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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紳(1520~1537) 景餘(경여) 洛川(낙천) 星州(성주) 거주지 : 玄風(현풍)
裵紳 1520 1573 星州 景餘 洛川
기언 별집 제26권 / 행장(行狀) / 낙천(洛川) 배 선생(裵先生) 행장
고조부는 중랑장(中郞將) 휘 중현(仲賢)이다.
증조부는 상호군(上護軍) 휘 효손(孝孫)이다.
할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 휘 환(紈)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휘 사종(嗣宗)이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선생은 휘는 신(紳)이고 자는 경여(景餘)이며, 성은 배씨(裵氏)이니 본관이 경산(京山 성주(星州))이다. 고려 말에 중랑장 용신(用臣)이 현풍(玄風)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이분이 선생의 5세조이다.
명나라 무종(武宗) 정덕(正德) 15년(1520, 중종15) 12월 기유일에 선생이 태어났다. 일곱 살에 같은 고을에 사는 김렬(金挒)에게 글을 배웠고 여덟 살에 엄한경(嚴漢卿)에게 글을 배웠는데 학문이 날로 진보되어 기재(奇才)라 일컬어졌다. 한번은 길가에 나가서 놀고 있는데 한 고을 수령이 나졸들의 보호를 받으며 벽제 소리 요란하게 지나가자 다른 아이들은 다 겁이 나서 숨었으나 선생은 단정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으니, 수령이 속으로 남다르게 여겼다. 관소(館所)에 가서는 선생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예모(禮貌)를 갖추면서 찬탄하기를,
“뒷날 이 아이는 큰 덕을 갖춘 군자가 될 것이다.”
하고, 그 성명을 적어 갔다. 열일곱에 향시에 합격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선생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저의 사업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습니까.”
하였다. 엄한경의 집은 부유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많았는데, 한 여인이 선생이 예절을 엄격히 지키는 것을 보고 시험해 볼 요량으로 자기 댕기를 풀어서 책 사이에 끼워 두었더니 선생이 그것을 발견하고 주인에게 하직하기를,
“성현의 글을 읽고 아직 그 일을 실천해 보지도 못했는데 그 책만을 더럽혔으니 떠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이 매우 부끄러워하였고 엄한경도 선생에게 사과하였다. 처음으로 글을 배웠던 스승 김렬이 역질에 걸려서 거의 죽게 되었고 온 집안이 모두 전염이 되었을 때에 선생이 몸소 밤낮으로 약물을 준비하여 치료하여 완치되었다. 그 뒤 김렬이 병이 들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에 글을 지어 그 아들을 경계하고 선생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내 아들을 부탁하니 그대가 잘 가르쳐 주시게.”
하고, 또 그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가 경외하는 사람이니 너희들은 나를 섬기듯이 섬겨야 한다.”
하였다. 그 아들은 선생을 매우 공경하였고, 세상에 착실한 사람으로 이름이 났다.
선생은 약관의 나이가 된 뒤에 처음에 남명(南冥) 선생을 만났고 뒤에 도산(陶山)에서 퇴계(退溪) 선생을 종유하여 옛 선현의 학문을 들었다.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 김범(金範), 이제신(李濟臣) 등과 더불어 나이에 따라 위차를 정하는 예(禮)를 강론하기를,
“태학은 예의(禮義)를 따라 서로 높이는 곳인데 장유(長幼)의 질서가 없으니 의리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당시에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이 대사성으로 있었는데 마음속으로 좋게 생각하였다. 지성균관사 성세창(成世昌)이 곤란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공자의 문하에 이러한 예절이 있었는가?”
