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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李 穀) 14
출생-사망 1298 ~ 1351 본관 한산(韓山)
자 중보(仲父) 호 가정(稼亭) 시호 문효(文孝)
초명 운백(芸白)
활동분야 경학
주요작품 《가정집(稼亭集)》
고려시대의 학자. 1333년 원나라 정동성 향시에 수석으로 급제하였다.
문장에 뛰어났고 고려에 돌아와 정당문학을 지냈다. 이제현(李齊賢)의 문인
정동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이 되었고, 원제(元帝)에게 건의하여 고려에서의 처녀 징발을 중지하게 했다. 1344년 귀국, 이듬해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와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문장에 뛰어나 원나라에서도 그를 외국인으로 보지 않았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조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고려대(高麗代) 가전체 작품 《죽부인전(竹夫人傳)》은 대나무를 의인화한 것으로 《동문선(東文選)》에 전하며, 백이정(白頤正) ·우탁(禹倬)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그의 아들이고 토정 이지함이 그의 8대손이다.
한산군(韓山郡 :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군리(郡吏) 이자성(李自成)2)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과 다르더니 성장해 글을 읽을 줄 알면서부터는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모친을 효성으로 섬겼으며,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서리로 근무했다.
충숙왕 4년(1317) 거자과(擧子科)에 급제하여 경서와 사서를 깊이 연구하니 당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의 문하에 많이 들어가 질정을 받았다. 7년(1320)에 과거에 급제3)해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사록참군(司錄叅軍)으로 임명되었으며, 충혜왕 원년(1331)에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승진했다.
충숙왕 후원년(1332)에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4)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이어 제과(制科)에도 급제5)했다. 그 전에 고려인은 제과에 급제해도 대개 석차가 낮았는데, 이곡의 대책(對策)이 독권관(讀卷官)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아 갑과 2등에 올랐으며, 재상의 천거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으로 임명되었다.
이곡은 중국 조정의 문사들과 교유하고 함께 공부하면서 학문의 조예가 더욱 깊어졌다. 문장을 지을 때 붓을 들면 바로 이루어졌고 말이 엄격하고 뜻이 오묘하였으며 문체가 전아(典雅)하고 고고(高古)해 외국인의 글로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귀국해 학문을 부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환국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원나라로 갔는데 본국에서는 전의부령(典儀副令) 벼슬을 받았으며 원나라로부터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로 임명되었다가 정동성행중서성(征東省行中書省)의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으로 옮겼다.
원나라가 고려에 자주 처녀를 바칠 것을 요구하자 이곡이 어사대(御史臺)에 그 일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한편 상소문을 대신 지었다.
“옛날 성군께서 천하를 다스릴 때는 모든 백성을 똑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제도를 통일시켰지만 지역과 인정에 따라 각기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존중하는 것은 구태여 바꾸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사방의 먼 나라들은 풍속이 각각 다른데도 굳이 중국과 같이 만들려 한다면 인정이 좇지 않을 것이며 형편에도 맞지 않을 것입니다. 인정이 따르지 않고 형편에 맞지 않는다면 비록 요순(堯舜)같은 성군이라도 능히 잘 다스릴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옛날 우리 세조황제께서는 천하를 다스리실 때 백성의 인심을 얻으려 노력했으며, 특히 특별한 풍속을 가진 먼 지방의 경우 원래의 전통에 따라 원만히 다스렸기 때문에 온 천하사람 모두[普天率土]가 기뻐서 춤추었으며 아득히 먼 나라에서도 앞 다투어 귀부했으니 요순의 다스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었습니다. 고려는 본래 바다 이 편에서 따로 하나의 나라를 만들어 두고, 성군이 중국을 다스리지 않으면 멀리하면서 서로 통교하지 않았습니다. 당나라 태종의 위엄과 덕망으로도 두 번이나 정벌에 나섰으나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갔습니다. 상국이 건국하자 가장 먼저 신하로서 복속해 왕실에 공훈을 세우니 세조황제께서 공주를 시집보내시고 이어서 조서를 하사해, 복식과 의례는 조상의 풍습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유시했기에 그 풍속이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금 천하에 군왕과 신하와 백성과 사직이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나라뿐입니다. 고려를 유지해 나갈 방도라면, 무엇보다 황제의 조칙을 공경히 받들어 조종들께서 행하신 바를 그대로 따르고 정치와 교화를 성실히 수행해 밝히며 때에 맞추어 조빙(朝聘)을 함으로써 상국 원나라와 함께 태평을 누리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그러나 환관의 무리로 하여금 중국에 근거를 마련해 주어 그 도당들을 늘리게 하니 이들은 황제의 총애를 믿고 도리어 본국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심지어 외람되게도 천자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다투어 사자를 보내 해마다 처녀들을 데려가니, 그 행렬이 끊이지 않습니다. 무릇 남의 딸을 데려다가 윗사람에게 잘 보임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짓은 사실 고려 스스로가 초래한 일이지만 천자의 분부가 있었노라고 사칭하고 있으니 어찌 상국 조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옛적에는 제왕이 한번 명령을 내리시면 온 천하가 공경하며 은덕이 내릴 것을 소망했기 때문에 그 조서를 덕음(德音)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주 특별 명령을 내리시어 남의 집 딸을 빼앗아가는 것은 대단히 옳지 못한 일입니다. 무릇 사람이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뒷날 자식들의 봉양을 기대하는 까닭이니 귀천이나 화이(華夷)를 가릴 것 없이 그 천성은 같습니다. 또한 차라리 남자를 데려와 살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는 것이 고려의 풍속으로 이는 진(秦)나라의 데릴사위 풍속[贅婿]과 비슷합니다. 통상 부모 봉양해 주기를 밤낮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품안에서 그 딸을 빼앗아 4천 리 밖으로 보내버리니 한 번 문을 나서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빤히 아는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원나라에 있는 고려의 부녀 가운데는 후비(后妃)의 지위에 올라 있는 경우도 있고 왕이나 제후와 같은 귀인의 배필이 되기도 하였으며, 공경(公卿) 대신(大臣) 중에는 고려의 외손(外孫)이 많습니다. 이는 본국의 왕족 및 문벌과 부호들의 집안에서 특별히 황제의 조서를 받았거나 혹은 자원해서 원나라로 왔거나 또한 중매로 혼인한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상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익을 노리는 자들이 끌어대다가 상례인 양 꾸미고 있습니다.
