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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셨다.
26.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막1:25,26)
25 Jesus ordered the spirit, “Be quiet, and come out of the man!”
26 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hard, gave a loud scream, and came out of him.
25.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셨다.
25 Jesus ordered the spirit, “Be quiet, and come out of the man!”
*회당
주전 587년 유대 나라는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성전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서 이방 나라로 끌려가고.......
그렇게 되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과 떨어진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모였습니다.
성전 중심이었던 그들이 이제 성경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고.......
그 곳이 회당입니다.
회당의 모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부족한 부분이 개선되었을 것입니다.
회당은 예수님의 시대까지 수백 년 동안 유대 사회에서 그렇게 유지되었습니다.
그 장소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모인 회당에 정말로 하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 때 회당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권위 있는 가르치심을 접하게 됩니다.
율법 학자들과는 확연하게 비교가 되었습니다.
2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막1:22)
장소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또 시간도 변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전 주에는 율법학자가 가르쳤는데 이번 주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통해서 가르침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통해 전혀 다른 나라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연대 의식
식구 중 한 사람이라도 중한 병에 걸리면 가족들이 돌아가며 간호합니다.
병자를 간호하는 일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건강할 때 식구고 병 걸리면 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간호하다가 그 병에 감염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병원비 대다가 집안이 망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합니다.
식구란 이와 같이 운명을 같이 하는 공동체를 이릅니다.
하지만 회사는 다릅니다.
열심히 봉사했다가도 월급을 더 많이 주는 곳이 있으면 다른 회사로 옮겨 갑니다.
회사에서도 회사원을 이런 식으로 대합니다.
회사 사정이 안 좋으면 직원을 해고하기도 합니다.
회사가 개인 사정을 봐 주지 않습니다.
가족과 회사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죽든 살든 운명을 같이 하느냐?
서로 이익을 취하느냐?
그 중에 신앙이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룬 삶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제 아버지로 두는 가정을 꾸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죽든 살든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성구 중 하나입니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a)
이 성경 말씀은 내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을 운명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간호하시다가 죽음의 병에 전염되고 마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한 식구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부모 외에 누가 그런 희생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신앙을 가지게 되면 진정한 평화를 얻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내가 한 가족이라는 관계의 확인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관계로부터 세상은 줄 수 없는 다른 평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27.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14:27)
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그 무엇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36. 성경에 기록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39)
*귀신 들림
그 아버지 되시는 주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손에 시퍼런 낫을 들고 한길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
도로에서 연신 웃으며 교통정리 하고 있는 사람
제 옷을 벗고 도로를 달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귀신으로 인해 비참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런 불행을 당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다행히 귀신 들리지 않았음에 안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성경은 달리 봅니다.
1. 여러분도 전에는 범죄와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2. 그 때에 여러분은 범죄와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엡2:1,2)
그런 줄 몰랐는데 예수님을 믿기 전 나의 삶이 귀신 들렸던 삶이었습니다.
그 때도 세수 잘하고 예의 바른 행동을 했었는데 말입니다.
침을 흘리거나 찢어진 옷을 입고 속살을 드러내고 다닌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이 없이 살던 삶을 악한 영에 지배당했던 삶이라고 일반화해 버리신 것입니다.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심각한 영적이 현실이었을 줄이야!
더 혼란스러운 것은 종교에 열심을 품은 현재의 삶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종교 행위를 하며 구원을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거짓 확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2,23)
그 종교 행위들 때문에 속고 만 것입니다.
좌우간에 귀신 들렸다는 것은 찢어진 옷을 입고 한길에 서서 교통 정리하는 사람의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귀신의 반응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시자 아주 과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일반 사람보다 그가 예수님을 먼저 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실 일을 두고 무서워 떨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입장이 예수님과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반면 귀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생명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점의 차이가 귀신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갖게 한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귀신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 귀신을 사람에게서 몰아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마귀는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존재입니다.
모든 믿음의 판정은 바로 사람 생명이 기준입니다.
제물에 관해서 바울이 말할 때였습니다.
바울은 제물의 문제에 있어서 신학적으로 자신이 옳더라도 그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옳은 주장을 하다가 생명이 걸려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 그러므로 음식이 나의 형제자매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면, 나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고전8:13)
영적 전쟁의 중심에는 사람의 생명이 있습니다.
바울은 매사에 이 기준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입을 다물고
그 때 귀신이 예수님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24.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막1:2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향해 입다물라고 하셨는데 귀신의 말이 완전히 틀려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증거를 아주 불쾌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귀신이 그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증거 했다면 주님은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께 중요한 것은 누구의 입으로 주님이 증거되느냐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내가 아빠가 되었을 때 나는 기이한 체험을 했습니다.
아이들의 똥이 전혀 더럽게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의 엉덩이에서 질퍽하게 묻은 똥을 깨끗이 닦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엉덩이에 뽀뽀해 주었습니다.