하니, 태학생 홍인우(洪仁祐)가 말하기를,
“있었습니다. 네 사람이 뜻을 말할 때에 증점(曾點)이 가장 뒤에 대답하였는데,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나이로 보자면 증점이 당연히 둘째로 대답해야 할 것이나 비파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뒤에 대답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성세창이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묘년(1519, 중종14) 이후로 선비들이 예(禮)를 말하는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에 그 일이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홍인우는 학문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매양 “배경여(裵景餘)는 독실한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중종 말년에 태학에 있다가 즐겁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이듬해에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명나라 세종 가정 31년(1552, 명종7)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상례(喪禮)가 크게 허물어진 시대였는데도 염빈(殮殯)과 장례(葬禮)와 제례(祭禮)를 한결같이 주 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고, 여묘살이를 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10년 뒤에 어머니 박 유인(朴孺人)의 말씀을 따라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가 되었다. 4년 뒤에 공천(公薦)으로 남부 참봉(南部參奉)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옮겼고 얼마 뒤에 경릉 참봉(敬陵參奉)으로 바뀌었다가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다시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명나라 목종 융경 2년(1568, 선조1)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삼년상을 마친 뒤에 빙고 별제(氷庫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또한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선비를 등용하는 데에 마음을 쏟았는데, 선비들을 양성하는 방도는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겨 학행(學行)에 경술(經術)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다. 그때 선생과 예안(禮安)의 조목(趙穆)이 첫째로 선발되어 교관(敎官)이 되었다. 선생은 본래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마지못해 벼슬살이를 한 것이었으므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수하는 왕명이 두 번이나 왔기 때문에 사은(謝恩)이나 하고 돌아오려 하였더니,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과 초당(草堂) 허엽(許曄)이 벼슬을 권하였다. 선생이 생도(生徒)를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소학》으로 우선을 삼아 그 음석(音釋)을 분명하게 알게 하고 그 구두를 바르게 떼게 하였으며 충분히 탐구하여 스스로 터득하게 하였다. 순차에 따라 차근차근 배워 나가게 하고 등급을 뛰어넘어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좌우명으로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써 붙여 놓고 배우는 자들에게 항상 보도록 하고 말하기를,
“학문을 할 때에는 반드시 안과 밖을 함께 수양해야 하니 어느 하나도 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선생은 거처하는 모습이 근엄하였고 동작에 위의(威儀)가 있어서 사람들이 스스로 경외하였고 보고 느끼며 배우는 것이 더욱 많았다. 이에 배우려는 자들이 모여들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선생에게 배우는 선비들이 모두 걸음걸이가 법도가 있고 말이 구차하거나 망녕되지 않아, 말하지 않아도 선생의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재신(宰臣)이 그 자제가 태만하여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을 근심하여 선생에게 책임지고 가르치게 하였는데, 몇 달 만에 그 자제가 법도를 지키며 조심스러워지고 몸가짐을 단속하여 경외할 줄을 알았다. 그 재신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몸소 실천하기를 독실하고 경건하게 하는 분이 아니라면 어찌 사람을 이와 같이 감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명나라 신종 만력 1년(1573, 선조6) 겨울에 선생이 병환이 나서 오래도록 낫지 않았다. 그런데도 날마다 의관을 정제하고 평일과 다름이 없이 하다가 반달이 지난 뒤에 세상을 떠나니, 곧 12월 17일이었다. 선생의 나이가 54세였다. 선생의 친구 중에 문덕수(文德粹)라는 분이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문병을 와서 손을 잡고 말하기를,
“병환이 이미 심해졌다. 죽을 때에 처자(妻子)를 부탁하는 것은 친구 사이에서 당연한 일이니,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죽음은 천명이다. 내 어찌 아녀자를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로부터 벼슬이 없는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무릇 선생을 아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옷을 마련해 보내 수의(襚衣)로 쓰라고 하였다. 이듬해 1월에 아들 희(暿)가 고향으로 운구하여 돌아와 다음 달 27일에 고령현(高靈縣) 봉삭(鳳朔) 남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
선생은 손씨(孫氏)의 따님과 혼인하여 아들 둘과 딸 셋을 낳았다. 아들은 희(暿)와 위(㬙)이다. 희가 계서(繼緖)를 낳았는데 계서는 훌륭한 행실로 천거되어 태릉 참봉(泰陵參奉)이 되었다. 계서가 아들 셋을 낳았는데 후적(後迪)과 후도(後度)와 후계(後洎)이다. 위는 일찍 죽었다. 사위 셋은 안사신(安士信)과 정인흡(鄭仁洽)과 곽영진(郭永鎭)인데, 정인흡은 생원이다.
선생은 자품이 남달라서 어릴 때부터 도(道)를 추구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항상 말하기를,
“학문을 하는 방도는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그 공부하는 방을 경재(景齋)라 이름하고 매일 종일토록 책을 읽으며 보냈으며 성현(聖賢)이 남긴 글의 요지를 적어 걸어 놓고 자신을 면려하였다. 일찍이 《대학》 〈성의장(誠意章)〉 아래의 주자(朱子) 주석에 “기미를 살펴야 한다.”라는 글을 읽고는 탄복하여 말하기를,
“여기에서 순(舜) 임금과 도척(盜跖)이 나뉘는 것이니, 이것을 잘 살피지 못하면 두서를 찾지 못하여 힘쓸 곳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집안에서 지낼 때에는 남녀를 구분하여 예절을 지키게 하였으며 형제간에는 우애 있게 지내며 부모를 잘 섬겼다. 어진 사람과 가까이하기에 힘썼으며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진실하였다. 말을 꺼냈으면 반드시 약속을 지켰고 행실은 반드시 조심스럽게 하였으며, 사소한 일이라 하여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고 남이 모르는 일이라 하여 조금도 멋대로 하지 않았다. 배우는 자들에게는 항상 안락과 방종과 나태와 욕심을 경계하도록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공부하는 사람은 고생스러움 속에서 무한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하였다. 고을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한 번도 시국과 정치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었다. 백성의 슬픈 일을 들으면 마치 그 아픔을 자기가 당한 것같이 여겼다. 임금의 초상을 당했을 때에는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말하기를,
“임금과 부모는 섬기기를 동일하게 하는 것이다. 삼년상 기간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마음이 불편하다.”
