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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 4장1~20절
제목 : 비유의 목적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그 첫 비유는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에게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가지 밭의 비유”는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며, 이러한 반응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모든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됩니다.
이 비유의 주된 초점은 뿌려진 씨인 말씀과 말씀을 들은 자의 반응인 밭의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다양한 반대와 오해 속에서도 결국 풍성한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1. 씨 뿌리는 자의 자유(1~9절)
1)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기 위한 준비(1~2절)
(1) 바닷가에 큰 무리가 모여 들었습니다(1절)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여기서 말하는'바다'란 갈릴리 호수를 가리킵니다.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 여기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청중을 '큰 무리', 곧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무리들이라 표현함으로써 그 당시의 매우 혼잡했던 상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청중들에게 밀려 하는 수 없이 배에 오르셨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러한 상황 묘사는 본장에서 다루는 여러 비유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숫자의 많음을 통해 당시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權爲)와 그분의 영적 영향력 등이 대단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처럼 참 생명과 진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강한 흡입력이 있습니다.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떠 있는 조그마한 배(3:9) 위에 올라 거기 앉으시고 해변 가에 모인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강론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십니다(2절)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여러 가지를 비유로 -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가르쳤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때까지의 가르침은 주로 직설적인 표현 방법이 사용되었는데 비해, 여기서는 우회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진리를 제시하는 비유적 방법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본장과 평행구절인 마태복음 13장에서는 7개의 비유가 사용되었지만 본장에서는 등불의 비유(21절;눅 8:16)와 자라는 씨앗의 비유(26-29절)가 더 있어 9개의 비유가 사용됩니다.
더욱이 마가는 본장 후반부에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34절)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본장이 다루고 있는 비유 이외에도 상당수의 비유들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비유 가운데서 몇 가지를 소개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바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기 소개되지 않은 비유도 있을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2) 씨 뿌리는 자의 비유(3~9절)
(1) 복음의 씨를 뿌리러 나갑니다(3절)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들으라(아쿠에테)은 여기서는 의미상 '깨닫는다'의 뜻으로 이해하여 '깨달을 지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말은 9절의 표현, 즉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는 표현과 함께 이 경고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 -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비유의 소재가 씨 뿌리는 농부로부터 얻어졌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형식, 즉 씨 뿌리는 자를 소재로 한 문구는 구약성경에서도 많이 발견됩니다(욥 4:8;시 126:5;잠 22:8;사 61:3;호 8:7;10:12).
한편 여기서 씨 뿌리는 자는 예수 자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본문의 '씨 뿌리는 자'를 오늘에 재해석하면 곧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사람으로 확대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네 가지 밭의 비유 (4~8절)
⓵ 길 가에 떨어진 씨(4절)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뿌릴새 더러는 - 본문은 팔레스틴 농부들의 파종(播種)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구절로 농부들은 보통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10, 11월에 비가 온 뒤 밭을 갈게 됩니다.
그런 후 나귀 등에 씨를 담은 큰 자루를 싣고 밭에 나아가, 그 씨를 다시 허리춤에 찰 수 있도록 만든 가죽 주머니에 적당히 옮깁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이 이미 기경해 놓은 밭이랑을 돌면서 그 씨를 손으로 여기저기 흩뿌리면 다른 사람이 그의 뒤를 따르며 쟁기로 흙을 덮음으로써 파종을 마치게 됩니다(Fred H. Wight).
따라서 여기서 '뿌릴 새'란 정확히 표현하면 '흩 뿌리새'가 됩니다(창26:12;레 25:3).
길가(텐호돈) -길이라는 말은 종교적 의미에서 삶의 자세로서의 행동 양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사람이 자주 다녀 단단히 굳어진 길을 가리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는 요즈음과 같은 넓고 곧은 도로가 드물었고 대개가 여행자나 나귀 등이 자주 다님으로써 생겨난 자연적인 오솔길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런데 이 오솔길은 공유(公有)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밭 주위나 혹은 그 밭을 가로질러 길이 날 경우 그 밭주인은 그 길을 남겨두고 개간해야만 했습니다(2:23;마 12:1;눅 6:1).
