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묵상 해설 (야고보서)
묵상을 위한 야고보서 개관
1.아직 명예회복을 기다리는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지혜문학에 속한다. 전도서나 잠언에서 보듯, 이 지혜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현실의 삶에서 필요한 생활의 지혜다. 야고보서는 시종일관 우리 삶에 눈길을 둔다. 삶의 모양을 관찰하면서 거기서부터 신앙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실 복음의 실천적 의미에 목말라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매우 반가워햐 할 글이 야고보서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별 인기가 없다. 엄연히 성경의 한 부분이지만, 그의 ‘홈피’에는 방문자가 드물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에서 출발하여 신앙에 접근하는 방식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행위와 믿음을 나누고 구원 문제를 삶이나 행위가 아닌, 교리로 해결하는 우리로서는 야고보서의 실천적 신앙론이 반갑지 않다. 반가운 친구보다 부담스런 손님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시선을 피한다. 루터처럼 대놓고 폄하할 수는 없지만, 조용히 무시하여 사태를 무마하려 한다
물론 야고보서를 아주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때때로 야고보서를 읽고 거기에 댓글을 단다. 그런데 그 댓글들이 더 답담하다. 야고보를 일는 우리 태도는 바울을 읽는 태도와 너무 다르다. 믿음과 음혜를 강조하는 바울의 선포에는 뜨거운 갈채를 보내지만, 무늬뿐인 믿음의 허망함을 지적하는 야고보서 앞에서는 자기방어적 태도로 바뀐다. 루터처럼 ‘악플’을 달지는 않지만, 야고보를 있는 그대로 즐거려는 시도는 흔치 않다. 야고보는 분명 우리 행실을 강조하는데 우리는 끝애 ‘야고보서도 믿음 구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로 결론을 맺는다. 이런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를 놓고서도 바울 변증을 시도하는 우리의 자세가 석연찮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행함이 최종적 판단이 기준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에 흔쾌히 ‘아멘!’ 하지 못할까(어쩌면 이런 표현에서도 교리적 틈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하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드러나야 합니다”하면서 거품을 무는 설교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소위 ‘바울의 관점’으로 야고보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차고 넘치지만, 야고보의 관점에서 바울을 읽으려는 시도는 찾을 수 없다. 우리 태도는 왜 이렇게 일방적일까?
2.자기기만의 함정
성경은 신자들의 착각, 곧 자기기만에 대해 자주 경고한다. 물론 이 착각은 은혜가 있는 곳마다 어디나 존재한다. 아무 공로 없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하나님의 은혜는 쉽게 삶을 떠난 외적 종교성으로 타락했다. 삶의 순종은 없지만 화려한 종교는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 외양에(자발적으로) ‘속아’ 자신들이 안전하다 착각하였다. 이사야의 초두에서 보는 것처럼, 구약 선지자들의 외침은 줄곧 백성들의 이런 위선적 자기기만을 겨냥한다. 이스라엘은 ‘값싼 은총’에 의지했고 선지자들은 그것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음을 폭로하였다.
새 언약의 등장이 구원역사의 본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함을 다급히 외치지만, 그렇다고해서 ‘회장님의 방침’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피상적으로 제기되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이항대립은 첫 언약에 대한 오해인 만큼, 또한 새 언약에 대하 오해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첫 음성인 세례 요한은(어설픈) 행함을 포기하고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촉구하지 않았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 곧 언약 백성이라는 외적 정체성에 희망을 걸었던 당시 유대인들의 값싼 은총론을 공격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마3:7-12; 눅3:7-14). 오실 메시아에 대한 선포는 이런 요구에 기초한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의 ‘행함’을 비판하고, 자기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칼날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외적 경건에 치중하면서 ‘율법의 더 소중한 가르침, 곧 정의와 자비로움과 신실함’은 팽개친 위선적 공허함을 겨냥하신다(마23:23). 야고보식으로 말하면, 그들의 문제는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음이었다(약1:2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은 무엇이든지 행하고,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종교인들이기 때문이다(마23:3).
믿음과 은혜의 화신인 바울도 예외가 아니다. 칭의론을 개진하면서 바울이 공격한 유대인들은 율법 준수에 열심인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외면적 정체성(할례, 율법 소유)을 자랑하면서도 그 삶이 이방인과 다를 바 없던 부류의 사람들이다(롬2장). 갈리디아의 선동자들에 대한 그의 비판도 “그들이 할례는 강요하면서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다(갈6:12-13). 이렇게 보면 신약의 일관된 비판은 율법에 대한 열성이 아니라 그 반대, 곧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종교적 외양으로 모양만 내려 한 위선에 대한 공격이다. 종교적 껍데기를 비판하고 참된 알맹이를 약속하면서 등장한 것이 기독교 복음인 것이다.