하였다. 《주역》을 즐겨 읽었다. 문장이 유려하고 법도가 있었으니 대개 학문이 높아서 그러한 것이었다. 〈남명선생실기(南冥先生實記)〉와 〈송계행장(松溪行狀)〉을 지었다. 선생이 낙동강 가에서 살았으므로 배우는 자들이 낙천(洛川) 선생이라 불렀다. 영남 학자 곽준(郭䞭)과 박성(朴惺)이 모두 선생의 제자였는데, 곽준은 황석산(黃石山)에서 패전하였을 때에 순절하여 죽었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큰 난리가 나서 상주(尙州)와 경주(慶州) 이남이 왜적에게 7년 동안 함락되어 있을 때였다. 선생의 저술이 매우 많았으나 글이 모두 없어져서 세상에 전해지지 않는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90여 년 만에 정표비(旌表碑)가 세워졌다.
후학(後學) 양천(陽川) 허목(許穆)이 짓는다.
[주-D001] 김범(金範) : 1512~1566. 자는 덕용(德容)이고, 호는 후계(后溪)이며,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1540년(중종35) 진사시에 장원한 뒤로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뒤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특별히 옥과 현감(玉果縣監)에 제수되었다. 《蒼石集 卷13 后溪傳, 韓國文集叢刊 64輯》 《沙西集 卷7 后溪金公旌門跋, 韓國文集叢刊 67輯》[주-D002] 이제신(李濟臣) : 1536~1583. 자는 몽응(夢應)이고, 호는 청강(淸江)이다. 1558년(명종13)에 생원이 되었고, 156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울산 군수(蔚山郡守), 사간원 정언, 청주 목사(淸州牧使), 사헌부 지평, 사간원 사간, 진주 목사(晉州牧使), 강계 부사(江界府使),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象村稿 卷24 淸江先生墓誌銘, 韓國文集叢刊 72輯》[주-D003] 충정공(忠正公) 이준경(李浚慶) : 1499~1572. 자는 원길(原吉)이고, 호는 남당(南堂)ㆍ홍련거사(紅蓮居士)ㆍ양와(養窩)ㆍ동고(東皐)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1522년(중종17)에 생원이 되었고, 1531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한성부 우윤을 거쳐 1543년에 대사성을 하였고 그 뒤 평안도 관찰사, 병조 판서, 대사헌, 이조 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1輯, 東皐遺稿, 민족문화추진회》[주-D004] 성세창(成世昌) : 1481~1548. 자는 번중(蕃仲), 호는 돈재(遯齋),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1501년(연산군7)에 진사가 되었고, 1507년(중종2) 정묘년 증광시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성현(成俔)의 아들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다. 강원도 관찰사,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 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大東野乘 己卯錄補遺 成世昌傳》 《實錄》[주-D005] 홍인우(洪仁祐) : 1515~1554. 자는 응길(應吉)이고, 호는 경재(敬齋)ㆍ치재(耻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537년(중종3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이황(李滉), 박순(朴淳) 등과 교유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耻齋遺稿, 민족문화추진회》[주-D006] 네 사람이……대답하였는데 : 자로(子路), 증석(曾晳),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가 공자를 모시고 있을 때에 공자가 각기 자기의 뜻을 말하게 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주-D007] 조목(趙穆) : 1524~1606. 자는 사경(士敬)이고, 호는 월천(月川)ㆍ동고(東皐)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누차 조정에서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거의 대부분 부임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힘썼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月川集, 민족문화추진회》[주-D008]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 1515~1590. 자는 과회(寡悔)이고, 호는 소재ㆍ이재(伊齋)ㆍ십청정(十靑亭) 등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534년(중종29)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154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2)에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진도(珍島)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선조가 즉위한 뒤에 이준경(李浚慶) 등의 계청으로 석방되어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그 뒤 대사간, 충청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 판서, 대제학,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穌齋集, 민족문화추진회》[주-D009] 초당(草堂) 허엽(許曄) : 1517~1580. 