한편 말씀이나 교훈을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비유 중 첫 번째가 '길'과 같은 마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사실 길은 땅이 굳고 통행인이 많기 때문에 씨앗을 싹틔어 열매를 맺도록 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땅입니다.
누가복음의 평행 구는 (눅8:5)이러한 점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 '밟히며'가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눅8:5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즉 길에 떨어진 씨앗은 밟히어 못쓰게 된다는 말입니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 길가에 떨어진 씨는 흙으로 덮여지지 않고 그대로 방임되기 때문에 새들의 좋은 먹이 감이 되고 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바는 새의 먹이가 되는 것은 그 씨 자체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그 씨를 담고 있는 땅의 상태가 문제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아무에게나 무조건 전한다고 해서 싹트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을 뿌리면 도리어 사단의 좋은 먹이 감이 되고 또 복음이 밝히어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⓶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진 씨(5,6절)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여기서도 마태복음과는 평행구가 완전히 일치하고 있지만(마 13:5),
누가복음에서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눅 8:6)라고 전혀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눅8:6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그러나 본문과 누가의 기록과는 내용면에서 깊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흙이 얇은 돌밭'이란 돌이 약간 섞여 있는 농토가 아니라 거의 돌로 이뤄진 밭에 흙이 얇게 덮여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토양은 갈릴리 호수 근방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곳은 수분을 쉽게 취할 수 있고 마치 온실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빨리 싹이 트게 됩니다(Donald W. Burdick).
그러나 연한 뿌리는 더 이상 깊게 박히지 못하고 거의 지면에 노출되기 때문에 뜨거운 태양열에 견디지 못하여 곧 말라 죽고 맙니다.
여기에 대해 누가는 '습기가 없어 말랐고'라는 표현을 통해 태양열로 인한 고사(枯死)를 말한 본문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⓷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7절)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가시떨기(타스 아칸다스) -여기서는 가시가 돋은 나무(thorn plant)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새 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가시덤불'로 번역되어 있는데, 본문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이 같은 번역이 어울릴 것이다.
팔레스틴에는 밭 주위에 이러한 가시덤불이 많이 자라며 때로는 곡식과 함께 자랄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이 가시떨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주변 곡식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맙니다.
이는 각각 다른 상황을 표현하기보다 가시덤불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땅에 씨앗이 뿌려지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라 봅니다.
사실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의 토양자체는 어쩌면 매우 기름진 곳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곳에 가시덤불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기운(氣運)을 막으므로(쉬네프닢산) - 이 말은 직역하면 '함께 억눌렀기 때문에 질식하였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숨이 막혀'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함께 억눌렀다'는 뜻은 가시나무의 여러 줄기들이 힘차게 자라나므로 그 속에 뿌려진 씨는 공기나 햇빛을 적당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잎이나 가지가 뻗어 나갈 수도 없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숨이 막혀'라는 표현으로 적절히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시덤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식물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가시덤불을 소재로 택한 것은 상징적으로 씨앗이 자라날 수 없는 최악의 조건을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결실치 못하였고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습니다.
이 비유가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점,
즉 첫째는 씨앗이 밟히거나 새의 먹이가 되어 쓸모없게 된 점,
둘째는 싹은 틔었으나 뿌리를 못 내린 점,
셋째는 자라기는 했으나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점으로 보아 다음절(8절)
'결실하였으니' 라는 말과 대조되면서도 문맥상 잘 어울리는 구절로서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의 무가치함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⓸ 좋은 땅에 떨어진 씨(8절)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좋은 땅에 떨어지매 -여기서 '좋은 땅'은 위의 세 경우의 흠이 모두 제외된, 농부가 정성껏 경작한 옥토를 가리킵니다.
