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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서(李敏敍)1633년(인조 11)~1688년(숙종 14)
西河先生集卷之十一 / 敎書 / 敎贈領議政文成公李珥從祀文廟書
숙종 8 1682 임술 康熙 21 - 文廟에 從祀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 文廟에서 輟享되다.
숙종 20 1694 갑술 康熙 33 - 다시 文廟에 享祀되다.
王若曰眞儒爲一世所宗。固宜表章於國故。公論待百年乃定。詎緩從享於廟廂。僉謀旣同。縟儀斯擧。惟卿生稟星嶽。道貫天人。霽月光風。依然周子之灑落。金聲玉色。允矣伯淳之混成。資已極於高明。氣又養以剛大。汎濫早歲。人誰間於程張。拔出迷塗。勇實過於賁育。精思暗合於妙道。卓識洞見於大原。約禮博文。兩致顏淵之竭力。明體適用。一遵考亭之成規。不待師承。自臻於堂奧。有非俗士敢窺於藩籬。門路之正。淵源之深。斯其至矣。豪傑之才。聖賢之學。可謂兼之。富宣廟之寤寐英髦。宜志士之展布器業。謀謨啓沃之盛。前古罕聞。契合知遇之隆。擧世莫及。蓋欲格君爲致化之本。必以安民爲固國之圖。至若破朋黨而集人才。與夫革弊政而講治法。陳奏激烈。率多流出於血誠。潤色鋪張。擧皆發揮於經術。言行則至理可復。志孚而委任方專。驚讒人之中傷。痛皇天之速奪。養兵十萬。誰識文靖之聖人。假我數年。庶興孔明之禮樂。雖道之將廢也命。亦沒而不亡者存。門徒之在四方。可知爲先生弟子。遺法之施後世。何莫非大用宏綱。奚但卓越於近儒。實是繼承於往哲。言猶在於簡冊。光耀無窮。澤未斬於搢紳。誦法不懈。士類咸有所歸仰。國脈潛賴其延長。是其功化之洋洋。不啻事業之卓卓。易名贈爵。褒隆旣盡於累朝。慕義懷賢。享祀相望於下邑。惟此泮宮腏食之禮重。未循章甫崇報之請勤。經四紀而齊聲。益見群情之久鬱。有二臣而同志。咸謂並配之是宜。天未終喪於斯文。事若有待於今日。玆以卿從祀于文廟之廡。擧先王所未遑者。非盛德孰能與焉。嗟光儀之莫追。九原難作。凜英爽之如在。百歲奚遙。于以慰答於衆心。于以昭明於聖化。夫子在上。顏曾在下。尙周施而罔違。國人所式。多士所依。庶顧佑之靡忒。故茲云云。
서하집 제11권 / 교서(敎書)
증 영의정 문성공 이이를 문묘에 종사하고 반포한 교서〔敎贈領議政文成公李珥從祀文廟書〕
왕은 말하노라. 참된 유자(儒者)는 한 시대의 존중을 받으니 진실로 나라의 관례에 따라 표장(表章)해야 하고, 공론이 백 년을 기다린 뒤에 마침내 정해졌으니 어찌 문묘에 종향하는 것을 늦추겠는가. 모두의 생각이 이미 같으므로 성대한 의식을 이에 거행하였다.
경은 성신(星辰)과 산악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고 도가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꿰뚫었다. 광풍제월(光風霽月) 같음은 주자(周子)의 쇄락함과 다름없고, 금성옥색(金聲玉色)은 진실로 백순(伯淳)의 혼성(混成)함이로다. 자질이 이미 지극히 고명한데 기운도 강대(剛大)하게 길러, 이른 나이에 넘쳐흘렀으니 누가 정자(程子)와 장자(張子)에 차이를 둘 것인가. 혼미한 세상에서 빼어났으니 용맹이 실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보다 뛰어나다.
정밀한 생각은 오묘한 도리와 은연중에 맞았고, 탁월한 식견은 큰 근원을 환하게 보았다. 예로 요약하고 문(文)을 폭넓게 익혀 안연(顔淵)이 힘을 다한 경지에 모두 이르렀고, 본체에 밝고 실용에 적절하여 한결같이 고정(考亭 주희(朱熹))의 완성된 법규를 따랐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스스로 깊은 경지에 이르렀으니, 세속의 선비가 감히 그 경지를 엿볼 수 없었다. 학문한 길의 바름과 연원의 깊음이 이에 지극하고, 호걸의 재주와 성현의 학문을 겸했다고 할 만하다.
선묘(宣廟 선조(宣祖))께서 자나 깨나 뛰어난 인재를 구할 때를 당하여 뜻있는 선비가 재주와 학식을 펼치기에 마땅하였으니, 계책을 꾀하고 충심으로 보필한 성대함이 전고에 드물었고, 계합(契合 의기투합)하고 알아준 융숭함은 따를 사람이 없었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을 교화를 이루는 근본으로 삼았고,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며, 붕당을 타파하고 인재를 모으며,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다스리는 법을 강구함에 이르기까지, 격렬하게 상주함은 대개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왔고, 윤색하고 포장함은 모두 경술(經術)에서 발휘되었다. 말이 시행되면 지극한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고, 뜻이 진실하여 위임함이 바야흐로 전일하였으니, 참소하는 사람의 중상모략에 경악하고 하늘이 빨리 데려간 것을 애통해하였다.