자는 태휘(太輝)이고, 호가 초당이다. 1540년(중종35)에 진사가 되었고, 1546년(명종1)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과 사헌부와 이조의 청현직을 두루 거쳐, 대사성, 삼척 부사(三陟府使), 도승지, 부제학, 대사간,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草堂集, 민족문화추진회》[주-D010] 구용(九容) : 군자가 갖추어야 할 아홉 가지 모습인데, 《예기》 〈옥조(玉藻)〉에 나온다. 발은 진중하고〔足容重〕, 손은 공손하고〔手容恭〕, 눈은 단정하고〔目容端〕, 입은 무겁고〔口容止〕, 목소리는 고요하고〔聲容靜〕, 머리는 곧고〔頭容直〕, 기운은 엄숙하고〔氣容肅〕, 서 있는 모습은 덕스럽고〔立容德〕, 얼굴빛은 장엄하게〔色容莊〕 해야 한다는 것이다.[주-D011] 구사(九思) : 군자가 염두에 두어야 할 아홉 가지 생각인데, 《논어》 〈계씨(季氏)〉에 나온다. 볼 때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고〔視思明〕,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聽思聰〕, 얼굴빛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고〔色思溫〕,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貌思恭〕, 말은 진실할 것을 생각하고〔言思忠〕, 일은 경건할 것을 생각하고〔事思敬〕, 잘 모르는 것은 묻기를 생각하고〔疑思問〕, 분할 때에는 어려움 당할 것을 생각하고〔忿思難〕, 이득 될 일이 있으면 정의를 생각해야〔見得思義〕 한다는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박헌순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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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계(茅谿) 문위(文緯)1554년(명종 9)~1631년(인조 9)
文緯 1554 1631 丹城 順甫, 純夫 茅谿, 茅溪
기언 별집 제26권 / 행장(行狀) / 모계(茅溪) 문 선생(文先生) 행장
선생은 휘는 위(緯)이고 자는 순보(順甫)이며, 성은 문씨(文氏)이니 본관은 단성(丹城)이다. 중세(中世)에는 함양(咸陽)에 살다가 3세조 웅(雄)으로부터 비로소 거창(居昌)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휘가 산두(山斗)인데 어질고 예의가 있었으나 세상에 드러나지 못했다. 그 고을 젊은이들로서 예절을 잘 알아 부모를 잘 섬기는 자는 대부분 그의 제자라 한다. 어머니는 함양 오씨(咸陽吳氏)이다.
가정 33년(1554, 명종9) 6월 계미일에 선생이 태어났다. 여섯 살에 처음으로 글을 배웠고, 아홉 살에 《상서(尙書)》를 배워 대의(大義)를 통하였다. 약관에 남명(南冥) 선생의 장례에 가서 예절을 관찰하였고, 인하여 덕계(德溪)에게 《주역》을 배웠으며, 뒤에는 정한강(鄭寒岡) 선생에게 나아가서 성현(聖賢)의 글의 요지를 들었다. 고생을 참고 힘써 행하기를 즐겨서 영남에서 이름이 났다.
우리 선조 때에 왜적이 쳐들어와 서울이 함락되고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의병이 많이 일어났다. 이에 선생은 고을의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의병장 김면(金沔)의 막하에 들어갔다. 김면은 군사(軍事)를 잘 알고 점잖고 신의 있고 병사들을 사랑하였으므로 병사들이 따르는 이가 많았다. 그 이듬해에 군중에 역질이 크게 퍼져 주장(主將)이 죽었다. 선생이 뒷일을 맡아 잘 처리하여 군중에서 주장의 초상을 치르는 예절을 극진히 하니 병사들이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그해 5월에 어머니 오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5년 뒤 10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는 남쪽 지방의 난리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을 때였다. 큰 난리 중이었으므로 예도(禮道)를 갖추기가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무릇 장례와 제사 등의 초상을 치르는 예절을 잘 행하니 보는 사람들이 더욱 어질게 여기었다. 졸곡을 마친 뒤에는 모계(茅溪)에 집을 짓고 10년 동안 글을 가르쳤다. 제자들이 모계 선생이라 일컬었다.
정승 유성룡(柳成龍)과 부제학 김우옹(金宇顒)이 번갈아 추천하여 선조 말년에 동몽교관에 제수되니, 《예기》의 〈곡례(曲禮)〉와 〈제자직(弟子職)〉으로 교육의 조목을 세우고 생도들을 지도하여 한 시대가 교화되었다. 4년 만에 선공감 주부로 올랐고, 얼마 뒤에 감찰로 옮겼다. 다음 해에 광해군이 임금이 되고 정인홍(鄭仁弘)이 국정을 주도하였는데,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가 크게 일어났다. 이때에는 정한강 선생이 대사헌으로서 있으면서, 은의(恩義)를 온전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의논을 지지하다가 이미 쫓겨났고, 대신들도 문을 닫고 들어앉는 판이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물러나지 않다가는 재앙을 당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사대부들이 벼슬하기를 부끄러이 여겨 하나둘 사직하고 떠났다. 그 뒤 대비가 유폐되고 왕자와 귀신(貴臣)들이 많이 죽음을 당하였고, 마침내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정권이 바뀌었다.
