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지역연구> 23호 3권에 소개한 '루이 라벨'의 <가치론>에 대한 서평입니다.
이 서평을 통해서 "가치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올립니다!
- 서평 -
루이 라벨의 『가치론, Traité des valeurs』 이명곤(제주대학교)
1. 루이 라벨의 사상과 『가치론』의 위치
루이 라벨은 가브리엘 마르셀과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유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그의 사상은 ‘정신의 철학(Philosophie de l’Espirit)’ 혹은 ‘자아에 대한 추구’를 그 본질적인 사명으로 하여, 현대철학에 형이상학을 새롭게 갱신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가톨릭 사상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철학적 탐구는 그리스의 철학 특히 플라톤의 사상을 그 뿌리로 하고 있으며, 또한 신플라톤주의자인 플로티노스의 범신론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형이상학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의 자아’에 대한 탐구라고 생각하며, 또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되는 그 과정에서 역동적 세계의 근원적인 힘 혹은 생명 그 자체로 나타나는 절대자(신)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 인간정신의 본질적인 국면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정신의 철학’에서는 무한한 힘에 참여하는 인간의 정신은 또한 무한한 그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정신활동을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무엇으로 고려하는 –이는 플라톤의 유산이다- 라벨은 자연히 19세기부터 인류의 문명을 지배하기 시작한 물질문명 혹은 기계ㆍ기술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그의 사유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아(la conscience de soi)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그리고 어떻게 자아가 가족적, 문화적, 민족적 그리고 세계사적인 역사 안으로 기입되고 또 어떻게 총체적인 현존(la présence totale)을 의미하는 신적인 존재와의 관계성 안에서 자신을 형성해 가는 것인지를 점진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현대인의 자아, 특히 물질문명에 깊이 침잠해 있는 현대인의 자아란 마치 정신의 특성 혹은 영적인 특성을 많이 상실한 비-인간화된 자아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비판이 잘 드러나고 있는 책은 『나르시스의 오류(L’erreur de Narcisse)’이다.
현대인의 자아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라벨이 통찰한 진실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 혹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가치의 소멸’에 있다고 보았다. 모든 가치를 경제적 혹은 물질적인 가치로 환원하고자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양하고 입체적인 가치의 국면을 하나의 평면화된 가치, 일원론적인 가치로 축소시키는 것으로 이 같은 가치관 아래서는 진정한 인간적 삶의 의미도 가치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라벨에게 있어서 현대사회의 가장 시급하고 근원적인 문제는 가치의 소멸을 규명하고 그 해결책을 간구하는 것이라 보았고, 『가치론(Traité des valeurs)』은 바로 이 같은 물음에 답하고자 쓴 책이다. 이 책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의 생전에 출간된 것은 1부이며, 2부는 지인들과 출판사가 비공개된 그의 원고들을 모아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가치론』은 루이라벨의 마지막 저작이자 그가 예언자적 소명으로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유언’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여기 인용된 모든 라벨의 인용구들은 다음의 책에서 인용되었음.
Louis Lavelle, Traité des valeurs, Paris, PUF. 2 volumes, 1955.
2. 가치론이 가진 특징 및 구성 체계
라벨은 『가치론』에서 경제적(물질적) 가치, 정서적 가치, 지적 가치, 미학적 및 종교적 가치에 대한 관계를 규명하고 있지만, 그 핵심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이다. 사실 라벨에게 있어서 ‘도덕(le moral)’이라는 말이 곧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에게 있어서 가치론은 도덕철학에 상응할 만한 개념이다.
1부에는 “가치에 대한 일반적 이론(Théorie générale de la valeur)”이란 소제목이 붙어 있고, 2부에는 “다양한 가치들의 체계(Le système des différentes valeurs)”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소제목이 말해주듯 1부에서는 모든 역사에서 그리고 모든 사상과 철학의 영역에서 일종의 가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며, 이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의 사상, 중세 기독교사상 그리고 불교나 도교 나아가 고대 인도사상(우파니샤드)에서 그리고 현대사상에서 나타나는 가치의 개념에 대해서 규명하고 있다. 2부에서는 인간의 행위와 논리적 사유에서 나아가 의지와 자유의 개념에서 어떻게 가치가 정립되는 것인지를 논한 뒤, 경제적(물질적) 가치, 정서적 가치, 지성적 가치, 미학적 가치 그리고 종교적 가치 등에 대해서 논하면서 이들의 상호관계를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는 가치의 체계를 일종의 ‘위계질서(La hiérarchie)’로 고려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가치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원인과 목적의 관계 혹은 조건과 결실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정교하게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같은 라벨의 가치개념은 중세철학(특히 스콜라철학)의 ‘존재의 위계’개념과 유사한데, 보다 하위적인 존재는 보다 상위적인 존재로부터 그의 존재이유와 의미가 해명되며, 또한 보다 상위적인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은 또한 보다 하위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는 잘 지어진 집처럼 서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하나로 고려할 수가 있는 것이다. 라벨은 이 같은 ‘존재의 위계’를 가치의 관점에서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라벨의 『가치론』은 정신과 육체 혹은 물질과 이념으로 이원화하고 있는 그리스적 세계관과 존재의 위계적 질서라는 중세 스콜라철학의 정신을 종합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가치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3. 가치론의 핵심적 원리와 특징들