십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려 하였으니, 문정(文靖)이 성인임을 누가 알겠는가. 몇 년을 더 살았다면 제갈공명(諸葛孔明)처럼 예악을 부흥시켰으리라. 비록 도가 폐해지려는 것도 명이나 세상을 떠나도 없어지지 않는 것 또한 있는 것이다. 문도가 사방에 있으니 선생의 제자인 줄 알겠고, 유법이 후대에 베풀어졌으니 무엇인들 대용(大用)이며 큰 법도가 아니겠는가. 어찌 근래의 유자보다 탁월할 뿐이겠는가. 진실로 옛날의 성현을 계승하였도다.
말은 여전히 서책에 남아 무궁하게 빛나고, 유택(遺澤)은 신료들에게서 끊어지지 않아 가르침을 욈에 게을리하지 않는다. 사류들이 모두 귀의하고 우러르며 국가의 명맥이 은연중에 힘입어 연장되었으니, 그 공업과 교화의 성대함이 단지 사업이 우뚝한 정도일 뿐이 아니다. 시호를 내리고 증작(贈爵)하였으니 융숭하게 포양하는 것이 이미 누조(累朝)에서 다하였고, 의리를 흠모하고 현자를 생각하여 제향이 하읍(下邑)에서 이어지고 있다.
생각건대 문묘에 배향하는 이 예는 중대하기에, 융숭하게 보답하자는 사류(士類)의 간절한 청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4기(紀)가 지났는데도 한목소리를 내니, 사람들의 마음이 오랫동안 답답해하였음을 더욱 볼 수 있고, 두 신하가 뜻을 함께하였으니 모두들 아울러 배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하늘이 아직 사문(斯文)을 잃게 하지 않으시어 일이 이루어짐이 마치 오늘을 기다린 듯하였다. 이에 경을 문묘의 서무(西廡)에 종사하노라.
선왕께서 미처 하지 못하신 일을 거행하니, 성대한 덕이 아니면 누가 이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아, 빛나는 위의를 따를 수 없으니 저승에서 돌아오기 어렵고, 늠연히 영령이 있는 듯하니 백 대인들 어찌 멀다 하겠는가. 이에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부응하며, 이에 성인의 교화를 드러내어 밝히노라. 부자(夫子 공자)가 위에 있고 안연(顔淵)과 증자(曾子)가 아래에 있으니 부디 두루 베풀어서 어김이 없기를 바라고, 나라 사람들이 본받고 많은 사류들이 의지하니 돌아보고 보우함이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이에…….
[주-D001] 증 영의정 …… 교서 : 이이(李珥, 1536~1584)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이다. 이이에 대한 문묘 종사는 1623년(인조 원년)에 경연에서 특진관(特進官) 유순익(柳舜翼)에 의해 처음 건의되었다. 이경여(李敬輿)ㆍ이민구(李敏求) 등도 적극 권했지만 인조가 경솔히 결정할 수 없다고 하며 거절하였다. 1635년에 관학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 270명이 상소하여 다시 이이와 성혼(成渾)의 문묘 종사를 건의하였는데, 생원 채진후(蔡振後)가 반대 상소를 올려 대립하였다. 이에 인조는 이이가 입산수도(入山修道)한 일과 성혼의 기축옥사(己丑獄事) 및 임진왜란 때의 잘못을 들어 채진후의 의견을 따랐다. 그 뒤에도 수차례 건의하였지만 인조는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국역 인조실록 1년 3월 27일, 13년 5월 11일》 효종조(孝宗朝)에 들어서 1649년(효종 즉위년)에 태학생 홍위(洪葳) 등 수백 명이 상소하여 건의하였지만 효종 역시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1650년에 이에 맞서 경상도 진사 유직(柳稷) 등 900여 명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다시 이를 반박하는 등 서인과 남인 간의 공방전 속에 효종 대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역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23일, 1년 2월 22일ㆍ5월 1일》 현종조(顯宗朝)에 와서도 태학생 윤항(尹抗)을 시작으로 팔도의 유생들과 유계(俞棨) 등이 끊임없이 건의하였지만 남인의 반대와 현종의 신중론으로 인해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국역 현종실록 즉위년 12월 1일, 4년 4월 23일ㆍ5월 20일》 숙종조에 와서 경신환국 이후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문묘 종사가 건의되었다. 1680년(숙종6) 황해도 생원 윤하주(尹夏柱)를 시작으로, 관학의 팔도 유생 500여 명이 상소하여 청하자, 숙종이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결국 종사를 허락하였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는 1682년 5월에 시행되었으니, 이 교서는 그때 지은 것으로 보이나,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모두 보이지 않는다. 