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우리말 반야심경<본문>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2
4성제(四聖諸)는 무명이 원인(集)으로 생긴 괴로움(苦)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滅)과 수행의 길(道)이다.
부처님이 보리도량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녹야원에서 5명의 수행자를 앞에 놓고
‘중도(中道)를 정등각 했다’라고 설한 다음
4성제와 8정도가 중도의 바른 앎과 실천 방법이라고 법문하셨다.
즉 중도는 연기법의 작용성을 바르게 깨달아
분별없는 삶의 제법실용(諸法實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연기작용(중도)을 확철히 알아차리지 못하면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착각(무명)으로 괴로움(苦)이 시작된다.
이러한 괴로움으로 시작된 4가지의 성스러운(四聖諸) 진리는
아래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오온이 본래 공함으로 무아(無我)임을
알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괴로움.
생노병사(生老病死)에 대한 집착과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과 이별하면서 생기는 괴로움.
미워하고 원망하며 증오하는 고통과
얻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들이 모두 괴로움이다.
즉 오음성고(五陰盛苦) 생노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의 괴로움이다.
둘째, 어떻게 고집(苦集)으로 생길까?
내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분별 식인 무명(無明)이
나의 것, 내 생각, 내 몸, 우리 것이라는 소유와 욕망(갈애)으로
분별하는 번뇌와 망상의 어리석음(貪瞋痴)이 집(集)을 만든다.
셋째, 그러면 이렇게 만들어진 괴로움을
어떻게 하면 멸(苦滅) 할 수 있을까?
고멸(苦滅)은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으로
참 진리와 하나 되는 계정혜(戒定慧)를 닦는 방법이다.
초기불교에서는 10선법과 팔정도, 37조도품
대승불교에서는 4섭법, 6바라밀, 반야의 깨달음인 선(禪)법 등이 있다.
부처님이 강을 건너 피안에 도달하는
과정을 뗏목을 비유했듯
강은 괴로움의 고집제(苦集諦)라면
뗏목은 괴로움을 건너는 방편이고 수단인 멸제(滅諦)이다.
넷째,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실제 강을 건너(修行)
피안에 도달하면 괴로움이 소멸하는데 이것이 도제(道諦)이다.
불교는 신행(信行)하여 직접 체험하는 종교라 했듯
이 도제 수행이 바른 지혜이며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다.
따라서 모든 교의는 도제 수행이
8정도, 6바라밀 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연기작용의 실제인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하여 이고득락(離苦得樂) 하는 것이다.
연기작용은 본래 작용만 있을 뿐
머물고 존재하는 것은 없다.
고정된 실상이 본래 없고, 머물되 머물지 않으며
모두 함께 서로서로 잇대어 조건 없이 나눔 하는 진리가 반야이다.
그럴 때 작용하는 본체는 공성(空性)인 공(空)이라고 하고
나타난 존재는 다른 이름으로 가명(假名)인 상(相)이다.
이처럼 모든 인연생멸법은 공의 뿌리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이것이 그것이고 그것이 이것이다.
공은 유무(有無) 존재의 차원이 아니라
청정(淸淨)하다는 것이다.
마음을 두지 않는다.
집착하여 분별하거나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어나되 일어난 그대로 알아차린다는 것으로
행하되 행함이 없이 한다는 중도이다.
단지 구분하여 이름을 붙여놓았을 뿐이며
모두 한마음 안에 4성제 8정도, 반야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괴로움의 사라짐도
괴로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없는 무고집멸도이며
지혜가 없고(無智) 얻을 것이 없으며(亦無得)
지혜가 따로 없기에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없는 이무소득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