을 입고 자기 신랑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경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좋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귀중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을까요? 그리고 무엇을 받아들였을까요? 그래서 어떤 변화를 주님을 위해서 하고 있을까요?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십자가가 아무리 무겁고 힘들다 하더라도 거부하면 어떤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주님처럼, 우리도 이제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한층 더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옵니다. 큰 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룰 수 있는 작은 꿈, 그리고 내가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꿈이 필요하다. 그냥 상상 속에만 있는 큰 꿈은 필요 없다.
느보산의 십자가.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어젯밤에는 써야 할 글이 많은데 도대체 방에서 글이 써지지 않는 것입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머리라도 식힐 겸 차를 끌고 나왔습니다. 동네의 카페에 가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였지요.
그런데 큰 도로로 나오자마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명절을 보낸 사람들의 귀성 차량으로 꽉 막혀 있었습니다. 안 막히는 반대쪽으로 가면 되겠지만, 문제는 다시 성지로 돌아올 때는 저 역시 이 꽉 막히는 행렬에 포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시간 후면 차량 흐름이 좋아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카페에 들어가 3시간 동안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어차피 나가 봐야 꽉 막힌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니까요.
3시간 동안 꼼짝 못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일까요? 집중이 잘 되면서 원하는 만큼의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많은 작가는 자신의 탈출구를 아예 막아 버린다는 이야기가 떠올려졌습니다. 빅토르 위고는 “해가 질 때까지 절대 나에게 옷을 갖다 주지 마라!”라고 했고, 작가 이외수는 “이 원고를 탈고할 때까지 절대 철창문을 열어주지 마시오!”라고 했다고 하지요. 때로는 나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도 필요합니다. 좀 더 집중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지요. 과거의 성인·성녀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분들도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산으로 또 사막으로 가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을 사는 우리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주님을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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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며느리의 말을 듣고 성당을 찾았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나 성당에 안 나가련다. 법당의 부처님은 얼마나 복스럽게 생기셨냐. 갔다 오면 복을 많이 받을 것 같다. 그런데 성당의 예수님은 삐쩍 말라서, 십자가에 매달려있으니 보기에도 안쓰럽다. 다른 것은 다 으리으리한데 어째 예수님만 저렇게 모셔 놓았다는 말이냐.” 며느리가 할머니에게 어떻게 설명했는지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설명하시겠는지요?
스승이 네 명의 제자에게 함부로 판단하거나,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여행을 가서 ‘배나무’를 보고 오라고 했습니다.
겨울에 다녀온 제자는 ‘배나무가 삐쩍 마르고 볼품이 없다고 했습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게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봄에 다녀온 제자는 ‘배나무에 생명이 숨 쉬는 것 같았습니다. 나무에는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고, 봄 햇살에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름에 다녀온 제자는 ‘하얗게 꽃이 핀 배나무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벌과 나비가 함께 어울리는 배나무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가을에 다녀온 제자는 ‘주렁주렁 열매가 달린 배나무를 보았습니다. 비와 햇빛이 있었을 뿐인데 배나무는 그걸 먹음직스러운 배로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작은 배나무 하나를 아는 데도 사계절이 필요하단다. 그러니 사람을 제대로 알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겨울의 배나무는 추위와 눈보라를 이겨내야 했다. 그러기에 잎을 떨구어 내야 한 것이다. 봄의 배나무는 긴 겨울을 참고 견디어준 뿌리에서 양분을 얻어 새싹을 내는 것이다. 여름의 배나무는 봄의 햇빛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을의 풍성한 열매는 여름에 피어난 꽃이 떨어진 자리에 생기는 것이다.” 저도 한쪽 면만 보고 판단한 적이 많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미리 단정한 적이 많습니다.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사람은 아예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십자가의 수직면은 하느님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수평면은 사람과 사람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사람과 일치를 이루게 하는 ‘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나의 삶을 바라보면서 나의 이웃들이 참된 위로와 영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알렐루야는 이렇게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우리 신앙인에게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지고 가셨던 십자가를 지고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우리에게도 부활의 기쁨과 영광이 주어지리라 믿는 것입니다.