정인홍은 합천(陜川) 출신으로, 유술(儒術)을 한다는 이름을 빌려 드디어 높은 벼슬에 등용되었다. 그의 학문은 박정하고 냉혹한 것이어서 은혜와 의리를 해치고 옛 선현들을 모멸하여 한 세상을 어지럽혔다. 그 폐단이 강우(江右)에서 일어나 풍속이 크게 물들었다. 이에 선생은 자취를 감추고 지조를 지키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제자들을 대할 때마다 의리의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여 극언하였으며, 인심을 맑게 하고 세도(世道)를 붙들어 세우는 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이때에 조직(趙溭)이라는 제자가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소장(疏章)을 올려 윤기(倫紀)를 바로잡으라고 진달하였다가 죄를 얻어 바닷가 섬으로 귀양 갔고, 선생도 결국 비방하였다는 무고를 당하여 금법에 걸려 재앙이 예측할 수 없었는데, 선생은 그런데도 오히려 태연하게 지내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의리를 즐겼다. 상이 즉위한 초년에 훌륭한 현인들을 거두어 등용하였다. 선생이 고령 현감(高靈縣監)이 되었는데, 세속의 인심이 자못 좌도(左道)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는,
“이제부터 도(道)가 더욱 쇠퇴하겠구나.”
하고,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에 어떤 어진 공경(公卿)이 어전(御前)에서 천거하였는데, 당시의 의논이 공을 늙었다 하였고 또한 부르지도 않았다.
숭정 4년(1631, 인조9) 11월 임진일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나이 일흔여덟이었다. 병환이 심해지자 부인을 물리치고 의관을 정제하고 운명하니, 군자들이 바르게 일생을 마쳤다고들 하였다. 이듬해 2월 경인일에 가조현(加祚縣) 다발산(多發山) 남쪽 기슭에 묘소를 정해 장사 지냈다.
선생은 천품이 고매하였고 일찍부터 구도(求道)하려는 뜻을 품었다. 날마다 군자들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쌓고 몸으로 실천하여 마음에 터득하였는데, 만년에는 더욱 성취하였다. 덕이 갖추어져 얼굴과 몸에 나타나, 온화하면서도 굳세고 강직하면서도 관대하고 공손하면서도 예절에 맞았다. 은둔해 살면서도 세상을 버려두지 않았고 곤궁하여도 정의를 잃지 않았으며 도를 즐기면서 근심을 잊었으니, 역시 군자로서의 성대한 절조를 넉넉히 볼 수가 있었다. 선생이 지은 〈좌우명(座右銘)〉과 〈자성편(自省篇)〉이 있다.
선생의 초취(初娶)는 이씨(李氏)인데 자녀가 없다. 재취(再娶)는 박씨(朴氏)인데 성후(誠後)를 낳았다. 성후는 훌륭한 행실로 이름이 났다. 삼취(三娶)는 신씨(愼氏)인데 아들 경후(敬後)와 충후(忠後)를 낳았다. 둘 다 학문에 뜻을 둘 나이이다. 딸 하나는 신안(新安) 나이도(羅以道)에게 시집갔다. 측실에도 자녀가 있는데 모두 어리다.
[주-D001] 남명(南冥) : 조식(曺植, 1501~1572)이다. 자는 건중(楗仲)이고, 호는 남명ㆍ산해(山海), 방장노자(方丈老子), 방장산인(方丈山人) 등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정에서 누차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만년에는 지리산의 덕천동(德川洞)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더욱 강학(講學)에 힘썼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南冥集, 민족문화추진회》[주-D002] 덕계(德溪) : 오건(吳健, 1521~1574)이다. 자는 자강(子强)이고, 호가 덕계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1552년(명종7) 식년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558년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 정랑, 지평, 부응교, 전한, 군기시 정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2輯, 德溪集, 민족문화추진회》[주-D003] 임해군(臨海君) : 1574~1609. 선조(宣祖)의 서장자(庶長子)이며 이름은 진(珒)이다. 성품이 난폭하였으므로 아우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광해군 즉위 초에 명나라에서 장자 임해군이 즉위하지 못한 사유를 조사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광해군을 반대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광해군 지지 세력들이 역모(逆謀)의 죄명을 씌워 임해군을 진도(珍島)에 유배시켰다. 얼마 뒤 다시 교동(喬桐)에 이배(移配)하였고 광해군 1년(1609)에 사사(賜死)하였다.[주-D004] 강우(江右) : 낙동강 오른쪽 지역을 말한다. 대개 경상우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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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朽淺) 황종해(黃宗海)1579년(선조 12)~1642년(인조 20)
黃宗海 1579 1642 懷德 大進 朽淺
기언 별집 제26권 / 행장(行狀) / 황 징군(黃徵君) 행장
선생은 휘는 종해(宗海)이고 자는 대진(大進)이다. 성은 황씨(黃氏)이며 본관은 회덕(懷德)이다. 고려 때의 합문지후(閤門祗候) 길신(吉臣)이 선생의 7대조이다. 합문지후가 상문(尙文)을 낳았다. 모두 과목(科目)으로 저명하였다. 그 후손에 직장(直長) 빈(彬)이 있었고, 직장이 철균(鐵均)을 낳았는데 글을 잘하고 행실이 있어서 녹사(祿仕)로 의주 판관(義州判官)을 지냈다. 의주 판관이 국자감 생원 우삼(友參)을 낳았는데 또한 독실한 효성으로 칭송되었다. 생원이 선무랑(宣務郞) 윤림(潤淋)을 낳았고 선무랑이 덕휴(德休)를 낳았는데, 덕휴가 선생의 아버지이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성품이 지극하였고 남모르는 덕을 많이 쌓았다고 일컬어졌다.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인데, 고려 정당문학(政堂文學) 성언신(成彦信)의 7세손이며 여든에 효성과 우애로 참봉(參奉)이 된 성우(成羽)의 따님이다.