이 땅은 씨앗을 무성하게 자라게 하며 열매를 잘 맺게 합니다.
결실하였으니 - 이는 계속해서 열매를 맺고 있음을 현장감 있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에서 한 가지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점은 본 비유가 강조하는 바는, 씨가 뿌려진 땅의 종류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될 때 일어나는 다양한 반응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문제는 아닙니다(Lane).
비록 온갖 역경이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막아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필코 자라서 궁극적으로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이 본문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할 점입니다.
한편 여기서 '30배, 60배, 100배'라는 숫자의 점진적 증가는 옥토를 만난 씨가 지닌 왕성한 생명력을 더욱 능동적이고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대 팔레스틴의 농사법이 상당히 미개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양의 결실은 매우감격적일 만큼 풍성한 결실인 것입니다.
(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9절)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이 비유를 시작할 때 '들으라'라는 경고적 어투로 했던 것 처럼 비유를 마치면서도 시작 때처럼 경고적 어투이면서 시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공관복음에서 여러 번 사용됩니다(23절;마 11:15; 눅 14:35).
이 경고적 어투는,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이는 오해하며 잘못 알아듣는 현실을 이미 전제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경고가 주는 의미는,
첫째 이해하기 위해 주의를 집중해 달라는 촉구입니다.
둘째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적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의미모두 듣는 사람의 자세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2. 비유에 대한 설명(10~20절)
1) 비유로 가르치시는 이유(10~12절)
(1) 예수님께 비유에 대하여 묻습니다(10절).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홀로 계실 때 - 이 표현은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절의 상황 설명은 1절의 상황 묘사와는 전혀 다릅니다.
즉 비유를 가르치기 시작할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배 위로 올라가야 할 정도였는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홀로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때'는 비유를 통한 설교를 마친 후 군중들이 자리를 떠난 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소는 같은 장소, 즉 배 위가 틀림없습니다(36절 주석 참조).
함께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들로 더불어 - 비유에 관하여 질문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이라고만 언급하여(마 13:10;눅 8:9) 진리 탐구에 대한 제자들의 열의를 은연중에 나타내 주는 동시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무지를 타인들에게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소극적 일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마가복음에서만 제자들의 수가 12명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 외에 비유를 들었던 다른 사람들도 함께 남아 비유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편협하게도 12제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기 위한 본서 기자 마가의 진지한 노력을 넌지시 보여 준 표현이라 할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밀의 종교(mystery religion)에서나 볼 수 있는 폐쇄성을 거부하시고 당신의 진리를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진리를 계시해 주기 원하셨습니다.
비유들을 묻자오니 - 여기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끝난 후에 질문을 하고 있지만 '비유들'이라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본 비유 이외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이 언급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2절 주석 참조).
한편 이 질문의 내용에 있어서 마태복음에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묻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비유의 뜻을 묻습니다.
그리고 본 마가복음은 이 양자 모두를 묻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하튼 이것은 제자뿐만 아니라 다른 청중들까지 모두 비유를 통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마태의 기록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비유로 가르친 것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본격적으로 비유만을 통한 진리 교육이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가르쳐왔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설교였기 때문에 생소하게 느꼈을 것입니다(2절 주석 참조).
(2)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였습니다(11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 '비밀'(뮈스테리온)이라는 말은 복음서에서는 바로 여기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평행 구에서만 사용된 말입니다(마 13:11; 눅 8:10).
이에 비해 바울서신에는 무려 21번이나 나타나며 계시록에는 4번 쓰였습니다(계 1:20;10:7;17:5,7).
이 비밀은 전에 알려지지 않은 일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즉 이 '비밀'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선포됩니다.
그러나 그 비밀을 궁극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앙을 가진 자들입니다.