저 자신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쉼표라고 생각합니다. 마침표라고 생각하면 힘들지만, 쉼표라고 생각하면 더 높이 갈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면 십자가도 몇 번 있었습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중환자실에 간 적도 있습니다. 오해로 자존심이 상한 적도 있습니다. 저의 게으름과 타성 때문에 큰일을 그르친 적도 있습니다. 머나먼 미국에 와서 신문을 만드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익숙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쉼표였습니다. 먹구름이 지나면 태양은 언제나 나를 비추고 있음을 압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지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있다면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가볍게 만들기보다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갈 힘과 용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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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
-삶의 중심-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고 내일 9월15일은 성모 통고 기념일입니다만 주일이라 기념미사는 없습니다. 두 축일이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음이 의미심장합니다. 순교성월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신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이요 성모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강론에 참고하고자 영문 미사책 독서를 보니, ‘십자가의 승리(Triumph of The Cross)’라 명명되어 있었습니다. 참 적절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무한한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오늘 입당성가와 퇴장성가의 배치도 참 적절했습니다.
-“십자가 승리하네/우리 구원하리라/십자가 승리하네/우리 구원하리
진리에 목마른자 사랑 자유 찾았네/십자가 찬란하게 세상 비추어 주네
주님은 우리 희망 용기 북돋아 주며/성부께 우리들을 인도하여 주리라.”-
성가 30장 ‘승리의 십자가’의 가사는 얼마나 은혜롭고 아름답고 깊은지요. 십자가의 승리, 십자가의 구원을 노래한 성가입니다.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의 배경에 찬란히 빛나는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바로 성금요일 주님의 수난예식 때 복음전 노래(필리2,8-9)나 십자가 경배시의 가사 역시 이와 일치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도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들 들어 높이시고/어느 이름보다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내리셨도다.”-
-“보라, 십자나무/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모두 와서 경배하세.”-
-“주의 십자가를 경배하오며/주의 거룩하신 부활을 찬양하나이다.
십자가 나무를 통하여/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참 좋은 참고가 되는 내용들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마치 뿌리 없이는 꽃도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 있어 부활의 그리스도입니다. 하여 우리는 승리의 십자가라 명명하는 것입니다. 감사송의 다음 내용도 이와 일치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십자 나무에서 인류구원을 이룩하시어/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새롭게 하셨나이다.”-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이 지칭하는 바 아담이요 아담의 후예인 우리들이지만 십자가의 예수님 덕분에 새롭게 승리의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수난의 십자가, 패배의 십자가 같지만, 생명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 기쁨의 십자가임을 깨닫습니다. 이를 통찰한 사부 성 베네딕도도 그 규칙에서 사순시기를 우울하고 어둡게 지내지 말고, 성령의 기쁨으로,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새삼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은 온 세상의 중심이며 우리 삶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중심에서 빠져 버리면 중심이 없는 완전 공허와 허무, 무의미의 세상이요 우리들일 것입니다. 하여 어디에 가든 우선 확인해 보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언젠가 피정집에서 미사 봉헌전 제의방에서 머리 숙여 인사하려 할 때 십자가가 없어 난감해 했던 일을 잊지 못합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9월 순교자 성월과 관련되어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공부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세 측면에 걸쳐 묵상한 것을 나눕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영원히 바라볼 대상인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보고 배울 영원한 구원의 대상이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체가 기도이며 공부입니다.
“하느님의 업적을 잊지 마라.”
화답송 후렴입니다. 하느님 업적중의 업적이 십자가의 구원,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하여 하느님의 이 크신 은혜로운 업적을 끊임없이 기억하고자 늘 바라봐야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바치는 성호경은 얼마나 좋은 기도인지요. 삼위일체 하느님과 우리의 일치를 상징하는 십자성호입니다. 고요히 십자가의 그리스도 앞에 자주 머물러 성호경 기도와 더불어 깊이 묵상한다면 그 은혜는 차고 넘칠 것입니다. 하여 바라보고 배우라고 제대 중앙 뒷 벽면에 높이 달린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바로 민수기의 기둥 위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이 예표하는 바 바로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바로 구원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구리뱀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십자가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볼 때 치유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새 아담이자 새 모세인 예수님 역시 오늘 복음에서 이점을 재차 확인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생명의 길, 구원의 길, 하늘 길은 십자가의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참 행복하게도 매 미사때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생명의 십자나무에 달린 영원한 생명의 열매인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작년 오늘 축일에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것을 권하셨습니다.
