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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先代)에서 나라가 위태로울때 목숨 바쳐 충성(忠誠)을 다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님을 위하여 효성(孝誠)을 다하여 가문을 빛내고 훌륭한 공적을 남긴 조상님을 알아 가는 것은 내 자신의 근본(根本)을 알아가는 길이라 생각된다.
“효자 가문에서 충신이 난다(求忠臣 出於 孝子之門)”는 말이 있듯이 옛말에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효자 가문에서 인물을 뽑으라고 했다.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은 가풍이고, 평소의 행실이기 때문이다.
역신(逆臣)으로 몰렸다가 훗날 신원복관(伸冤復官)된 충신들은 자신의 가족과 가문도 풍비박산 된다. 후손들은 충신의 이름 석 자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간다. 조선조 우리 충장공파에서는 일곱분의 선조께서 충신정려와 효자정려를 하사 받았다.
■충신정려(忠臣旌閭)
▸충장공(忠莊公) 휘(諱) 분(苯) (장흥 忠烈祠에 配享)
▸독곡공(獨谷公) 휘(諱) 명세(名世) (장흥 忠烈祠에 配享)
▸동암공(東庵公) 휘(諱) 현보(賢輔) (함평 上谷祠에 配享)
▸신재공(愼齋公) 휘(諱) 감(瑊) (함평 杓山祠에 配享)
효경(孝經)에 공자께서 "다섯 가지 형벌에 속하는 죄가 삼천 가지이나 그중에서 불효보다 큰 죄는 없다(五刑之屬三千 而罪莫大於不孝)"라고 하였듯이 효는 인륜(人倫)의 가장 으뜸이 되는 덕목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모님께 자식 된 도리를 다 하려는 선조들의 효성(孝誠)은 후손들에게 큰 교훈이다.
■효자정려(孝子旌閭)
▸광노자(狂奴子) 휘(諱) 광로(光露)
▸망우당(忘憂堂) 휘(諱) 윤진(胤晉)
▸무위와(無爲萵) 휘(諱) 인겸(仁謙)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순국하였으나 포상에서 누락되어 정려(旌閭)의 은전은 받지 못했지만 지역 유림들의 노력으로 사당에 배향(配享)된 세분의 선조가 있다.
■순국선조(殉國先祖)
▸청안공(淸安公) 휘(諱) 명원(名遠) (장흥 忠烈祠에 配享)
▸판관공(判官公) 휘(諱) 곤수(崑秀) (장흥 忠烈祠에 配享)
▸병사공(兵使公) 휘(諱) 현용(見龍) (나주 忠莊祠에 配享)
충신정려를 하사 받아 장흥 충렬사에 배향(配享)된 독곡공(獨谷公) 휘(諱) 명세(名世) 선조님도 처음에는 포상에서 누락되어 정려(旌閭)의 은전을 받지 못했지만 아들 진사공 휘 첨(䪜)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 충신정려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0권, 광해 즉위년 11월 21일
유학 정첨(鄭䪜)이 상소하여 아버지 정명세의 충의와 절개에 대해 아뢰다
장흥(長興)에 사는 유학(幼學) 정첨(鄭䪜)이 상소하기를,
“이미 죽은 신의 아비 정명세(鄭名世)가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있을때 임진 왜란을 만나 출몰하여 적군을 토벌했는데, 크고 작은 십여 차례의 전투에서 수급을 많이 벤 공로가 있었고 나라를 위해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신의 아비의 이름이 절개를 세운 인사들의 뒤에 끼어 있는데도 아직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자식 된 자의 원통만이 아니고 사실 공론이 한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명세의 충의를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는 일은 의당 쾌히 시행해야 할 것이다. 예조에 말하여 속히 논의한 다음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하거나 공로가 인정되어 표창하는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국장과 애족장에 추서된 세분의 선조님이 있다. 독립유공자(獨立有功者)라 함은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국권 수복을 위하여 여러 민족운동을 펼친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를 말한다.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사람이다.