요즘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모조리 처녀만 데려가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 처첩까지 얻으려 합니다. 무릇 다른 나라로 사신 가는 일은 황제의 은덕을 널리 펴고 백성들의 고통[民隱]을 살피려고 하는 것이니 『시경』에서도 ‘두루 논의하고 두루 상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외국으로 사신가는 자들은 재물과 여색으로 독직(瀆職)을 저지르고 있으니 이를 엄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풍문으로 들으니,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겨 놓고서 비밀이 샐까봐 걱정한 나머지 비록 이웃이라도 볼 수 없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대경실색해 서로 돌아보며 ‘무엇 하러 왔는가? 처녀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처첩을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수근뎁니다. 군대의 서리들이 사방으로 나가 집집마다 뒤지다가 만약 숨기기라도 하면 그 이웃을 잡아 가두고 그 친척을 구속해 채찍으로 때리고 괴롭히다가 처녀가 나타난 뒤에야 그만둔다고 합니다. 사신이 한번 오기만 하면 나라가 온통 소란에 싸여 개나 닭이라도 편안할 수 없습니다. 처녀들을 모아놓고 그 중에서 데려갈 사람을 뽑는데 얼굴이 예쁘든 못났든 간에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 그 욕심만 채워주면 비록 예쁘더라도 되돌려 줍니다. 그리고 되돌려 준 처녀대신 다른 데서 여자를 벌충하느라 또 수백 집을 뒤집니다. 이 모든 것은 오로지 사신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지고 누구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황제의 뜻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한 해에 두 번 혹은 한 번이거나 한 해씩 거르기도 하는데, 그 수가 많게는 마흔 내지 쉰 명이나 됩니다.
그 선발에 들고나면 부모와 친척들이 함께 모여서 밤낮으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도성의 문에서 보낼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쓰러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슬프고 원통해서 괴로워합니다.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멀어버리는 자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사신들이 처첩으로 데려가는 경우는 이처럼 처절하지 않지만 인정을 거슬러 원망을 사는 것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경(書經)』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자발적으로 힘을 다하지 않으면 군주는 아무 공적도 이룰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상국 조정의 덕화(德化)가 미치는 곳은 만물이 모두 성대를 누리는데 고려 사람만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옛날 동쪽 바다에 사는 한 아낙네가 한을 품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다는데, 지금 고려에는 한을 품은 아낙네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몇 년 사이 고려에 홍수와 가뭄이 계속 이어져 백성들 가운데 굶어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이야말로 그 원망과 탄식이 조화로운 기운을 상하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당당한 천자의 조정이 후비나 궁녀[後庭]가 부족하지도 않은데 어찌 반드시 외국에서 데려오려 하십니까? 비록 아침저녁으로 사랑을 받아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을 그리게 되는 것이 사람의 당연한 정인데, 지금 궁궐에 두고 시기를 놓쳐 헛되이 늙게 하거나 때로는 내보내어 환관에게 시집을 보내지만 결국 자식을 두지 못하는 자가 열에 대여섯이나 되니 그 원망하는 마음과 조화를 상하게 하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작은 폐단이 있어도 나라의 이익이 되는 일이 어쩌다 있긴 하나 폐단이 없는 것보다는 못합니다. 하물며 나라에 아무 이익이 없고 먼 곳의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아 그 폐단이 적지 않은 일은 어떠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고귀하신 말씀을 조서로 내리시어, 감히 황제의 뜻을 어겨 위로는 성스러운 귀를 더럽히고 아래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처녀를 데려가는 자 및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처첩을 취한 자가 있거든 금지하는 조목을 명시하셔서 차후로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황제의 조정이 만민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교화를 드러내고 외국 사람들이 옳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위안함으로서 원망을 없애고 조화로운 기운을 가져와 만물이 육성된다면 더 이상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황제가 건의를 받아들이자, 본국에서는 그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임명하였다.
충혜왕 후2년(1341)에 표문을 전하러 원나라로 가서 6년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원나라에서 그를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임명하였다. 당시 본국에서는 관작이 남발되어 심지어 노예도 관직을 얻었다. 전중(殿中) 최강(崔江)이 정윤(正尹) 자리를 원하자 그 말을 들은 이곡이 이런 시구를 보냈다.
생전에 정윤이 되는 것도 괜찮은 일이니,
죽은 뒤에 중서로 올려 주는 것보다 나으리.
안취(安就)와 조명(趙溟)이 모두 죽은 뒤에 중서(中書)로 오른 것을 두고 이렇게 풍자한 것이다. 충목왕이 왕위를 이어받고 환국하게 되자 이곡이 재상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나라 구실을 못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미풍양속이 무너지고 형벌이 문란하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편히 살고 있지 못합니다. 다행히 지금 국왕이 명을 받아 환국하게 되니 백성들은 큰 가뭄에 단비를 바라는 것처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왕은 연부역강하고 겸손하며 온화하고 과묵하기 때문에 여러 공들로부터 국정에 대한 견해를 듣게 될 것이니 이제 사직의 안위와 백성들의 이해와 사군자(士君子)의 등용과 퇴출이 모두 여러 공의 의견으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군자를 등용하면 사직이 편안할 것이고 군자를 퇴출시키면 백성들이 해를 입게 되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니 인재를 제대로 쓰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근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쓰기는 쉬워도 사람을 알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사람의 곧음과 인격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그저 재산과 권세를 따져 나에게 붙좇는 자는 비록 간사한 아첨꾼이라도 등용하고 그렇지 않는 이는 비록 청렴하고 겸손해도 퇴출시켜 버린다면 사람 쓰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쓰니 정사가 나날이 어지러워지고, 정사가 어지럽기 때문에 나라는 따라서 위기에 빠져 망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것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옛 사람들은 그러한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한번 사람을 등용하고 퇴출시키는 일에는 반드시 그 행실과 활동 상황을 살폈으며, 또 재물과 권력에 자신의 기준이 흔들릴까 조심했던 것입니다. 