《국역 숙종실록 6년 8월 26일, 7년 9월 18일ㆍ19일, 8년 5월 20일》[주-D002] 도가 …… 꿰뚫었다 : 《사계유고(沙溪遺稿)》 권7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율곡 이 선생 가장(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栗谷李先生家狀)〉에 “천인(天人)ㆍ성명(性命)의 은미한 이치와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道)를 끝까지 연구하여 찾아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하였고, 또 “심성(心性)ㆍ이기(理氣)의 근원에 대해 끝까지 연구하여 투철하고 시원스러웠다.” 하였다.[주-D003] 광풍제월(光風霽月) …… 다름없고 : 광풍제월은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로, 인품이 고결하고 마음이 탁 트인 사람을 비유한다. 주자(周子)는 송대(宋代)의 학자 주돈이(周敦頤)로, 자는 무숙(茂叔)이다. 《산곡집(山谷集)》 권1 〈염계시(濂溪詩)〉의 서(序)에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를 평하면서 “용릉(舂陵)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상하고 가슴속이 쇄락(灑落)하여 마치 비 온 뒤의 맑은 바람과 밝은 달 같다.[人品甚髙, 胷中灑落, 如光風霽月.]” 하였다.[주-D004] 금성옥색(金聲玉色)은 …… 혼성(混成)함이로다 : 금성옥색은 사람의 곧은 인품과 지조를 뜻하는 말이다. 백순(伯淳)은 송대의 학자 정호(程顥)의 자이다. 주희가 정호의 화상(畫像)에 지은 찬(讚)에 “봄기운처럼 따뜻하고 산처럼 우뚝 섰으며, 옥빛처럼 아름답고 종소리처럼 쟁쟁하니, 원기가 모여 혼연히 천연으로 이루었네.[揚休山立, 玉色金聲, 元氣之會, 渾然天成]” 하였다. 《晦庵集 卷85 六先生畫像讚 明道先生》[주-D005] 기운도 강대(剛大)하게 길러 :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길렀음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를 설명하면서 “그 기운의 속성이 지극히 강하고 지극히 크니, 곧음으로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찬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 하였다.[주-D006] 이른 …… 뛰어나다 : 이이가 문무(文武)를 두루 갖추었음을 말한다. 정자는 명도 선생(明道先生) 정호(程顥)와 이천 선생(伊川先生) 정이(程頤)이고, 장자(張子)는 횡거 선생(橫渠先生) 장재(張載)이니, 모두 송대의 학자이다. 맹분과 하육은 모두 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용맹한 장수이다. 《한서(漢書)》 권57 하 〈사마상여열전 하(司馬相如列傳下)〉에 “힘에는 오확(烏獲)을 일컫고, 날래기는 경기(慶忌)를 말하고, 용맹은 맹분과 하육을 기대합니다.” 하였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注)에 “맹분은 옛날의 용감한 전사이고, 하육 또한 용맹한 전사이다.” 하였다.[주-D007] 예로 …… 이르렀고 : 《논어》 〈자한(子罕)〉에 “부자께서는 차근차근 사람을 잘 가르치셔서 문으로 나를 넓혀 주시고, 예로 나를 요약해 주셨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어 나의 재주를 다하니, 마치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이 있는 듯하여 비록 좇고자 하나 말미암을 것이 없도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하였다. 이는 안연의 학문의 경지를 표현한 말로, 이이의 경지가 이 정도에 올랐음을 말한 것이다.[주-D008] 본체에 …… 따랐다 :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고 시무(時務)에 통달한 것을 말한다. 《국역 월사집》 제53권 〈율곡 선생 시장(栗谷先生諡狀)〉에 “그 공부의 차제(次第)를 보면 오로지 염락(濂洛)의 종파(宗派)에 바탕을 두었는데 주자(朱子)에게서 얻은 것이 특히 많았다.……선생은 이치에 밝고 의리에 정밀하며 함양한 공부가 깊었다. 이것이 내면에 충실하여 덕행(德行)이 되고 외면에 발현하여 사업이 된 것으로 모두 본체에 밝고 실용에 알맞은 학문[明體適用之學]이었으니, 실로 침잠하여 자기의 학문만 하고 세무(世務)를 익히지 않는 학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국역 혼정편록9》에도 “정주(程朱)의 참된 학통을 깊이 깨달은 자입니다.……《성학집요(聖學輯要)》는 제왕의 학문의 요점을 모두 말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못지않고, 《동호문답(東湖問答)》은 본체에 밝고 실용에 알맞은 실제를 볼 수 있습니다.” 하였다.