특히 마가복음에 나타난 이 '비밀'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더불어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 래드(G. E. Ladd)는 말하기를 '이 비밀은 다니엘서에 예언된다(단 2:44;12:12,13)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세상에 도래하여 사람들 가운데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바, 숨겨진 형태로 진보해 나가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A theology of the N.T. p. 94).
한편 본문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1:15 주석을 참조하라.
외인(外人)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 이 구절을 12절에 붙여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외인'이라는 말은 본절에서 지칭하는 '너희들' 즉 질문한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로서 불신앙의 완악(玩惡)한 마음을 지닌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의미를, '비유'(파라볼레)라는 말은 '수수께끼'(riddle)로서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말은 비밀을 알게 했다는 말과 대칭을 이루어 천국에 대한비밀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으로 계속 남아 있게 했다는 말이 됩니다.
(3)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12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70인역(LXX)에 의한 사6:9, 10의 자유스런 인용입니다.
*사6:9,10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한편 70인역에서 이사야의 글과 마가가 여기에 인용한 구절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즉 마가는 본문에서 보고 아는 것을 먼저 그리고 듣고 깨닫는 것을 나중에 배치시키지만 사 6:9은 듣고 깨닫지 못하리라는 사실이 먼저 언급됩니다.
또한 사 6:10의 첫 부분과 같은 강한 표현인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는 70인 역의 본문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으며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는 문구를 변형시켜 단순히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하는데 있어서 마가는 아람어의 역본인 탈굼역(The Targum)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유의 목적이 믿지 않는 자들(외인)은 진리를 받을 수도 없고 회개 할 수도 없게 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말씀이 신학적으로 매우 난해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이 내용을 기록한 각 복음서간의 차이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태는 본문 초두에 사용된 접속사 '히나'('하기 위하여', NIV성경은 모호하게 '히나'를 '이는'<so that>이라고 번역함) 대신에 '호티'( '그결과')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누가는 '메포테'('...하지 않도록')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접속사 '히나'의 뜻과 관련하여 본 구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분분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러한 해석들을 통합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외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하고 그 비유를 알아보고 듣기만 하면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라고 번역함으로써 마치 시험을 치르고 용서를 받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어쨌든 본절 말씀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그저 단순하게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한 가지 이유가 진리를 '외인(완고한 불신자)에게는' 감추는 것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적극적인 입장에서 마샬(Marshall)이 언급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시는 방법을 통하여 그의 청중들로 하여금 표면적인 이야기를 뚫고 들어와 그 실제적인 의미를 발견 하도록 유도하셨으며, 동시에 어두운 눈과 둔한 귀를 가진 자가 돌이켜 진리를 바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Commentary on the Luke, p. 323)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표면적으로는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 즉 완악한 맹목성과 복음의 거부에 관한 정죄 및 그로 인한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선포한 것(Robertson)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완고한 불신자에게는 비유가 심판을 지향하는 가리워진 비밀에 속하나 예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백성들에게 그 같은 심판과 형벌의 메시지를 제공하심으로써 오히려 그러한 충격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과 회개를 촉구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실은 주님의 경고를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용서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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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들(13~19절)
(1) 제자들의 무지를 책망하십니다(13절)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의 무지를 가볍게 책망하십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이미 입문한(11절)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의미가 명백하여 깨달음이 있는 자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비유이지 않은가? 만일 이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찌 더 어려운 비유들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하고 실망 섞인 책망을 하신 것입니다.
한편 이 같은 사실에 대해 혹자(Cranfield)는 말하기를 '인간에게 덮여 있는 어두움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제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2)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입니다(14절)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여기서부터는 3-8절까지의 비유에 대한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직접 그 의미가 해석됩니다.
뿌리는 자 - 이에 대해 본문에서는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지만, 그는 분명 말씀의 주체이신 그리스도와, 복음을 이 땅에 선포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 마태복음에서는 간접적으로 '씨'가 '천국 말씀'임을 밝히고 있는데(마 13:19)비해, 누가복음에서는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라고 직접 서술합니다(눅 8:11).
