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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서인(公藝書忍)
公藝書忍 唐
예 주001) 아홉 사더니 여러 님굼 주002) 제 다 졍표 주003) 시니 후에 님굼미 주004) 봉 주005) 나 겨시다가 주006) 그 집븨 주007) 샤 예 블려보셔 주008) 그 아들와 주009) 화 주010) 일 무르신대 주011) 예 죠 주012) 붇들 주013) 주쇼셔 여 답호 죠예 주014) 주015) 일 나마 주016) 서 주017) 진샹 주018) 니라 그 덴 주019) 너교 주020) 아믜 주021) 화동티 아니호 얼운니 주022) 옷밥블 주023) 골오 주024) 아니 주거나 아랫 져믄 사름미 례졀리 주025) 그르츠거나 주026) 커든 주027) 서르 외다 주028) 마다 호로 거슬 주029) 도니 주030) 각각 서르 면 주031) 지븻 이리
연히 주032) 화동리라
Ⓒ 편찬 | 김안국 / 1518년(중종 13)
張公藝 九世同居 北齊 隋 唐 皆旌表其門 高宗 封泰山 幸其宅 召見公藝 問其所以能睦族之道 公藝請紙筆 以對乃書忍字百餘以進 其意以爲宗族所以不協 由尊長 衣食或有不均 卑幼 禮節或有不備 更相責望 遂爲乖爭 苟能相與忍之 則家道雍睦矣
世人分割不同廬 獨有張公九世居 帝問由來能睦道 但將忍字百來書
禮嚴卑幼缺應頻 尊長衣飱或未均 忍不出言相責望 怡怡家道自相親
Ⓒ 편찬 | 김안국 / 1518년(중종 13)
공예서인(公藝書忍 : 공예가 참을 인(忍)자를 쓰다) 당나라
장공예(張公藝)가 구대(九代)를 내려오면서 한집에서 살았더니, 그 후 여러 나라(북제, 수, 당나라 등)의 임금들이 모두 그의 집에 정문(旌門)을 내려 표창하였다. 후에 임금(당나라 제3대 왕인 고종)이 태산(泰山)에 봉선하러 나가 계시다가 공예의 집에 오셔서 공예를 불러 보시고, 그 집안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소이(所以)를 물으시니, 공예가 “종이와 붓을 주소서.” 하고는 대답으로서 종이에 참을 ‘인’(忍)자를 백(百)여 자 써서 바쳤다. 그 뜻은 생각건대, 집안사람이 화목하지 못한 것은 어른이 먹고 입는 것을 고르게 주지 않거나, 아래의 어린 아이들이 예절을 어기거나 하면 서로 옳으니 그르니 하면서 어긋나게 되므로 각각 서로가 참으면 집안의 일이 저절로 화목해질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 역자 | 김문웅 / 2010년 10월 일
〈규장각본〉
댱공예 아홉 사더니 여러 님금 제 다 정표시니 후에 님굼이 봉 나 겨시다가 그 지븨 샤 공예 블러보셔 그 아와 화동 이 무르신대 공예 죵 브들 주쇼셔 여 답호 죠예 잉 일 나마 써 진샹니라 그 데 너교 아믜 화동티 아니호 얼운이 옷밥블 골오 아니 주거나 아랫 져몬 사이 례졀리 그르거나 서르 외다 마다 호로 거슬미 되니 각각 서르 면 지븻 이리 연히 화동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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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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댱굥예 당나라 슈쟝 사이니 조샹브터 구 가지로 [이미지](오륜행실도 4:47ㄱ)사니 그 후 여러 나라흘 디내되 다 그 집을 졍표엿더니 당나라 고종황뎨 태산에 봉션【님군의 공덕을 사겨 명산에 감초 일이라】시고 오시다가 그 집에 님샤 공예 불러 무르시되 무 도리로 능히 이러시 종족을 화목게 다 공예 됴희와 부 쳥여 믈 인 일을 드리니 대개 그 은 종족이 불화미 양 어룬이 의식을 혹 고로디 아니케 고 즈니와 어린 이 녜졀을 부죡히 면 인여 서로 망여 토며 틈이 나니 진[이미지](오륜행실도 4:47ㄴ)실로 능히 서로 마 디내면 집안히 스로 화목다 말이러라