■건국훈장(建國勳章)
▸국사공(菊史公) 휘(諱) 희면(熙冕)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追敍)
▸기농공(基農公) 휘(諱) 세권(世權)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追敍)
▸운암공(雲巖公) 휘(諱) 두흠(斗欽)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追敍)
이상 충신. 효자 열세 분의 선조님께서 쌓은 공적(功績)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충장공(忠莊公) 휘(諱) 분(苯)
자(字)는 자유(子㕀)이며 호(號)는 애일당(愛日堂)이다. 1452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 · 김종서 등이 주살되고 정란(靖難) 두 달여前 전라·경상·충청도 체찰사를 역임하여 삼남 지방의 백성들의 어려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오던 중 압송되어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삭탈관작(削奪官爵)되고 낙안의 관노가 되어1454년 사사(賜死)되었다.
1746년(영조 22) 김종서 · 황보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58년 (영조 22) "忠莊" 시호교지가 하사되었으며
1786년(정조 10)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되었고
1791년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장흥에 충신정문을 세웠다.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광노자(狂奴子) 휘(諱) 광로(光露)
원래의 휘(諱)는 원(遠)이고 자(字)는 기지(器之)이며, 호(號)는 광노자(狂奴子)이다. 세종7년 1425년에 출생하였다.
천하에 제일 큰 효는 대를 이어 선조의 제사를 모시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다. 충신의 제사를 보존하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 였지만 목숨을 보전하여 충신의 제사를 모실 수 있는 후손들을 오늘에 있게 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광노공께 효자정려 (孝子旌閭)를 내려주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光露 卽端廟相臣苯之子 〔遭〕禍佯狂 匿跡存祀者也
정광로는 바로 단종조 때 상신(相臣) 정분(鄭苯)의 아들로 화를 만나 거짓으로 미쳐서 자취를 숨겨 제사 지낼 자손을 보존한 자이다."
충장공의 충절을 더욱 빛나게 하여 오래도록 전하게 된 것은 광노공께서 가문을 보존하여 대대손손 조상님에게 제사를 받들어 모시려는 효성 때문일 것이다. 장흥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독곡공(獨谷公) 휘(諱) 명세(名世)
자(字)는 백시(伯時)이며 호(號)는 독곡(獨谷)이다. 선조 6년 1572년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고, 1579년(선조 1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586년에 사헌부감찰을 거쳐 해미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임진년에 왜적들이 침략하자 공이 의병이 되기를 청하여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별장으로 임명하여 아산과 평택에서 왜적을 무찔렸다. 체찰사가 공이 장군의 제목이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특별히 군기사 첨정 겸 조방장으로 승진하였다.
공의 아우 명원(名遠)이 당시에 청안현감이 되어 왜적과 싸웠는데 형세가 심히 위급하다는 급보를 듣고 병사들을 거느리고 달려가 보니 청안공이 홀로 병사들을 거느리고 힘써 싸우다 이미 전사하여 공이 어찌할 수가 없었다. 괴산 북쪽 산기슭에 가매장하고, 제문을 지어 이르기를, "너의 유골은 내가 수습하여 주었는데 나의 유골은 누가 수습하여 줄 것인가!" 하니 듣는 사람 모두가 슬퍼하였다.
김천일, 경상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과 진주성으로 들어가
각각 대열을 나누어 진주성을 사수하였으나 왜적들에게 10일을 포위당하여 주야로 크고 작은 수십여 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공과 김천일 및 여러 장수와 선비들이 촉성루에 모여 북쪽을 향하여 재배를 하고 남강으로 몸을 던져 순국하니, 1593년 6월 29일이다. 충신정려가 하사되고 장흥 충렬사에 배향(配享)되었다.
▣청안공(淸安公) 휘(諱) 명원(名遠)
1584년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망을 하여 공석이 된 청안현감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청안(現충북괴산)은 왜적이 육로로 사용하는 요충지이다. 도망간 전임자를 대신하여 임지로 떠날 때에 죽음을 무릅쓰고 밤을 틈타 부임하여 관인(官人)들을 불러 모으고, 군인과 민간인들을 불러 설득을 하여 공께서 흩어진 병사 500여 인을 모집하여 정예병으로 결성하고 힘써 싸워 지킬 대책을 세웠다.
