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요지
《주교요지》(主敎要旨)
초대 명도회장(明道會) 회장을 지낸 정약종(丁若鐘, 아우구스티노)이 독창적으로 저술한 교리서.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국식 표현으로 서술된 최초의 한글 대중 교리서이자, 신앙심이 약한 신자들에게 확고한 믿음을 갖도록 해 주는 신학서이고, 천주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불식시켜 줄 수 있는 호교서(護敎書)라고 할 수 있다. 정약종은 사람들이 갖가지 도리를 물으면 마치 주머니에서 물건을 끄집어내듯이 척척 풀어 주어 듣는 사람들이 지루해 하지 않고 잘 이해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하층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그들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애정과 해박한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주교요지》는 저술되었다. 그는 이 책을 지은 뒤, 천주의 여러 가지 덕과 도리를 한데 모은 총론서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추가로 저술하였다가 박해로 인해 완성하지 못하였다.
[저술 시기와 내용] 정약종의 《주교요지》를 저술한 시기는 박식한 교리 지식을 갖춘 이후여야 하므로 하민층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거나 지도층으로 부각되는 1797∼1798년 이후 혹은 1799년 초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된 후로 보인다. 1801년 5월 22일 정부에서 한신애(韓新愛, 아가다)의 집을 수색하여 압수된 도서명 중에 《주교요지》1권이 들어 있었다. 이로써 1801년 이전에 신도들이 여러 한글 천주교 서적과 함께 《주교요지》를 필사하여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주교요지》는 원본에 가장 가까운 절두산 순교 상지 소장 필사본을 기준으로 살펴볼 때, 상·하 두 편 1책 96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은 32조목 45장, 하편은 11조목 51장으로 나뉘어 있다. 그중에 상편은 첫째 천주의 존재 증명(1∼5조목), 둘째 천주의 속성(6∼14조목), 셋째 속론(俗論)·도교·불교·민간 신앙에 대한 비판(15∼28조목), 넷째 상선 벌악(29∼32조목) 순으로 서술되었고, 하편은 성서에 바탕을 둔 계시와 구속으로 첫째 천지 창조(1∼2조목), 둘째 강생 구속(3∼9조목), 셋째 천주교 봉행(10∼11조목) 순으로 서술되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는 천지 창조·강생 구속·삼위 일체·상선 벌악의 4대 교리를 중심으로 천주교의 교리가 일목요연하게 서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제목이 같은 불리오(L.L. Buglio, 利類想)의 《주교요지》와 구별된다. 불리오의 책은 28장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는 천지 창조, 만물 주재, 삼위 일체, 강생 구속, 영혼 불멸, 천당과 지옥, 천주 십계, 세례, 고해 등 12개의 주제에 관한 교리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는데, 정약종의 책과 내용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불리오의 《주교요지》를 번역하거나 기본 모델로 삼은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이야(Mailla, 馮秉正)의 《성세추요》(盛世芻 , 1733)와도 구별된다. 목차 배열의 순서가 서로 다르고 교리서 전체 분량의 차이도 클뿐더러, 주요 교리를 설명하는 구체적인 설명의 비유도 서로 다른 점이 많다. 그러므로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이 <백서>(帛書)에서 언급한 것처럼 《천주실의》(天主實義), 《성세추요》등 많은 교리서의 내용들을 참고하고, 자신의 의견을 보태어 완성한 독자성을 지닌 별도의 교리서라고 평가된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정약종의 《주교요지》를 감준하여 펴도록 하면서 마이야가 저술한 교리서 《성세추요》보다 낫다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평판에 힘입어 이 책은 신입 신자들에게 천주교를 설명해 주는 기본 도서가 되었으며, 신도를 비롯한 많은 민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로 인하여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필사되고 전승되어 널리 읽혔으며,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에 의해 186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뒤 목판본이나 활판본으로 여러 차례 간행됨에 따라 더욱 널리 보급되어 일반 신자들의 교리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고,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의 <상재상서>(上宰上書)와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교리 이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판본의 종류와 특징] 오늘날 정약종의 《주교요지》는 필사본과 간행본을 모두 망라하여 총 48책이 대학교 도서관이나 기타 도서관에 소장·전승되고 있다. 