이치가 이런데도 선한 이와 악한 자가20) 제대로 구별되지 않고 옥과 돌이 섞이듯 뒤죽박죽이니 사람을 제대로 알아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바로 지금 본국은 재물 가진 자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세력이 있는 자를 지혜 있는 사람으로 여기며, 조정의 신하들과 학자들의 말을 광대들의 잡스러운 놀이쯤으로 여기고, 곧은 말과 옳은 논의를 길거리에 나도는 망령된 이야깃거리로 여기는 것이 풍속으로 굳어버렸으니 나라가 나라 같지 않게 된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제가 친척들과 이별하고 나라를 떠나 오랫동안 황제 아래에서 식객 노릇을 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요사이 여러 공들께서 정사를 도와 개혁한다지만 예전의 관행에서 그다지 나아가고 있지 않다는 말을 듣습니다. 말로는 원로들을 떠받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젊은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으며, 말로는 청렴을 존숭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탐욕스러운 자가 권세를 잡고 있습니다. 악소배들을 척결해 버렸지만 큰 악당들은 그 간악함을 고치지 않았고, 옛 신하들을 바꾸었지만 새로 벼슬에 오른 자들은 오히려 옛 신하들에게 아부하고 있습니다. 사람 알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고 사람 쓰는 것은 너무나 쉽게 여기니, 국왕께서 공들께 정무를 맡긴 뜻과는 달라져 버렸습니다. 원나라 조정에서 이런 사정을 들으면 틀림없이 제동을 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본국의 재상들에게 굳이 글을 보낼 필요가 없소. 화만 돋을 뿐 별다른 이익이 되지 않을 것이외다.’라고 충고하기에 저는 그에게 ‘사직이 진실로 편안해지고 백성이 참으로 이익을 얻는 일이라면 자세한 사정을 원나라 조정에 알리고 황제께도 건의해야 할 터인데 어찌 본국의 재상들이 화를 낸다고 그냥 입을 다물고 있겠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이런 뜻에서 외람되게21) 말씀드리니, 공들께서는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원나라 순제(順帝)가 상도(上都)로 행차할 때 이곡이 호종하자 본국에서는 그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했고 거듭 승진시켜 지사사(知司事)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삼았으며 한산군(韓山君)으로 봉하였다. 책력을 반포하는 일로 환국한 후에는 이제현 등과 함께 민지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보 수정하고 또한 충렬·충선·충숙왕 등 3대의 실록을 편수했다. 또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김인관(金仁琯) 등을 뽑았는데, 두 사람이 사사로운 인연에 의거해 권문세가의 자제 증 공부가 변변치 않은 자들을 많이 뽑았기 때문에 헌사의 탄핵을 받고 새로운 급제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공문을 받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자 중서성(中書省)에서 감창(監倉)을 맡겼고 본국에서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로 임명했으며 곧이어 고려로 환국했다.
충정왕이 즉위하게 되자, 과거 이곡은 공민왕을 왕으로 세우고자 청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관동(關東)지방을 유랑했다. 이듬해 원나라에서 봉의대부(奉議大夫)·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으로 임명했다. 그 다음 해에 죽으니 나이 쉰넷이었으며 시호를 문효(文孝)라고 하였다. 성품이 단정 엄격하며 강직해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였다. 그가 저술한 『가정집(稼亭集)』 스무 권이 세상에 전한다. 아들은 이색(李穡)으로 따로 전기가 있다.
충목왕 때 정당문학(政堂文學)·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원나라 순제(順帝) 때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지낸 문신관료이다. 개경과 원나라 수도를 오가며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인 한산의 전원과 농사를 좋아하여 그곳에 가정(稼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호를 가정(稼亭)이라 하였다.
이 가계는 선대가 재지 이족이었으나, 이곡의 아버지 이자성(李自成)이 정읍감무(井邑監務)를 지내면서 중앙관료를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이곡은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하고 원나라에 공민왕의 즉위를 요청하였으며, 아들 이색(李穡)은 공민왕 때 신흥사대부들과 학문적인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색의 아들 이종덕(李種德)과 이종학(李種學)도 우왕 때 각각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와 첨서밀직사(簽書密直司事)를 역임함으로써 우왕 때 세족의 지위를 갖게 된다. 이 가문의 지위는 비록 세족이었지만, 신흥사대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성리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하면서 현실모순에 대한 개혁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편 이곡의 모친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울산 이씨(蔚山李氏)였고, 처가는 영해(寧海 :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지역에 우거한 함창 김씨(咸昌金氏)였다. 이곡은 외가 또는 처가를 따라 울산(蔚山 : 지금의 울산광역시)과 영해를 왕래하였고 경주 이씨 이제현(李齊賢), 영해 박씨(寧海朴氏) 박원계(朴元桂), 순흥 안씨 안축(安軸), 봉화 정씨(奉化鄭氏) 등의 가계와도 교류 또는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영남지역의 문풍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곡의 후손들은 안동 권씨·반남 박씨(潘南朴氏)·양성 이씨(陽城李氏) 등의 집안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 원나라의 동녀 징발을 폐지토록 한 경학의 대가 이곡(李穀)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4. 慶尙道 寧海都護府 流寓條]
이곡(李穀:1298∼1351)의 자는 중보(仲父), 초명(初名)은 운백(芸白), 호는 가정(稼亭)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지금의 충남 서천)이지만, 영해도호부(지금의 영덕군) 유우(流寓: 방랑하다가 타향에서 머물러 삶) 조(條)에 “급제하기 전 여기에 와서 김택(金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경북의 인물로 치부할 만한 근거를 남겼다.
그는 한산 이씨의 시조인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으로, 찬성사 이자성(李自成)의 아들이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이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범상하지 않았고 꾸준히 공부에 정진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받들어 모셨다.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 과거의 예비시험)에 합격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으로 선발되었으며, 다시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때 지은 대책(對策)을 독권관(讀卷官)이 보고 감탄하였다. 그곳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그때부터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는데, 문장을 지음에 있어 붓을 잡으면 곧 이루어졌으며, 글의 뜻이 매우 엄정하고도 간결하여 그곳의 문사들도 그를 감히 외국 사람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대접을 받음으로써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게 되었다.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성 행중서성 좌우사원외랑(征東省行中書省左右司員外郞)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때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의 동녀(童女) 징발을 자주 하였으므로 어사대(御史臺)에 말하여 이를 폐지할 것을 청하는 한편 소(疏)를 지었다.