괴산의 전투에서 진퇴를 거듭한 혈전을 하여 왜적 수백 명을 참살하였고, 몇 번에 걸쳐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공이 분기하여 크게 부르짖으며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 왜적과 육박전을 하니 참살된 왜적이 매우 많았다. 그런데 매복하고 있던 왜적이 갑자기 일어나 마침내 왜적의 칼날에 맞서다 결국은 지쳐 많은 상처를 입고 순국하니 1592년 11월 초 7일이다.
재상 조경(趙曔)이 정향축(丁享祝)을 고쳐지어 이르기를,
“창을 들고 집을 떠나더니,
배에 화살을 꽂고 돌아왔구나!
독곡공의 아우요. 충장공의 손자로다.” 하였고,
대사간 박기정(朴基正)이 고유축문을 지어 이르기를,
“충장공의 후손이요. 독곡공의 아우로다.
왜란에 참여하여 왜적에게 죽었으니
열렬한 충성과 절의로다.” 하였다.
장흥 충렬사와 고흥 성산사(星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판관공(判官公) 휘(諱) 곤수(崑秀)
공의 휘는 곤수(崑秀)이고 자(字)는 백옥(伯玉)이다. 명종 15년 1560년 경신년에 출생하였다. 1583년(선조16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 판관으로 계실 때 임진왜란을 만나 여러 장수들과 한마음 한뜻으로 평택에서 왜적과 싸워 수백 명을 목을 베었다. 이 일이 소문이 나서 조정에서 공을 장군의 제목으로 지목하고 조방장을 제수하였다.
공이 병사들을 거느리고 대거 길을 차단하고 오랫동안 연일 큰 전투를 하자 적탄이 비 오듯 하였고 창에 찔린 곳이 수도 없었으나, 얼굴빛 하나 변치 않고 왜적과 육박전을 하다가 1593년 6월 23일 마침내 순국하니 당시 나이가 34세였다. 장흥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병사공(兵使公) 휘(諱) 현용(見龍)
공의 자(字)는 성서(瑞) 요 호(號)는 취죽당(翠竹堂)이다. 1570년 무과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의 변을 당하여 권율장군과 수원성에 진을 치고 있어서, 공은 정척(鄭陟)과 함께 적의 내부를 염탐하였는데 자세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 적의 형세를 살펴 본 즉 군량미가 없어 적병들이 배불리 먹고 건강할 수가 없었다. 삼경도 되지 못하여 왜적들이 모두 잠들자 공이 온 힘을 다해 포승줄을 풀어버리고, 왜적 우두머리의 칼을 빼앗아 수십 명을 죽이고, 정척을 데리고 말위로 몸을 날려 타고 적진에서 길을 열고 나오는데 도처에 죽을 쑤는 가루가 분분하였다. 이후 왜적들이 공의 신비스러운 용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왜적 우두머리의 수급을 도원수에게 바치고 왜적의 허와 실을 보고한 후 연일 큰 전투가 벌어지면 공이 매번 선봉에 서서 많은 적들을 참살하고 마침내 대승을 거두었다.
다음 해 1593년 3월 공이 또 권율장군과 함께 행주에서 병사들을 모아 온 힘을 다해 칼날을 무릅쓰고 여러 날 승전을 하였고, 한 척의 검을 들고 전쟁터를 전전하여 향하는 곳마다 앞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 임진왜란 3대 전첩의 하나로 손꼽힌 이치(梨峙)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니 도원수가 크게 칭찬하며 말씀하기를 공은 진실로 장군의 제목이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상공(上功)으로 여기고 병사(兵使)를 제수하신 것이 선무녹훈(宣武錄勳) 되고 호남 절의록에 기록되었다. 순조 1832년에 유림의 공론으로 인하여 나주에 충장사(忠莊祠)를 세우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배향(配享)되었다.
▣동암공(東庵公) 휘(諱) 현보(賢輔)
자(字)는 성좌(聖佐), 호(號)는 동암(東庵)이다. 1566년 병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임진왜란을 당하여 최경회와 함께 본 현에 의병 청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몽탄강 전투와 목포전투에서 분력하여 싸워서 많은 왜적들을 참살하였다. 바닷가 고을들이 그에 힘입어 편안하였으나 성공을 이루지 못하고 목포전투에서 순국(殉國)하였다.