그리고 공동번역에서는 본문이 '뿌린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비유의 '씨'는 '말씀'을 의미하며,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말씀', 곧 예수님의 인격과 그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하였다는 확실한 소식인 것입니다.
본 비유에 있어서 그 강조점은 '말씀을 뿌리는 일'이었으나, 그 해석에 있어서의 강조점은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the reception of the Word)임에 유의해야 합니다(15-20절).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그 비유의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말씀을 뿌리는 일'에 대한 사람들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의 부정적 측면을 경험하신 바 있습니다(2, 3장).
(3)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15절)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물론 여기서 '길가'란 자신의 능력과 경험과 선입관과 주의 주장으로 인해 굳어 질대로 굳어진 완악한 심령을 가리킵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영적 감화나 감동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들을 가리킴이니- 이를 좀 더 상세히 번역하면
'이를테면, 이 사람들은 다음에 나오는 종류의 사람들이다'라는 뜻입니다.
길바닥에 씨앗이 뿌려진 것에 비유되는 사람은
말씀을 들었으나 자기의 것이 되지못하고 사단에게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사단이 즉시 와서 - 여기서 '사단'(사타나스)이란 인간의 내면에 흩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빼앗아가는 악의 실체로서, 4절에 언급된 '새들'을 이 사단으로 보기도 하고(Lenski) 또 사단의 하수인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단'이라는 말 대신 사단의 별칭(別稱)이라 할 수 있는 '악한자'(호 포네로스)로 묘사하고(마 13:19),
누가복음에서는 '마귀'(호디아볼로스)라고 묘사하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초점은 누가 어떻게 빼앗아 가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자기에게 들려진 말씀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즉 천국의 비밀이 자신에게 주어졌어도 자기의 영혼의 양식과 신령한 지혜로 만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의미는 말씀을 듣고 천국의 비밀을 알았으면서도 즉시 자기 삶으로 옮겨 천국을 이루어가지 못하면 그 말씀은 남의 것이 되고 만다는 뜻입니다.
특히 자기 삶으로 옮기는 결단과 실천성을 강조하는 말이 '즉시'입니다.
말씀을 내면 깊숙이 뿌리박지 못하면 '즉시' 사단이 '와서' 빼앗아 갑니다.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 - 특히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마태복음에서는
'그 마음에 뿌리운'(마 13:19)으로 묘사하여 그 씨앗이 단지 주변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이 뿌려졌음을 암시합니다.
(4) 말씀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16~17절)
⓵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16절).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본절은 돌밭에 뿌리워진 씨앗에 대한(5절) 해설입니다.
15절에서는 말씀을 들은 사람에 대한 반응이 직접 묘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15절의 상태보다 좀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수용(受容)하였음을 밝힙니다.
15절이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라면, 이 비유는 비록 순간적이라고는 하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나, 진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는 사람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는 일시적이나마 신앙생활에 흥미를 갖고 열심히 교회생활에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⓶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넘어지는 자입니다(17절)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 뿌리가 성장할 수 없는 돌밭에 뿌리워진 씨앗을 '그 속에 뿌리가 없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로 이런 자들은 그 마음속에 말씀의 씨를 받아들였다고는 하나 그 말씀이 지속적인 생명력으로 커가 끝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원천인 뿌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생명력은 일시적이요 그 본질은 경박하고 유약합니다.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 - 6절에 언급된 태양열이 여기서는 '환난'(드립시스)과 '핍박'(디오그모스)으로 묘사되었습니다.
먼저 헬라어 '드립시스'(환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짓누르는 압박'을, '디오그모스'(핍박)는 '뒤에서 바짝 추격하는 듯한 위협'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양자(환난과 핍박)는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어려움과 박해를 가리킵니다.
