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춘당집 제21권 / 행장(行狀) / 고조고(高祖考) 선무랑부군(宣務郞府君) 행장
부군의 휘는 여즙(汝楫)이고, 자는 □□이며, 성은 송씨(宋氏)인데, 계통이 은진(恩津)에서 나왔다. 시조(始祖) 휘 대원(大原)이 고려조(高麗朝)에 판사를 지내셨다. 이로부터 3대를 전하여 사헌부 집단(司憲府執端) 휘 명의(明誼)에 이르러서, 깨끗한 풍채와 곧은 지조로 포은(圃隱) 등 제현(諸賢)의 추중을 받았다. 회덕 황씨(懷德黃氏) 판서 수(粹)의 따님에게 장가드셨으므로 자손이 회덕에 살게 되었는데, 대대로 번창하니 후인들이 그 마을을 ‘송촌(宋村)’이라고 이름하였다. 집단공이 진사 휘 극기(克己)를 낳고, 진사공이 휘 유(愉)를 낳았는데, 덕을 숨기고서 벼슬하지 않고 호를 쌍청당(雙淸堂)이라 하셨다. 교리 박팽년(朴彭年)이 쌍청당기(雙淸堂記)를 짓고 청음(淸陰) 김 상공(金相公)이 묘명(墓銘)을 지었다. 이분이 바로 부군의 증조이다. 조는 휘가 계사(繼祀)로 상주 판관을 지냈고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요년(遙年)으로 해박한 학식과 다양한 재능을 지닌 큰 그릇으로 일찍부터 공보(公輔)감이라는 명망이 있었으나, 벼슬이 군자감정 겸 교서관판교(軍資監正兼校書館判校)에서 그쳤다. 허백당(虛白堂) 성공(成公 성현(成俔))이 묘명을 지었다.
부군은 바로 정(正)의 둘째 아드님으로 품계가 선무랑(宣務郞)이었는데, 28세의 나이로 모년(某年) 1월 19일에 별세하셨다. 묘소는 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 정부군(正府君)의 무덤 오른쪽 묘향(卯向)의 언덕에 있다. 비(妣) 숙인(淑人)은 나주 김씨(羅州金氏)로 판관 양(壤)의 따님이고 태학사 대경(臺卿)의 후손이시다. 배위(配位) 의인(宜人)은 완산 이씨(完山李氏)로 태종대왕의 4대손인데, 증조는 경녕군(敬寧君) 비(
)로 시호가 공무공(恭武公)이고, 조는 은천군(銀川君) 찬(穳)으로 시호가 제간공(齊簡公)이다. 고는 아림군(娥林君) 정(禎)이고, 모는 평양 조씨(平壤趙氏)로 상장군 지한(之漢)의 따님이시다. 의인은 모년 모월 모일에 출생하여 모년 10월 17일에 별세하셨고, 부군의 묘역에 따로 장사 지냈다.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세영(世英)으로 승사랑(承仕郞)을 지냈고, 차남은 세웅(世雄)으로 군자감 판관을 지냈다.
승사랑은 운산군(雲山君) 계(誡)의 따님을 초취(初娶)로 맞이하였으나 아들도 없이 일찍 죽었고, 감찰 연인(延仁)의 따님을 재취로 맞이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응상(應祥)으로 별좌(別坐)를 지냈고, 차남은 응서(應瑞)로 군수를 지냈으며, 딸은 첨지 이정현(李廷顯)에게 시집갔다. 응상은 전한(典翰) 민전(閔荃)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는데, 문창(文昌)과 계창(啓昌)으로 모두 진사였다. 측실에서도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개(凱)이고, 딸은 임갑생(林甲生)에게 시집갔다. 응서는 판서 이윤경(李潤慶)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창(爾昌)으로 군수를 지냈고, 딸은 부제학 신응시(辛應時)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도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윤창(胤昌)이고, 딸은 신효문(愼孝門), 서양갑(徐羊甲)에게 시집갔다. 이정현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빈(賓)으로 찰방이고, 차남은 분(蕡)이고, 삼남은 신(賮)이고, 사남은 천(蕆)으로 동지(同知)이며, 딸은 부사 신순일(申純一), 학생 김몽란(金夢蘭)에게 시집갔다.