공의 공적이 원종공신녹권에 자세하게 실려 있고 또 호남절의록과 삼강록에 실려 있다. 1807년에 공의 충절을 임금께 아뢰자, 충신정려를 내려주니 정자동에 충신정려가 세워졌으며 함평 상곡사(上谷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재공(愼齋公) 휘(諱) 감(瑊)
자(字)는 옥경(玉磬) 호(號)는 신재(愼齋)이며 1588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창의사 김천일 막하로 가셔서 여러 전투에서 많은 왜적을 사살하고,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촉석루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하고 북향사배를 한 후 이르기를,
“선조의 어가가 아직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장군들이 먼저 죽게 되었으니 나라가 위태롭게 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여러분들은 잠깐만 기다리시오 내가 사생이지(死生以之)를 보여드리겠소. ”하고 칼을 어루만지며 말위로 올라 적진으로 돌격하여 싸우기를 수십 번하여 백여 명의 목을 벤 후 마침내 진중에서 순국하였다.
조정에서 사복사정벼슬을 추증하여 주고 선무원종일등 공신으로 선정하여 주었다. 이러한 기록이 선무원종록훈 및 호남절의록과 삼강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867년에 충신정려를 내려주었으며 함평 표산사(杓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망우당(忘憂堂) 휘(諱) 윤진(胤晉)
효자 망우옹(忘憂翁) 정윤진(1686~?)의 자(字)는 시우(時愚)이며 충신 정현보의 현손으로 일찍이 사친에 도를 깨달아 아버지 정문원(鄭文遠)과 어머니 고성정씨(固城鄭氏)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정효자라 칭하였으며, 1794년(정조 18)에는 효행탁이로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司僕寺正)에 증직하고 그 뒤 1870년(고종 7) 향도의 추천으로 효자 명정을 받았다.
▣무위와(無爲萵) 휘(諱) 인겸(仁謙)
효자 무위와(無爲窩) 정인겸(1723~1807)의 자는 군익(君益), 충신 정현보의 8 세손이며 효자 정윤진의 증손으로 일찍이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부친상중에 나쁜 괴질이 나돌았지만 자기의 몸은 돌보지 않고 상청(喪廳)을 지키며 향을 계속 피웠다고 한다. 그 후 1794년(정조 18) 효행탁이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증직 되고, 이어 1802년(순조 2)에는 가의대부에 승배 되었다. 그리고 1870년(고종 7) 향도의 추천으로 효자 명정을 받았다.
▣국사공(菊史公) 휘(諱) 희면(熙冕)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追敍)
자(字)는 태현(泰賢), 호(號)는 국사(菊史)이며 전남 함평 월악 출신으로 원래 성리학에 능한 학자로 성리학에 전념하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봄 국권회복을 결심하고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고 곳곳에 격문을 보내 의병(義兵)을 모아 1907년에 영광에서 김곡구(金容求) ·기삼연(奇參衍) 등과 의거하여 왜적과 싸우는 등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나주(羅州)의 선동(船洞), 철천(鐵川) 등지에서 왜병을 무찌르는 공훈을 세웠으나 결국에는 패하여 체포되어 광주 형무소로 이송되어 1908년 봄 유형(流刑) 6개월을 언도 받아 모진 고문에도 의연하였으며 늠름한 지사(志士)의 모습을 보였다.
순종황제 대관의 은전으로 석방되었다. 특히 그가 직접 쓴 남관일기(南冠日記)는 당시의 거사내용과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기록한 당시의 의병 활동과 일제의 잔혹함등 민중의 뜻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 국사유고(菊史遺稿)를 남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追敍)하였다.
▣기농공(基農公) 휘(諱) 세권(世權)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追敍)
1888년 경상남도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에서 태어났다. 12세에 진주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였고, 진주사범학교의 3년 과정을 1년 만에 수료하였다. 졸업 직후인 1905년 참봉에 제수되었고, 1910년 20세에 최연소 하이면 면장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북촌과 익선동, 봉익동, 성북동, 혜화동, 창신동, 서대문, 왕십리, 행당동 등 경성부 전역에 한옥 대단지를 건설하였다. 현재 외국 관광객으로 붐비는 서울 종로 북촌(北村) 전역을 건축한 사람이 정세권이다.