이들 48책은 절두산 순교 성지 소장 필사본―a,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필사본―b·c,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d, 1885년에 간행된 목판본―a, 간행 연도를 알 수 없는 목판본―b, 1887년에 간행된 활판본―a, 1897년에 간행된 활판본―b, 1906년에 간행된 활판본―c, 1932년에 간행된 활반본―f로 구분된다. 그런데 필사본―d와 목판본―b는 목판본―a와 내용이 같고, 활판본―b·c·d·e는 활판본―a와 내용이 같다. 그러므로 내용 면에서 볼 때 필사본―a, 필사본―b·c, 1885년에 간행된 목판본―a, 1887년에 간행된 활판본―a, 1932년에 간행된 활판본―f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필사본―a는 1800년에 필사된 것으로서 원본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동일한 저본(底本)에서 필사된 필사본―b·c는 필사본―a의 내용을 상당 부분 수정·축약·보충하여 필사본―a와 내용이 상당히 달라졌다. 그리고 1885년에 간행된 목판본―a는 필사본―b·c를 저본으로 삼아 대폭 수정·축약·보충한 것이고, 1932년에 간행된 활판본―f는 활판본―a를 저본으로 삼아 불교와 도교에 대해 비판한 항목을 모두 삭제하는 등 또다시 큰 폭으로 수정·축약·보충한 것으로서 원본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a와 내용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교요지》판본들 간의 관계는 인명·지명 등의 고유명사 표기 방식이나 주격 조사 ‘ㅣ’의 사용 빈도 등의 비교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다.
이러한 여러 판본들 간의 변화를 양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상편의 경우 필사본 간에는 거의 변화가 없지만, 필사본―a와 비교하여 목판본―a는 2.2%가, 활판본―a는 5.0%가, 활판본―f는 무려 34.6%가 줄었다. 하편의 경우 필사본―a와 비교하여 목판본―a는 3.5%가, 활판본―a는 4.9%가, 활판본―f는 5.1%가 감소하였다. 그리고 상·하편 전체의 경우 필사본―a와 비교하여 목판본―a는 2.9%가, 활판본―a는 4.9%가, 활판본―f는 18.7%가 줄었다. 그러나 각 절들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판본들 간에 양적인 변화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판본들 간에 양적인 변화가 거의 없는 경우도 있으며 필사본―a와 비교하여 그 밖의 판본들 모두가 큰 폭으로 증가한 경우도 있고 감소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목판본―a로부터 크게 감소한 경우도 있고, 활판본―a부터 큰 폭으로 감소한 경우도 있으며, 목판본―a에서 크게 감소하고, 활판본―a에서 오히려 큰 폭으로 증가한 뒤 활판본―a에서 삭제된 경우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정약종 사상이나 그의 저술을 연구할 때 사료적 가치가 가장 큰 것은 원본에 가장 가까운 필사본―a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의 필사본―b·c나 1885년에 간행된 목판본―a 그리고 1887년에 간행된 활판본―a와 1932년에 간행된 활판본―f는 필사본―a의 내용을 수정·축약·보충한 것이나, 그것을 재차 삼차 수정·축약·보충한 것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그렇다고 필사본―a를 수정·축약·보충한 일련의 판본들이 아무런 사료적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1885년에 간행된 목판본―a나 1887년에 간행된 활판본―a 그리고 1932년에 간행된 활판본―f에서 각각 그 내용을 대폭 수정·축약·보충한 것은 당시 교회의 교리 교육이나 신학적 입장의 변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당시 교회의 교리 교육이나 신학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오히려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특히 불교와 도교에 대해 비판한 항목은 모두 삭제한 활판본―는 천주교회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나 교리 교육의 변천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출처:가톨릭 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