[주-D009] 스승의 …… 이르렀으니 : 《국역 월사집》 제49권 〈우찬성 증 영의정 시 문성공 율곡 이 선생 묘표(右贊成贈領議政諡文成公栗谷李先生墓表)〉에 “선생의 학문은 스스로 염락(濂洛)의 종파를 얻어 단계를 거치지 않고 먼저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 입언(立言)과 저술이 늘 보통 사람의 의표(意表)를 벗어난 것이어서 전인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발명한 것이 많았다.” 하였다.[주-D010] 충심으로 보필한 : 원문의 ‘계옥(啟沃)’은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그대의 마음을 열어 나의 마음에 대도록 하라.[啓乃心, 沃朕心.]” 한 데서 나온 말로, 신하가 숨김없이 마음을 열어 임금을 계도함을 말한 것이다.[주-D011] 임금의 …… 삼았고 : 유성룡(柳成龍)이 이이에게 근본적인 장책(長策)을 묻자 이이가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아래로는 조정을 맑게 하는 것이 근본적인 장책이오.[上格君心, 下淸朝廷, 是根本長策.]” 하였다. 《栗谷全書 卷30 經筵日記 萬曆九年辛巳○今上十四年, 韓國文集叢刊 45輯》[주-D012] 백성을 …… 삼았으며 : 사간원 정언을 지낼 때 시사(時事)를 진언한 상소에서 폐단을 고칠 근원을 생각하며 말하기를 “첫째는 마음을 바르게 하여 다스림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요, 둘째는 현명한 이를 등용하여 조정을 맑게 하는 것이요, 셋째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栗谷全書 卷3 諫院陳時事疏, 韓國文集叢刊 44輯》[주-D013] 붕당을 …… 모으며 : 붕당을 깨고 인재를 모으는 방법을 아뢰면서 “지금 전하께서 진실로 현자를 얻은 뒤 이미 그 작위를 높이고 또 그의 말을 채용하여 그의 학문을 펼치게 하고 사방에서 준걸을 초빙하여 여러 지위에 포열하신다면, 한 군자가 여러 군자를 이끌어 와서 붕당이라는 명칭이 참소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栗谷全書 卷4 論朋黨疏, 韓國文集叢刊 44輯》[주-D014] 폐정(弊政)을 …… 강구함 : 시사를 아뢰는 상소에서 “천하의 일은 근본과 말엽이 있으니, 먼저 그 근본을 다스리는 사람은 오활한 듯해도 이룸이 있고, 말엽만을 일삼는 사람은 절실한 듯하나 도리어 해가 됩니다. 오늘날의 일로 말한다면 조정을 화합하고 폐정을 개혁하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하고, 폐정의 개혁안으로 공안(貢案)을 고치고, 군적(軍籍)을 개혁하고, 주현을 병합하여 줄이고, 감사를 오랫동안 맡게 하는 것 등을 제사하였다. 《栗谷全書 卷7 陳時事疏, 韓國文集叢刊 44輯》[주-D015] 참소하는 …… 경악하고 : 이이가 병조 판서로 있을 때 이탕개(尼蕩介)가 함경도 지역을 공격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이이가 병조 판서로서 출전 명령을 내린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양사에서 이이가 병권을 마음대로 주무른다고 공격하였다. 《국역 선조실록 16년 6월 17일, 19일》[주-D016] 하늘이 …… 애통해하였다 : 이이가 49세의 나이로 일찍 별세하였음을 말한 것이다.[주-D017] 십만 …… 알겠는가 : 이 문정(李文靖)은 송나라 때의 재상 이항(李沆)이다. 송 진종(宋眞宗) 때 이항이 재상이 되고 왕단(王旦)이 참정(參政)이 되었는데, 사방에서 날마다 수한(水旱)과 도적의 피해를 보고해 왔다. 왕단이 “작은 일로 황제를 번거롭게 할 것 없다.” 하였는데, 이항은 임금이 아직 젊으니 사방의 어려움을 알게 하지 않으면 사치에 빠져 토목(土木)ㆍ갑병(甲兵)ㆍ도사(禱祠)의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항이 죽은 뒤 과연 그 말대로 황제가 태산(泰山)에 봉(封)하고 분음(汾陰)에 제사하며 궁실(宮室)을 화려하게 짓는 일을 벌이자, 왕단이 이항의 선견지명에 탄복하며 “이 문정은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하였다. 《宋史 卷282 李沆列傳》 이이가 연석에서 십만 명의 병사를 미리 길러야 한다고 아뢰었는데, 유성룡(柳成龍)이 저지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유성룡이 조당(朝堂)에서 재신(宰臣)들에게 말하기를 “당시에는 나도 괜한 소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그 말을 반대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이 문정은 참으로 성인이다. 만약 그 말을 따랐다면 국사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한 일이 있다. 《국역 월사집 제53권 율곡 선생 시장》[주-D018] 몇 년을 …… 부흥시켰으리라 : 남송(南宋) 진량(陳亮)의 〈제갈공명론(諸葛孔明論)〉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죽지 않았다면 예악을 부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孔明無死, 禮樂可興.]” 