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려
전북 전주 출생. 2006년 제3회 매창주부백일장 장원
∥당선작
카드 전성시대(全盛時代) 외 2편
한 여자가 길 위에 쓰러졌다
카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아무런 단서가 없다 신원미상, 중년 여자 작은 키 평범한 얼굴 그녀가 살아온 길을 찾기 위해서는 손을 들어 지문을 따라가야 한다 다행히 체온이 식지 않았다면
본인 맞나요?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 꽃은 왜 꽃인가 너는 왜 너인가처럼 어리둥절하고 고민스럽다 관청마다 수없이 도장이 찍힌 오래된 서류들이 관계를 규정짓는다 흐린 것들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 한 치 오차 없이 그어진 선들은 존재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다
이의 제기할 수 없는 사실들 그러나 모두가 진실은 아니라는 것
나는 주민등록증에 갇혀있다 그 안에서만 피가 통한다 벗어나는 순간 나의 진실이라고 믿었던 사상이나 성격이나 끓는 핏속 그리움 따위는 나를 변호하지 못한다 기꺼이 서류에 그어놓은 관계 속에서 인형처럼 살다가 붉은 줄이 그어지면 소멸할 뿐,
깊은 산속에서 작은 풀꽃처럼 살겠다는 꿈은 이름 지을 수 없는 꿈이라는 것
내가 나임을 증명하기 위해 또 한 장의 카드를 만든다
새의 말
새의 말은 슬프다
새의 귀를 갖지 못한 나에게
숲에 모인 백로의 날갯짓이나
초저녁 어둠에 스치는 깃털소리나
버스를 기다리는 말 못하는 소녀들의 손짓은
이상한 나라의 언어
자신의 말을 한마디도 들을 수 없는 그들에게
손은 혀다
눈은 귀가 되어 손을 말을 듣는다
깊숙한 눈 속 그늘까지 들여다보아야
그들의 말이 들린다
손끝에서 나부끼는
외침에 귀 기울여본 적 있는가
할머니 나를 부르던 손
내 아이 배를 눌러보며 밥을 먹이던 손
가슴을 두드리던 손, 한번
잡아본 적이 없어서
먼 나무꼭대기에 앉아 건네는 말 한마디
이제야 보인다
들리지 않는 날갯짓은 더 이상
슬픔의 말이 아니라
높은 하늘을 날기 위한 신호라고
깨진다는 것
그릇이 깨졌다 생일 아침
아끼던 그릇이 생을 놓았다
불길하다거나 슬퍼할 이유 없이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인 것이다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 예정되어있던 날
그릇의 단면이 푸르다
깨지기 직전의 충격이 남아있는 듯
날카로운 금이 그어져 있다
애착을 끊기 위해 먼저 놓아버린 손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쪽과 저쪽 다시 하나가 될 수 없고
그릇과 나 사이 건널 수 없는
핏빛 서슬
나도 몇십 년 전 오늘
어머니 살을 찢고 이 세상에 왔다
탯줄을 끊고 몇 번씩 가슴에 금을 그어 어머니를 떠났고
내 몸을 열고 또 세상에 나온 나의 아이들이
다시 내게 금을 긋는다
아들에게서 온 전화
아직 끊어지지 않은 탯줄을 본다
아프지 않게 평온함에 금을 그어야 하는 날이
가까워졌음을 안다
깨진다는 것은
우리 사이에 금이 그어지는 소리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신호이다
∥당선소감
내 시의 응달에 햇빛이
눈 속에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섣달그믐께부터 푹푹 눈이 쌓여 모든 길이 얼어버렸습니다. 새날 새 다짐들도 눈 속에 꼼짝없이 묻혀버렸습니다. 먼 곳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은 한 데서 발을 동동 구르는데……
햇빛 눈부시던 날, 내 시의 응달에 빛이 들어왔습니다.
오랫동안 내 속의 작은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억울하고 부끄럽고 그리고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끊임없이 소근거렸는데요, 어느새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목소리는 글이 되었습니다. 차츰 아이는 밖으로 나와서도 주눅 들지 않고 나와 눈을 맞춥니다. 분명해지는 내 안의 언어들,
대견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부족한 글을 양지로 이끌어주신 선생님들, 그리고 불안한 날을 격려하며 함께 지낸 문우들에게 고마움을 드립니다.
∥심사평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향한 시가 되길
예심에서 올라온 5명 시인지망생 가운데 강경아 씨의 「용산구 신계동 산 27번지」 외 2편과 김려 씨의 「카드 전성시대(全盛時代)」 외 2편을 시에 시인상 당선작으로 뽑았다.
강경아 씨의 시들은 무척 비극적이다. 강자의 힘이 폭력으로 작용할 때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는 약자는 소외의 고통을 지나 죽음의 벽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강 시인은 깊은 애정을 갖고 억압당하는 그들의 내면에 잠재된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하고 그 억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한다. 우리 시단에 어느 때부터인지 많은 시인들이 현실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시선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풍조로부터 거리를 두고 어두운 현실의 이면을 응시하는 뚝심이 오히려 참신하게 느껴진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보다 어떠한 현실에서 살고 있는가의 문제도 무척 중요한 것이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현실을 통찰하는 시선의 예리함과 비유적 구조를 유지하며 다양한 이미지를 변용하는 능력이 앞으로 큰 시인으로 발전해 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준다.
김려 씨의 시들은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며 개인의 존재를 증명해주기 위한 기호들이 오히려 개인의 꿈을 억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숫자와 문자 또는 사진 등으로 조합된 그 기호들은 진정으로 개인의 진실을 보여주거나 변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일상적 기호에 길들여지며 살다 보면 “새의 말”, 즉 인간의 언어보다 더 직접적으로 진실을 보여주는 ‘손의 언어’가 “이상한 나라의 언어”로 여겨질 뿐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김 시인은 진실을 주고받기 위한 언어가 장벽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생일날 아침 그릇이 깨진 것을 본다. 그 사소한 경험을 통하여 “깨진다는 것”은 일상적 질서, 즉 관계의 틀을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이 열리는 신호”로 여기는 김 시인의 사유와 상상력이 무척 든든하다. 앞으로 김려 시인은 늘 스스로 깨어짐으로써 일상어의 문법을 파괴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문법에 따라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구축하여 “높은 하늘을 날”아가리라고 믿는다.
다시 한번 강경아 씨와 김려 씨의 등단을 축하한다.
심사위원/김석환(시인, 명지대 교수)
공광규(시인,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양문규(시인, 본지 주간)
—계간 『시에』 2013년 봄호
첫댓글 활발한 시작활동과 더불어 서로 나누고 베푸는 아름다운 소통의 문학 이루시길 바랍니다.
어깨가 무겁지만 선생님의 격려가 힘이 됩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글감을 찾는 모습이 좋아요, 좋은 발상입니다.
관심으로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켜봐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시쓰기를 더 고민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