만력 7년(1579, 선조12) 3월 26일에 선생이 태어났다.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어려서 글을 배우기도 전에 어버이 섬기는 예절을 아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며 효자라고 하였다. 열 살에 고인(古人)의 학문에 뜻을 두었고, 열너덧 살에 학문과 재예로 이름이 났고, 스물네 살에 처음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섬겨 학문의 종지(宗旨)를 들었다. 병오년(1606, 선조39)에 아버지가 중풍을 8년 동안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운명할 때에 울면서 말하기를,
“내가 8년을 앓는 동안 아이가 조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근심 어린 얼굴로 나를 봉양하였다. 내가 죽으면 아이가 곡을 하다가 몸을 상할까 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초상을 당해서는 다섯 달 동안 장례를 치르지 않고 죽만 먹고 땅바닥에서 잤으며 너무 곡을 하여 남이 부축해야 일어날 수 있었다. 장사를 지내고 3년 여묘살이를 하는 동안은 거친 밥을 먹고 물만 마셨고 채소도 과일도 먹지 않았다. 그 거상(居喪)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정한강 선생의 〈상제답문(喪制答問)〉이 있다. 복상(服喪)을 마친 뒤에 어떤 사람이 술과 음식을 가져와 위로하니 선생이 받지 않고 말하기를 “운운” 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행장(行狀)을 지었고, 신해년(1611)에는 호남과 호서의 유생 1천여 명과 함께 선현을 헐뜯은 정인홍(鄭仁弘)의 죄를 논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임자년(1612)에 정인홍이 정승이 되어서 목천현(木川縣)을 지나가는데 정인홍에게 아첨하는 자가 서생들을 불러 모아 정인홍을 영접하고자 하니, 수십 명이 모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지난해에 서생들이 상소하여 이 사람의 죄상을 성토하였는데 이제 와서 다시 알현하고자 한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서생들이 모두 돌아갔다. 계축년(1613)에 광해군이 태비(太妃)를 서궁에 유폐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인도(人道)가 없어지는구나.”
하고, 드디어 과거(科擧) 공부를 중지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정사년(1617)에 퇴도(退陶) 선생 산거시(山居詩)의 발문을 지었다. 무오년(1618)에 연산(連山)에 가서 사계(沙溪) 선생을 만나 예를 물었다. 〈예학의난답문(禮學疑難答問)〉이 있다. 임술년(1622)에 도잠동(陶潛洞)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인조가 문학(文學)하는 선비를 널리 찾을 때에 고을에서 선생의 행의(行誼)를 보고하였는데, 보고가 올라가기 전에 장유(張維)가 이미 상에게 추천하였다. 이듬해에 어머니 성 유인(成孺人)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나이가 50이 다 되었는데도 곡읍(哭泣)하고 거애(擧哀)하는 예절을 노쇠를 이유로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반곡(返哭)한 뒤에는 여막에서 거처하였다. 분묘까지의 거리가 또한 몇 리쯤 되었는데 매일 새벽이면 무덤 앞에 가서 곡하기를 한결같이 여묘살이할 때와 같이 하였다. 상례(喪禮)를 읽었다. 〈사계의례답문(沙溪疑禮答問)〉이 있다.