부동산 개발로 얻어진 재력은 식민지하에서 민족자본으로 사용되었다.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 경성지부 재무를 담당하면서 모든 자금을 사비로 충당하였다.
1929년 정세권은 물산장려회 재무이사로 선출되어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한 후 식민지의 민족자본가로서 낙원동 300번지에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을 지어 기증하며 조선물산장려회의 재정을 담당하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정세권이 없었으면 사실상 불가능했다.”라 말한다.
정세권은 조선일보 사장으로 민족 언론의 대표였던 민세 안재홍과 평생의 동지로 독립운동을 했다. 이극로의 조선어학회, 신간회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시인 한용운은 조선물산장려회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전(移轉) 장소를 마련해준 정세권을 치하하며 <장산>지에 “백난중분투(百難中奮鬪) 하는 정세권씨에게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1933년 상해에서 김구(金九)가 보낸 야밤에 찾아온 임정요원이 군자금을 내놓으라고 했을때 마침 집 몇 채 판 돈이 있어 통째로 내주기도하였다.
1935년 3월 15일 경성 종로 명월관에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이 창립됐다. 사무실은 종로 화동 129번지 2000평 땅에 있던 2층 건물이었다. 역시 땅과 대지는 정세권이 기증하면서 조선어학회의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하였다. 갖은 고초를 무릅쓰고 참여한 조선어학회 운동은 해방 후 최초의 한국어사전인 한글학회 큰 사전 간행이라는 성과를 남겼다.
1942년 10월 1일 경성 화동에 있는 조선어학회 회관에서 한글학자 33명이 경찰서로 끌려갔다. 증인 48명도 끌려갔다. 끌려간 사람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정세권 또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민족자본가 정세권의 민족운동 참여는 실제 고문을 받고 뚝섬의 토지 35,000여 평을 강탈당하는 등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무릅쓴 것이었다.
경남서부보훈지청은 독립유공자 정세권 생가(고성군 하이면 덕명3길 27)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운암공(雲巖公) 휘(諱) 두흠(斗欽)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追敍)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출신으로 경술년(1910년) 한일합병 때 순절한 애국지사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왕을 가까이 모신 중앙관리로서 충직한 신하였으며 나라 잃은 울분을 표현 할길 없어 자결로 국치(國恥)에 항거한 조선의 마지막 의로운 선비로서 1910년 10월 25일 69세에 [손명사(損命詞)]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저서(著書)로 운암집(雲巖集)을 남겼다.
운암공의 부인인 청주한씨도 “나라 망하고 남편이 죽었으니 홀로 살 수 없다.”라고 하며, 운암의 1주기 제사를 지내고 조용히 따라 자결하였다.
損命詞(손명사) 목숨을 버리며 고하다.
有客來傳無國報 / 어떤 객이 전하길 나라가 없어졌다 하기에
癲狂心事淚悽然 / 미칠듯한 심사에 눈물 흘리며 처참해지네
擧跟寧蹈靑山土 / 발꿈치 들고 어찌 청산의 흙을 밟으랴
閉戶不見白日天 / 문 걸어 닫고 대낮의 하늘을 보지 않네
負帝貞忠慚陸秀 / 황제를 업고 죽은 육수부의 정충에 부끄럽고
攘秦大義憶齊連 / 진나라 물리친 제나라 노중련의 대의를 생각하네
國破難容無救罪 / 나라가 망함은 용납이 어렵고 구제할 수 없는 죄이니
莫如身死逐先賢 / 이 몸 죽어 선현을 따르니만 못하리라.
우리 鄭氏가문은 작은 시골 문중임에도 위대한 선조들이 많다. 충장공의 후예로 충효가 대대로 이어 내려오니 위대한 선조들의 후손으로 긍지와 함께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후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선조들의 유덕(遺德)을 추모 현양(顯揚)하고 종중의 화목과 번영을 위해 노력하고 후진 육성에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