“…옛날에 우리 세조황제[忽必烈]께서는 천하에 민심을 얻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더욱이 멀리 떨어져 있고 풍속이 다른 곳에는 그 풍습에 따라 순리로 다스렸습니다.…고려는 본래 해외에 있어 따로 일국을 이루어 적어도 중국에 성인이 있지 않으면 아득히 서로 더불어 통하지 않았으니 당 태종의 위덕(威德)으로도 두 번이나 침공하였으나 소득이 없이 돌아갔습니다. 귀국의 건국 초기에는 맨 먼저 솔선하여 귀순하여 귀국 왕실에 큰 공훈을 세웠으므로 세조황제께서는 공주를 우리나라에 출가시키는 동시에 조서로써 명시하시기를 ‘의복과 예의 제도는 조상의 풍습을 없애지 말라.’고 하였습니다.…그런데 부시(婦寺: 궁중에서 일을 보던 여자와 환관)의 무리들이…임금의 이름을 팔아 다투어 역마를 달려 해마다 처녀[童女]를 강탈하여 수레에 싣고 가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습니다.…대저 사람이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은 장차 그 반포(反哺)함을 바라기 때문입니다.…고려의 풍속은 남자가 차라리 본가로부터 따로 살지언정 여자는 집을 떠나지 않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진(秦) 나라의 데릴사위와 같아서 무릇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여자의 임무로 되어 있습니다.…듣건대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이를 숨기고 오직 드러날까 걱정하여 비록 이웃이라도 보지 못하게 하고…이윽고 군대와 관리들이 사방으로 나가 집집마다 수색하고 만일 숨기면 그 이웃을 잡아 가두고 그 친족을 구속하여 매질을 하고 곤욕을 주어서 처녀가 나타난 뒤라야 그치니, 한번 사신을 만나면 나라 안이 소연(騷然)하여 닭이나 개까지도 편안할 수 없게 됩니다.… 여자 하나를 뽑는 데 수백 집을 뒤지며…그 수가 많으면 사오십 인에 달합니다. 이미 선발되면 부모와 친척들이 한 곳에 모여 통곡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고, 국경 밖으로 보내게 되면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도 있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었습니다. …옛적에 동해에 원부(寃婦)가 있으매 삼 년 동안 하늘이 가물었는데 이제 고려에는 원망을 품은 여자가 그 얼마이겠습니까? 근년에 나라에 수재와 한재가 서로 잇달아 백성의 굶어 죽는 자가 심히 많은 것은 이러한 원한이 모여서 생기는 괴변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덕음(德音)을 내리시어…법으로써 엄금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절대 없게 하기를 바랍니다.…”
황제가 이를 가납(嘉納)하였고, 고려에서는 그에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의 벼슬을 내렸다. 그 뒤 본국에서 밀직부사, 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고 뒤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 충선, 충숙 3조(三朝)의 을 편수하였으며, 한때는 양천군(陽川君) 허백(許伯)과 함께 과거시험을 관장하였는데, 학력이 없는 세가(世家) 자제들을 많이 선발하였다고 하여 헌사(憲司)로부터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 원나라에서 불러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 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얼마 안 되어 귀국하였으나, 충정왕이 즉위하자(1349) 일찍이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던 연유로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지방으로 주유(周遊)하였다.
이듬해 원나라로부터 다시 벼슬을 받았으나 그 다음해에 죽었다. 그는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비교적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으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정몽주(鄭夢周), 백이정(白頥正), 우탁(禹倬)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동문선(東文選)』에는 100여 편에 가까운 시와 가전체(假傳體) 작품「죽부인전(竹夫人傳)」이 수록되어 있으며,『가정집(稼亭集)』4책 20권이 전한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에 배향되었고, 묘소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곡리에 있다.
◉원나라 황후에 오른 익산의 공녀(貢女)
고려는 1225년(고종12)부터 1355년(공민왕4)까지 100여 년간 원나라에 수백 명의 공녀를 바쳐야 했다.
고려조정은 공녀를 차출하기 위해 결혼도감(結婚都監) 내지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을 설치하여 여자들을 징발하자 처녀들은 조혼을 하는 풍습까지 생겼고, 하여 처녀 징발이 어려워 역적의 아내나 파계승의 딸 등을 공녀로 보냈는데 원이 폐망한 후 명나라도 병자호란(1636~1637)이후에 공녀를 요구했었다.
1331년 익산 사는 기자오(奇子敖)는 15세의 막내딸 기순녀(奇順女)를 공녀로 차출 당한다.
초상집이 된 집을 떠나면서 영특한 순녀는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죽기야 하겠습니까? 죽기보다 못하다면 자진(自盡)하면 되지요” 라며 부모님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당시 원나라엔 공남(貢男)으로 가서 환관이 된 고려남자가 꾀 있었는데, 순녀는 원나라에 붙들려가 공남인 박불화와 고용보(高龍普)를 우연히 조우하게 된다.
원나라 환관인 고용보는 미색에 영리하고 기품 있는 순녀를 보고 황제·순제(順帝)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추천을 하고, 이내 황제는 순녀를 어여삐 사랑하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의 후비열전(后妃列傳)에는 “비(妃;기순녀)는 미색에 영특하고 가는허리에 기품이 있어 갈수록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술돼 있다.
순녀가 황제의 총애를 받자 황후인 타나시리(答納失里)의 질시와 간계에 고초를 겪게 되지만 영특한 순녀는 이를 잘 극복하여 입궁 2년 만에 제2황후에 책봉돼는 수완을 보인다.
황후는 갖은 간계를 꾸미고 반정까지 꾀하다 들켜 사약을 받게 되고 나중에 순녀는 황후에 등극하게 된다.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는 14세에 황태자에 책봉되니(1353년) 원나라에서의 기황후의 기세는 충천하였고, 덩달아 고려의 기황후의 죽은 부친도 영안왕에 봉안 되는 등 막강한 세도가가 되였다.
기황후의 오빠들도 덕성부원군에 봉임 되었는데, 세도와 권모술수로 조정을 어지럽히다가 순제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공민왕도 이들의 역모를 탐지하여 숙청효수 시키고야 말았다.
이를 불충하게 여긴 기황후는 화가나서 공민왕을 폐위(1364년)시키고 충선왕의 3남 덕용군을 왕에 등극시킨다.
1365년 기황후는 명실상부한 황후에 올랐지만 원의 국세는 급박히 기울고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자 쫓겨나 몽골로 달아나야했다.
경기도 연천읍엔 <기황후의 묘>란 봉분이 있다.