주석
주001)예:예(張公藝, 인명)+ø(zero 주격 조사). 장공예가.주002)님굼:임금. 한문 원문에는 임금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데, 당나라 제3대 왕인 고종(高宗)으로 되어 있다.주003)표:정표(旌表). 착한 행실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 한문 원문에 ‘旌表其門’이라 한 것을 보면, 정문(旌門)을 내려 표창한 것을 알 수 있다. 정문(旌門)은 충신, 효자, 열녀 들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을 말한다.주004)님굼미:님굼[王]+-이(주격 조사). 임금이. ‘님굼미’는 중철 표기이다.주005)봉:한문 원문의 ‘封泰山’을 언해문에는 ‘ 나 겨시다가’로 풀이해 놓았다. 그런데 정조 21년(1797)에 간행된 ≪오륜행실도≫에는 ‘封泰山’을 ‘태산에 봉션시고 오시다가’로 언해하면서, 특히 ‘봉션’에 대하여 ‘님군의 공덕을 사겨 명산에 감초는 일이라’고 협주를 달아 놓고 있다. 이로써 ‘’은 ‘봉션’을 가리키는 말이며, 그 의미는 왕의 공덕을 새겨 명산(名山)에 보존한다는 뜻임을 알 수 있다.주006)겨시다가:겨시-[有]+-다가(종속적 연결 어미). 계시다가.주007):행행(行幸).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동함. 이 문헌에서는 한문 원문의 ‘幸其宅’을 ‘그 집븨 샤’로 언해하고 있는데 비해, ≪오륜행실도≫(1797)에서는 동일한 한문에 대해 ‘그 집에 님샤’로 언해하고 있어 ‘’이 임금의 왕림(枉臨)을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주008)블려 보셔:브르-[召]+-리-(사동 접미사)+-어(연결 어미)+보-[見]+-시-(높임법 선어말 어미)+-어(연결 어미). 불러 보시어. ‘召見’(소견)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서 만나 봄을 뜻하는 말이다.주009)아들와:아[宗族]+-들(복수 접미사)+-와(접속 조사). 집안사람들과. 친척들과. 복수 접미사 ‘-들/’은 중세 국어에서 ㅎ종성 체언이므로 ‘아들콰’로 표기됨이 마땅하나 여기서는 ㅎ이 소실되어 ‘아들와’로 표기되었다.주010)화(和同):사람 사이가 멀어졌다가 다시 뜻이 잘 맞게 됨.주011)무르신대:묻-[問]+-으시-(높임법 선어말 어미)+-ㄴ대(종속적 연결 어미). 물으신대. 물으시니. ‘묻다’는 ㄷ불규칙 동사로서 어간 ‘묻-’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연결되면 어간은 ‘물-’로 교체된다.주012)죠:종이. ‘죠’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의 ‘종이’가 되었다. 죠〉죠희〉죠히〉죠이〉종이.주013)붇들:붇[筆]+-을(목적격 조사). 붓을. ‘붇들’을 ‘붇을’의 중철 표기이다.주014):-[忍]+-(관형사형 어미). 