을축년(1625)에 〈독서록요어속선(讀書錄要語續選)〉의 발문을 지었다. 병인년(1626)에 사계 선생이 장묘(章廟)를 추숭(追崇)하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소장(疏章)을 올리려고 선생에게 물었는데, 선생이 《춘추》의 민공(閔公), 문공(文公), 양공(襄公), 애공(哀公)의 일을 근거로 대답하고, 또 글을 지어 추숭하는 것이 예절에 맞지 아니함을 말하였다. 무진년(1628, 인조6)에 장유가 상에게 아뢰어, 첫 벼슬로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사년(1629)에 《가례박해(家禮剝解)》의 발문을 지었다. 경오년(1630)에 여헌(旅軒) 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죽림서원(竹林書院)과 탁영 사당(濯纓祠堂)의 향사 절목(享祀節目)을 물었다. 이때에 목서흠(睦敍欽)과 목장흠(睦長欽) 두 분이 선생을 행의(行誼)가 있다고 추천하였다.
임신년(1632)에 장유가 또 상에게 아뢰어 동몽교관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갑술년(1634)에 최명길(崔鳴吉)과 목서흠이 상에게 아뢰기를,
“황종해는 산림(山林)에서 도(道)를 지키고 살면서 출세에 뜻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영릉 참봉(英陵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을해년(1635, 인조13)에는 〈도산언행습유(陶山言行拾遺)〉와 〈한강오복연혁도(寒岡五服沿革圖)〉의 발문을 지었다. 또 〈비풍문규(比豐門規)〉를 지었다. 제의(祭儀), 분묘(墳墓), 경종(敬宗), 목족(睦族) 등에 대한 내용인데 각각 고증(考證)과 통론(通論)이 있다.
병자년(1636)에 제릉 참봉(齊陵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에 호란(胡亂)이 있었다. 나이 많은 형이 있었는데, 선생도 이미 늙은 몸이었으나 형과 함께 산중으로 피난하여 음식을 손수 차려 올리고 출타 시에는 고삐를 잡고 수행하면서 말하기를,
“난리 중에는 형제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
하였다. 정축년(1637)에 예시(禮詩) 아홉 장(章)을 지었다. 첫째는 사친(事親), 둘째는 교자(敎子), 셋째는 군신(君臣), 넷째는 부부(夫婦), 다섯째는 형제(兄弟), 여섯째는 사사(事師), 일곱째는 장유(長幼), 여덟째는 붕우(朋友), 아홉째는 총론(總論)인데, 오륜(五倫)을 미루어 부연하고 《소학》을 조술(祖述)하여 편장(篇章)을 이룬 것이다. 무인년(1638)에 〈동방선행수문(東方善行謏聞)〉과 〈목악고사(木嶽古事)〉가 완성되었다. 기묘년(1639)에 〈심성정리기설(心性情理氣說)〉을 지었다. 경진년(1640)에 조정이 특별히 6품직에 서용하여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를 삼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촌규범례(村規凡例)〉를 지었다. 〈남전향약(藍田鄕約)〉을 본뜬 것인데 당시의 풍속을 따라 가감하여 손질한 것이 46조항이었다. 〈경민편(儆民篇)〉의 서문을 지었다. 또 〈문중완의(門中完議)〉를 지었는데 차적(次嫡)이 승중(承重)하는 일과 제전(祭田)과 묘전(墓田)에 대해 논한 것이다.
임오년(1642) 12월 24일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나이 64세였다.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가 없자 원근의 사림(士林)들이 서로 물력(物力)을 내어 함께 장례를 치렀다. 문인(門人) 조유안(趙惟顔), 안여룡(安汝龍), 김광훈(金光勳) 등이 상례(喪禮)를 맡았다. 이듬해 3월에 고을의 치소(治所) 동쪽 삼생동(三生洞) 덕천(德泉)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 지냈다. 광중(壙中)을 3자 정도 파 내려가니 오래된 그릇이 하나 나왔는데 ‘덕천(德泉)’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그 언덕을 덕천이라 이름하였다. 8년 뒤에 선생을 죽림서원(竹林書院)에 종사(從祀)하였다.
선생은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직접 배웠고 독실하게 믿고 옛 법을 좋아하였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행실을 쌓았다. 그 학문은 한결같이 효도와 공경으로 근본을 삼았으며, 집안에서 실천을 독실하게 하여 고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았다. 제사는 법도에 맞게 지냈고 가까운 조상이라 해서 더 풍부하게 하지 않았다. 제사의 예절은 엄격함을 위주로 하여, 어머니 기일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아버지를 함께 제사하지 아니했다. 종중(宗中)의 제사를 주관하는 종손에 대해서는 비록 자기보다 항렬이 낮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예모(禮貌)를 갖추고 대우하며 말하기를,
“조상을 높이는 예절은 마땅히 이래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형제간에는 한결같이 은혜와 사랑을 위주로 하였고, 가정에서 교육할 때에는 반드시 노여움과 원한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였다. 자제들에게 허물이 있으면 또한 꾸중을 하지 아니하고 차근차근 타일러서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사람들과 사귈 때에는 반드시 진심을 다하고 반드시 공경을 다하였다. 불선함이 있으면 반드시 말해 주었고, 고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스스로 반성하며 말하기를,
“내 말이 신뢰받지 못하니 나의 허물이다.”