기황후가 사후에 어떻게 하여 유골이( 유골이 없이,평소 기황후의 고국에 대한 향수와 그의 유언으로) 여기에 묻히게 됐는지 모르나 15세에 공녀로 붙들려가 대국 원나라의 황후에까지 올라 중원을 쥐락펴락 했을 권세와 영화를 누렸으니 우리나라 여성의 뛰어난 잠재력과 총명한 DNA를 엿볼 수 있음이다.
숭유(崇儒)사상이 국시였던 이조초기까지도 여성들의 입지는 공고하였던바, 14세기경의 기순녀의 입신기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나라 여성들 잠재력의 무한함을 일깨워보는 게다.
◉ 기황후(奇皇后), 원제국을 장악하다. 역사속 인물 이야기
몽골 초원에서 일어나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대원제국(大元帝國),
대원제국(大元帝國)의 마지막 황후(皇后)인 기황후(奇皇后), 역사는 그녀를 고려 여인이라고 적고 있다.
칭기즈칸이 세운 대원제국 원(元)나라 하면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던 나라다.
14세기 초반의 세계 지도를 보면 당시 원(元)나라는 고려(高麗)가 있는 동쪽 끝에서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인도 북부를 지나고 중동과 동유럽인 헝가리까지 아시아 전역과 동유럽을 아우르는 말 그대로 세계 제국이었다.
이런 나라의 황후가 고려 여인이었다는데 어찌 된 일일까?
또 기황후는 단순히 황후의 자리에만 오른 것이 아니라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원(元)나라 전체에 행사했던 황후였다.
황후가 권력을 장악하고 대륙을 뒤흔든 경우는 중국 역사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고려 여인으로 태어나서 대원제국의 황후가 된 기황후, 그녀는 누구였을까?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70여 킬로 떨어진 곳에 운거사(云居寺)라는 절이 있다.
세계적인 불교 유산들이 많은 이곳은 일 년 내내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다.
운거사(云居寺)가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사찰의 경내에서 오래된 불교 관련 서적들이 많이 발견돼 북경의 돈황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운거사(云居寺)는 사찰 바로 뒤의 병풍처럼 펼쳐진 석경산(石經山) 때문에 더 유명하다.
전체가 거대한 돌산인 석경산은 수(隋) 나라에서 명(明) 나라에 이르는 1,000여 년 동안 승려들이 직접 산에 올라가 새긴 석경(石經)들이 보관돼 있다.
석경이란 법란을 피해서 경전을 영원히 보관하기 의한 돌에 새긴 경전을 말한다.
승려들은 돌에 경전을 새겨 이것을 굴 속에 보관했다.
현재 석경산에서 석경이 보관된 굴은 모두 7개인데 그중 화엄당(華嚴堂)만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석경산의 불경 가운데 가장 앞선 시기인 수(隋) 나라 대 새겨진 석경들이 보관된 곳이다.
3면의 벽을 가득 메운 경판은 화엄경(華嚴經)과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등의 대승 경전들이다.
일곱 개의 석굴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경전들인 이곳의 석경들은 천 년의 세월 탓인지 곳곳이 깨어지고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석판을 살펴가던 중 낯익은 글자를 발견했다.
고려(高麗)라는 나라 이름과 승려 혜월(慧月)의 이름이었다.
고려 승려 이름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중국 북경에 있는 거대한 석경의 보수 작업에 고려의 승려가 어떻게 참가하게 된 것일까?
석경의 중수를 끝내고 쓰였다는 '중수화엄당경본기(重修華嚴堂經本紀)'를 보면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고려 승려 혜월의 주도하에 보수를 하는데 자정원사 고용보(高龍普)가 백만 냥을 시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정원사 고용보는 누구이며 왜 백만 냥이나 시주를 한 것일까?
화엄당 보수를 위해 백만 냥을 시주한 자정원(資政院)은 원나라 기황후의 재정 기구였다.
그렇다면 고려국 승려 혜월의 청을 받아들여 석경산 화엄당의 보수에 이렇게 많은 후원을 한 원(元)나라의 기황후는 누구일까?
'원사(元史)'는 원(元)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의 후비열전(后妃列傳)에는 열 명의 황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몽고 이름이 '완자흘도(完者忽都)'로 나타나 있는 기황후를 원사(元史)는 고려인이라고 적고 있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 기씨다.
행주 기씨 종친회를 찾아 족보에서 기황후를 찾아 보았다.
기황후의 아버지 기자오(奇子敖)에게는 다섯 아들과 세 명의 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중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되었다는 기황후는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다.
그녀는 원(元)의 황태자까지 낳았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행주 기씨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 기씨 여인은 어떻게 원(元)나라로 건너가 원(元)나라의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몽고가 고려를 처음 침입한 것이 1231년인 고종(高宗) 18년이다.
그 이후로 몽고는 30여 년에 걸쳐 무려 일곱 차례나 고려를 공격해 온다.
그때마다 고려는 치열한 대몽항쟁(大夢抗爭)을 벌이게 된다.
당시 중국, 러시아, 중동 지방으로 무섭게 세력을 뻗어가던 몽골에게 항몽 의지가 강한 고려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30여 년에 걸친 몽고의 공격에 고려는 결국 고종 46년(1259년)에 무릎을 꿇고 만다.
그 이후로 고려에는 원(元)나라의 공주가 왕비로 오는 것을 비롯해서 다양한 형태의 내정 간섭이 시작된다.
이 내정 간섭 중에 가장 악랄한 원(元)나라의 요구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녀(貢女)였다.
공녀(貢女)란 말 그대로 '공물로 바치는 여자'란 뜻인데, 원(元)나라는 고려 여인 그중에서도 고려 처녀들을 징발해서 원(元)으로 보내 줄 것을 요구한다.
이런 원(元)나라의 요구에 수많은 고려 여인들이 공녀로 뽑혀 원(元)나라로 끌려가게 되는데 행주 기씨 집안의 막내딸인 기황후도 이런 시대의 희생양인 공녀(貢女)로 선발되어 원(元)나라로 가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기자오(奇子敖)의 딸 기씨는 공녀(貢女)로 징발되어 원(元)나라로 끌려가 제일 먼저 궁중에서 차 따르는 일을 하는 궁녀였다고 한다.
실제로 끌려간 고려 여인들은 기자오의 딸처럼 이렇게 궁녀로 일하지만 혹은 신분에 따라 각기 다른 곳에 배치를 받았다.