참을.주015):잉(忍)+(字). ‘인’(忍)이라는 글자. “ 잉 : 忍”(신증유합 하:11ㄴ).주016)일 나마:일백(一百) 남짓.주017)서:스-[書]+-어(연결 어미). 〈글씨를〉 써서.주018)진:진상(進上). 진귀한 물품이나 토산물 등을 임금이나 고관에게 바침.주019)덴:[意]+-에(처격 조사)+-ㄴ(보조사). 뜻에는.주020)녀교:너기-[想]+-오-(삽입 모음)+-(설명의 연결 어미). 여기되. 생각하되.주021)아믜:아[宗族]+-의(관형격 조사). 집안사람의. ‘아믜’는 중철 표기이다.주022)얼운니:얼운[尊長]+-이(주격 조사). 어른이. ‘얼운니’는 중철 표기이다.주023)옷밥블:옷[衣]+밥[食]+-을(목적격 조사). 옷과 밥을. ‘밥블’은 중철 표기이다.주024)골오:고루.주025)례졀리:례졀(禮節)+-이(주격 조사). 예절이. ‘례졀리’는 중철 표기이다.주026)그르츠거나:그르츠-[誤, 違]+-거나(선택형 어미). 그르치거나. 어기거나.주027)커든:‘거든’의 축약형.주028)외다:그르다[非].주029)거슬:거슬-[逆]+-이(부사 접미사). 거스르게. 남의 말이나 명령 따위와는 어긋나게.주030)도니:도-[爲]+--(현재 시상 선어말 어미)+-니(종속적 연결 어미). 되니.주031)면:-[忍]+-면(종속적 연결 어미). 참으면.주032)연히:자연히. 저절로. “긔우니 초 기드리면 히 살리니”(구급 간이방 1:66ㄱ)에서 보듯이 15세기에 ‘自然’의 한자음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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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루상분(黔婁嘗糞)
黔婁嘗糞 齊
庾 黔婁ㅣ 孱陵 令이 외야 갯더니 아비 지븨셔 病 어더늘 믄득 미 놀라아 오 모매 미 흐르거늘 즉자히 그위 더디고 도라 온대 집 사미 다 놀라 주001) 너겨 더니 醫員이 닐오 病을 아로려 커든 주002) 며 믈 맛보라 제 아비 즈츼더니 주003) 눈다마다 머거 보니 漸漸 오 주004) 믯믯야 가거늘 더욱 시름야 나죄마다 北辰 머리 조 갑새 죽가 지다 비더니≪辰 벼리라≫ 虛空애셔 닐오 네 아비 목수미 다아 주005) 잇더니 네 하 情誠일 그무메 가 주그리라 니 그무메 가아 죽거늘 너므 슬흐며 侍墓사니라
Ⓒ 편찬 | 세종(조선) 명찬 / 1481년(성종 12)
庾黔婁. 新野人. 爲孱陵令. 到縣未旬. 父易在家遘疾. 黔婁忽心驚. 擧身流汗. 卽日棄官歸家. 家人悉驚其忽至. 時易疾始二日. 醫云. 欲知差劇. 但嘗糞 甛苦. 易泄痢. 黔婁輒取嘗之. 味轉甛滑. 心愈憂苦. 至夕. 每稽顙北辰. 求以身代. 俄聞空中聲曰. 聘君壽命盡. 不復可延. 汝誠禱旣至. 故得至月末. 晦而易亡. 黔婁居喪過禮. 廬於墓側
Ⓒ 편찬 | 세종(조선) 명찬 / 1434년(세종 16) 11월 25일 반포
검루상분 제나라
유 검루가 잔릉 영이 되어 가 있더니, 아비 집에서 병 얻으니, 문득 마음이 놀라 온 몸에 땀이 흐르므로 즉시 관직을 던지고 돌아오니, 집안 사람이 다 놀랍게 여기더니, 의사가 이르되, “병을 알려면 똥의 달며 씀을 맛보라.” 제 아비 설사하니, 눈 데마다 먹어 보니 점점 달고 미끈미끈하여 가므로 더욱 시름하며 저녁마다 북극성에게 머리 조아려 “〈아비〉 값에 죽어 지이다.” 하며 빌더니,≪신은 별이다.≫ 허공에서 이르되, “네 아비 목숨이 다하여 있는데 네가 하도 정성스러우므로 그뭄에 가서 죽을 것이다.” 하니, 그뭄에 가서 죽으니, 너무 슬퍼하며 시묘살이 하였다.