실로 천국에 이르는 방법을 따라 살고 진리를 따라 살 때, 외부로 부터나 자기 자신 안으로부터 여러 가지 갈등과 유혹이 있게 마련입니다.
또 불의한 세력들이 진리와 정의를 파괴하려고 하면서 공격해 오기도합니다. (롬1:25;2:8;약 3:14;벧후 2:2).
15절의 '사단'을 마태복음에서 '악인들'로 묘사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치됩니다. 사단은 천국을 파괴하려는 세력입니다.
이러한 환난이나 핍박을 견디어 이겨내지 못하면 결국 천국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6절에 언급된 '태양'은 이처럼 뿌리가 없는 식물에게는 생장(生長)의 크나큰 장애물로 대두됩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뿌리워진 '씨'에게 있어서는 그 생장에 있어서 습기만큼 중요하고도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태양의 빛과 열기 없이는 '씨'는 결코 푸르게 성장하여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즉 그 '씨'는 '말씀을 인하여'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핍박과 환난('태양')없이는 결단코 풍성한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Lenski).
곧 넘어지는 자요 - 실로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지 않은 식물은 아무리 그 외모가 화려하고 푸르르다 하더라도 강렬한 태양 앞에 쉬 쓰러지고 말듯이 신앙에 깊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심령은 환난과 핍박에 견디지 못하고 마치 사냥꾼의 올무에 걸려 더 이상 활동력을 상실한 짐승처럼 죄의 올무, 절망과 좌절의 올무, 온갖 고통의 올무에 걸린 채 더 이상의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딤전 3:7;6:9).
*딤전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딤전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5) 말씀이 가시떨기에 뿌려진 것(18~19절)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가시덤불에서 싹을 틔웠으나 가시덤불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앗의 비유입니다.
앞 절과의 차이점은, 17절에서는 뿌리가 없어 환난과 핍박이 일어나면 넘어지는 자, 곧 배반자를 말하나(눅 8:13), 여기서는 비록 뿌리(말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성실성과 이해력)은 있으나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욕심으로 인해 끝내 결실치 못하는 자를 묘사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러나 결과적 측면에서 17절의 경우와 동일하다고 봅니다.
실로 가시떨기가 자라는 땅은 길가나 돌밭보다 훨씬 뛰어난 옥토임에 분명합니다(7절).
따라서 이곳에 씨앗이 떨어지게 되면 그 씨앗은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되고 또 싹이 돋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성장의 어느 시점에 이르러 가시로 인해 방해를 받다가 종내 결실치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가시를 세 경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⓵ '세상의 염려'입니다.
'세상의 염려'란 인간의 생명이 끝내 종말을 고하게 될 현세대에 국한된 근심(Lenski), 현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열심과 걱정거리(Donald W. Burdick),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일어나는 불안(Taylor)등입니다(마6:25, 31;눅 8:14;21:34;고전 7:33).
*마6:25,31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⓶ '재리(財利)의 유혹'입니다.
재리와 가시를 연결시킨 것은 참으로 적절합니다.
그 까닭은 재물은 인간의 영혼을 깊이 찌르는 가시가 되기 때문입니다(The Pulpit Commentary , 딤전 6:10).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이 '재리의 유혹'은 재물이 지닌 기만성, 곧 재물이 어떤 안식과 자신감 등을 약속하는 듯하나 결국에는 그 소유자와 기대자로 하여금 허무한 절망에 빠뜨리게 하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Taylor,Lenski, Burdick, 마 11:21-23).
⓷ '기타 욕심'입니다.
'씨'(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고 질식시켜 그 기운을 막는 모든 장애 요소를 가리킵니다.
이에 대해 혹자(Robertson)는 '모든 정욕, 모든 갈망, 모든 세속적 쾌락'이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눅 8:14에는 이 말 대신에 '이 생의...향락'이라 표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모두 앗아가는 현세 지향적이고 감각적이며 관능적인 관심과 욕망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진정 이 같은 욕망들은 마치 기운찬 가시 떨기처럼 우리의 영혼과 생활 전 영역을 뒤덮음으로써 말씀의 씨의 성장을 철저히 제어해 버립니다.