하였다. 《文章辨體彙選 卷400 諸葛孔明論》 여기에서는 이이가 49세의 나이로 별세하지 않았다면 예악을 부흥시켰을 것임을 안타까워한 것이다.[주-D019] 도가 …… 명이나 : 이이가 경륜을 펴지 못하고 일찍 별세한 것이 하늘의 명임을 말한 것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백료(公伯寮)가 계손(季孫)에게 자로(子路)를 참소하는 것을 보고 자복경백(子服景伯)이 분노하자, 공자가 풀어 주며 “도가 장차 행해지려는 것도 명이며 도가 장차 폐해지려는 것도 명이다.[道之將行也與, 命也; 道之將廢也與, 命也.]” 하였다.[주-D020] 시호를 …… 다하였고 : 이정귀가 지은 묘표(墓表)에 “우리 성상이 즉위하신 당초에 연신(筵臣)들이 선생의 행장 및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진상하니, 성상이 읽어 보고 감탄하여 선생을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태상시(太常寺)에 명하여 시호를 내리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문성공(文成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하였으니, 1623년(인조 원년)에 시호를 내리고 추증하는 일이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역 월사집 제49권 우찬성 증 영의정 시 문성공 율곡 이 선생 묘표(右贊成贈領議政諡文成公栗谷李先生墓表)》[주-D021] 제향이 …… 있다 : 각처의 서원에서 이이를 배향하고 있음을 말한다. 《국역 월사집》 제49권 〈우찬성 증 영의정 시 문성공 율곡 이 선생 묘표〉에 “유생들이 석담(石潭)의 소현서원(紹賢書院)에 선생을 배향하였고, 또 선생의 묘소 아래에 자운서원(紫雲書院)을 세워 학문을 닦고 선생을 사모하는 곳으로 삼았다.” 하였고, 이밖에도 신암서원(莘巖書院)과 송담서원(松潭書院) 등이 있다. 《국역 국조보감 제38권 효종조2 10년》[주-D022] 4기(紀)가 …… 내니 : 12년이 1기이니 4기는 48년이다. 1635년에 관학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 270명이 상소하여 문묘 종사를 건의한 뒤로 지금까지 48년이 지나도록 한결같이 문묘 종사를 건의함을 말한다.[주-D023] 부자(夫子)가 …… 있으니 : 문묘의 정위(正位)에 문선왕(文宣王) 공자가 있고, 동서의 배위(配位)에 안자(顔子)ㆍ자사(子思), 증자(曾子)ㆍ맹자(孟子)가 각각 자리하고 있다. 《文廟享祀錄 文廟享祀圖》[주-D024] 그러므로 이에 …… : 원문의 ‘운운(云云)’에 해당하는 내용은 《율곡전서(栗谷全書)》 권37 〈부록 5 교서〉에 보이니,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응당 잘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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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河先生集卷之十一 / 敎書 / 宋朝四賢本朝兩賢。從祀文廟後頒敎書。
王若曰王化之本。無大於右文。聖廟之中。莫重於侑食。旣陞黜之得正。宜敷告之用申。言念秩禮於瞽宗。罔非奬明於儒術。蓋自孔門速肖之群弟。以及後代私淑之諸賢。大焉道統之所存。皆已尙德。小而講師之相守。亦不廢功。然或去取之舛差。未免前後之指議。貞觀所進則半得罪於聖敎。靖康以降則多見遺於眞儒。如楊羅接河洛之傳承。與李黃明考亭之受授。九人之濫祀宜斥。在中朝而已行。四子之宗派可躋。應古法而不惑。稽俗傳之爽實。必也正名。改舊列之乖倫。是以論世。至我列祖之累洽。乃有偉人之並興。文成之造詣高明。生稟光嶽。文簡之踐履敦篤。學本家庭。同遡洙泗之淵源。蔚爲海東之山斗。理氣性情之辨。已極精微。規模事業之隆。益致廣大。宏言崇論。斷斷乎其致主之誠。卓識全才。仡仡乎其任道之勇。嗟負抱之未究。尙風烈之有徵。爵諡雖崇。何足爲盛德之報。是非旣定。益可見沒世之思。繼五賢而追享。固宜歷三朝而衆籲彌亟。加隆先哲。庸補祀典之闕遺。表章兩臣。尤切士類之觀感。主張斯道之責。寧不在予。鼓舞一邦之人。亦將由是。方當大正於文廡。允合齊擧於縟儀。
玆於本年五月二十日。將文廟從享。壽長侯公伯寮,蘭陵伯荀況,岐陽伯賈逵,扶風伯馬融,司空王肅,司徒杜預,任城伯何休,偃師伯王弼,臨川伯吳澄黜享。文登侯申棖,淄川侯申黨。以疊享去黨。建寧伯胡安國,華陽伯張栻,蒲城伯眞德秀,崇安伯蔡沈。以失次改定位置。以宋朝將樂伯楊時,文質公羅從彥,文靖公李侗,文肅公黃幹,本國文成公李珥,文簡公成渾。新從享於東西廡。於戲。道不異於古今。人豈間於遠近。事光前代。克示趨向之途。風動四方。庶致作新之效。故茲云云。
서하집 제11권 / 교서(敎書)
송조의 네 현인과 본조의 두 현인을 문묘에 종사한 뒤에 반포한 교서〔宋朝四賢本朝兩賢從祀文廟後頒敎書〕
왕은 말하노라. 왕의 교화의 근본은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것보다 큰일이 없고, 성묘(聖廟 문묘)의 안에는 유식(侑食)보다 중요한 예가 없다. 이미 문묘에 종사하거나 출향하는 것이 바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반포해서 알려야 한다. 예에 맞게 고종(瞽宗)에 차례대로 배향한 것을 생각해 보니 모두 유학을 장려하고 밝힌 것이었다.