제왕이나 고위 관직의 첩이 된 경우는 그래도 대우가 나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녀들은 궁중의 시녀로써 각종 허드렛일을 하며 일생을 보내거나 더 심한 경우는 술집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원(元)나라의 기록 가운데는 이렇게 징발되어 온 고려 여인이 노역에 시달리는 모습이나 심지어는 술집에서 고려 여인이 시중드는 모습을 연상하는 글들도 많다.
그렇다면 이들 고려 여인들은 왜 공녀로 뽑혀 이렇게 고생을 하는 타국 땅으로 오게 된 것일까?
고려사(高麗史)를 통해 공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했다.
원(元)이 고려의 여자를 요구할 때는 동녀(童女), 즉 어린 여자란 조건을 내세웠다.
기록상에서도 원(元)이 여러 차례 고려에 공녀를 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공녀에 관한 기록을 읽던 중 이상한 단어가 눈에 띄었다.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 이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중국과 우리나라 역사책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고려 관련 기록들을 정리하고 있는 장동익 교수는 공녀 제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장 교수에 의하면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은 '기부군행빈별감'이라고도 하는데 기부군은 남성군으로 몽고군에 투항한 군인들을 말한다.
몽고군은 이들을 위해서 동녀(童女)를 제공해 가정을 꾸려 주는데 그 동녀들을 고려에 요구한 것이었다.
결국 충렬왕(忠烈王) 때 고려에 부녀자 500명을 요구하게 된다.
고려 조정은 500명의 부녀자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관원을 파견하는데 이 관원을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이라 불렀던 것이다.
공녀의 요구가 갈수록 치열해지자 충렬왕 5년(1279년)에는 전국에 금혼령이 내려진다.
혼인을 할 때는 반드시 관(官)에 신고하게 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처벌도 엄격했다.
홍규(洪奎)의 경우 고려의 대표적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당시 홍규는 재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딸이 공녀로 선발되자 홍규는 이를 피하기 위해 딸의 머리를 깎은 후 승려로 만들었다.
그러나 왕은 홍규를 섬으로 유배시키고 그의 딸을 공녀로 보냈다.
그의 딸은 결국 원(元)나라 사신 아쿠타이의 아내가 됐다.
귀족 가문의 딸도 피해 갈 수 없었던 공녀 징발 제도의 분위기 속에서 행주 기씨 기자오(奇子敖)의 딸도 원나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원(元)나라는 비단 공녀뿐 아니라 고려 출신의 환관들도 상당수 요구했다.
원나라가 이렇게 고려 사람들의 징발을 요구한 까닭은 무엇일까?
몽고인들은 몽고인 지상주의라는 원칙하에서 색목인(色目人-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쪽 사람)과 한인(漢人)을 어느 정도 등용했지만 최상층은 몽고인이 전부 차지하고 중상층의 경우 색목인이, 그리고 하층 부류를 한인이 차지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중국 강남 출신인 남인(南人)의 경우 정권 참여가 거의 배제됐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제국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학문적 소양과 정치적 경륜을 겸비한 고려인을 등용하려 했던 것이다.
몽고인들이 민족을 분류한 기준에 의하면 몽고에 끝까지 저항한 고려인은 3등급의 민족이었다.
그러나 원(元)을 건설한 세조(世祖)가 고려인을 평한 글을 보면 고려인의 우수성에 대해 적고 있다.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고려인은 실제로는 3등급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한족(漢族)의 진출을 배제한 상태에서 사회의 중추적인 부분에서 실질적으로 일을 하는 상당수가 고려인이었다.
특히 원나라는 한자를 알고 기본적인 학문의 소양을 갖춘 고려인을 황궁 안에 두기 위해 끊임없이 환관과 공녀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원나라로 끌려간 기자오의 딸 기씨도 차(茶) 따르는 시중을 드는 궁녀로 원나라 생활을 시작한다.
13세에서 16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 품을 떠나서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만리 타향으로 끌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러나 원나라에서는 고려 처녀의 징발을 요구한 1275년 이후 80년에 걸쳐 계속 공녀를 요구한다.
나중에는 원나라 대신들 사이에서 고려 여인을 아내로 갖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돼서 원(元) 정부의 공식적인 요구뿐만 아니라 원나라의 대신, 관료, 장군들까지 개인적으로 공녀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런 참혹한 실상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여러 기록들이 남아 있다.
고려 말의 유학자 이곡(李穀)이 올린 상소문의 일부를 보면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이웃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숨겨서 키웠다."라고 적고 있다.
또 공녀로 뽑힌 가족들은 밤낮으로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 목을 매 죽는 사람, 피눈물을 너무 흘려 눈이 머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렇게 고려 사람들은 공녀로 뽑히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그 참혹한 실상이 그대로 보여진다.
공녀로 선발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공녀로 선택되어서 원나라로 끌려간 기씨는 어떻게 해서 원나라 황후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인천에서 배를 타고 네 시간을 가야 하는 대청도(大靑島)는 고려 시대 당시 원나라의 유배지로 쓰였던 곳으로 이곳 곳곳에는 원나라와 관련된 전설들이 남아 있다.
그중 내동초등학교 자리는 옛날 궁궐터였다고 한다.
현재 학교 앞의 계단도 원래 궁궐 앞에 있던 계단을 그대로 이용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몇 년 전 만해도 궁궐지 주변에서는 기와조각들이 많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배지였던 섬에 궁궐까지 짓고 마을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불렀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고려사(高麗史)에 나타난다.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 명종(明宗)의 태자(太子) 토곤 테무르(妥懽帖睦爾)가 충혜왕 원년(1331년) 11세 때 대청도로 유배를 왔다고 한다.
이곳 대청도에서 1년여를 머문 토곤 테무르(妥懽帖睦爾)는 원나라로 돌아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그가 바로 원순제(元順帝)다.
그런데 황제 자리에 오른 순제(順帝)는 또 한번 고려(高麗)와의 인연을 맺게 된다.
바로 차 따르는 궁녀 기씨와의 만남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순제는 총명하고 지혜로운 차 따르는 궁녀 기씨를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한낱 차 따르는 궁녀가 이렇게 황제의 사랑을 받자 당시 제1황후였던 타나실리(答納失里)는 기씨를 매우 질투했다.