Ⓒ 역자 | 김정수 / 2010년 10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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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001)놀라:놀랍-이. 놀랍게.주002)아로려커든:알-ㅗ-려-ㅎ-거든. 알려면. 알려 하거든.주003)즈츼더니:설사하더니.주004)오:-오. 달고.주005)다아:다-ㅏ. 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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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6일 오전 01:25 - 수정됨
□ 간재 전우가 줄포에 남긴 족적(3):
3. 효자첨추공정려기(문헌23, 이승종) 수권 188
⁋ 孝子僉樞李公旌閭記
扶寧之木上有烏頭赤脚輝暎鄉里者. 故孝子僉知中樞府事古阜李氏峽旌閭也. 公十世祖執義諱伯瞻以詩文嗚於世 光廟改玉後不復仕. 公性淳質動遵家公孝友之教 謹溫清極滋味不遠遊. 父有疾寝劇 公焦勞煎迫髮為之白. 禱天祝廟願减己齡以痊父病 八年而後得廖 既經三歲病復危篤 醫窮技殫禱祝眞誠倍 於前時父不進糜粥亦不食八朔如一日. 既没廬墓過練 而母又亡居廬五年 哀毀柴瘠以 八十二歲卒 僉樞其壽職也. 後因士論蒙綽楔之典. 余過公桑梓之鄉 公後孫時燦謁記於余 余觀誄輓諸作有 云玉淵潛泊芝宇輝光 又云睦婣今世張公二 誠孝吾東黔老雙此. 可以見公之所以爲公 而今其後承蕃衍 亦見其食報之驗矣是為記. 戊申仲秋日 潭陽田愚記
부령의 목상에 있는 오두적각(烏頭赤脚, 검은 머리에 붉은 다리, 즉 정문)이 이 마을(鄉里)을 밝게 비추고 있으니, 효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고부이씨(古阜李氏) 협(峽)의 정려라. 공의 10세조(十世祖)인 집의(執義) 휘 백첨(伯瞻)은 시문(詩文)으로써 당세(當世)를 울렸고, 단종 퇴위 후(光廟改正後)에 다시 벼슬하지 아니하였다. 공의 성품은 순질(淳質, 바탕이 깨끗함)하고 행실은 가정에서 받은 효우(孝友, 효도와 우애)의 가르침을 준수(遵守)하여 온청(溫淸, 부모의 거처를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게 함)을 삼가 살피고, 맛있는 음식으로 받들며, 멀리 나가 놀지 아니하며, 부친의 병(病)이 심하니, 공은 초로전박(焦勞煎迫, 마음 졸여 애태우며 애씀)하여 머리가 하얗게 될 정도였다. 하늘에 빌고 사당(祠堂)에 축원(祝願)하여 자신의 목숨(壽)를 내어 낫기를 바라니, 친환(親患, 부모의 병환)이 8년을 지나 거의 치료되었다. 그러나 다시 3년 후에 병이 위독하여 온갖 의술로도 어찌할 수 없었으니, 모든 방도(方道)를 다하며, 빌고 비는 그의 축원이 참으로 정성스러웠다. 그때 아버지가 죽과 미음을 들지 아니하면, 자신 또한 먹지 아니하기를 8개월 동안 하루와 같이 하였다.
부친이 세상을 등지니 여묘(廬墓)하여 소상(小祥)을 지나, 어머니가 또 돌아가시어 여막(廬幕)에서 5년을 지내니, 실로 애훼(哀毁, 몹시 야윌 만큼 부모의 죽음을 몹시 슬퍼함)하고, 시척(柴瘠, 마른 나뭇가지처럼 몸이 수척해짐)하였다. 공이 82세에 이승을 등지니 첨지중추부사는 그 수직(壽職)이다. 후에 사론(士論, 선비들 사이의 논의)으로 작설지전(綽楔之典)을 받게 되었다.
내가 공이 살던 곳(桑梓之鄉, 고향의 뽕나무밭, 목중리)을 지나다가 공의 후손인 시찬(時燦)을 만나 나에게 정려기(旌閭記)를 청하기에, 그 만사(輓詞, 상여글)와 제문(祭文)과 행장(行狀)을 보았으니, 그 기록에서 말하기를, ‘덕이 있는성품(玉淵, 性品)은 담백하고, 풍모[芝宇, ’남의 의용‘(儀容)에 대한 존칭어. 몸을 가지는 태도, 예의에 맞는 차림새]가 빛이 났다.’ 또 말하기를,
‘화목함은 오늘날의 장공(張九齡, 673 ~ 740, 당나라 현종 때의 재상)이 두번째요,
성효(誠孝, 정성과 효도)는 오동(吾東, 우리나라)의 금노(黔老)와 짝이로다.’