스승을 잘 계승한 공문(孔門)의 제자들부터 사숙(私淑)한 후대의 여러 현인들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도통(道統)이 있는 분들에 대해서 모두 이미 문묘에 종향하였고, 작게는 서로 지켜 온 강사(講師)들에 대해서도 그 공을 폐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거취(去取 종사와 출향)가 잘못되어 전후로 비난을 면치 못하기도 하였다.
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 연간에 올린 사람 중에는 절반이 성교(聖敎)에 죄를 얻었고, 정강(靖康 북송 흠종(欽宗)의 연호) 연간 이후에는 참된 유자(儒者) 중에 누락된 사람이 많았다. 예컨대 양시(楊時)와 나종언(羅從彦)은 하락(河洛)의 전승을 접하였고, 이통(李侗)과 황간(黃榦)은 고정(考亭)이 전수받고 전수한 일을 밝혔다. 과분하게 배향한 아홉 사람은 마땅히 출향해야 하니 중국에서 이미 시행하였고, 네 사람의 종파(宗派)는 배향해야 하니 옛 법에 대조하여도 의심할 것이 없다. 세속에서 전하는 것이 사실과 어긋남을 알았으니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 하고, 옛날의 배열이 윤리에 어긋난 것을 고쳐야 하니 이 때문에 그 사람의 시대를 논하는 것이다.
우리 열성조가 누누이 태평하여 마침내 훌륭한 인물이 아울러 나왔다. 조예가 고명한 문성공(文成公 이이)은 태어나면서 광악(光嶽)의 정기를 받았고, 실천이 독실한 문간공(文簡公 성혼)은 학문이 가학에 뿌리를 두었으니, 함께 수사(洙泗)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성대하게 우리나라의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이기(理氣)와 성정(性情)을 분별함이 이미 지극히 정밀하였고, 규모와 사업의 융숭함은 더욱 광대하였다. 언론이 크고 높아 훌륭한 임금을 이루어 주는 정성이 한결같았고, 식견이 탁월하고 재주가 완전하여 도를 자임(自任)하는 용맹이 뛰어났다.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이 안타깝지만 오히려 유풍과 덕업에서 징험할 수 있다. 관작과 시호는 비록 높였지만 어찌 성대한 덕을 보상하기에 충분하겠는가. 시비가 이미 정해지니 별세한 뒤에도 사모함을 더욱 볼 수 있다.
오현(五賢)을 이어 추가로 배향하는 것이 진실로 타당하고, 세 조정을 지났는데도 사류들의 호소가 더욱 절박하였다. 선철(先哲)을 더 높이니 이에 사전(祀典)에 빠진 것이 보완되고, 두 신하를 표장하니 사류들이 보고 감동함이 더욱 간절하였다. 사도(斯道)의 책임을 주재함이 어찌 나에게 있지 않겠는가. 온 나라 사람들을 고무함 또한 이에 말미암을 것이다. 이제 문묘의 양무(兩廡 동무와 서무)에 배향하는 것을 크게 바로잡는 때를 당하였으니, 일제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이에 금년 5월 20일에, 문묘에 종향했던 수장후(壽長侯) 공백료(公伯寮), 난릉백(蘭陵伯) 순황(荀況), 기양백(岐陽伯) 가규(賈逵), 부풍백(扶風伯) 마융(馬融), 사공(司空) 왕숙(王肅), 사도(司徒) 두예(杜預), 임성백(任城伯) 하휴(何休), 언사백(偃師伯) 왕필(王弼), 임천백(臨川伯) 오징(吳澄)은 출향하고, 문등후(文登侯) 신정(申棖), 치천후(淄川侯) 신당(申黨)은 중복 배향한 것이므로 신당을 빼었으며, 건녕백(建寧伯) 호안국(胡安國), 화양백(華陽伯) 장식(張栻), 포성백(蒲城伯) 진덕수(眞德秀), 숭안백(崇安伯) 채침(蔡沈)은 위차(位次)가 잘못되었으므로 위치를 바꾸어 정하였고, 송조의 장락백(將樂伯) 양시, 문질공(文質公) 나종언, 문정공(文靖公) 이통, 문숙공(文肅公) 황간, 우리나라의 문성공 이이, 문간공 성혼을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새로 종향하였다.