여러 차례 채찍으로 기씨를 때릴 정도였다.
야사의 기록에는 채찍으로 때릴 뿐 아니라 인두로 몸을 지지기까지 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황후인 타나실리는 순제(順帝)의 아버지를 죽인 문종의 측근 신하 엘 테무르의 딸로 순제는 타나실리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
그런데 1335년, 원 황실에 커다란 정변이 일어난다.
타나실리 황후의 형제들이 순제에 대한 모반 사건을 일으키고 타나실리 황후도 이 사건에 얽혔다는 이유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뜨게 된다.
그러자 놀랍게도 순제는 궁녀 기씨를 황후로 책봉할 시도를 한다.
그러나 이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몽골은 전통적으로 왕족이 아니면 왕비로 책봉될 수 없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기씨가 어떻게 황후가 될 수 있었을까?
그것에 관련된 전설을 간직한 탑 하나가 제주도에 남아 있다.
원당사(元堂寺) 5층 석탑이다.
이 탑은 아들 낳기를 원하는 기황후의 청을 들어 원순제가 세워 준 것이라 한다. 그리고 1337년, 궁녀 기씨는 실제로 아들을 낳는다.
상황은 궁녀 기씨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즈음 원나라 궁중을 장악하고 있던 고려 환관들도 발빠르게 움직였다.
원사(元史) '환관전'에는 단 두 명의 환관이 입전되어 있다.
그중 한 명인 박불화(朴不花)는 고려 출신 환관으로 기황후의 측근이 되는데 기황후와 같은 고향 사람이다.
이런 고려인 환관들을 비롯해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 활발히 논의되던 입성론(入省論), 즉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직속성으로 만들려는 논의를 막기 위해 고려 정부까지 기황후의 황후 책봉에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 무렵 기씨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던 세력이 축출되고 1339년 공녀로 원나라에 끌려갔던 기자오의 딸은 드디어 원 제국의 황후가 된다.
공녀로 끌려 간 기씨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에는 극적인 사연이 많았다. 기록에 의하면 기황후는 미모가 뛰어나고 총명했다고 적고 있다.
또 순제는 대청도에 유배됐던 경험이 있고, 당시 원나라 궁중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려 환관을 비롯한 고려인 세력의 도움으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당시 신분 등급이 엄격한 몽고 사회에서 몽고족이 아니면 황후에 오를 수 없다는 규칙을 깬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후 25년간 기황후는 제2황후의 자리에 있다가 1365년 제1황후가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제1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제2황후의 자리에 있으면서부터 이미 제1황후를 제치고 30여 년간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한다.
이렇게 30년이란 오랜 기간 동안 고려 여인이 원나라 황실의 주인으로 머물게 되자, 그 영향은 단순히 정치적인 부분에만 그치지 않았다.
현재 몽골의 수도는 울란바토르다.
이곳에 있는 국립박물관에는 희귀한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몽골의 전통적인 유물을 전시하는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유물 한 점이 그것이다.
그것은 인두였다.
몽골에서 '이뚜'라 부르는 인두는 발음도 비슷하다.
인두는 정말 고려로부터 전해진 것일까?
복식(服式) 측면에서도 고려가 원나라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원대 벽화에서 나타나는 몽골의 전통적인 복식은 모든 옷들이 아래위가 하나로 된 수평형 식이다.
그런데 원의 후기가 되면 이런 전통적인 몽골 복식에 변화가 나타난다.
당시 벽화와 무덤 속 흙인형들은 아래위가 나뉘어진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다.
특히 윗저고리 선이 길게 허리선까지 내려와 있다.
몽골의 전통 복식이 아닌 이런 옷차림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고려 시대에 그려진 불화들을 보면 그 의문은 풀리게 된다.
저고리가 허리선까지 내려오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사람들, 그것은 바로 고려의 복식이다.
고려양(高麗樣)에 대한 기록은 원나라의 기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고려양은 비단 복식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고려의 음악을 비롯해서 생활 풍속,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퍼져 갔다.
초원에서 생활하는 몽골의 한 전통적인 가정을 찾았을 때 이들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밀가루에 설탕을 넣고 기름으로 튀겨 낸다는 전통음식인 '뮈시카'는 보즈의 한 종류다.
중간에 칼집을 내고 꼬아내는 과정이 우리의 전통적인 한과인 매작과를 만드는 과정과 닮아있다.
평소에는 크게 만들어 먹지만 명절에는 모양을 작고 예쁘게 만든다는 뮈시카는 밀가루를 이용해 만드는 우리의 전통 한과 매작과도 중간에 칼집을 낸 뒤 칼집을 낸 부분을 뒤로 꼬아서 만든다.
이 둘은 왜 이렇게 닮아있는 것일까?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에 고려 음식 여러 가지가 전해졌다고 전해진다.
그중 고려병(高麗餠)이나 고려 조청 등이 있는데 현재도 남아 있는 고려병은 전통적으로 만드는 방법이라던지 모양 등 유사성 때문에 고려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 여인이 원나라의 황후로 앉아 있고 수많은 고려 여인이 원나라로 건너갔던 이 시기, 고려의 문화는 고려양(高麗樣) 또는 고려국양(高麗國樣)이란 이름으로 원나라 곳곳에 퍼져 나갔다.
칭기즈칸이 몽골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중국 통일 과업을 시작한 것이 1206년의 일이다.
그러나 통일이 완성된 때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때인 1271년이다.
그러니까 쿠빌라이가 대원제국을 건설한 때부터 계산하면 원제국이 존속한 기간은 100여 년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실제적으로 원나라의 황제와 황후의 숫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기황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면서 실권을 행사한 기간이 30년 정도가 되니까 대원제국의 전체적인 기간을 놓고 보면 상당한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의 공녀로 끌려와서 온갖 고난을 헤치면서 황후의 자리에 오른 기황후, 그녀는 과연 어떤 황후였을까?
중국의 수도 북경,
중국 역사상 북경을 처음 수도로 정한 것은 원나라다.
원은 북경에 도읍을 정하고 대도(大都)라 불렀다.
그러나 시민공원으로 보호되고 있는 2,000미터 정도의 성곽 터를 제외하고는 북경에 원나라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명(明)나라가 들어서면서 원(元)나라의 유적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현재 자금성(紫禁城)의 건청문(乾淸門) 자리가 옛 원나라 황궁의 본당인 대명전(大明殿)이 있던 자리다.
