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김씨 정려문(善山 金氏 旌閭門, 김승경의 딸) (시인 박찬선) | 善山金氏 文化遺産
전체공개 2008.02.29. 20:45
풍기홍삼(skki****)
1:1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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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큰 눈이 내렸다. 더럽고 감출 곳이 많은 세상 깨끗하게 하려는 생각에서 일까. 자동차 좀 덜 타고 걸어 다녀서 건강 다지고 외화절약 하라는 배려에서일까. 하늘도 우리의 실정을 헤아리고 있나 보다. 눈이 내린지 사흘이 지났지만 양지쪽만 조금 녹았을 뿐 길은 얼음판이 되었고 음지에는 그대로 발이 푹푹 빠졌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선산김씨 정려문은 늘 생활하고 있는 학교 뒤(상주시 신봉1리 267) 남산자락에 있었다. 사시사철 맑은 물이 넘치는 우물 위쪽 봉강서원(鳳崗書阮 대제학 강희중, 대사간 강형 봉향)과 나란히 있었다.
정경부인 선산김씨는 진산군수 김승경의 딸이다. 천성이 엄숙한 여인으로 대사간(사간원의 으뜸 벼슬 정 3품) 강형(姜詷)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기르고 시부모님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또한 남편을 섬기는데도 예의를 다하여 의복과 음식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손수 청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생활에서 윤리는 부도(婦道)를 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여인의 운명이란 지아비의 삶과 직결되게 마련이다. 특히 삼종지의(三從之儀)와 여필종부(女必從夫)가 강조되었던 유교사회에 있어서는 이를 것도 없다. 여기서 남편 강형을 살펴보자.
강형의 자는 형지(詷之)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 서기 1451년에 태어났으며 서기 1472년에 진사.1490년에 장예원의 사평으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언, 사헌부 지평, 장령, 그 후 대사간에 이르렀다. 1482년 음 8월에 사사(賜死)한 연산군의 생모 윤씨(성종비)를 다시 추숭하는 동시에 효모묘(孝母廟) 신축 등 소위 궁중 법도에 어긋나는 연산군의 처사에 공이 홀로 입주입묘(立主立廟)를 비판하여 왕에게 극간하다가 1504년 음 10월 4일에 능지처참되었고 같은 날 아들 영숙, 무숙, 여숙도 화를 입었다. 그 부인 선산김씨도 화변을 당하자 연산군의 처사에 억울함을 못 이겨 한달이 넘도록 식음을 전패하고 주야로 통곡하다 몸져누우니 동창이 생겨서 마침내 피를 흘리며 별세하였다.1504년 음 12월 8일 이었다.
그 뒤 중종반정 후 갑자사화 때 억울한 신하를 풀게 될 때 공은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대제학을 추증하고 자손들은 어명으로 등용토록 하였다. 아울러 선산김씨도 정경부인을 증직하고 일생을 지아비와 같이 한다는 부도를 지킨 절개가 뛰어난 열녀로 정문(홍살문)을 내려 세우게 하였다. 이 정문은 신봉(봉대) 진흥군 사당 앞에 세워졌다.
여기에서 참고로 강형의 16세손 강옥이 지은 대사간공가장(大司諫公家狀)에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복위를 제창할 때에 공이 홀로 임금에게 아뢴 일부를 보자.
“하늘과 땅은 만물의 으뜸이라 하옵고 부모를 인륜의 주라 하옴은 고금 천지에 오직 사람만이 강기(鋼紀)를 엄수하였사옵기로 군주의 높은 자리는 태산과 같이 우뚝하였고 해와 별과 같이 소명하시어 천백번 몇 번이고 난을 겪었사옵니다만 끝내 오랑캐나 금수에 이르지 아니하온 것은 그 군부(君父)가 계시었던 까닭이옵니다. 군부의 막중하기가 이와 같사옵거늘 선왕 성종과 전하께서는 의로서는 임금과 신하가 되옵니다만 가깝기로는 곧 부자간이옵니다. 대소사를 막론하시고 시정 전반은 모두 그 명하심에 따르심이 전하로 계시는 위치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옵니다. 이제 전하께서 선왕의 유교(遺敎)를 어기시오면 이것은 곧 신하로서 군주에게 거역하는 것이오니 어찌 신하된 사람이 군주에게 배반함이 있다고 해도 책하실 것이오며 어찌 남의 아들이 아비에게 배반하옴이 있다고 한들 책하오리까. 노사신이 말하기를 선왕의 유교에 어기심은 그 잘못이 소소하다고 하였사오나 오직 이러한 마음을 가지신다면 그 악역부도하옵기가 어디에 이르지 아니하오리까. (중략) 군부에게 배역하옴은 순후한 풍속을 퇴패시키고 저해하는 것이옵기로 마땅히 엄중한 법을 적용하시옴이 간신배와 아첨하는 무리의 문을 막는 까닭이 되겠사오며 또 선왕의 유교를 준수하옴이 사망지효(事亡之孝:부모가 생존하셨을 때와 같이 하는 효도)를 다하시는 것이옵기로 다행스럽기가 위에 더하옴이 없사옵겠다고 아뢰옵니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어찌 너만 홀로 아뢰는고’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동관들이 따르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는 까닭이옵니다’라고 하시었다. 이어서 아뢰기를
“선왕께서 가르침으로 전해 이르기를 폐비된 어미라고 하니 역시 천친(天親)인지라 감히 마음으로는 잊지 못하느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마음을 가지시오면 즉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아니한다는 일단이 되겠사옴으로 이 마음을 좀더 너그러이 넓혀 가지시오면 가히 대효(大孝)가 되셨다고 할 수 있사옵니다.”임금이 대노하여 다른 사간과 즉시 경질하도록 명하였다. 갑자년(1504) 연산 10년에 이르러 공이 대사간으로 되심에 임금이 말하기를 강모는 말이 많고 불공하며 유공여 상포영감(遺公輿 尙抱永感:부모가 생전에 쓰시던 물건 즉 활이나 면복용(冕服用:면류관과 예복용) 신발을 같이 가지고 못가시면 자손 된 자가 평생 한이 된다는 뜻)이라는 등의 언동은 용서할 수 없는 죄라하여 드디어 극형에 처했다.
강형의 강직한 기개는 우주를 떠받치는 기둥과 같고 일월과 더불어 광명을 다투었으니 족히 충신열사로 하여금 천 년 후에라도 감격하고 눈물지을 것이거늘 어찌 이러한 일이 반드시 허다하다고 하겠는가.
이로보아 대사간공의 대쪽같은 성품은 선산김씨에게도 나타났으니 부부의 도리가 하나같이 올 곧게 승화되었음을 알겠다.
사간원대사간강형처열녀선산김씨지문(司諫院大司諫姜泂妻善山金氏之門)은 눈 속에서 더욱 고고해 보였다. 맛배지붕 위에 얹힌 흰 눈이 열부의 정신을 일러주는 양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댁에서 수십 보에 불과하지만 독감으로 누우셨다가 선뜻 일어나셔서 직접 안내해 주신 16세손 강경석(전 상주고 서무과장)님의 조상에 대한 긍지와 따뜻한 마음을 적어둔다(참고: 진주강씨종감, 경상북도 효열행지, 상산지)
[출처] 선산 김씨 정려문(善山 金氏 旌閭門, 김승경의 딸) (시인 박찬선) (♡ 선산김씨, 善山金氏 , 一善金氏) |작성자 풍기홍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