아, 도는 고금이 다르지 않으니, 사람이 어찌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겠는가. 일이 전대에 빛나니 향해 가야 할 길을 보여 줄 수 있고, 유풍이 사방에 진동하니 진작하여 새로워지는 효험이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주-D001] 송조(宋朝)의 …… 교서 : 1682년(숙종8) 5월에 송조의 네 현인과 우리나라의 두 현인을 문묘에 배향하고 몇몇 사람들을 출향하는 예를 거행하고 내린 교서이다. 송조의 양시(楊時)ㆍ나종언(羅從彦)ㆍ이통(李侗)ㆍ황간(黃榦)과 조선조의 이이(李珥)ㆍ성혼(成渾)을 공자의 묘정(廟庭)에 종사하고, 선유(先儒)인 공백료(公伯寮)ㆍ순황(荀況)ㆍ마융(馬融)ㆍ왕필(王弼) 등의 종사를 폐지하였으며, 한 사람인데 이름이 다르게 중복 종사된 신당(申黨)을 빼었다. 《국역 숙종실록 8년 5월 20일, 21일》[주-D002] 유식(侑食) : 제사 때 삼헌(三獻)한 뒤에 첨작(添爵)하고 식사(食事)를 권하는 절차인데, 여기에서는 문묘에 배향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주-D003] 예에 …… 것 : 고종(瞽宗)은 은(殷)나라 때의 학교 이름이다. 《주례(周禮)》 〈춘관종백 하(春官宗伯下)〉 대사악(大司樂) 조에 “도덕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여기에서 가르치게 하고 죽으면 악조(樂祖)로 삼아 고종에서 제사한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성균관을 가리키고 성균관 안에 문묘가 있으니, 문묘에 차례대로 배향하였음을 말한 것이다.[주-D004] 스승을 …… 제자들 : 《양자법언(揚子法言)》 권1에 “빠르구나, 칠십 명의 제자가 중니(仲尼)를 닮음이여.[速哉, 七十子之肖仲尼也!]” 하였다. 문묘에 배향된 공문 제자로는 안회(顔回)ㆍ증삼(曾參)ㆍ민손(閔損)ㆍ염옹(冉雍) 등의 성현이 있다.[주-D005] 사숙(私淑)한 …… 현인들 : 사숙은 직접 배우지 못하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배우는 것을 말하니,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나는 공자의 문도가 되지는 못했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선하게 하였다.[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여기에서는 맹자와 송대의 현인 등 공자에게 직접 배우지 못하였지만 도를 잘 계승한 현인들을 말한다.[주-D006] 정관(貞觀) …… 얻었고 : 정관 21년에 당 태종(唐太宗)이 조서를 내려 좌구명(左丘明)ㆍ복자하(卜子夏)ㆍ공양고(公羊髙)ㆍ곡량적(榖梁赤)ㆍ복승(伏勝)ㆍ고당생(髙堂生)ㆍ대성(戴聖)ㆍ모장(毛萇)ㆍ공안국(孔安國)ㆍ유향(劉向)ㆍ정중(鄭衆)ㆍ두자춘(杜子春)ㆍ마융(馬融)ㆍ노식(盧植)ㆍ정현(鄭玄)ㆍ복건(服虔)ㆍ하휴(何休)ㆍ왕숙(王肅)ㆍ왕필(王弼)ㆍ두예(杜預)ㆍ범녕(范寗) 등 21명을 태학에서 선사(先師)에게 제사 지낼 때 문묘에 함께 배향하도록 명하였다. 《舊唐書 卷3 太宗本紀下》 명 세종(明世宗) 대에 와서 정부경(張孚敬)의 건의에 따라 개정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문묘에서 출향되었다.[주-D007] 양시(楊時)와 …… 접하였고 : 하락(河洛)은 정호(程顥)와 정이(程頤)가 살던 낙양 인근으로, 여기에서는 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시(1053~1135)의 자는 중립(中立)이니, 정호와 정이의 문인으로 구산(龜山)에 거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구산 선생(龜山先生)이라고 일컬었다. 정호 형제의 학문을 주희(朱熹)와 장식(張栻)에게 전수하였다. 나종언(羅從彦, 1072~1135)의 자는 중소(仲素)이니, 정이와 양시의 문인이다. 양시를 통해 정호 형제의 학문을 듣고, 나중에 정이에게 나아가서 수학하였다. 《宋史 卷428 道學列傳二 楊時, 羅從彦》[주-D008] 이통(李侗)과 …… 밝혔다 : 이통(1093~1163)의 자는 원중(愿中)이니, 연평(延平) 선생이라고 불렸다. 나종언을 통해 정호 형제의 학문을 전수받았으며, 주희의 스승이 된다. 황간(黃榦, 1152~1221)의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齊)이니, 주희의 사위이며 제자이다. 처음에 유청지(劉淸之)에게 수학하였다가, 유청지의 권유로 주희에게 수학하였다. 《宋史 卷428 道學列傳二 李侗, 卷430 道學列傳四 黃榦》[주-D009] 과분하게 …… 시행하였고 : 아홉 사람은 아래에서 언급한 공백료(公伯寮)ㆍ순황(荀況) 등을 말한다. 《국역 월사집》 제60권 〈남궁록 상(南宮錄上) 문묘의 사전(祀典)을 이정(釐正)하는 것에 대한 계본[文廟祀典釐正啓本]〉에,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실린 것을 조사하여, 안하(顔何)ㆍ순황(荀況)ㆍ공백료(公伯寮) 등 13명은 이미 중국에서는 출향했고, 거백옥(蘧伯玉)ㆍ오징(吳澄) 등은 문묘에 종향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는 모두 문묘에 두었음을 밝히고, 출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9명에 대해 “마융은 양기(梁冀)를 위해 주소(奏疏)를 지어서 충신 이고(李固)를 죽였고, 남군 태수(南郡太守)로 있다가 탐탁죄(貪濁罪)로 면직되어 삭방(朔方)으로 유배되었으며,……두예가 단상(短喪)한 것은 모두 명교(名敎)에 죄를 지었습니까.” 