-“집에 모시고 있는 십자가든 아니면 묵주에 달린 십자가든 그것을 바라보며 이것이 바로 우리 실패의 상징임을 기억합시다. 이와 더불어 이것은 또한 우리 승리의 상징임도 기억합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평생 바라봐야 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자 평생 공부해야할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불평하다 뱀에 물려 죽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결코 불평 불만하지 말아야 함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예수님 공부에 충실한 이들은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도 하지 않을 것이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한 주님을 닮아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순종의 삶에 항구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이 완전히 계시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깊이 항구히 묵상하면서 다음 복음 말씀을 잘 깨달을 것이고 우리 또한 하느님 사랑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평생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해 깨닫고 배워야 할 공부이겠습니다. 사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사랑하는 평생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십자가의 예수님을,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2014년 안식년중 산티아고 순례시 미사가방에 온갖 짐들 가득한 14kg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800km 2000리 순례할 때 참으로 실감했던 내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만으로는,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사랑을 실천하며 죽는 그날까지 주님을 따릅니다. 바로 오늘 퇴장 성가 31장도 이와 관련되어 은혜로웠습니다.
-“이 크신 모든 은혜 베풀어 주시니/한 생명 다바쳐서 주님을 따르리
가난한 형제 찾아 복된 말씀 전하면/주 사랑 깨닫고 하느님을 뵈오리.”-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참으로 십자가의 주님을 사랑하며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항구히, 충실히 따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자작 좌우명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마지막 연을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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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의 십자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쳐다봐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하고 고백했습니다.
성녀 줄리 빌리아르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십자가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하면서 십자가를 가까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하지 못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 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에 ‘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 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 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이,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언어의 습관이,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심판보다는 구원을 앞세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삶에 있어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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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인류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친히 매달리신 십자가를 기억하고 경배드리는 날입니다.
먼저 제1독서에서는 구리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민수 21,4).
약속의 땅은 멀고 광야의 시간은 지리멸렬하게 이어집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 요소인 물도 떨어지고 양식이라고는 만나 뿐이니 온갖 불평에 욕구 불만까지 차오릅니다. 그들은 또 모세에게, 하느님께 불평합니다.
그동안 하느님께서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시면서 불평을 해소해 주신 것과 달리 이번에는 불뱀을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하게 하시지요. 이 재앙에 놀라 모세에게 죄를 뉘우치며 간청하는 백성을 위해 주님께서는 새로운 해법을 내려 주십니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민수 21,8).
하느님은 불 뱀을 없애 주시지 않고, 또 기적으로 물린 상처를 씻은 듯 낫게 해 주시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시지 않고, 물릴 경우에 목숨을 건질 방도를 마련해 주십니다. 흉측한 불 뱀 모양의 구리 형상으로요. 굳이 백성에게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된 뱀을 본떠 만들라고 하신 이유를 헤아려 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불 뱀을 해법으로 제시하셨던 하느님께서 인류의 죄악에 대해서도 일맥상통하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죄악을 싹 없애버리신다거나, 죄 지은 이를 본인도 모르게 자동으로 원상 회복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외아들에게 인류의 죄를 지워 높이 달리게 하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2코린 5,21).
예수님은 혐오스런 불 뱀의 형상 못지 않게, 인간의 죄를 몽땅 다 뒤집어쓴 가장 처참한 몰골로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곧 뱀에는 뱀의 형상, 죄에는 죄의 형상입니다.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아들을 통하여!" 인류 구원은 성삼위 하느님의 공동 과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께 인류 구원의 열쇠를 맡겨주십니다. 광야 어디에서건 뱀에게 물린 이가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구리 뱀이 매달린 기둥을 찾아와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고 하듯이, 하느님께서 직접 죄악을 그냥 뚝딱 없애시지 않고, 죄악에 덜미가 잡힌 이라도 마음을 돌려 간절한 믿음으로 십자가 예수님의 속량을 믿는다면 구원을 받게 하신 겁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쳐다봄으로써" 살아났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의 구리 뱀이 십자가 예수님의 예표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리 뱀과는 달리 온전한 자기 희생이 수반된다는 점에 있어서 차이가 나지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치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이 엄청난 피의 값이니까요.
"내가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이리라"(영성체송).