우리 아기의 똥이다!
주님께 중요한 것은 누가 주님을 말하느냐였습니다.
주님은 귀신이 주님을 전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Be quiet,
이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 대한 봉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얻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주께서 십자가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봉사할 자격을 주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지성소에 들어가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제사장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대제사장은 봉사를 통해서 엄청난 특권을 누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거기에 들어갔다가는 여지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지성소를 막던 그 칸막이가 찢어진 것입니다.
믿는 모든 사람이 대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나 같은 이방인도 자유롭게 그 자리로 들어가 주님을 봉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봉사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교회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주님을 위해 대단한 것을 해드리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봉사란 그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믿는 백성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나오라
기이한 일입니다.
이 귀신이 한 사람의 삶을 짓이겨 놓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 귀신에게 어떤 징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요구한 것은 유일했습니다.
사람에게서 즉시 나오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거라사 지역에서 귀신 들린 한 사람을 고치신 적이 있었습니다.
쫓겨난 귀신들이 예수님께 요청했습니다.
“우리들을 돼지 떼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 때 주님은 귀신의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12. 귀신들이 예수께 "우리를 돼지들에게로 보내셔서,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13. 예수께서 허락하시니, 악한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 쪽으로 비탈을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막5:12,13)
귀신이 예수님에 의해 쫓겨난 다음에 마구잡이로 돼지 떼에게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일단 예수님의 허락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귀신의 그 요청을 허락하신 통에 그 마을에 난리가 났습니다.
그 마을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은 것입니다.
마리당 10만 원을 쳐도 2억 원의 돈이 순식간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마을에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된 것입니다.
버려진 한 사람
냄새 나는 한 사람
누구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미친 사람
우리 생각에 그 한 사람이 나은 대가로 치른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귀신의 수작에 넘어가셨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주님께 경제적 보장은 관심 밖입니다.
우리에게 우습게 보이는 한 사람이라도 그 생명의 회복이 수억대의 손실보다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독재자들은 주님과 꼭 그 반대의 논리를 폅니다.
독재를 추종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이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생명 사랑과 경제 보장을 삼박자고 박자 맞추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독재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독재가 독버섯처럼 또다시 기어 나오는 것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은 삼박자로 세상 축복과 박자 맞추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없었습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자기네 지역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막5:17)
생명이란 경제를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공짜로 사람의 회복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직 사람 생명 가치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26.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26 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hard, gave a loud scream, and came out of him.
*말씀
귀신 들린 사람의 괴력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것의 악착같음을 들을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지독한 귀신을 어떻게 사람에게서 몰아내셨냐는 것입니다.
귀신이 꼼짝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은 권위 있는 주님의 가르치심의 결과였습니다.
21.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막1:21,22)
그 날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기고만장했던 귀신이 예수님의 그 가르치심에 한 치의 저항도 못 하고 복종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유일의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전쟁의 무기는 m16이 아닙니다.
17. 그리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십시오.(엡6:17)
그들은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율법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르침에서 일점일획도 성경 말씀과 틀린 구석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기로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최고 가는 잠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 임재 현실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 드러나는 권위를 경험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창1:3)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현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창세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바로 그 일을 확인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의 일입니다.
말씀이 그대로 현실이다.!
*명령의 대상
제자들이 광풍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26.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27.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이분에게 복종하는가?"(마8:26,27)
그 미친 바다에서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모두 바가지 들고 물 퍼내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것만이 그들의 살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거기에서 다른 생각을 했다가는 그대로 베드로에게 발길질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열심히 일하는 제자들을 꾸중하셨던 것입니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다시 예수님은 정색하시고 바다를 꾸중하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바다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바람과 바다조차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할 줄 몰랐습니다.
말씀의 대상을 한정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나 요한에게나 말이 통한다고 여기는 것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바다와 파도에게도 말이 통한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회당에서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찢어진 옷을 입고 침을 흘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귀신에 대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여지없이 복종하더라는 것입니다.
*우상화
오늘 본문에서 귀신을 수식하는 단어는 악하다는 것입니다.
악한 귀신은
The evil spirit
회당의 악한 귀신은 한 사람을 파멸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귀신의 역사가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은 한 집단을 미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달리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제 1계명을 어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게 만듭니다.
결국 떼거지로 사람을 죽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 제 8사단 제16연대 박규철 소위가 퇴각하는 인민군을 뒤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습니다.
인민군 무리 가운데서 동생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고향은 황해도 평산군이었습니다.
형은 월남해서 국군에 입대해서 장교가 되었습니다.
동생은 북한에 남아있다가 인민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필 전쟁터에서 형제가 만난 것입니다.
형이 치악산 고개에서 동생(인민군 제 8사단 제 83연대 박용철 하전사)을 적군으로 만난 것입니다.