하였고, 또 “오징은 정민정(程敏政)의 의논에서 ‘비록 과실은 없는 듯하나 그 저술이 성학을 밝히기에 부족하다.’ 했습니다.” 하여 이들이 빠져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주-D010] 그 사람의 …… 것이다 : 그 사람에 대해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그 사람이 살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봄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천하의 훌륭한 선비를 벗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또 위로 올라가 옛사람을 논하니, 그의 시를 외우고 그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모른다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그 사람의 당대를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위로 올라가서 벗하는 것이다.[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하였다.[주-D011] 광악(光嶽) : 삼광오악(三光五嶽)의 준말이다. 삼광은 해[日]ㆍ달[月]ㆍ별[星]이고, 오악은 태산(泰山)ㆍ형산(衡山)ㆍ화산(華山)ㆍ항산(恒山)ㆍ숭산(嵩山)이니, 천지(天地)를 가리킨다.[주-D012] 학문이 …… 두었으니 : 아버지 청송(聽松) 선생 성수침(成守琛)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는데, 성혼이 10세에 아버지를 따라 우계(牛溪)의 파산(坡山)에 있는 별업에 와서 배웠다. 《국역 월사집 제54권 우계 선생 시장》[주-D013] 수사(洙泗)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를 합하여 말한 것으로, 공자가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공자 또는 유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주-D014] 관작과 …… 높였지만 : 이이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성혼은 좌의정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주-D015] 별세한 뒤에도 사모함 : 이이와 성혼의 덕을 사모하여 별세한 뒤에도 잊지 못함을 말한다. 《대학장구》 전 3장에 “《시경》에 ‘아, 선왕을 잊을 수 없네.’ 하였는데, 후대의 군자들은 선왕의 어짊을 어질게 여기고 선왕이 친하게 지낸 이를 친히 여기며, 후대의 소민들은 선왕이 즐겁게 해 주신 것을 즐거워하고 선왕이 이롭게 해 주신 것을 이롭게 여기니, 이 때문에 돌아가신 뒤에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詩云: 於戲, 前王不忘! 君子賢其賢而親其親, 小人樂其樂而利其利, 此以沒世不忘也.]” 하였다.[주-D016] 오현(五賢)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다섯 명의 유현(儒賢)을 가리킨다. 1573년(선조6)에 유생들이 오현에 대한 문묘 종사를 청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들이 청하였는데도 시행되지 않다가, 1610년(광해군2)에 와서 문묘에 종사되었다. 《국역 선조실록 6년 8월 28일》 《국역 광해군일기(중초본) 2년 9월 5일》[주-D017] 세 조정을 …… 절박하였다 : 1635년(인조13)에 관학 유생 송시형(宋時瑩) 등 270명이 상소하여 다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건의한 뒤로 효종ㆍ현종 대를 거쳐 숙종 대까지 끊임없이 청한 것을 말한다.[주-D018] 문등후(文登侯) …… 빼었으며 : 《국역 월사집》 제60권 〈남궁록 상(南宮錄上) 문묘의 사전(祀典)을 이정(釐正)하는 것에 대한 계본[文廟祀典釐正啓本]〉에 “신정과 신당은 본래 한 사람인데, 《공자가어(孔子家語)》와 《사기(史記)》에 그 이름을 함께 기재했기 때문에 잘못 알고 두 사람으로 제사 지내다가 중국에서는 이미 신당을 없애고 신정만 모시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고치지 않았습니다.” 하여 중복 배향되었음을 밝혔다.[주-D019] 그러므로 이에 …… : 원문의 ‘운운(云云)’에 해당하는 내용은 《국역 숙종실록》 8년 5월 21일 기사에 보이니,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응당 잘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채현경 장성덕 (공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