문창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승길(承吉)로 생원이고, 차남은 용길(龍吉)이다. 계창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길(以吉)ㆍ유길(惟吉)이고, 딸은 군수 김연(金埏)에게 시집갔다. 개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효길(孝吉)이다. 이창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준길(浚吉)로 사헌부 지평이다. 신응시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참판 윤흔(尹昕)에게 시집갔다. 윤창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흥길(興吉)이다. 이빈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시익(時益)이고, 차남은 시직(時稷)으로 장령이다. 이분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시석(時奭)이고, 차남은 시척(時陟)으로 감찰이다. 이신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시상(時尙)으로 현감이다. 이천은 2남 3녀를 두었다. 승길은 아들이 없어 용길의 아들 광두를 후사로 삼았고, 딸은 남정(南炡)에게 시집갔으며, 측실에서 낳은 아들은 광빈(光彬)이다. 용길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광주(光柱)ㆍ광추(光樞)ㆍ광두(光枓)이고, 딸은 이운개(李雲漑), 권서기(權恕己), 김익명(金益鳴)에게 시집갔다. 이길은 2남 2녀를 두었고, 유길은 2남을 두었다. 준길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광식(光栻)이고, 딸은 나명좌(羅明佐)에게 시집갔고, 한 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판관은 군수 정광좌(鄭光佐)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응생(應生)이고, 차남은 응수(應秀)로 군수를 지냈으며, 따님은 병사(兵使) 김경원(金慶元)에게 시집갔다. 응생은 여회(呂誨)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하창(賀昌)이고, 딸은 황준남(黃俊男), 참봉 김결(金潔)에게 시집갔다. 응수는 지사 강현(姜顯)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창(慶昌)이고, 딸은 현감 이치(李錙), 조원개(趙元凱)에게 시집갔다. 하창은 2남을 두었는데, 인길(寅吉)ㆍ호길(虎吉)이다. 황준남은 1남 2녀를 두었고, 김결은 1남을 두었다. 경창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은 계록(啓祿)으로 무과(武科)에 합격하였고 현령(縣令)을 지냈다. 이치는 1남 2녀를 두었고, 조원개는 2남 2녀를 두었다. 계록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시승(時昇)으로 지평에 추증되었고, 차남은 시행(時行)이며, 딸은 진사 박원(朴瑗)에게 시집갔다. 인길은 2녀를 두었고, 호길은 2남을 두었다. 시승의 두 아들은 유관(有觀)ㆍ유징(有徵)이고, 딸은 이훈(李薰)에게 시집갔다. 시행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박원은 딸 하나를 두었다. 내외의 자손이 모두 수백여 인이다. 대수(代數)가 멀고 아직 시집 장가 가지 않은 자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불초손(不肖孫) 등은 세대(世代)가 이미 멀어진 뒤에 태어났고, 가승(家乘)에도 증거할 만한 기록이 없으므로 부군과 부인의 생몰 연월, 숨은 덕, 아름다운 행적을 상고할 수는 없으나, 일찍이 고로(故老)에게 듣건대, 부군께서는 친가(親家)와 외가(外家)의 적선한 음덕(陰德)을 받고 태어나시어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셨으므로 부모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으셨으며, 장성한 뒤에는 영특함이 범상하지 않아 큰일을 하실 것 같았는데, 불행하게도 목숨이 짧아 일찍 별세하시니, 사람들이 모두 매우 애석히 여겼다. 정부군(正府君)께서는 의인(宜人)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고 자식마저 어린 것을 가엾게 여겨 항상 한집에서 살며 양육하셨다. 만년에는 송촌의 상류에 따로 집을 지어 사시다가 의인에게 물려주셨는데, 지금 준길과 호길 등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의인께서 사시던 옛 집터라고 한다.