다행히 그의 형이 동생을 먼저 알아보고 생포하여 두 사람이 살아서 몸부림치며 울었던 것입니다.
전우들도 함께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만약 형이든 동생이든 방아쇠를 당겨 선제 공격을 했더라면 그 중 한 사람은 시체가 되어 만났을 것입니다.
얼싸안고 우는 형제를 향해 적군이니 죽이라고 소리 지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 따위 소리를 했다가는 그 사람부터 총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 일은 박규철 소위의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일이었습니다.
그 눈물이 마른 다음 그들이 한 일은 다시 총칼을 들고 서둘러서 형제를 죽이러 북진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주 멍청한 짓입니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귀신 장난질입니다.
귀신이 그 집단으로 하여금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섬기게 한 것입니다.
자본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죽여야 하고
멸공!
또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자들을 용납해서 안 되고.......
즉 그것이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형제를 죽여도 된다는 정당성을 이데올로기에서 찾게 한 것입니다.
바보같이 사람들이 속은 것입니다.
귀신은 이런 식입니다.
또다시 이 땅에 형제를 향해 총 겨루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고 햇볕정책을 펴야 합니다.
북쪽에서 총알이 날라 와도 인내심을 보여야 합니다.
쌀을 북의 형제들에게 퍼 주어야 합니다.
통일 후에 북한의 동포들이 우리 굶어 죽을 때 쌀막걸리 해 먹었냐면 뭐라고 답할 것입니까?
또 하나님께서 똑 같은 질문을 하시면 뭐라고 답할 것입니까?
우파 이데올로기의 시녀가 된 교회들이 어리석은 짓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이데올로기의 쇠창살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선제공격으로 본때 보이려다가 우크라이나처럼 되는 것은 순간입니다.
본때 안 보이고 조용히 있어도 남쪽의 무력이 북쪽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북쪽도 알고 있습니다.
미사일로 맞대응을 안 해도 우리 국민이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선제 공격이니 뭐니 입 조심하고 우매한 짓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15.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평화를 이루시고,
16.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려는 것입니다.(엡2:14-16)
*해코지
귀신은 곱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행동은 귀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까지 해코지를 한 것입니다.
오기를 부린 것입니다.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은 것입니다.
큰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떠난 것입니다.
26.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26 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hard, gave a loud scream, and came out of him.
한 청년과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내 눈 앞에서 그 청년이 장작 쓰러지듯이 그대로 전봇대를 향해 꼬꾸라지는 것입니다.
머리가 쇠와 부딪히던 그 둔탁한 소리!
이상한 것은 주님께서 그런 귀신의 해코지를 막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급 당시에 하나님은 기이한 말씀을 모세에게 하셨습니다.
21.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이적을 행할 능력을 주었으니, 너는 이집트로 돌아가거든, 바로의 앞에서 그 모든 이적을 나타내 보여라. 그러나 나는 그가 고집을 부리게 하여 내 백성을 놓아 보내지 않게 하겠다.(출4:21)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완악하게 하셔서 그의 백성에게 더 고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백성의 형통한 길을 하나님께서 거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왕 바로를 불러다가 제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미련해서 제 자식을 제 손을 죽여본 다음에 세상 왕의 정체를 확인한 것입니다.
제 아들도 죽이라는 바로의 악랄한 명령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그처럼 간절히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까?
금식을 한 번 했을까?
그 일이 없었더라면 회초리질을 참으며 애굽에 눌러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급에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원인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출3:7)
그 때에야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간절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 고통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한 것입니다.
그 간절한 부르짖음이 하나님을 움직이시게 한 것입니다.
아니었더라면 히브리 백성들은 오로지 벽돌 만드는 일에 전심전력했을 것입니다.
우리 아들 벽돌회사 이사야!
그런 자식을 출세했다고 자랑삼았을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그렇게 귀신은 그 사람에게서 쫓겨갔습니다.
그런데 귀신을 몰아내는 일이 2,000년 전 회당에서 예수님의 사건으로 그친 것인가?
창세 때입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혼란을 향해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자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되어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었더라.
십자가에서입니다.
성자 하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속죄된 것입니다.
오순절 때입니다.
막힌 담을 허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 마음으로 초청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미문 앞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거지는 꼭 그 자리에 앉아서 꼭 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푼 줍쇼!
하지만 성령 하나님을 받은 베드로는 전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깡통에 돈을 넣은 다음 거룩한 기도문을 암송하고 성전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앉은뱅이의 귀에 대고 명령했습니다.
6.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행3:6)
베드로는 자신의 중심에서 주인이 되신 예수님 임재를 현실로 드러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는 일어날 수 없는 앉은뱅이에게 일어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죽으셨던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베드로 안에 예수님의 임재를 보장하셨습니다.
그 가르치심에 일어날 수 없는 자가 일어나더니 성전을 향해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8.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행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