*눅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3) 열매을 맺는 땅(20절)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이 비유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의 경우를 언급한 것으로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의 '결실'에 관한 내용입니다.
실로 '씨'(말씀)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은 인간의 심령에 그 씨가 뿌려져 그 인간의 온 인격과 삶을 통해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같은 결실을 맺는 사람은 무엇보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즉 그는 말씀을 경시하지도, 환난과 핍박을 두려워하지도, 세상의 유혹과 염려에 빠지지도 않고 오직 주어지는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실행하며, 온전히 간직하는 데 힘씁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은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나 커다란 결실, 곧 진리와 은혜와 덕이 충만한 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한편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사실은 '듣고'(아쿠우신, '순종하다','깨닫다','이해하다'는 뜻도 지님)와 '받아'(파라데콘타이,'영접하다', '승인하다', '인정하다'는 뜻도 지님) 그리고 '결실을 하는'(카르포포루신)이라는 말이 모두 현재 시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또 계속적으로 그 말씀을 받아 들여 계속적으로 결실을 한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실로 앞에 언급된(15-19절) 세 종류의 밭에 비유되는 사람들이 듣고 인정하는 것을 중도에 포기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좋은 땅'의 사람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생명력으로 하나님 나라의 말씀에 착념함으로써 끝내 많은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마 13:23;눅 8:15).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그 결실이 30배, 60배, 100배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는 점입니다.
이러한 소출은 그 밭(사람)의 능력보다 오히려 그 씨(말씀)가 지닌 역동적 생명력을 강조한 것이라 봅니다.
실로 한 인간에게 뿌려진 씨는 그 내부에서 풍성한 성장을 함으로써, 회개와 겸손과 온유함 등의 심령의 변화를 가져오며, 그러한 변화는 그 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타인에게도 옮아가는 것입니다.
한편 이 비유는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를 생각나게 합니다(마 25:14-30).
즉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등의 다양한 숫자 나열을 통해 그 결실의 종류가 다양함을 암시해 줍니다.
이는 주의 말씀을 실천하여 천국을 이루어 갈 때 각 사람마다 다양한 형태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결실 각각을 존중해야 합니다.
묵상 Point
1) 길가에 떨어진 씨
말씀을 등자마자 거부하는 ㅏ들이다.
그들에게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자신이 진리다. 자진들만이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실리다.
하늘이 아니라 땅이다.
이유는 묻지마라.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맘먹었다.
우리만 지리를 결정할 자격이 있다.
그들이 길가에 떨어진 씨다.
2) 돌밭에 떨어진 씨
복음을 환영한다. 예수를 환대한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
그게 내 필요를 체워줄 것 같다.
나를 보호해 주고 인정해줄 것 같다.
환상적이다. 기쁘다. 너무 좋다. 그런데 대가를 요구한다.
십자가를 요구한다. 자시을 비우라고 한다.
이전보다 더 큰 위기를 끌어안으라고 한다.
그러면 도리어 생명과 안전을 확보할 것이라는 못 알아듣는 소리를 한다.
그래서 끝내 떠난다. 버린다. 포기한다. 베드로의 예수 부인이 여기에 속한다.
3) 가시떨기에 뿌리진 씨
말씀이 들린다. 간절함도 있고 사모함도 있다.
하지만 내 모든 소유를 상대화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
더 많은 소유를 얻고 천하를 호령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나의 나라를 향한 내 욕망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품으라는 말을 따를 수 없다.
부자 청년의 퇴장과 가롯 유다의 배반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4) 좋은 땅에 뿌려진 씨
말씀을 받는다. 그 말씀에 자신을 건다.
말씀이 내 안에서 창조가 일어나도록 허락한다.