3.신자의 자기기만에 대한 바울의 경고
물론 이는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누리는 우리에게는 이런 자기기만의 위험이 훨씬 더 크다. 그래서 신약은 거듭 성도들의 착각을 경고한다. 가령 이신칭의의 선언서에 해당하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스스로 속이지 마라”는 엄중한 경고를 날린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갈6:7). 우리 인생의 농사에는 육체 농법과 성령 농법 두 가지가 있다. 육체라는 밭에다 파종하면, 육체의 밭에서 썩어짐을 수확한다(바울서선에는 지옥 개념이 없는데, ‘썩어짐’이 그와 유사한 개념의 하나다). 반면에 성령에다 인생을 파종하면, 성령의 밭에서 영생을 수확한다(6:8). 신앙의 모양만 잘 꾸민다면 ‘육체 농법’으로 살면서도 영생을 수확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강한 믿음이 아니라 대책 없는 자기기만이다. 바울은 그것을 경고한다. 그것은 육체대로 살면 죽을 것이고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는 로마서의 말과 같다(8:13; 참조, 약1:15).
4.복음을 말하는 야고보의 방식
야고보서와 무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는 이유는, 삶을 제시하면서 믿음을 말하는 야고보의 관심사가 순수한 복음 그 자체라는 것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을 삶의 문맥에서 분리하려는 유혹, 혹은 우리 삶의 공허함을 화려한 외양으로 보상하려는 충동은 신앙의 길을 방해하는 가장 집요한 장애물의 하나로 작용한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야고보서를 주셨다. 바울서신처럼 야고보서 또한 복음을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우리는 쉽게 믿음이 순종으로 이어진다. 말하지만, 이 흐름은 결코 자동적이지 않다. 사실 믿음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고민 아닌가? 그럴 때 우리는 순종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혹은 많은 경우) 우리는 위선적 종교성으로 순종 없는 삶을 감추려 들기도 한다. 화려한 종교성, 혹은 그럴듯한 믿음의 수사로 순종 없는 내 삶을 위장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그런 우리를 향해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너의 삶을 거울 삼아 너의 믿음을 비추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를 선포하셨다(눅15장). 이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소환하기 위한 하나님의 희생적 결단이다. 그런데 이 은혜가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 생긴다. 일만 달란트의 용서가 일백 데나리온의 용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말하려 한다. 이럴 때 은총은 율법보다 더 무서운 칼날을 휘두른다. 예수님은 “너희가 먼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해야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경고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것”이라고 경고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물론 복음이 율법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이기적 자기만족을 하나님의 은혜로 치부하는 우리의 위선을 폭로하는 거룩한 지혜의 표현이다. 열매로 나무를 판단하고, 우리 용서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읽어내겠다는 것은, 은혜로는 부족하니 율법을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참 은혜를 선포하는 한 방식인 것이다. 바울의 표현으로 하자면, ‘의를 통하여 우리를 통치하는’ 은혜 아래 살아가라는 초청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는 정말 예수님의 동생이다.
행위를 요구하는 야고보서가 복음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성경적 복음과는 다른 ‘내가 복음’을 믿고 있다는 말과 같다. 철없는 아이는 복잡한 교통규칙을 짜증나는 율법이라 말하겠지만, 어른들은 자유로운 운행을 가능케 하는 지혜라 말할 것이다. 은혜의 다스림 안에 있으면 과거의 율법도 우리를 ‘자유케 하는 율법’으로 다가오지만(1:25), 죄의 다스림에 휘둘리는 사람에게는 복음조차 갑갑한 요구사항으로 들릴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야고보서가 해결되어야 할 신학적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5.야고보서에서 배우는 하늘의 은혜
야고보는 지혜를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 우리 행실로 드러나는 그런 지혜다(3:13). 우리는 이런 지혜를 실천해야 한다(3:13-14). 하지만 이런 실천의 근원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다(1:5,17; 3:15). 우리에게는 이 초월적 지혜, 곧 우리로 시험에서 인내하게 하고 우리를 생명의 면류관으로 이끌어줄 하늘의 지혜가 필요하다(1:5).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지혜로 우리 삶을 채워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한다”(1:6-8; 참조, 롬4:19-21). 야고보서가 행위구원론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위나 지혜가 없어도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혜가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1:21; 참조,2:14),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심어주신 복음의 말씀은 구원의 능력을 함축한 말씀이다(참조, 롬1:16). 우리를 더러움에서 건지는 힘, 우리로 악을 버리게 하는 힘, 곧 시험에서 인내하며 참된 삶을 지켜가는 힘이다. 행위로 우리 믿음을 증명하라는 야고보의 요구는 결국(돈처럼)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헛된 것들에 의지하거나(2:1-13; 4:13-17; 5:1-6), 육체의 욕심에 휘둘려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거나(3:13-18; 4:1-12), 그러면서도 구원에 이를 것처럼 착각하지 말고(2:15-26),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는 말씀의 능력을 굳게 믿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지혜를 사모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사실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도 바로 그것 아닌가? 내가 내 삶을 바꿀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은총, 곧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이 지혜를 사모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야고보서는 우리로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을 사모하도록 만들지 않는가?
권인경 교수(숭실대학교 신약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