『가치론』에서 가치를 유발하는 중심 되는 원리는 “인식하는 정신에서 본질인 것이, 행동하는 정신에는 가치가 된다”는 명제이다. 이 명제는 가치를 추구하는 연구에 있어서 기초를 다지는 하나의 척도가 된다. 이 명제의 핵심은 가치 있다는 것은 ‘바랄만한 것’이며, 무엇이건 본질적인 것은 바랄만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이를 실제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가령 ‘아버지’ ‘교사’ ‘공무원’ ‘군인’ ‘선비’ ‘스님’ ‘사랑’ ‘정의’ ‘평화’ 등 모든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바랄만한 것’이며, 이것이 ‘바랄만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경우는 그 본질에서 추락하거나 빗나가는 경우, 즉 ‘부패’하거나 ‘타락’한 경우이다. 즉 모든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바랄만한 것을 즉 가치를 가능성으로 함의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현실 안에서 추구되고 실현될 때 여기에 ‘가치 있는 무엇’이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는 어떤 특정 대상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이든 그의 고유한 본질에 그리고 그 실현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추구의 정점에 있는 것을 라벨은 ‘정신으로서의 인간이 된다’는 것 혹은 ‘자아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라벨은 ‘자신을 안다는 것’은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는데, 노예란 자신의 자유를 전혀 확신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질에 비추어 볼 때 가장 무가치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가치가 어떤 본질적인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또한 물질적인 것(하위적 가치)이 정신적인 것(상위적 가치)에 종속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본질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은 본질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며, 이는 또한 억압이 아닌 자유에 기초하는 삶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체의 힘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초월성이라는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용어가 일종의 가치의 개념으로 다시 취하게 된다. 라벨은 세계를 움직이고 형성해가는 무한한 행위(신적 행위) 혹은 영원한 행위에 대해서 말하면서 인간의 정신은 이 영원한 행위에 협력 혹은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영원한 행위에게 협력하여야 하며, 이 영원한 행위와 우리 자신을 혼동할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수동성(la passivité)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진술은 전통적으로 ‘무한자’, ‘절대자’, ‘포괄자’ 혹은 ‘존재자체’ 등으로 말해진 신적 존재에 대한 인간정신의 참여를 의미하며, 여기에는 무한을 향해 자신을 투사(Entwerfung)하는 자유의 인간 혹은 종교적 인간의 본질이 주어지는 것이다. 즉 초월성에 대한 자각은 새로운 본질을 형성하는 가치 있는 무엇이 주어지는 사건이다. 이렇게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의 정신은 한계를 가지 않는다. 이 같은 라벨의 사유에서 『가치론』은 ‘도덕형이상학의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4. 『가치론』의 현대적 의의
경제제일주의, 물질만능시대, 기계기술문명, 디지털세상이라는 말들은 현대사회의 특징을 규명하는 용어들이다. 우리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지속 가능한 개발을 보장해야 한다”, “수익창출이 우선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자본과 경제가 가장 우선시 되는 현대문명의 치명적인 함정’이다. 라벨은 물질적인 것(경제적인 것)은 다른 모든 가치가 존재하기 위한 일종의 가치의 지반일 뿐 그 자체로는 일종의 중립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본의 가치’라는 말을 ‘축적되고 찬미된 중력의 제유법(synecdoque)’처럼 고려하고 있다. 물질이나 경제의 존재이유가 보다 상위적인 가치들에게 있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기술문명은 이와는 반대되는 가치의 전도를 맞이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술의 발전이란 곧 수익의 창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조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가치와 일(la valeur et le travail)을 동일시하는 정신이다. 마르크스(Marx)에서 비롯한 소위 좌파 사상가들은 노동의 도덕적 가치가 노동의 운동 그 자체에 있다고 보지 않고 노동의 효과 즉 노동이 산출한 생산품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노동의 가치가 우리자신한테서 발생되는 혹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발생되는 어떤 변화에 있다고 고려하지 않으며, 이는 노동의 도덕적 가치를 외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사고들은 노동의 도덕적 가치를 제거해 버린다는 측면에서 인간을 물질화, 사물화 시키면서 생활을 비-인간화 시킨다. 반면 라벨은 “노동의 도덕적 가치는 사람들이 노동에 대해서 아름다움, 기쁨 그리고 노동의 영광에 대해 이야기 하는 바로 그곳에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노동에서 도덕적 가치를 완전히 제거시켜 버린다면 그때는 인간적인 삶이란 생존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들의 위에 자리 잡게 되는 ‘일차원성(unidimensionnalité)’의 가치로 끝나 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사고방식은 ‘반-희생적 경쟁사회’라는 현대사회에서 특히 상업과 경제영역에서는 이미 ‘범주적 명령(impératif catégorique)’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라벨의 통찰이다. 삶의 모든 다양한 가치들이 사실은 단 하나의 ‘생존’이라는 가치에 수렴되어 버린다는 것은 ‘가치전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왜냐하면 원래 삶이란 다양한 가치들을 산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벨은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현대의 사회를 부조리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도덕한(scandale)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라벨의 『가치론』은 정서적 가치, 미적 가치, 지성적 가치 그리고 경제적 가치 등과 같은 서로 다른 가치들이 통일되어 있다고 고려하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다양한 가치들을 통일시키고 일치시킬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학문적인 지평에서는 칸트가 포기한 ‘도덕 형이상학’의 지반을 ‘가치들의 체계’라는 것으로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며, 또한 가치의 부재로 인해 불행한 의식을 일상으로 체험하는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가치에 대한 담론을 통해 스스로의 의식(자아)을 형성하면서, 가치의 복원을 통해 세계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현대인의 숭고한 사명을 자각하게 하는 매우 의미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Louis Lave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