주님의 갈망, 그분의 허기가 짐작이나 되십니까! 인류에 대한 그분의 구원 열망과 의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모든 사람!" 주님은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시고 꿈꾸시고 기대하십니다. 그러니 한 점 티끌도 못 되는 우리가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 안에서 신분 서열로 구분하고 차별하거나, 같은 믿음을 지니지 않는다고 함부로 비그리스도인들을 냉대하고 밀어내고 소외시켜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 주님의 이 통 큰 사랑의 청사진 덕분에 우리 역시 운좋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존재가 된 것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죄 때문에 아파하실 벗님, 오늘 십자가를 한번 쳐다 보십시오. 거기 벗님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달려계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기만 하십시오. 이제 십자가로부터 치유를 받은 벗님, 주님의 "십자가로 모든 사람 이끌어 들이기" 프로젝트에 저와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성 삼위 하느님의 공동 과업에 벗님을 협력자로 부르십니다. 아멘으로 응답하시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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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신성과 결합된 그분의 인간성은 우리에게 다다라 우리의 참된 인간성을 되
진흙을 매개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안에 오염된 곳도 있음을 깨닫고 이를 바라보도록 초대하신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다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흙을 반죽하기 위해 그분이 뱉은 침은 물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서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을 상기시킨다.(요한 3,5;7,37-39; 19,34 참조) 자신의 어린 자식이 넘어져 생긴 상처에 엄마가 침을 발라준다. 애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면 낫는 데 도움이 된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상처에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신다.
♣우리는 진흙에 지나지 않지만 하늘의 일부도 함께 반죽된 진흙이다.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다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당신의 성령을 주셨다.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셨다.’(요한 9,6참조)는 것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 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이를 상기시키는‘도유된’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했다. 그분이 바른 진흙, 그분의 육신, 인간성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분의 신적 요소다. 신성과 혼합된 그분의 인간성 (참 하느님이시오 참인간이신 그분의 존재)은 우리에게 다다라 우리의 참된 인간성을 되찾아 준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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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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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모세와 구리 뱀 이야기
이 이야기는 육화의 신비 전체의 예형입니다. 뱀은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을 집어삼키고 있던 독하고 치명적인 죄를 상징합니다 ... 죄는 사람의 영혼을 깨물어 사악함의 독을 주입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늘에서만 오는 구원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결코 그 뱀을 피하지 못하고 패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께서 죄 많은 육의 모습이 되셔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셨습니다"(로마 8,3).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고 항구한 믿음으로 그분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높은 나무에 달려 있는 뱀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십자가에서 수난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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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3,14-15)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나무에 들어 올려지신 것을 기억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실패요 죽음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믿는 이들의 눈에는 영광이요 승리이자 생명과 부활의 표지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늘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광과 승리의 십자가, 생명과 부활의 십자가, 사랑의 십자가를 늘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고, 우리의 영광과 승리와 생명과 부활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민수21,4-9)와 복음(요한3,13-17)이 우리에게 전하는 강한 메시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어느 사순절에 신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십자가는 장식품(소품)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 몸을 아프게 할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다시 부활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십자가를 자랑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리라. 주님은 우리 구원이요 생명이며 부활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과 자유를 얻었네."(입당송/갈라6,14 참조)
"'다양한 모습을 지닌 백성'
하느님의 백성은 이 세상의 다양한 민족들로 구체화되며, 이 민족들은 저마다 고유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인간은 언제나 문화 속에 있습니다. 은총은 문화를 전제로 하고 이 하느님의 선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화 안에서 구체화됩니다."('복음의 기쁨', 11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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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십자가는 나의 방패>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어느 집이든 누구든 십자가 없는 사람이
없고 십자가는 감추고 싶어합니다.
십자가는 때때로 버거움으로 여겨지지만
자신의 한계를 알게하는 겸손의 도구입니다.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십자가를 그으며
일어나 오늘도 십자가를 앞 세우고
세상에 나가 영적 투쟁에서 승리합시다.
십자가가 빛을 발하도록 깨어 있다면
악의 세력에 저항할 힘이 솟아날 것입니다.
힘들다고 십자가를 팽개치면
당분간은 편할지 몰라도
자신을 방치하게 되어 겉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고 맙니다.
십자가 파는 사람 보셨소?
십자가 사는 사람 보셨소?
팔 수도 없고 살 수도 없지만
누구나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 있으니
그 십자가를 분신으로 삼으십시오!
저는 힘들때 더 십자가를 긋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 부활을
희망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십자가는 나의 방패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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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 14)
생명이 있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생명을
들어 올리는
생명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속에
사랑과 용서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이십니다.
막을 수 없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삶의 이유를
깨닫게 하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를
깨어나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데려다줍니다.
저마다의
십자가는
주님을 향하고
주님을 찾게 합니다.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에서
영원한 생명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대신
우리를 회개와
사랑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구원은 십자가이며
십자가는 순종입니다.
들어 올려지시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시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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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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