성령께서 그 말씀으로 역사하도록 맡긴다.
하나님께서 열어가시는 세상을 기대한다.
예수님의 다스림에 복종하여 자기 전부를 내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한다.
이것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다.
말씀 가이드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다.
믿어서 열매를 맺는 씨와 열매 없는 씨.
복음은 묶인 데서 해방되고, 아픈 데서 치유되고, 고통받는 데서 놓임을 받는 구원의 소식이다.
그런데 그 좋은 소식을 의외로 ᄇᆞᆮ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신다.
이유가 가지각색이다.
길가에 떨어지 씨.- 말씀을 듣자마자 거부하는 자들이다.
말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자신이 진리다. 자신들만이 자격 있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실리다.
돌밭에 떨어지 씨.- 복음을 환영한다. 예수를 환대한다.
그게 내 필요를 채워줄 것 같다.
나를 보호해주고 인정해줄 것 같다.
기뻤고 너무 좋았다.
그런데 복음은 대가를 요구한다.
십자가를 요구한다.
이전보다 더 큰 위기를 끌어안으라고 한다. 그래서 끝내 떠난다.
가지떨기에 뿌려진 씨.- 말씀이 들린다.
간절함도 있고 사모함도 있다.
아지만 내 모든 소유를 상대화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
내 나라를 향한 욕망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분의 열망을 품으라는 말을 따를 수 없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 - 말씀을 받는다.
말씀이 내 안에서 창조가 일어나도록 허락한다.
성령께서 그 말씀으로 역사하도록 맡긴다.
하나님께서 열어 가시는 세상을 기대한다.
예수님의 다스림에 복종하여 자기 전부를 내건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한다.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복음이 복된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이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를 때, 하나님 나라 소식은 복음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계속 노예로 생존만을 모색할 것인가, 자유 안에서 생명을 누릴 것인가?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전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해 사람들이 다양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설명합니다.
씨가 뿌리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은 ‘씨’가 아니라 ‘밭’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열매는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 따르는 많은 무리도 다 열매로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처럼 처음부터 거절한 이들이 있고, 무리처럼 말씀을 듣기 위해 나왔지만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감당하지 못하고 돌아설 이들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내 마음과 태도는 어떻습니까?
그 마음 밭에서 거둔 열매는 어떠합니까?
2, 9-12절 비유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외인에게 감추고, 제자들에게는 더 풍성히 알리는 것입니다.
좋고 나쁜 땅을 가리지 않고 길가를 포함해 모든 땅에 씨가 뿌려진 것처럼, 말씀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오직 마음을 좋은 땅으로 기경한 이들에게만 열릴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제 욕망을 이루려는 뒤틀린 마음을 소유한 자들에게 비유의 말씀은 비밀이 되어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릴 것입니다.
15-19절 말씀이 결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을 기경(起耕)해야 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밭은 이미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에 말씀이 뿌리조차 내리지 못합니다.
돌밭은 고난과 핍박에 대한 두려움이 바위처럼 마음을 짓누르고, 가시밭은 세상 염려와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가시덤불처럼 자라 마음을 뒤덮습니다.
말씀의 열매를 결실하는 제자의 길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에 있습니다(8:34). 그것은 곧 제 마음에서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는 가시덤불을 거둬내는 일이며, 고난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의 바위를 들어내는 일입니다. 말씀이 열매 맺도록 지금 내 마음 밭에서 들어내고 거둬내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20절 좋은 밭은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밭이란 말씀을 겸손히 수용한 이들의 마음입니다.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백배로 결실할 것입니다.
죽어야만 살 수 있고,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빌 3:8)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제자입니다.
[기도]
공동체-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와 말씀을 깨닫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주소서.
열방-인도 정부가 법률개정을 통해 비정부(NGO) 종교단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인도 정부가 비정부 단체를 제한하는 규정들을 개정하고 종교단체의 활동을 인정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