이는 가히 공의 공된 바를 보인 것이며, 이제 그 후손들이 번연하니, 또한 그 불식지보(不食之報)의 증험(證驗)을 보인 것이니 이같이 기록하노라.
19O8년(융희2, 戊申) 음력 8월(仲秋, 가을) 日 담양 전우가 짓다(潭陽 田愚 記)
[편집자 주]
1. 오두적각(烏頭赤脚, 검은 머리에 붉은 다리, 즉 정문)
2. 순질(淳質, 바탕이 깨끗함)
3. 광묘개정[光廟改正, ‘광묘’는 조선 왕조 제7대 임금인 세조(世祖)의 별칭(別稱), 세조의 능호(陵號)를 광릉(光陵)으로 정했던 관계로 광묘를 별칭으로 사용하게 되었음. ‘개정’(改正)은 잘못된 법을 바르게 고치는 일. ‘광묘개정’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퇴위시키고 세조로 등극한 반정을 뜻한다.
4. 순질(淳質, 바탕이 깨끗함)
5. 효우[孝友, 부모(父母)에 대(對)한 효도(孝道)와 형제(兄弟)에 대(對)한 우애(友愛)]
6. 순질(淳質, 바탕이 깨끗함)
7. 온청(溫淸, 부모의 거처를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게 함)
8. 초로전박(焦勞煎迫, 노심초사 마음 졸여 애태우며 애씀)
9. 친환(親患, 부모의 병환)
10. 여묘[廬墓, 상제(喪制)가 무덤 근처(近處)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
11. 소상(小祥, 사람이 죽은 지 한 돌 만에 지내는 제사)
12. 여막[廬幕, 무덤 가에 지은 초가(草家)로 상제(喪制)가 상이 끝날 때까지 거처(居處)하는 곳]
13. 애훼(哀毁, 몹시 야윌 만큼 부모의 죽음을 몹시 슬퍼함)
14. 시척(柴瘠, 마른 나뭇가지처럼 몸이 수척해짐)
15. 수직[壽職, 해마다 정월(正月)에 80세 이상(以上)의 관원(官員) 및 90세 이상(以上)의 백성(百姓)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
16. 사론(士論, 선비들 사이의 논의)
17. 작설지전[綽楔之典, 충신(忠臣)ㆍ열녀(烈女)ㆍ효자(孝子)들을 표창(表彰)하기 위(爲)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주던 나라의 특전]
18. 상재지향(桑梓之鄉, 고향의 뽕나무 가래나무)
19. 만사(輓詞, 죽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글, 상여글)
20. 제문[祭文, 죽은 사람을 조상(弔喪)하는 글. 흔히 제물(祭物)을 올리고 축문(祝文)처럼 읽음. 애뢰]
21. 행장[行狀, 일생(一生)의 행적(行蹟)을 적은 기록(記錄)]
22. 풍연(玉淵, 아름다운 덕이 모인 연못, 덕이 있는 품성)
23. 지우[芝宇, ‘남의 의용’(儀容)에 대한 존칭어. 몸을 가지는 태도, 예의에 맞는 차림새]
24. 장공[張公, 장구령(張九齡, 673 ~ 740): 당나라 현종 때의 재상. 광둥성[廣東省] 취장[曲江] 출생. 진사에 등과하였고 문재(文才)로 문인 재상 장열(張說)의 추천을 받아 중서사인(中書舍人), 중서시랑(中書侍郞)을 거쳐 733년 재상이 되었다. 안녹산(安祿山)이 위험인물임을 간파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반대파인 이임보(李林甫)에게 미움을 받고 좌천되었다(736). ‘취장장선생문집’(曲江張先生文集) 20권이 현존한다. 광둥성 취장에서 9대(代)가 함께 화목하게 살았다 함.]
25. 성효(誠孝, 정성과 효도)
26. 오동(吾東, ‘옛날에, 동쪽에 있다.’는 뜻으로, 우리나라를 일컫던 말)
27. 금노(黔老)
28. 번연(蕃衍, 넓게 퍼지다, 번창하다)
29. 불식지보[不食之報, 조상(祖上)의 음덕(陰德)으로 자손(子孫)이 잘 되는 보응]
30. 증험[證驗, 사실(事實)을 경험(經驗)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