여러 자손들이 의론을 모아 묘전(墓田)을 마련해서 해마다 한식일(寒食日)에는 제사를 성대하게 올리고, 다른 명절에는 참배(參拜)만 하고 있다. 묘소 앞에 옛날에 세운 작은 표석(標石)이 있는데 단지 관계(官階)만을 새기고 사실을 기재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부군께서 뜻을 펴지도 못하시고 일찍 별세하시어 당시에 명성을 날리지 못하셨으나, 만약 이처럼 사적이 모두 묻히어 후세에 의거할 바가 없게 한다면 잔약한 자손들의 슬픔이 더욱 무궁할 것이다. 그러므로 감히 고로에게 들은 개요(槪要)와 세계(世系) 및 자손들을 대략 서술하여, 당세의 입언군자(立言君子)에게 묘명(墓銘)을 청한다. 만약 묘명을 지어 주는 대인(大人)의 은혜를 입어서 묘도(墓道)를 빛내고 후손들에게 보여 줄 수 있게 된다면 저승의 부군과 이승의 자손들의 부기(附驥)의 다행을 무슨 말로 비유할 수 있겠는가. 묘명을 지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2001
高祖考宣務郞府君行狀
府君諱汝楫。字▣▣。姓宋氏。系出恩津。初祖諱大原。麗朝判事。三傳至司憲執端諱明誼。以淸裁直操。爲圃隱諸賢所推重。聘懷德黃氏判書粹之女。子孫因家於懷。奕世蕃昌。後人名其里曰宋村。執端生諱克己。進士。進士生諱愉。隱德不仕。號雙淸堂。朴校理彭年記之。淸陰金相公銘其墓。寔府君曾祖也。祖諱繼祀。尙州判官。贈司憲府持平。考諱遙年。以通材偉器。早負公輔重望。官止軍資監正兼校書館判校。虛白成公銘其墓。府君卽其第二子也。階宣務資。年二十八某年正月十九日歿。墓在公州沙寒里正府君兆右卯向之原。妣曰淑人羅州金氏。判官壤之女。大學士臺卿之後。配曰宜人完山李氏。太宗大王之四代孫。曾祖
。敬寧君。諡恭武公。祖穳。銀川君。諡齊簡公。考禎。娥林君。母平壤趙氏。上將軍之漢之女。宜人以某年月日生。以某年十月十七日歿。葬與府君同原異壙。育二男。長曰世英。承仕郞。次曰世雄。軍資監判官。承仕初娶雲山君誡女。無子。再娶監察延仁女。生二男一女。男長曰應祥別坐。次曰應瑞郡守。女適僉知李廷顯。應祥娶典翰閔荃女。生二男。曰文昌,啓昌皆進士。側出有一男一女。男曰凱。女適林甲生。應瑞娶判書李潤慶女。生一男一女。男曰爾昌郡守。女適副提學辛應時。側出有一男二女。男曰胤昌。女適愼孝門,徐羊甲。李廷顯有四男二女。男曰賓察訪。曰蕡。曰賮。曰蕆同知。女適府使申純一,學生金夢蘭。文昌有二男。曰承吉生員。曰龍吉。啓昌有二男一女。男曰以吉,惟吉。女適郡守金埏。凱有一男三女。男曰孝吉。爾昌有一男。曰浚吉。司憲府持平。辛應時有一女。適參判尹昕。胤昌有一男四女。男曰興吉。李賓有二男一女。男曰時益。曰時稷掌令。李蕡有二男二女。男曰時奭。曰時陟監察。李賮有一男。曰時尙縣監。李蕆有二男三女。承吉無子。以龍吉之子光枓爲嗣。一女適南炡。側出有一男。曰光彬。龍吉有三男三女。男曰光柱,光樞,光枓。女適李雲漑,權恕己,金益鳴。以吉有二男二女。惟吉有二男。浚吉有一男二女。男曰光栻。女適羅明佐。餘未笄。判官娶郡守鄭光佐女。生二男一女。男長曰應生。次曰應秀郡守。女適兵使金慶元。應生娶呂誨女。生一男二女。男曰賀昌。女適黃俊男參奉,金潔。應秀娶知事姜顯女。生一男二女。男曰慶昌。女適縣監李錙,趙元凱。賀昌有二男。曰寅吉,虎吉。黃俊男有一男二女。金潔有一男。慶昌有一男。曰啓祿武科縣令。李錙有一男二女。趙元凱有二男二女。啓祿有二男一女。男曰時昇。贈持平。時行。女適進士朴瑗。寅吉有二女。虎吉有二男。時昇有二子。曰有觀,有徵。女適李薰。時行有五子。朴瑗有一女。內外子孫總數百餘人。世遠而未冠笄者。不載。不肖孫等生世旣遠。家乘且無徵。府君夫人生歿歲月。潛德懿行。蔑得以考。竊嘗聞之故老。府君承內外積美之源。幼而岐嶷。最爲父母所鍾愛。纔長。英秀不凡。若將以有爲。不幸短命以歿。人皆痛惜之。正府君哀宜人早寡而子幼。常率育之不異處。晩就村之上游。別築室以居。仍授宜人。今浚吉,虎吉等所居。卽其故基云。諸孫合議置墓田。每歲寒食擧盛祭。他節日行參展。墓前舊有小標。只刻官階。不載事實。仍竊惟念。府君齎志早歿。不克策名於時。若只如此。湮沒無所籍於後。則是尤孱孫所隱愴於無窮。茲敢略敍所聞梗槩若世系子孫。以請銘於當世立言之君子。如蒙大人一言之惠。以賁泉道。以示來裔。則幽明附驥之幸。豈勝容喩。無任祈懇之至。