하고, 반드시 성의(誠意)로 자신을 면려하였다.
선생이 평소 병이 많았으나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있었다. 거처를 반드시 엄격하게 하였다. 항상 《논어》에 있는 “있어도 없는 듯이 하고 찼어도 빈 듯이 하고 남이 건드려도 따지며 다투지 않는다.”라는 말을 즐겨 일컬으며,
“한평생 가슴 깊이 새겨 둘 말이 이것이다.”
하였다. 평생 정의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음으로써 몸을 깨끗이 하였다. 거처를 그윽한 산수 속에 정하고 한가로이 시를 읊으며 스스로 즐겼다. 30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경술(經術)을 널리 공부하였고 예학(禮學)을 더욱 깊이 공부하였으며 또 제자백가의 말과 의약(醫藥)과 산수(算數) 같은 지엽의 학문도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학문이 더욱 넓어지고 행실이 더욱 수양될수록 몸가짐은 더욱 겸손해졌다.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소학》과 《효경》을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사서(四書)를 가르쳤다. 배우는 자들이 선생을 후천(朽淺) 선생이라 불렀다. 후천은 그 관향(貫鄕)의 옛 이름인데 그것으로 호를 삼은 것이다.
그의 〈언행잡기(言行雜記)〉에,
“선생은 평소에 술을 잘 마셨다. 젊을 때에 한번은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는데, 한 번 아버지의 경계를 듣고는 물러나 자책하고 종신토록 술에 취해 아버지의 경계를 망각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연로해지자 여러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어 살림을 하도록 하였는데, 선생은 굳이 척박한 논밭과 늙은 노복을 갖기로 하고 말하기를 ‘재물은 얻기 쉽고 형제는 얻기 어렵다.’ 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이 심해졌을 때에 감을 잡숫고 싶어 하였으나 병환에 해로워서 올리지 못하였는데, 그 뒤 선생은 늙을 때까지 차마 감을 먹지 못하였다. 기일(忌日)이 되면 반드시 검은 두건을 쓰고 흰 옷을 입고 종일토록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앉지 않았으며, 슬퍼함이 초상을 당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오늘날까지 마을의 부로(父老)들이, 선생이 어머니 병환에 대변을 맛보고 피를 내어 흘려 드리고 북신(北辰)에 기도하여 대신 죽게 해 달라고 했던 일들을 서로 전하며 《신정선행고사(新定善行古事)》를 만들었다.”
하였다.
의인(宜人) 이씨(李氏)는 우리 태종의 7세손이다. 아버지 이홍벽(李弘璧)은 선행(善行)으로 세상에 알려져 당대 사림들의 존경을 받은 분이었고, 어머니 진주 정씨(晉州鄭氏)는 중고(中古)에 이름 높은 승지 정성근(鄭誠謹)의 4세손이며 현헌(玄軒) 선생 목세칭(睦世秤)의 외손녀이니, 내외분이 모두 이름 있고 법도 있는 집안 출신이다. 의인은 성품이 아주 훌륭했으며, 시부모를 잘 봉양하였다고 칭송을 들었다. 만력 10년(1582, 선조15) 9월 30일에 태어나, 선생이 돌아가신 뒤 2년 만에 의인이 세상을 떠났다. 나이 63세였다. 같은 언덕에 부장(祔葬)하였다. 아들이 둘인데, 곡립(鵠立)과 학립(鶴立)이다. 곡립은 진사이다. 사위는 사인(士人) 이감(李堪)이다.
곡립은 재후(載厚)와 이후(履厚)와 명후(命厚)를 낳았다. 학립은 도후(道厚)를 낳았고 사위는 이순희(李淳煕)이며 또 아들 둘과 딸 둘이 있는데 어리다.
《후천유고(朽淺遺稿)》 다섯 권이 있고 또 《언행록(言行錄)》이 있다.
[주-D001] 장묘(章廟) : 인조의 아버지이다. 인조반정 이후에 대원군(大院君)이 되었다가 1627년(인조5)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다. 그 능(陵)이 김포에 있다.
[주-D002] 죽림서원(竹林書院) : 여산(礪山)에 있다.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성혼(成渾), 송시열(宋時烈)을 향사(享祀)하였다.
[주-D003] 동방선행수문(東方善行謏聞) : 한국문집총간 84집에 수록된 황종해의 문집인 《후천집(朽淺集)》 권8에는 〈동방명인사적수문대략(東方名人事跡謏聞大略)〉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04] 목악고사(木嶽古事) : 《후천집》 권8에는 〈목현사적(本縣事蹟)〉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05] 있어도……않는다 : 《논어》 〈태백(泰伯)〉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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