명나라는 옛 원의 황궁 자리에 새롭게 궁을 건설하면서 황궁의 보호를 위해 황궁 주변의 흙을 파내어 하천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파낸 흙을 연충각에 매립하여 만든 인공산이 지금의 경산이다.
원나라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원의 흔적을 철저히 파괴한 것이다.
중국 고위 관료들의 거주지인 중남해 지구는 원래 기황후의 거처인 흥성궁 자리였지만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기황후가 제2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1339년으로 황후에 오른 뒤 기황후는 주로 흥성궁에서 살았다.
기록에 의하면 원나라의 새 주인이 된 기황후는 미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매우 똑똑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시간이 나면 여효경(女孝經)과 사서(史書)를 보며 역대 황후들의 좋은 덕행에 대해 공부하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진상품 중에서도 진귀한 것들은 먼저 태묘에 제사를 지낸 뒤 먹었다고 '원사후비열전(元史后妃列傳)'은 기록하고 있다.
북경 시내에는 기황후의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다.
원나라 말년, 대규모 기근이 들어 대도(大都) 안에서만 20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시체가 나뒹굴었다.
뿐만 아니라 기황후는 대규모의 구호사업도 펼친다.
정치 전면에 나선 기황후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막대한 재정이 드는 이런 사업을 기황후가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자정원(資政院)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기황후는 자신의 정치적 뒷받침이 되는 자정원에 고려인 환관들을 집중 배치한다.
뿐만 아니라 순제로 하여금 박불화에게는 영록대부의 벼슬을 내리게까지 한다. 원나라에서의 영록대부는 재상들도 오르기 힘든 고위 벼슬자리였는데 이는 전적으로 기황후의 배경에 따른 것이었다.
기황후의 권력이 이렇게 강해지자 황궁 내에는 자정원파가 생겨나고 이는 황제의 측근들과 대립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즈음 순제는 방탕한 생활에만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기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자정원파는 중대한 계획을 세운다.
이른바 순제 양위 사건이 그것이다.
고려인 환관 박불화가 앞장서서 황제인 순제에게 왕위를 장성한 황태자에게 넘길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일종의 쿠데타 모의인 셈이다.
순제의 반발로 양위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순제 편에 서서 기황후의 모의를 거부했던 재상들만이 귀양가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이 사건은 자신의 남편이자 원나라의 황제인 순제의 양위까지 도모했던 기황후의 힘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한 나라의 황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황후가 이렇게 많은 활약을 한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이즈음 원제국은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원나라 후기의 당시 지도를 보면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지속됐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황하 유역에서 일어났던 홍건적(紅巾賊)의 난이다.
홍건적은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홍건적은 몽고족이 가장 멸시했던 한족(漢族)이 중심이 돼서 결국 원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주요 세력이 된다.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明)을 세운 주원장(朱元璋)도 홍건적에 속해 있었다.
황하 유역에서 일어나서 강남의 거점인 남경을 점령하고 수도 북경을 향해서 주원장은 무서운 기세로 쳐들어가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순제와 기황후는 대도인 북경을 버리고 몽고 초원으로 도피를 하게 되는데 황급히 수도를 버리고 도피한 순제와 기황후는 어찌 되었을까?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에는 기황후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 있다.
지금은 밭으로 변해버린 조그만 야산이 있는데 300여 년 전에 지어진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의하면 이곳에 기황후의 능이 있다고 한다.
현재도 이곳에서는 고려 양식의 어골문양의 기와도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묘를 둘러쌌던 곡담의 기와라는 것이다.
원나라의 황후였던 기황후는 최후가 어떠했길래 왜 원이 아닌 국내에 묘가 있다고 전해지는 것일까?
'북순사기(北巡私記)'는 원나라 순제와 기황후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신하 유길이 도피하는 원순제를 수행하며 17개월 동안 쓴 책이다.
북순사기에 의하면 원순제와 황후, 황태자 일행이 대도를 떠난 것은 1368년 7월이다.
도피행로는 상도(上都), 응창(應昌)을 거쳐 초원으로 이어진다.
도피를 하던 중 기황후는 원병을 보내지 않는 고려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한다.
1년 6개월의 도피 끝에 몽골의 깊숙한 초원 카라코룸에 이르러 순제는 나라에 관한 모든 권한을 황태자에게 이양한 뒤 세상을 떠난다.
기황후가 낳은 아유르시리다르 황태자는 북원(北元)의 황제가 되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원나라가 망한 6개월 후 명나라에 의해 쓰여진 원사(元史)에 기황후에 대한 묘사는 부정적이다.
기황후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기록된 데에는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도 한몫을 한다.
원(元) 황후의 힘을 등에 업은 기철은 고려 내에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많은 횡포를 부린다.
대표적인 예가 충목왕(忠穆王)에 대한 개혁 정치를 좌절시키기도 했고 각지에 농장을 개설하여 인민들을 경제적으로 수탈하기도 했으며, 또 충혜왕(忠惠王)이 체포되어 원으로 연행될 때 기철이 앞장서기도 했다.
결국 기철은 원나라의 세력이 많이 약해진 후기 원(元)에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밀리에 공민왕(恭愍王)에 의해 처형 당한다.
기황후도 고려의 왕을 책봉하는데 개입해 자신이 부리기 쉬운 사람을 세우는 등 고려의 입장에서 볼 때 부정적인 일들을 자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들도 없지 않다.
충렬왕(忠烈王) 이후 80여 년을 이어온 공녀의 징발을 금지하는 영을 내린 때도 바로 순제 때다.
뿐만 아니라 원 내부에서 종종 제기되던 입성론(入省論), 즉 국호를 비롯해 고려에 대해 어느 정도 부여한 자주성을 인정하지 말고 고려를 원에 속한 하나의 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 논의도 원 순제 때 이르면 완전히 사라진다.
2001년, 행주 기씨 제각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기황후의 영정 봉안식이었다.
사실 그동안은 기씨 집안에서조차 기황후의 부정적인 평가에 밀려 자신의 선조를 자랑스럽게 내세우지 못했다.
기황후 사후 600여 년 만의 영정 봉안식이었다.
기씨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대륙으로 끌려갔던 13살의 기씨는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원(元)으로 끌려가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기황후...
그녀에 대한 평가는 암울했던 고려 후기 역사 한가운데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